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14장
죄와 은혜의 지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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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14장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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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0) 제14장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신자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지성은 은혜 상태에서 유지되었던 올고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 시작이나 과정에서 지성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성적 혼란은 이성의 출론의 작용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러한 혼란은 죄로 말미암는 영혼의 어둠. 어둠은 물론 복음과 은혜의 세계 그리고 인간 자신에 대한 무죄에 의해서 가중됩니다. 신자가 제와의 싸움에서 이러한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면 효과적으로 싸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효과적으로 제하와의 싸움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죽임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혼란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제
(01:15) 죽임을 위해서 싸울 때 빠진 혼란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원리적 혼란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혼란입니다. 2장에서는 논의와 편의를 위하여 먼저 원리적인 혼란을 살펴본 후에이어서 개별적인 혼란에 대해서 교 개 개별적인 혼란에 대해서는 그중에서 가장 빈번이 경험되는 경우 다섯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원리적인 혼란, 싸움에서 경험되는 원리적인 혼란은 크게 어 두 가지로 어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비중생자에게서 발견되는 원리적인 혼란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서 죄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거듭난 중생자에게서 발견되는 원리적인 혼란입니다.
(02:17) 죄에 의한 빈번한 패배로 말미암아 자신의 중생을 의심하거나 죄죽임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A. 비중생자의 경우 중생 없이 죄를 죽이려 함. 첫째로 비중생자에게서 발견되는 원리적인 혼란입니다. 이는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죄임을 위하여 애쓰는 것입니다. 비중생자에게는 죄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죽임에 있어서 유효인이신 성께서 비중생자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중생자는 아무리 죄 죽임을 위하여 애쓴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반문이 떠오릅니다. 외죄를 죽이는 것이 신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불신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불신자들도 종종 죄의 욕를 이기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는가? 그것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중생의
(03:22) 유물를 막론하고 양심과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빛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본성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불신 상태이거나 교회를 다녀도 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절대적인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의 의지와 정선은 저의 강력한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의 빛을 가지고 있어서 선악을 분별하고 마음에 있는 죄의 산출을 막는 기능을 합니다. 비록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속에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생례적인 인식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면 마음이 무겁고 마음의 죄책감으로 인한 갈등이 생깁니다.
(04:18) 그러나 선을 행하면 양심이 편안하고 마음이 어느 정도 어 안정을 얻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성령의 일반적인 은총에 작용을 허락하셔서 사회의 질서와 도덕을 유지하게 하심으로 세상이 존속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선이 아닌 낮은 차원의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선악을 판단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어느 정도 한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령의 그러한 은총적인 작용이 없다면이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모든 질서가 깨어진 정부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관계를 떠나는 것입니다.
(05:10)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절실한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찾을 수 있습니까? 그들 모두가 짐승처럼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악한 욕구를 스스로 누르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이 세상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따르는 총체적인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이차적인 선 혹은 열등한 아름다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비중생자가 양심과 번성의 빛을 통해서 선악을 분별하고 죄를 이기려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과 영혼 안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있습니다.
(06:08) 그래서 그가 양심이나 본성의 빛에 의해서 죄를 이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를 죽이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극적인 목적이 되고 가치 판단의 최종적인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같이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인 실천이나 윤리적인 억제로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비중생자에게는 죄임의 실천보다 복음을 듣고 거듭나는 일이 필요합니다.이 이 중생자의 경우 첫째로 거듭난 중생자에게서 발견되 올릴 훈련입니다.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죄에 대한 빈발한 패배에 인해 자신의 구원의 여부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07:03) 둘째로 거듭난 신자에게도 죄의 죽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 빈벌한 패배로 구원 여부의 혼란을 느한 패배로서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듭나온다 할지라도 죄에 대하여 빈번이 실패하게 되면 스스로 거듭나는 죄를 의심하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신자의 구원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구원의 확신은 가변적인 것입니다. 신자 안에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 인쳐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쳐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감지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영혼 안에 일어난 일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되는데 만약 신자가 성화를 살지 못하고 죄로 인하여 영혼의 절망에 빠지게 되게 되면 확신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08:00) 마치 질이 좋은 유리창이라고 할지라도 오염 물질 묻어 밖을 벌 수 없는 이처와 같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참여를 통해 죄를 누치게 되면 다시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명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만약 신자가 죄에 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죄는 것이 불순종하고 은혜의 원리를 떠 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죄의 싸움이 불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죄의 더불어 싸우기를 명시하며 은혜를 주고자 하는데 신자를 이미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거듭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반복한다면 제우 싸움에서 그가 이길 수 없으라는 것은 참명한 이치입니다.
