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에 임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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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사도행전 19:17–20 NKRV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괄목할 만한 부흥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와 당시 세속적 세계관의 충돌을 보여준다.
당시 에베소는 약 20만 이상이 모여 살던 대도시였고 로마 제국 아시아주의 수도였으며 항구 도시로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경제와 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에베소가 복음으로 정복된다면 그것은 곧 아시아 전체에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는 뜻이었다.
당시 에베소는 철학과 학문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으며 많은 지식인들이 모이고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바울이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 것은 기독교가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이교도의 주장들을 압도할 수 있는 종교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지 바울의 지혜를 통해서가 아니라 거룩하고 놀라운 부흥을 통해서 주술과 마법이 판치던 에베소의 사악한 영적 세력을 꺾으셨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에베소의 사악한 영적 세력들을 무너뜨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이 에베소를 변화시킬 위대한 권세임을 입증하였다.

II. 에베소에 임하신 하나님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어떤 제자들을 만나서 물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계심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대답하면서 자신들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만 대답하였다.

A. 성령이 임하게 하심.

첫째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었다.
그러자 바울이 세례 요한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한 말을 상기시켰다.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셨다.
그제야 그들은 바울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안수를 하였고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하게 되는데 그 수가 열두 사람쯤 되었다(행 19:6).
사도 바울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복음이 강력한 이교적 세계관과 미신으로 가득 찬 에베소 도시의 지속적 영향을 끼칠 길을 찾았다.
먼저 그는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면하였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였다(행 19:9).
그러나 바울은 실망하지 않고 의견이 충돌하는 회당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그들을 가르쳤다.
바울은 거기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이태 동안이나 계속했다.
그러자 아시아에서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기독교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충분히 복음의 말씀으로 신앙이 성숙해져 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놀라운 능력을 행할 수 있도록 권능을 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행 19:12).
그것은 에베소에 살고 있는 그들로서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놀라운 기적은 마술사들이나 이교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자신들도 꼭 따라 해보고 싶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바로 마술하는 사람들, 곧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마술사로서 바울의 능력을 무척이나 부러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흉내 내어 악귀 들린 자들을 고쳐주고자 하였으나 이는 그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병을 고쳐주고 무엇이라도 보답으로 받아 수입을 늘리거나 또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다.
웃지 못할 일은 그들이 자신들은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그 귀신 쫓는 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였던 것이다. “...어떤 유대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에게 명하노라”(행 19:13).
이런 일을 본받아서 행한 이들이 있었으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나 바울의 이름을 의지하여 귀신을 내쫓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고 그들은 그 도시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악귀가 대답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늘 너희는 누구냐...” 하였기 때문이다(행 19:15).
그뿐만이 아니라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버렸으니 그들은 상처를 입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쳐 나가버렸다(행 19:16).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사람의 말에 설득되어서 복음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영적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의 세계에서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와 바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들에게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는 권능,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체가 영적 전투다(엡 6:12). 그리고 그것은 냉엄한 현실이다. 마귀와 싸워 이길 힘이 있으면 그를 쫓아내서 살아서 남게 되고 그럴 힘이 없으면 그에게 져서 쫓겨나는 것이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영적 전투라면 그들을 양떼로 이끌고 있는 우리 목회자들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목자인 우리에게 신앙과 더불어서 착한 양심과 건전한 상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것의 전부라면 우리가 과연 자신의 많은 양떼들을 지금 울부짖으며 삼킬 양들을 찾아다니는 마귀로부터 지켜낼 수 있겠는가?(벧전 5:8)
