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의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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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 걸음의 순종
본문: 요12:44-50
주제: 익숙한 종교적 타성을 깨고 빛 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한 걸음'을 내디뎌, 우리 영혼을 다시 뜨겁게 하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라.
[서론]
저와 같이 공부하는 전도사님 한분이 최근 노방전도를 나갔다가 겪은 일입니다.
전도를 하던 중 한 권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믿는 사람이니까 그냥 보내드리는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그 권사님에게 복음을 전해준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우리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왜 교회 잘 다니고있는 사람을 붙잡느냐”며 화를 낼겁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복음을 다시 들은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전도사님, 오늘 복음을 다시 들으니 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랜 세월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매너리즘이란 어떤 일을 오래 반복하다보면 관성에 빠져 지루함과 무기력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몸은 교회에 있고, 손발은 교회 봉사로 분주합니다.
하지만 정작 마음 속에는 알수없는 허전함이 가득합니다.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건지 아니면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느덧 내 삶에서 복음의 감격은 희미해지고, 그저 익숙한 종교적 언어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대중들에게 선포하시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44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크게 외치신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왜 이렇게 목이 터져라 부르짖으신 것일까요?
[본론1]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12장까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기적을 통해 보여주는 ‘표적의 책’입니다.
13장-21장까지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영광의 책’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 전반부, ‘표적의 책’을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이제 이 말씀이 끝나면 예수님은 대중 사역을 멈추시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십니다.
그렇기에 표적의 책 마지막 부분에 나온 예수님의 외침은 단순한 설교가 아닙니다.
깨닫지 못하는 영혼들을 향해 부르짖는 간절한 사랑의 절규입니다.
44-45절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이 장소가 주는 의미가 아주 큽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들은 평생 성전을 드나들며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눈 앞에 계시는데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12장까지 수많은 표적을 보고도 그들은 마음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기적들을 보면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일까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삶을 바꿀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정작 눈 앞의 하나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할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과 계시는 결국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 분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분을 뜨겁게 사랑할때 그 분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유는 이러한 진리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교회 청소나 식당 봉사때문에 다투는 집사님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큰 교회 여선도회 회장과 권사회장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도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떠셨을까?”
이 질문만 던져봤어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정치적 신념이나 자기 욕망이 앞서는 경우들입니다.
그것은 결코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게 아닙니다.
그럼 우리 신앙신앙생활도 점검해봐야 합니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그 어떤 것보다 사랑하고 있을까요?
나는 정말 예수님을 따르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론2]
이처럼 신앙의 본질인 예수님을 잃어버린 상태를 46절은 ‘어둠’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어둠은 교회 밖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 봉사를 해도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둠에서 어떻게 벗어날수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46절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빛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거부하고 어둠을 선택하는 적극적인 저항과 거부를 의미합니다.
자꾸 어둠에 머물러 있으려는 죄악과 무지, 두려움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앞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일곱가지 표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셨지만 믿기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42절에 보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쫓겨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둠에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이것 역시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단순히 입으로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지적인 동의, 입술의 고백, 감정의 동요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47-48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둠에 있는 자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심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심판을 지금 시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심판받지 않고 구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어둠에 머물며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심판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만 나온다고 해서 예배만 드린다고 해서 심판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기준은 오직 말씀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그 운명이 갈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때문이라고 핑계댈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순종이 반복되면 그것은 완악함이 됩니다.
그 완악함은 곧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소리 아니냐고 물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분명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믿는다는 입술의 고백이나 지적 동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순종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과연 계속해서 그 분의 말씀에 따르지 않을수 있을까요?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단순히 말씀을 더 배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말씀 묵상이 억지로 해야 하는 숙제같지 느껴지지 않으세요?
말씀 묵상에 감동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배움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실천하려는 순종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묵상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순종할때만 말씀이 살아서 움직여 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묵상이 즐거워집니다.
제가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말씀을 묵상할때의 일입니다.
많은 목사님들과 1년동안 거의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목사들 묵상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 때의 일은 제 2의 거듭남이라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묵상하면서 성경의 많은 것들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묵상한 말씀을 어떻게든 순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말씀 묵상하면서 제가 영국에서 받았던 도움의 손길이 기억났습니다.
누군가 제 사물함에 한 학기 학비를 넣어주셨습니다.
누군지도 알수 없었습니다.
그 학비때문에 저는 계속해서 공부를 할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말씀을 묵상하는데 그때 받았던 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 은혜를 누군가에게 되갚아야겠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마침 전날 자녀가 넷이나 있는 가난한 동료 목사님이 휴가도 못가고 힘들게 사역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묵상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하여 아무도 몰래 그 분 사물함에 작은 돈을 넣어드렸습니다.
그때 제 영혼에 밀려왔던 기쁨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활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빛이 되어 제 삶을 비추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빛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우리 영혼이 어둠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신 풍성한 삶을 누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우리를 억압하는 멍에가 아닙니다.
순종은 우리 영혼을 다시 뜨겁게 만드는 생명의 불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외침을 들었습니다.
성전이라는 가장 거룩한 곳에 있으면서도 정작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의 모습이 어쩌면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그 권사님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수십년간 수천번은 더 들었을 복음의 메시지 앞에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익숙함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뚫고, 복음의 빛이 영혼에 다시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한번 듣고 다른 곳에 치워두는 골동품이 아닙니다.
오늘 내 삶을 다시 뜨겁게 타오르게 하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위해 엄청난 기적이나 대단한 신학적 지식이 필요한게 아닙니다.
제 영혼을 다시 거듭난 것같은 기쁨을 맛보게 한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묵상중에 떠오른 주님의 마음에 순종할때 였습니다.
동료의 사물함에 작은 사랑을 표현하며 ‘한 걸음의 순종’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모든 말씀의 정수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신앙생활할수록 우리의 공허함만 더 커질 뿐입니다.
말씀을 아는 것을 넘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곧, 우리 영혼의 어둠에 빛을 비추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게 아닙니다.
오늘 단 한걸음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한 말씀이라도 붙들고 순종의 한 걸음을 내딛일때 복음이 다시 우리 영혼을 회복시킵니다.
우리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제 12장까지의 표적을 좇는 삶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좇는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매너리즘의 어둠은 떠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영광의 책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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