(08:55) 이 이 죄에 필요성 인식하지 못함.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영혼 안에 영적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심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주의 절대적인 지배에는 종식됩니다. 마음은 새로운 은혜 의를 갖게 됩니다. 총계적인 신학자 좋은 오인이 첫 회심에서 하늘의 축복이 쏟아진다고 말한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생을 통해 신자의 마음은 전혀 새로운 경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뜻을 순종하며 사는 경영성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살기를 힘한 하나 하늘 자원을 주어지고 이로써 신자는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09:49)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경향성을 계속 유지하며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거룩한 삶의 신천에 있어서 너무나 치명적인 사실인 죄 죽임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 때문일까요?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 죽음의 필요성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에 크게네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무지 때문에 첫째로 신자의 무지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죄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거듭나는 것은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진리의 핵심적인 요소인 복음적 사실을 들음으로써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10:40)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 성화의 삶을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외치는 복음 선포는 단순하였지만 이미 구원을 얻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들로 자리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를 비롯한 신약의 서신서들이 기록된 이유입니다.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희박하여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죄 죽임의 실천을 모르고 있을 때 그가 죄 죽임의 필요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비 잘못된 교리 때문에 둘째로 잘못된 성화의 교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 주위에는 복음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고 회심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 죽임을 실천하지 않거나 죄를 거의 이기지 못하는 삶을 사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11:42) 물론 이들 중에 중 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라고 할지라도 교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그릇된 성화의 교리를 믿고 있으면 신자의 명백한 의무인 복음적인 죄 죽음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거의 모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한 조국 교회에 유되 유통되고 있는 많은 성경 공부 교재 중 성령 충만한 삶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는 제죽임의 실천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하거나 잘못 가르치는 교재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성화에 있어서 무저항주의 곧 성령께서 신자를 홀로 성화시키시키시니 신자는 그러한 성령의 작용에 반항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쳐서 신앙을 관조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12:38) 이것들은 모두 죄와 더불어 치열하게 분토하도록 가르치는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감 먼 교리들입니다. 신학적 균형을 잃은 구원관 때문에 셋째로 구원을 말함에 있어서 즉각적인 구원인 칭위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잃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구원은 시제적으로 과거적 구원인 칭의와 현재적 구원인 성화 그리고 미래적 구원인 영화로 설명됩니다. 영화는 죽은 후 낙원에 들어간 우리의 몸이 썩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신자가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어 구원은 칭의와 성화입니다. 칭은 믿는 순간 즉각적으로 받는 구원이고 성화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토대로 성령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일생 동안 이루어가야 할
(13:43) 구원입니다. 그리고이 두 구원을 분리하는 것은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구원은 점진적인 구원의 원인이 되고 점진적인 구원을 통해서 즉각적인 구원이 입증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그러나 조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균형 있는 복음 대신 믿기만 하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반드시 천국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방식으로 구원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성를 위한 노력을 율법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무지속에 경박한 기독교 신앙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교회는 이한 오류를 깊이 회개하고 참된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14:30) 거룩함보다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넷째로 신자로서의 참된 기쁨을이 세상에서 찾으려 하는 경향들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신자가 추구하는 가치는 신앙 때문에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이지만 진실한 신자가 찾는 가치는이 세상에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스스로 중심이 된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은 피조물적 가치관을 회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장음한 목적도 모르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에서 구속하셔서 궁극적으로 이루고 싶어하시는 거룩한 계획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신앙을 자기 번의 기회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 속에 살기 위하여 죄와 더불어 피흘리기까지 싸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이
(15:34) 이 개별적 훈란 주지금의 실천에 있어서 신자가 빠지게 되는 지성적인 혼란 중 개별적인 훈란은 크게 다섯 가지로 유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모르는 경우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경우입니다. 셋째로 죄의지고 있는 자신의 상황으로 복음을 덮어버리는 경우입니다. 넷째로 죄와 싸움에 있어서 충체적인 싸우지 않고 한두 가지 개별적인 죄와 싸우는 경우입니다. 다섯째로 죄의 갈등은 죄와의 싸움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A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모음. 첫째로 자신은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혼의 어둠과 지성의 무지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16:27) 또한 그렇게 하려는 노력도 발견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는 간단한 복음 이상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거듭난 신자에 불구하고 복음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현재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격히 말해서 이런 경우는 지상치고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아니라 처음부터 죄의가 무엇인지 죄악의 싸움이 무엇인지 또 죄의 지배의 받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속적인 죄의 더불어 싸워서 이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승실하게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 중에도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저기와 방감증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17:11) 죄는 신자의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기뻐합니다. 죄는 자신을 직접 공격하지 않는 한 방 반항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착실히 참사하는 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가 신자의 그러한 삶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죄는 궁극적으로 신자를 자신에게 순종함으로 저의 지배력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가 외적으로 어떠한 종교 생활을 하든지 크게 성과하지 않습니다. 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며 내적 내적인 경향성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의 마음과 내적인 경향성이 죄를 향하고 있는 한 얼마든지 그를 죄 가운데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적대한면 그가 죄가 살고 있는 증거이며 따라서 복음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것을 죽여 버리는 것 위에는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18:11) 그런데 자신 속에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이 가득차 있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한병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성경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만족하는 비롯된 성경입니다. 그러는 삶은 결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들을 어둠 영혼에는 깊은 어둠이 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죄에 대한 사랑이 가득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만 그 자비를 경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린 죄가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을 경험하지 못하기 어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그러한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19:01) 오히려 그들은 죄에 진 신자에게서 많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삶의 모범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 담대히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그러한 신자들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그에게 회개하고 참된 신자의 길을 다시 걸어갈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의 복된 상태를 위하여 죄를 죽이고 죽이고자 힘쓰십니까? 그리고 끊임없이 죄 죽임의 실천을 가운데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19:55)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혼란. 둘째로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혼란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죄의 지배로부터 멀어져 눈 안에 살게 되면 신자의 마음에는 평강이 찾아옵니다. 이처럼 신자의 마음에 있는 진정한 평안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만 옵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이 없이 느끼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신자가 마음속에 평화를 누리는 것은 제 죽임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평화이고 신자가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를 유지하는 한구적인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신령한 기쁨과 의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에 졌을 때에도 평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20:48) 죄와 싸우는 동안에는 평화가 없고 많은 갈등을 동반하는 교통이 있었는데 죄와 싸우기를 포기하고 정욕을 쫓을 때 일시적인 평화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싸우기를 포기하고 항복함으로써 얻는 일시적 평화입니다. 잠시 후 죄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강력한 지배력을 신자의 영혼 안에 형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정욕으로 가득 차기하고 신자는 그 정욕에 순종함으로써 죄의 지배를 강화시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자는 적은 죄의 영향에도 크게 복종하는 노예로 상태로 노예의 상태로 떨어지게 됩니다. 죄의 지배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은혜의 지배에도 그러합니다.
(21:38) 이처럼 죄와 싸우기를 포기하면 죄는 거침없이 자신의 온대한 계획을 우리 안에 실현해 갑니다. 그래서 죄와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아 살아야 할 신자가 죄에게 종노릇하고 불리를 향하며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신자는 자신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에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게 되고 그의 마음과 영혼에는 끊임없는 갈등과 고통이 깃뜨리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죄의 사실에 묶여 노예처럼 부림을 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22:24)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에서 비롯되지 않는 모든 평화와 그릇된 안정감을 혐오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참된 거룩에 이르는 비결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비밀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의 비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만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되는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기까지 은혜의 권리를 따라 죄와 싸우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는 상황으로 복음을 덮음. 셋째로 죄는 상황으로 복음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한신자가 죄에 패배하면서 이름뿐인 신앙생활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23:21) 복음의 빛을 받았습니다. 자기 안에 죄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 죄 때문에 자신의 영적인 생명이 악해져 가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평화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그 죄를 발견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으음과 영혼의 실이 그로 하여금 결단하는 죄임을 실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은 죄에 대한 사랑과 그릇된 평화에 안주하려고 하는 마음이 죄의 실천을 가로막았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신자의 의지와 정서는 죄에 쉽게 굴복하고 있으며 지성은 죄를 어 죄로 판단하고 있지만 의지와 정서의 반항을 극복하고 복종시킬 수 있는 힘을 영혼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24:12) 이러한 영혼으로부터 강력한 힘이 공급되지 않을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성은 죄와의 싸움을 포기한 의지와 정세 어 동의할 구시를 찾게 됩니다. 따라서 이때에 죄에 관한 진지한 견해를 하찮게 생각하는 지각 없는 견해를 받아들이거나 그릇된 시본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본받게 되면 힘을 잃은 지성은 죄의 구에 이미 굴복하려고 하는 의지와 정서에 조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이 세상에 이렇게 힘들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도적이지 않은가? 설마 죄를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신자들이 다 오위에 빠졌을까? 지성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지만 의지와 정서가 여전히 죄를 좋아하고 그 가운데 거하려 합니다.