만약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영적인 권세가 없다면 우리의 목사직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 중 한 사람인 리옹의 이레나이우스(c.130-101)는 자신의 책 『이단 논박』 제7권 829쪽에서 목회의 사명을 받은 참된 예수의 제자들의 표지로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꼽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분의 참된 제자들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그분의 이름으로 [기적들을] 완수합니다. ...어떤 이들은 참으로 마귀들을 가장 확실하게 진실하게 몰아내며, 그 결과 그 가장 사악한 영들로부터도 능히 깨끗해진 이들이 직접 믿음을 갖게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레나이우스가 증언하는 이 영적 권세에 관한 언급은 단순히 신학적 이론이 아니라 초대 교회가 거대한 로마 제국과 수많은 이단들과 맞서 싸우며 이겼던 실전의 무기였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이런 귀신들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세가 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의 참된 제자라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였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양 무리들을 그 악한 영의 압제로부터 구해내는 일은 목회자에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어쩔 수 없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 사역을 위해 꼭 필요한 준비이며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래서 칼뱅은 자신의 책 『공관복음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께서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도록 그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단지 그분의 교리를 전파하는 전령일 뿐 아니라 그분의 권능을 집행하는 사역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보라! 칼뱅은 목회자를 단지 교리를 전달하는 자라고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목회자로서의 임무는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만 완수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목회자는 이 세상에서 그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권능을 이 세상에서 대리적으로 집행하는 말씀의 종이라는 의미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라는 빼놓을 수 없는 증거는 그가 입술로 전하는 메시지가 영적 권세가 있어서 실제적 승리로 확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양떼들은 늑대와 싸워서라도 구원해 내고야 마는 선한 목자처럼, 우리 양 무리들을 악한 귀신들과 악령들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도록 강력한 영력으로 무장되어 있는가?
악한 귀신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리게 하였던 예수와 바울의 그 큰 권세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물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단지 사람에 불과했던 바울의 그 큰 영적인 능력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었을까?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가 『설교와 설교자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목회자는 특히 설교자는 비범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 신령함은 단지 거듭나면서 비롯된 것, 그 이상의 영적인 무엇이다.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지니고 있는 영적 능력으로서의 신령함이다.
강력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을 떠올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은 광야, 고독, 기도 같은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유대 광야에서 40일을 물조차도 마시지 않은 채 기도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본격적인 선교 사역에 헌신하기 전에 아라비아의 광야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했을까? 거기서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관리했기에 그토록 크고 신령한 능력이 일평생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했을까?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존 번연은 기도와 영력에 관한 『존 번연 전집』 1권 631쪽 “임종시의 격언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는 우리 영혼에게는 방패이며 하나님께는 제물이며 사탄에게는 채찍입니다.”
이러한 영적 권세에 대하여 마틴 로이드 존스는 자신의 책 『영적 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는 우리가 영적 권세의 근원에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기도가 없다면 우리는 마귀 앞에서 무력한 먹잇감일 뿐입니다.”
우리 시대에조차 사랑을 받고 있는 저 유명한 기도의 사람 E.M.바운즈(1835-1913)는 자신의 책, 『기도와 능력』 제17장에서 말한다.
“기도하지 않는 사역자는 마귀의 노리개에 불과하지만 무릎으로 사는 사역자는 지옥 전체를 뒤흔드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바운즈는 평생에 걸쳐서 목회자의 영적 권세와 기도의 깊이가 비례한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해 보여주었다.
또한 깊은 기도는 긴 시간을 요구하고 그렇게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은퇴 후 매일 8시간 이상 기도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하늘나라로 갔다.
