예수님이 바꾸신 장례식(요11:25-27,38-44)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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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이 바꾸신 장례식
본문: 요한복음 11:25–27, 38–44
목회자가 장례식장에 가면 자주 보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갑자기 떠났을까…” 그런데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돈이 아무리 많아도, 권력이 아무리 커도,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요즘 세상은 안되는 것 없고, 못하는 것 없다.… 인간은 다 해결할 수 있다.” 비행기도 만들고, 인터넷도 만들어 세상을 연결하고, 질병도 치료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인간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왕들이 있었고 수많은 천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 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놀라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무덤 앞에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그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은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해주는 사건이며, 우리가 그 분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늦게 오시는 것처럼 보일까? 우리가 고통 당할 때 누가 우리를 위로해주는가? 예수님은 정말 생명의 주인 이신가? 오늘 말씀을 통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함께 생각해면서 이 세가지 질문에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첫 번째는

1. 지연은 거절이 아니라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급히 전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바로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이틀을 더 머무셨다.” (요 11:6) 기록합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미 늦은 겁니다. 결국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믿음과 아쉬움입니다. “주님이 계셨다면 살았을 텐데…”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 (요 11:4)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바로 오시지 않으셨을까? 왜 사랑하는 친구가 죽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1:14–15)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보다 믿음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2:3 은 말씀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더딘 것처럼 보여도 결코 거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정한 때에 반드시 이루시며, 그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병원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수술이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들의 마음이 점점 불안해집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혹시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그런데 나중에 의사가 나와서 말합니다. “수술이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최선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이제 살 수 있습니다.” 그때 가족들은 깨닫습니다. 지연 된 것이 더 감사할 일이구나… 우리의 삶에서 지연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늦어진 것이 아니라, 더 철저히 살리기 위한 시간임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치유보다 더 큰 기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연은 거절이 아니라 더 큰 영광을 위한 준비다.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합니다. 왜 기도가 늦게 응답될까? 왜 하나님은 바로 해결하지 않으실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절대 늦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조급함으로 원망하기보다, 지연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신뢰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내 삶의 더딤조차도 하나님 손 안에서는 더 큰 영광을 위한 준비일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두 번째는

2.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에 같이 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을 준다”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부활이다.” 생명의 근원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35절에 짧은 구절이 있죠.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5) 예수님은 곧 나사로를 살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우셨습니다. 왜일까요? 죽음이 가져온 인간의 슬픔을 함께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공감하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7은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누가복음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우셨습니다. 나사로 죽음 앞에서 흘리신 눈물의 의미와 결이 다를 수 있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인간의 슬픔과 멸망을 보고 가슴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위로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나님 뜻이 있을 거야.”, “힘내.” 그런데 한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옆에 앉아서 같이 울어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 위로했지만 나와 함께 울어준 그 친구가 가장 큰 위로가 되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울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신다면 이제 우리도 울어야합니다.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 안에 가정 안에 있다면 그 공동체는 진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편 56: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눈물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고통 당하는 자를 기억하며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 때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병에 담으시고 다 계수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너무 빨리 설명하려 하지 말고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 삶에 눈물이 날 때에도 “주님은 내 고통을 모르신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와 함께 우시는 예수님께 그 슬픔을 솔직히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를 가지고, 이제는 교회와 가정에서 상처 입은 사람 곁을 지켜 주는 위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울어주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은 말보다 더 분명하게 예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 세 번째는

3.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 서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1:40) 그리고 예수님이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죽은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을 넘어 예수님의 정체를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의 부활은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부활을 일으키는 메시아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죽음을 다스리는 생명의 주입니다.
시편 16:10 은 말씀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이 구절이 왜 중요하냐면,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도행전 2: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은…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알고 말하되…” (사도행전 2:29–31)
즉, 베드로는 시편 16편이 단순히 다윗 개인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죽음에 버려지지 않으실 메시아, 곧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바울 역시 다윗은 썩음을 당했지만, 예수님은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고 하여 시편 16:10을 부활 본문으로 풉니다.
의학에서 심장이 멈춘 환자를 살릴 때 심장충격기를 사용합니다. 의사가 외칩니다. “Clear!” 그리고 전기 충격을 가합니다. 잠시 후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무덤을 향해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성경은 우리에게 외칩니다. 아무개야, 나오라. 슬픔에서 나오라, 두려움에서 나오라, 어두움에서 나오라. 절망에서 나오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음과 절망 앞에서 무릎 꿇는 사람들이 아니라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아직도 무덤처럼 막혀 있는 두려움과 죄와 낙심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음성 앞에 그것을 열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죽은 것을 살리시고, 끝난 것 같은 인생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붙들고 살 뿐 아니라, 아직 그 생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11장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지연은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에 함께 우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과 부활의 주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왜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왜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해도 됩니까? 예수님은 장례식을 부활식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어린아이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 여동생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오빠 지금 어디 있어?”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어.”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괜찮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괜찮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랑 있으면 가장 안전하잖아.”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가장 안전합니다. 살아도 예수님 안이 가장 안전하고, 죽어도 예수님 안이 가장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라, 죽음을 무너뜨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무덤은 마지막 문이 아닙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끝처럼 보여도, 예수님 안에서는 끝이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의 마지막은 멸망이 아니라 부활이고, 작별이 아니라 다시 만남이며, 어둠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던 그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는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날에는 어떤 무덤도, 어떤 눈물도, 어떤 죽음도 주님의 음성을 막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퍼할 수는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는 있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별을 경험할 수는 있어도 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 예수님을 붙드십시오. 지연 속에서도 믿으십시오. 눈물 속에서도 믿으십시오. 죽음 앞에서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결코 늦지 않으시고,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며, 결코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언젠가 저와 여러분의 인생 마지막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장례식마저도 주님의 손 안에서 부활의 아침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 되기를, 이 소망이 저와 여러분의 소망 되기를, 그래서 오늘을 살면서도 생명을 붙들고,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부활을 바라보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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