(25:06) 그리고 그것을 버릴 의지가 없고 마음에 변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논리적으로 자신이 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복음의 분명한 증거를 자신의 상황으로 덮어버립니다. 이렇게 죄는 자신의 상황으로 복음을 덮어버리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영혼은 즉각적으로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둘째로 마음은 급속히 죄를 향해서 열게 됩니다. 이때 잠시 지성적으로 죄를 깨달았던 영혼은 신속하게 몰러가 더 깊은 침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자가 자신이 그렇게 죄임을 실천하지 아니하고 어둠 가운데 살아가도록 상황으로 복음을 덮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게 되면 그 삶 전체가 비영적인 틀에 갇치게 되고 죄로부터 돌이켜 다시 죄 죽임을 위하여 분투하는 일은 힘들게 됩니다.
(26:11) 뒤 총체적으로 싸우지 않고 특정한 죄에만 싸움 내체로 충체적인 죄의 싸움을 개별적인 죄의 싸움으로 퇴치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죄 죽음은 총체적인 죄의 싸움을 통해서만 수행됩니다. 죄는 총체적인 것입니다. 개별적인 죄는이 총체적인 죄의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개별적인 죄가 총체적인 죄를 인식하고 그와 더불어 싸우게 되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이 때문에 개별적인 죄와 싸우는 싸워이긴 것을 마치 죄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생각하는 지상적인 혼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청유도 신학자 크리스토퍼 로브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6:59) 당신이 죄를 죽이려고 할 때 당신의 힘을 어 죄된 행동 어느 하나를 억제하는데 기울이지 말고 청적인 죄를 죽이는데 온 힘을 기울이십시오. 나무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길은 가지를 자른 것이 아니라 그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스 거스리려고 하는 악한 경향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똑같아서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행위를 행하심 행하는 일 심지어 우리의 육체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이러한 개별적인 죄의 불인 죄의 근원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고자 하는 신자의 삶을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데이를 위해서 총체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28:00) 죄라고 하는 본성적인 향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어지는 모든 개별적인 죄를 미워하고 죽기까지 사회하는 것은 물론이고 죄와는 상관이 없는 일상 생활의 습관이나 타고난 성품 기질 등의 기들린 죄까지도 미워하는 미워하고 그것을 죽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관을 거스리는 특정한 몇 개의 죄를 미워하고 그것과를 열심히 싸우거나 자신이 이미 잘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해 잡으심을 느끼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의 실패한 삶을 죄로 규정하고 그것을 미워하는 것은 진정한 죄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바리새인적인 자기 기만입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의 죄만 미워하면서 그것과 열심히 싸우고 다른 죄는 내버려 두는 것은 진정한 죄의 싸움이 아닙니다.
(28:57) 이러 어 그렇게 싸워서 이긴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혼을 다시 살게 하는 죄 죽임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더욱이 특정한 죄에만 어 싸워서이긴 사람에게는 항상 자신의 의를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한 죄와의 싸움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루어진 진정한 승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서 성령께서 죄를 죽이는 것을 경험하기보다는 오리려 자기 자신이 죄를 죽이기 위해 분 어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죄의 죽임이 없었고 영적인 승리도 없었지만 죄와 더불어 분투한 기억만 있기에 그는 자에 의해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9:50)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순종하려고 하는 총체적인 순종의 의지를 가지고 일체의 성실과 부지함으로 죄를 죽이는 삶 어 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싸움으로 오해함. 다섯째로 죄와의 갈등을 죄와 죄와의 싸움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은 죄와의 죄와의 싸움이 너무 힘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는 좀처럼 죽지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그 실천이 매우 힘들다고 느끼는 그것이 참으로 죄와 싸우는 과정에서 느낀 것인지 죄와 갈등 속에서 경험한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1.
(30:47) 죄와 싸우지 않고 갈등하는 원. 여기서 갈등이란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내적인 고통과 혼란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죄하우 싸움에 관련해서 언급하게 되는 갈등은 죄 죽임의 의무와 죄에대 신화적인 현실 사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와 싸우면서도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싸움이 치열한 전투가 되지 못하고 갈등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싸움은 타협을 통해서 그치게 하기 힘들지만 갈등은 타협을 통해 쉽게 종시킬 수 있습니다. 전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군과 적군이 피비린내게 싸움을 합니다. 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합니까? 오직 적대감만이 있을 뿐입니다.
(31:41) 모든 적이 선멸될 때까지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됩니다. 이처럼 아군과 적군이 명확한 전쟁터에서는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과 싸우는 사람이 대치하고 있는 그 적으로부터 파송된 간첩으로서 위장 군인이 되어 적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라면 그 전투에서 갈등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완전한 미움으로 대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적에 대한 치열한 혐오감 없이는 적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전투의 목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적가우 싸움에서 제화의 싸움에서 비롯된 갈등은 대부분 죄에 대한 미련에서 비롯됩니다. 혹은 죄를 죽인 상태에 대한 희망은 있어도 그 일을 위하여 지불해야 하는 영혼과 육체의 부단한 수고를 마아에도 갈등은 생겨날 수 있습니다.
(32:38) 이것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죄의 뿌리를 둔 것입니다. 결국 갈등은 죄에 대한 끊지 못하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이 이 갈등으로는 죄가 죽지 않음. 죄는 죽일 때에 죽는 것이지 괴롭게 할 때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어 그러한 갈등의 기간은 결코 한없이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갈등이 지속되면 은혜보다는 죄가 유리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오래도록 진지함과 열정을 유지할만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죄를 죽이고자 하는 내적인 결단은 약화되고 죄에 대한 욕구는 증대하게 됩니다. 결국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스러운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소원을 갖게 됩니다.
(33:36) 이때 죄는 자신을 향해 손을 들어주도록 강력하게 저항하고 정욕은 그렇게함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구를 만족시켜 달라고 조르게 됩니다. 결국 싸움은 끝나게 됩니다. 신자들 중에는 이렇게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죄와 분투하며 싸웠으나 죄가 잘 죽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 중 대부분은 죄와 갈등한 것과 실제로 맛붙어 싸운 것을 혼동하데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죄와 갈등하는 것을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은 스스로 그러한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이 높은 영생활을 영하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4:25) 그러나 하나님의 상급은 죄와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어두운 반바다를지나 미지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담대하게 그 나라에 계실 주님을 바라며 소망 가운데 자신이 받을 영광을 꿈꾸며 그 죽음의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죄와 많은 갈등을 느끼는 사람이 죄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보다 더욱 담대하게 영혼의 어둠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향해 담대하게 만드는 영적인 용기는 끊임없이 죄를 미워하되 그 뿌리까지 미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신자로 나타나기를 힘쓰고 사모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35:23) >> 삼죄와 싸우는 신자의 표지 그러면 죄와 갈등하는 사람과 실제로 싸우는 사람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무슨 기준으로 신자가 자신의 죄와 싸우는 중 있는 중인지 혹은 단지 갈등하고 있을 뿐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여기에 실제로 죄 싸우는 신자에게만 있고 단지 갈등만 하는 사람에게는 찾아보기 어 다섯 가지 표지를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화적고자 합니다. A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 첫째로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있습니다. 실제로 죄와 싸우는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정직하게 인식합니다. 단지 갈등만 하는 사람이들은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죄를 외면하고 과서 평가하지만 죄와 사우는 신자애들은 죄를 성경적인 지적하는 대로 정직하게 인식합니다.
(36:23) 인식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죄와 싸우는 사람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식하는 그것을 시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죄와 더불어 싸울 전일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B. 효과적인 죄 죽임 방법을 갈망함. 둘째로 죄를 죽이는 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이라 하고자 합니다. 죄와 갈등하는 상태에 있는 신자의 경우 죄를 죽이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탐구가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와 더불어 갈등한 상태에 있으나 죄를 죽고자 하는 사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장 13절 진정으로 죄의 죽임을 싸 위에 싸우고 있는 신자는 그 싸움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더 많은 정보를 필요할 것이며 그것을 얻을 수
(37:28) 있다면 어떠한 시승도 치를 것입니다. 좋은 오인과 같이이 죄임이 아주 커다란 영적인 죄를 필요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죄김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없다면 그것을 위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죄에 대해 진자의 연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죄와 싸우는 자신을 돕는지 열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의 성도들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던 때일수록 죄에 대해 많은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에 대한 갈망은 죄를 죽이는 방법을 알고자 하는 욕구로 표현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힘보다 은혜의 능력을 믿음.
(38:27) 셋째로 죄와 싸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도움을 믿습니다. 그것은 죄의 힘을 인식하나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굳게 믿습니다. 따라서 죄의 힘이 크게 느껴지다는 이유 때문에 자하지 않습니다. 죄 갈등하지 않 갈등하는 사람은 자주 낙심하지만 죄와 싸우는 사람은 사람들은 그 죄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은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그렇게 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적을 물질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기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뒤 자신의 결단보다 성령을 의지함 넷째로 죄를 죽이시는 성령을 의지합니다.
(39:26) 진실로 죄를 죽이기 위하여 실제로 싸우는 신자들에게는 자신이 싸우지만 죄를 죽이시는 주체가 성령이시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결단하지만 죄를 죽임에 있어서 자신의 결단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을 굳게 믿습니다. 아무리 단호하게 결단할지라도 그 결단은 단지 제 죽음의 현장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하기 위한 준비라고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을 의지합니다. 어차피이 싸움은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성령을 온전히 의지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죄를 죽이시되 홀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순종을 사용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어찌하든지 온전한 순종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죽이기를 원하는 의뢰의 마음이 있습니다.
(40:19) 그러나 죄의 갈등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전심으로 성령을 의지하기보다는 신앙적인 요행을 바라거나 자신의 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이 이 고민보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다섯째로 제아와의 싸움에 있어서 고민보다 기도를 많이 합니다. 제화와 갈등 상태에 있는 신자들은 많이 고민하고 적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죄를 죽이기 위해서 온 마음으로 죄와 싸우는 신자는 고민은 적게 하고 기도는 많이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주의를 돌아보십시오. 스스로 죄와 많이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갈등 상태에 있는 신자들의 공통점은 죄를 인식하고 제 죽임의 의무와 제 사랑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은 하지만 열렬한 기도는 없다는 것입니다.
(41:11) 이렇게 죄에 대해 인식하고 싸우려고 한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은근한 미련을 간직하여 갈등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열렬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객관적으로 대하지 못하는 죄가 그 영혼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죄와 맛부터 싸움에 맞부터 싸움에 영혼은 죄와 맛부터 싸움에 있어서 주관적으로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 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혼히 실제로 죄와 맛부터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 안에 속속들이 스며든 죄가 분리되어야 하고 그것이 죄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움은 불가능합니다. 영원히 죄와 맛부터 실제로 싸워 죽이기 시작하는 일은 명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간절한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42:08)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반복적인 기도의 실천과 그를 통하여 반드시 죄를 죽이고자 하는 꺼지지 않는 열렬함이 지속될 때에 죄는 신자의 영혼 속에서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죄에 대한 친화감은 변하여 적대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죄 죄임을 위하여 열렬하게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은 실제로 피어흘리는 죄와 마주하게 됩니다. >> 자, 진정한 분가 필요함. 죄와 많이 싸웠으나 승리하기 어려웠다고 고백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정말 죄와 맛붙어서 싸워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열렬한 기도가 여러분 속에 살아 있어서 죄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실제로 그 죄에 대항하여 싸우게 했습니까? 실제로 죄와 맛부터 싸우기 시작할 때에 영혼 안에서 느끼는 죄에 대한 접대감은 가장 크게 달하게 되고 싸움도 한체 양보가 없는 치열한 상태가 됩니다. 이때 성령께서 실제로
(43:12) 죄를 죽이시기 시작합니다. 이때에 죄 죽임을 경험한 사람들은 죄가 얼마나 심각게 죽는지를 체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와의 싸움이 끝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안에 잔존하는 작은 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정말 죄와 싸우기 시작하면 기도도 열렬해지기 시작합니다.
(43:55) 그리고 지성 안에서 그 죄가 또렷히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기도 속에서 죄와 맛부터 싸우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죄가 얼마나 쉽게 성령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혼란 가운데 있는 영혼의 고통 참든 평안이 없음 앞에서 살펴본 죄와 싸움에서 겪고 되는 이러한 지상적 혼란은 우리의 영적인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그래서 이런 혼란이 있을 때에는 영혼히 더욱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죄의 용서와 참된 위로가 모두 약속되어 있으며 단지 약속뿐만 아니라 영혼을 어 죄의 권세에서 이끌어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이러한 복음의 이치에 대하여 무죄하거나 앞서 언급함과 같은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면 마음과 생각이 모두 엉크러져 죄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44:52) 뿐만 아니라 죄의 싸움 중에서 경험하게 되는 참된 위로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죄는 마치 습기가 많고 어두운 그에서 잘 자라는 독포가 같습니다. 찰란는 햇빛이 비추고 건조한 곳을 자라지 않습니다. 죄 역시 어두운 무지와 정욕이라는 습기가 있는 곳에서 번성합니다. 따라서대 같은 밝은 빛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죄의 먹이야 되는 정욕을 버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위하여 복음의 교리를 위하고이 복음서에 기들려진 경건의 비밀을 체험함으로써 죄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죄는 어두움을 영혼과 눈먼 지상 안에서 활기차게 번성하고 역사합니다. 그래서 죄가 처음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때 먼저 우리의 지성 곧 생각이 흐트러지게 하여 어둠 속에 있도록 돕습니다.
(45:48) 이처럼 엉 엉크려진 생각 속에서 어두워진 마음을 모판으로 죄는 자라기 자라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가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위로나 신령한 기쁨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을 생활을 이어지게 됩니다. 이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뿐이 신앙 생활은 영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을 단지 위해시는 종교 생활일뿐 신령한 생명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의 정를 죽이고 더럽고 부패한 마음을 정결하게 씻은 하나님의 영광 위하여 살고자 하는 충천한 열정을 갖는 것이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드내지 않는 한 무슨 일을 주님의 섬기라 하든지 그분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입니다.
(46:40) 결국 신자는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기쁨과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의무의 형식적으로 참여하거나 실정을 내게 됩니다. 그 의무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절박한 필요성과 거룩해지고자 하는 신령한 욕구를 상실한 채 형식뿐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신앙에서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믿음조차 잠식되고 마침내 모든 은혜를 고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와 싸울 때 경험이 되는 지성적인 혼란이 추리하는 결과입니다. >> 4. 싸움에서 필요한 사고와 판단.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풍부한 지식과 정직한 사고입니다.
(47:29)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의 삶에는네 가지 태도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첫째로 항상 경성하여 신자가 죄와 죄와 싸우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늘 깨어 있어 영원히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은 일생에 한 번 한두 번 큰 전쟁을 필름으로써 최종적인 승리를 거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분투하고 싸움이 분투하는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죄에 물들지 아니하고 순결함을 유지하여 항상 영적인 삶의 빛을 소유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탐구해야 합니다. 죄와 싸우기 원하는 신자는 죄와 은혜의 세계에 대해 부지러운 지성적으로 탐구하여야 합니다.
(48:28) 성경을 통해 죄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께 제 죄를 이길 능력을 베푸시며 심자는 어떻게 그러한 죄를 이기고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게 되는지를 탐구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겪는 영적인 어려움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했고 성경 속에 그 답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분투하며 사는 가운데 죄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은혜의 비밀을 터득하게 되지만 지적인 탐구 없이 경험을 통해서만 그 모든 것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적은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료야 할 것입니다. 조로 깊이 있고 감안력게 있으며 지성적인 저자들에 의해에 쓰여진 작품들을 성령의 빛으로 진지하게 탐구하고 연한 영적인 의인들의 신앙의 경험과 내면 세계의 투쟁을 그린 전기나 자사전 혹은 일기 같은 것들을 숙독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49:27) 항상 기도하여야 합니다. 신자는 죄와 싸우기 위하여 늘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지작정이 탐구와 함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혼의 가장 친숙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가장 잘 알고 아시고 동시에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와 은혜의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세상적인 탐구를 통한 개념적인이기를 가지고는 그 비밀스러운 세계를 모두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탐구에 성령께서 축복하셔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그 조명은 분명한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50:14)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죄와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그 지식에서 자리 잡음으로 주의 강교한 계획과 악의 유례에 이용당하지 않도록 정리된 이해를 소유하여야 합니다. 대체로 항상 순종하여 진자가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확고한 순종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의지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지성을 사용하여이 비밀스러운 죄와 은혜의 세계에 대해 알려 주시 주시지만 그것을 참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나태하고게 신자들이 아닙니다.
(51:06) 오직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의 지식을 따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기를 힘쓰는 사람에게 그러한 지식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러므로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은사입니다. 따라서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 단지 죄와 은혜에 대한 지식이 개념적으로만 쌓이여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깨달음 깨달은 대로 숙구하고 수고한 대로 자신의 삶을 적용하며 부지런히 죄와 싸우기를 실제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신자는 처음 받았던 은혜 상태에 올고듬을 유지할 수 있으며 지상적인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네 번째 혼란을 막는 지침. 그러면 실제적으로 이러한 지성적인 혼란을 막는 지침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지성적인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 자신을 살피고 주의해야 하는지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52:07) 만약 이러한 혼란이 시작되고 있거나 팽배 있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다섯 가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시하라. 둘째, 죄의 힘을 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피라. 셋째,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미워하라. 넷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음을 지키라.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A,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감시하라. 첫 번째는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감시하는 것입니다. 죄는 무지와 더불어 죄와의 싸움에서 이러한 지성적인 혼란을 초리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52:57) 따라서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살피고 주의하지 아니한 아니 아니면 이러한 지성적인 혼란은 가중되게 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에 대한 감감시는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뇌제하는 뇌제하는 죄를 살 첫째로 이미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를 살피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는 결코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죄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이러한 활동에는 구체적인 계획과 목표가 깃뜨려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자라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갑자기 힘을 얻기도 합니다. 이러한 죄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 죄와의 싸움에서 지성적인 혼란을 막는 매우 중요한 지침입니다.
(53:53) 이 제가 유입되는 경로를 살 둘째로 제가 들어오는 경로를 감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밖에 자기 밖에 있는 죄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자신 안에 들어온지를 예의 주시하는 것입니다. 유혹은 자기 밖에 있으나 그 유혹이 자신 속에 죄로 들어오는 통로는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환경은 물론 그 환경 속에서 죄가 자신 안에 들어오기에 적합하도록 하는 내적인 통로를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어떻게 심겨지고 역사하게 되는지 살펴보십시오. 처음에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객관적인 유혹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거기에 반응하게 되면 생각이 즐거움을 얻게 되고 반복되는 생각은 죄에 대한 더 강력한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54:45) 결국 마음 전체에 강력한 죄의 욕구가 깃들이게 되고 마음을 지배한 이러한 욕구는 영혼에 영향을 주어 죄의 지배력을 가중시켜 줍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의 경로를 철저하게 살피지 않고는 죄의 공격에 올바르게 제처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객관적인 감시 체제가 허물어지고 나면 신자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별성으로 말미암아 쉽게 죄와 친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죄와 친화적이게 되면 죄를 자신 안에 남겨둔 채 살아가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그 신자 안에 있는 죄는 지배력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이 죄가 생각 속에서 사고를 혼란케 하고 정서 속에 죄에 대한 욕구를 불붙여 의지를 굴복시킵니다.
(55:36)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죄는 우리 안에서 우세해지게 됩니다. 신자가 죄와의 싸움에서 혼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 안에 있는 죄와 그 통로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죄가 죄가 익숙해지는만큼 그것을 파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어렵고 또한 그 죄에 대한 반감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처럼 죄와의이 싸움은 지업적이거나 단편적이지 않고 우리 영혼의 상태와 총체적인 연관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어둠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진리의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든 것들을 밝히 보여줄 수 있는 지혜와 능력에 있습니다.
(56:30)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1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자우의 날선 어떤 건보다도 예리하여 공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더욱이 죄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기질 성향 습관 같은 것을 이용하여 들어옵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죄와 그 죄의 활동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어야 됩니다. 문제가 되고 되는 것은 탁월한 기질이나 성품이 아니라 그것들이 죄의 통로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57:28)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자기 속으로 들어오는 죄들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는 인간을 아는 일반적인 지식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과 지적인 탐구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죄들을 잘 인식하고 그 움직임을 예의 주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와 의사함에서 경험하는 지성적인 혼란에서 벗어난 첫 번째 지침입니다. 죄의 힘을 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라. 두 번째는 죄의 힘을 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숨은 허물과 죄를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58:19) 그래서 시인은 자기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그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강고하였습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죄와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자라갈수록 자신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성찰도 깊고 정확해집니다. 그러나 영적인 성장이 없고 죄와 은혜의 세계에 대해 무죄할수록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정체와 그 계획 그리고 특성들에 대해 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신 속에 있는 죄에 대해 매우 뻔뻔스러운 태도를 견제하고 납니다.
(59:10) 비유하자면 자신 속에 죄라는 나무가 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우성하게 자라서 악이라는 열매를 맺고 고통을 겪을 때까지 그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기가 일수입니다. 이러한 죄는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 양분이 필요하듯이 죄가 자라기 위해서는 정욕이라는 먹이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정욕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면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들은 점점 강화됩니다. 정욕이란 마음속에 있는 죄에 대한 욕구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죄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견지에서 행위로 드러난 죄만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1:00:0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죄에 대한 요구를 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죄의 힘을 더하는지 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런 질문을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때에 나의 마음이 강팍해지는가? 그리고 어떤 때에 무엇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들이 힘을 얻고 죄의 욕구가 자극받게 되는가? 신자의 거룩한 삶은 결코 아무렇게나 살아감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영혼까지 두루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객관적으로 살피는 자세가 죄와의 싸움에서 매우 욕인합니다.
(1:00:49) 마치 획과 의사가 환자의 흉보를 절개하고 밝은 조명 아래 암세포를 찾고 절제하며 핏줄과 핏줄을 신경과 신경을 힘줄과 힘줄을 연계하듯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투죽간의 고기처럼 다루어서는 결코 거룩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마음의 평안을 미워하라. 실제로 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마음의 평을 미워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사람과 집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마음의 평안을 거짓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 존호에는 죄 가운데 있는 신자 안에 죄가 죽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증거가 그 죄에 대한 혐감이라고 시작했습니다.
(1:01:41) 물론이 세상에 있는 어떤 신자라도 죄로부터 안전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그 죄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어찌할 바 없이 남아 있는 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주관적으로 죄를 사랑하고 특정한 죄에 대한 실행의 욕구를 강하게 느끼면서 평화로운 마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신자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평화가 양할 수 없을까요? 그것은 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책대감입니다.
(1:02:27) 따라서 어 죄 가운데 있는 신자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적대권을 치진 사람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도 오류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적대감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것은 마치 상대방의 얼굴을 침을 뱉으며 악수하고자 뱉으며 악수하고자는 손을 내미는 것과 똑같은 행동입니다. 공기 속에 있는 오염 물질의 호흡을 통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 몸에 들어오고 있듯이 신자에게도 이러한 의식이 할 수 없게 잔절하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화에 미치는 영에 매우 적습니다.
(1:03:11) 문제가 되는 것은 죄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마음에 품고 있는 죄입니다.이 아 이것은 신자의 자신을 선택한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평안을 깨뜨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싶어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마음이 점차 굳어져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하나 더 하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인하여 들어오게 되는 죄와 자신의 게르고 부자기 때문에 들어오는 어 되는 죄는 혼동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스스로 죄를 선택하고도 그 범죄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연민하는 것입니다.
(1:04:03) 지금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죄는 정확하게 깨닫기보다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가진 공통적인 허물과 약정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이도하며 그것을 하나님과의 평안을 커다란 방해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영혼의 실제 상황입니다.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죄의가 스스로 선택한 죄인지 아니면 인간으로부터 불과학력적인 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그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죄가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사소운 것이라면 그는 영적으로 영적인 생명에 넘치는 삶에 영의함으로써 스스로 그렇다고 사실을 임정해야 합니다.
(1:04:54)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를 일을 외면하거나 자신의 영혼의 상황을 해석하는데 있어 부성적으로 어 부성적 부정직해짐으로 더 깊은 영혼의 어둠 속에서 떨어지기도 아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아 우리가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있는 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정직하고 명료한 판단을 가질 수 있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설해지고 틈해진 거 위에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변명과 자기 합리와 간사한 술수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죄 우리의 죄를 죄를 다루는 태도들이 선한 일을 그치고 죄싸움에 있어 보장된 승리의 길을 버리고 가장 어리석은 길을 택하게 합니다.
(1:05:50) 주님 위에 누가 우리를이 혼란의 어 반복 속에서 구현낼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뿐만 아니라 죄의 싸움에서 부주한 태도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평안을 확신하고 죄사을 간단히 포기하게 합니다. 부주일한 그 자체가 진지해지는데 필요한 수고를 마아하는 지성적인 게으림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주의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들어오게 된 죄 역시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어떠한 진지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빚다 안에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고 죄를 살피며 그것에 역사하는 방식으로 통로를 관찰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 인내와 수고를 요합니까? 부주인은 바로 이런 수고를 지불하지 싫어서 선택된 게으림입니다.
(1:06:57) 죄는 어 그것이 어떤 경로로 들어왔던지간에 영혼을 공격합니다. 신자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죄도 어 은혜를 죽이고 실수로 선택한 죄도 영혼을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안에 죄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마음의 평안을 지극히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신자라도 지칠 줄 모르는 의지를 가지고 피흘리까지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없습니다. >> 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음을 지키라.네 네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이 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주의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이고 둘째는 말씀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1:07:46) 1. 말씀의 지속적 감화. 첫째로 말씀 아래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지속적인 감화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크게 세 가지로 적용되는데 우리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셨다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이제껏 살아온 삶의 방식과 생각들이 있습니다. 중생을 통해 커다란 편안을 경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생각은 부패한 옛 사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악한 생각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약한 생각은 우리 마음에 우리 마음 안에 착상되려 하고 그것들을 죄들을 죄는 여향력을 확보하는 교독으로 삼으려 합니다.
(1:08:43) 를 따라서 이렇게 타오르는 생각의 작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감마 아래 놓여기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감아 받은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이 마음을 올게 지키라. 두 번째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 자기의 지성적인 작용이 하나님의 말씀에 강력한 감화를 받고 그 진리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에 기뻐하는 바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도록 자신의 마음에 올거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마음을 지키며 자기 안에 있는 죄에 대한 미움을 갖는 한 죄와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그가 죄와 싸우고 있는 한 죄는 그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1:09:44) 존 화이트의 지적과 같이 우리의 모든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이라는 우리 안에 맹수를 한 마리씩 기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신자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원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부신자들에게는 그것을 제어할 힘이나 지혜 그리고 법이 별로 없지만 신자에게는 가장 좋은 제 기재들이 새 언약 안에서 중생과 함께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으로 스스로 죄를 택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일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에 대하여 깨어 있어서 마음의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해지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은혜의 상태에서 지키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불가학력적인 죄가 우리 안에 잔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1:10:44) 신자가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마음을 지키는 일에 있어 졸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의 실천에 있어서 자만하지 말고 더 깊은 자신의 내면을 살펴 악함과 더러움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없다고 고백하며 참참회 속에서 번히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깨어지고 상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긍휼를 구하여야 합니다. 한 순간도 그분이 부드러워 주시지 않으면 과거에 이루었던 우리의 승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1:11:28) 신자는 이렇듯 자주 진실한 자기 깨어짐을 통해 자기의 의와 죄를 향한 사랑에 대해 깨어지고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하여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와 싸우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마치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을 아버지께 부탁하여 이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치열한 죄와의 싸움에서 죄로 말미암아 지성적인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다섯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2절 말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여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1:12:34)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지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 으셨느니라. 아멘. 우리 안에서 죄가 발견되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타고난 못난 성품과 몸에 벤 습관을 통해 죄들이 들어옵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죄의 소원이 있고 그래서 죄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솟아나는 정욕들은 끊임없이 죄의 즐거움을 구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죄와 싸우는 것이 매우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동안 너무나 오래도록 하나님의 말씀의 감화를 잃어버리고 부부주의함과 무지 속에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1:13:34) 이렇게 죄와 싸우고자 하나 싸울 힘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리고 왜 거기서 죽으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반문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바로이 죄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거기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은 지금 짓고자 하는이 죄 때문에 막힌담을 허물어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어찌 잠시 죄가 주는 즐거움을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자신에게 다 이르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 위에 쏟아부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 대한 소원이
(1:14:38) 사라지고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회개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은혜도 죄도 그것이 우리 속에 강한 영향력으로 자리잡기 전에는 반드시 우리의 생각이 그것에 집중하고 마음이 집착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산출되기 직전 죄에 대한 이러한 집중은 그게 달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을 피하면 죄를 이길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죄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처절히 분토하려는 자세와 함께 죄를 불러오는 유혹받는 상황을 피하거나 쉽게 죄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마음을 흩어놓는 일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은 이러한 일에 있어 탁월한 효능을 갖습니다.
(1:15:33)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강팍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서 4 53장 5절 말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나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아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서도 범죄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놓지 않은 죄의 정체는 공로 없는 우리에게 한없이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1:16:27)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죄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시고 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은혜에서 미끄러지는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 마음에 어찌할 수 없는 죄의 소욕이 있어도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히브리서 10 12장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1:17:19)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아멘.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뉘우치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능가하는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그것을 죽이게 하십니다. 범죄한 자에게는 용서를 베푸시고 은혜의 세계가 허물어진 자에게는 그 은혜의 세계를 다시 세우심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재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 사랑을 안 사람들에게는 죄에 대한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1:18:07) 죄의 속임이 아무리 간교하다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자들을 언제나 도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어둠과 생각의 혼란을 극복하는 말씀의 빛으로 은혜의 능력으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1:25:16) 아멘.
아멘.
한눈에 보는 14장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I. 원리적인 혼란
A 비중생자의 경우: 중생 없이 죄를 죽이려 함
-비중생자는 아무리 죄 죽임을 위하여 애써도 죄를 죽일 수 없음
-그의 마음과 영혼 안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있음.
-양심이나 본성의 빛으로 죄의 욕구를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님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죄 죽임의 실천보다 복음을 듣고 거듭나는 일이 필요함.
B. 중생자의 경우
1.빈번한 패배로 구원 여부의 혼란을 느낌
-구원은 불변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가변적인 것임
-성령께서 신자 안에 그가 구원받은 사람임을 인쳐 주시는데 마음이 그런 성령의 역사를 감지함
-죄로 인해 절망에 빠지게 되면 확신이 흐려질 수 있음.
-참회를 통해 죄를 성령의 은혜로 명료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됨
2. 죄 죽임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함
a 무지 때문에: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나 희박하여 죄 죽임의 의무와 그 필요를 모름
b 잘못된 교리 때문에: 그릇된 성화의 교리를 믿고 있어서 죄임의 실천이 필요함을 알지 못함
c. 신학적 균형을 잃은 구원관 때문에: 즉각적인 구원인 칭의만을 강조하여 성화를 위한 노력을 율법적인 것으로 이해함.
d. 거룩함보다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참된 기쁨을 이 세상에서 찾으려는 경향 때문에 죄와 맞붙어 싸우려 하지 않음.
II. 개별적인 혼란
A.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모름
-영혼의 어둠과 지성의 무지 때문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함
-죄가 무엇인지 죄와의 싸움이 무엇인지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 모름
B. 하나님과의 평화에 대한 혼란
-신자는 죄와 싸우기를 포기하고 항복함으로써 일시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음
-이것 때문에 그릇된 안정감에 빠지게 됨.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목에서 비롯되지 않는 모든 평화와 그릇된 안정감을 혐오해야함.
C 죄에 지는 상황으로 복음을 덮음.
-죄에 패배하는 상황이 지속될 때 죄에 관한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게 여기는 견해를 받아들임.
-죄를 죄로 인식하고 있던 지성의 힘을 잃고 정서와 의지에 동조하여 복음의 분명한 증언을 상황으로 덮어버림
-이때 영혼은 즉각적으로 더 깊은 어둠 속에 들어가고 마음은 급속히 죄를 향해 문을 엶
D 총체적으로 싸우지 않고 특정한 죄와만 싸움
-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악한 경향성이고 죄의 죽임은 개별적인 죄의 뿌리인 죄의 근원을 죽이는 것임.
-그런데 자신의 인생관을 거스르는 특정한 몇 개의 죄를 미워하고 그것만으로 열심히 싸움.
-그렇게 싸워서 이긴다고 할지라도 영혼을 다시 살리게 하는 죄의 죽임의 효과가 없음.
-특정한 죄와만 싸워 이긴 사람은 자기의 자기 의에 빠질 위험이 있음.
E.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싸움으로 오해함.
1.죄와 싸우지 않고 갈등을 하는 원인
-죄와 싸우면서 죄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치열한 전투가 되지 못하고 갈등에 그침
2.갈등으로 죄가 죽지 않음.
-갈등으로 죄가 죽지 않을뿐만 아니라 갈등의 기간은 한없이 오래 지속된 것이 아님
-갈등을 싸움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갈등하고 있는 자체가 자신이 높은 영적 생활을 영위하는 증거라고 여김
3. 죄와 싸우는 신자들의 표지
a. 죄에 대한 정직한 인식: 성경이 지적하는 대로 죄를 정확하게 인식함
b. 효과적인 죄 죽임의 방법을 갈망함: 죄를 죽이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자 함
c. 죄의 힘보다 은혜의 힘을 믿음: 죄와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을 믿음
d. 자신의 결단보다 성령을 의지함: 죄를 죽이는 주체가 성령이라는 확신이 있음.
e. 고민보다 기도를 많이 함: 고민은 적게 하고 기도를 통해 죄와 맞붙어 싸움.
4. 진정한 분투가 필요함.
III. 혼란 가운데 있는 영혼의 고통: 참된 평안이 없음.
IV. 죄와의 싸움에서 필요한 사고와 판단.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경성해야 함.
-죄와 은혜의 세계에 대해 부지런히 탐구해야 함.
-늘 성령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 함.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의지가 절실하게 필요함
V. 혼란을 막는 지침.
A 자기 안에 있는 죄를 감시하라.
1. 내재하는 죄를 살핌.
-자기 안에 내재하는 죄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해야 함
2. 죄가 유입되는 경로를 살핌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성품이나 기질 성향 습관을 잘 알고 있어야 함
B. 죄에 힘을 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라
C.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마음의 평안을 미워하라
D.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마음을 지키라
1. 말씀의 지속적 감화
-’말씀 아래서’라는 것은 말씀의 지속적인 감화 아래 살아가야 함을 뜻함.
2. 마음을 올곧게 지킴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의 감화를 받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도록 마음을 올곧게 유지하는 것임
E.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스터디
제14장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지성적 혼란
첫번째공부
1.죄 죽임의 과정에서 빠지기 쉬운 지성적 혼란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41)
2. 죄와의 싸움에서 경험하는 원리적 혼란이란 무엇입니까?(342)
3. 불신자들이 간혹 죄를 이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한계는무엇입니까?(342-345)
4. 죄에 빈번히 패배함으로 구원 여부에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이 주지해야 할 사실은 무엇입니까?(345-346)
5. 신자가 되었음에도 죄 죽임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347- 349)
6. 신자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는 처지가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오래 참으시며 살려 두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350-351)
7.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 누리는 평화와 죄에게 졌을 때 누리는 평화는 어떻계 다릅니까?(352)
8.신자가 죄에 지는 자신의 상황으로 복음을 덮어버리는 과정을 지성, 정서, 의지의 작용을 통해 살펴보십시오. 이렇게 되면 신자의 영혼에는 어떠한 결과가 일어납니까? (353-354)
9. 총체적인 싸움이 아닌 개별적인 싸움에서 이긴 것을 전부 다 이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354-355)
10. 죄 죽임의 과정에서 신자가 죄와 싸우지 않고 갈등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와의 갈등을 죄와의 싸움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무엇입니까?(356-358)
11. 실제로 죄와 싸우는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다섯 가지 표지는 무엇입니까?(358- 360)
두번째 공부
12. 죄와의 싸움에서 겪게 되는 지성적 혼란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은 어떤 것입니까?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과 교훈은 무엇입니까?(362-363)
13. 죄와의 싸움에서 신자가 정직한 사고와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363-364)
14. 자기 안에 있는 죄와 그 죄의 통로를 살피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죄가 신자 안에 들어오기 위해 사용하는 통로는 무엇입니까?(367-368)
15. 죄에 힘을 더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욕구가 솟아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입니까?(369-370)
16.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마음을 지킨다고 할 때, 말씀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과 마음을 지킨다는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373-374)
17. 죄와의 싸움이 힘들어질 때,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함으로 혼란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말해 보십시오. 이 사실이 주는 도전을 서로 나누어 보십시오.(376-3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