그러면 이제 중간에 퀴즈 하나 낼게요. 지금 창이 보여요? 안 보여? 보이네? 박 목사님 무슨 창이에요? “기도” 그렇지. 그렇지 그걸로 그 하나 하나를 가지고 그냥 청중들을 이걸 쓸 때는 인제 여러분들이 청중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썼으니까 그런데 내가 좀 이제 미안한데 평소 드리는 거보다 시간을 절반밖에 못 드렸어. 내가 논문 쓰느라고 그래서 아까도 오타도 좀 나오고 그랬는데 내가 그건 미안하게 생각을 해. 이제 훨씬 더 더 많이 시간을 써야 되는데 최선을 다해서 했어요. 그런데 하나를 딱 잡은 거야. 성령이 임했다. 능력이 임했다. 큰 큰데 그걸 적용을 해야 될 거 아니야. 그런데 그거를 어떻게 적용해? 그러니까 그런 능력이 임하는 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 능력을 줄여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거 하나를 적군에게 이렇게 찔렀다고 쳐 그러면은 다음 찔를 곳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어떻게 해야 돼? 창을 더 깊이 후벼파야지 그래서 등으로 등 바깥으로 창끝이 나오게 해야 돼. 한번 찌르고 그다음에 다른 데를 찾는 게 아니라 한번 찔른 그 자리에 들어갔으면 온 몸을 던져서 밀어버려가지고 그 창끝이 등뼈 바깥으로 나와야 된다. 이거야. 갈비뼈를 부수고
그런데 우리의 처지는 어떠한가? 정말 우리에게 능력, 영력이라는 것이 있긴 있는 것인가? 의무감에서 드리는 몇십 분의 기도가 어떻게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적 권세에 접근하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거기로부터 보여지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교제의 강물에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흠뻑 잠길 수 있게 하겠는가?
눈물이 없는 기도는 연료가 없이 돌리려는 원동기와 같다. 매번 힘을 주어 돌려보지만 잠시 움직이다가 금세 멈추기를 반복할 뿐이다.
많은 기도를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마음에 헛된 생각이 오가고 기도 소리는 공허한 울림이 될 때 그 긴 기도의 시간은 우리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한 채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양 무리들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는데 영혼은 곤비하고 육체는 지쳐 있지 않는가?
그래서 겉모양으로는 기도를 해도 우리의 속사람은 좀처럼 그 마음을 물처럼 하나님 앞에 쏟아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깨어지는 경험이 기도 속에 없다.
우리 마음이 물처럼 녹아서 영적 능력의 근원이신 성령의 임재와 십자가의 보혈의 샘이 잇대어 닿아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냉랭하고 형식적인가?
우리의 기도 시간은 짧고 그 짧은 기도 시간은 대부분 산란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일쑤니 거기에서 어찌 우리의 영혼이 신령한 세계에 접촉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반드시 만나주고 싶으실 정도로 그렇게 마음 전체가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무력한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사랑하는 양떼들을 원수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눈물과 피로 물든 가슴이 되어서 처절히 매달리며 기도해 본 것이 도대체 언제였는가?
깃털같이 너무나 가벼운 영혼으로 온전히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상승하는 영혼의 감각이 거룩한 세계에 대한 접속의 환희로 승화되는 순간들은 얼마나 드물었던가?
어떻게 하면 예수처럼 그렇게 자기를 다 버린 채 기도 속에서 큰 행복과 눈물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버려야지만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지옥에까지 내 이름이 두려움 속에서 알려지게 될 것인가?
우리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더해 줄 뿐이지만 참으로 지옥의 마귀에게까지 알려지는 것이야말로 그것들이 우리의 사역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지 않은가? 변하지 않는 신자의 영혼들과 그들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지도 않는 나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가지고 물러설 곳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포도원을 보시며 최상급의 포도 열매를 기대하셨으나 신포도만을 잔뜩 맺은 것에 대해 나에게 물으셨다(사 5:2).
“내가 네게 기름진 땅과 우수한 포도나무를 주었더니, 황폐하게 된 까닭이 무엇이냐?”
할 말을 잃은 나는 이제 숨을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것이 나의 목회의 현실인데 내가 이제 더 이상 어디로 물러갈 때가 있단 말인가?
한때 세상에서 방황하며 천국과 지옥도 모른 채 고집대로 영죽을 험한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른 채 나는 여전히 그늘진 사랑을 우거지게도 하였다.
그러니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목놓아 울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느 구천을 떠도는 불쌍한 영혼이 되지 않았을까?
세상에 있는 나는 기도를 쉬어도 천국에 계신 예수는 기도를 쉬지 않으시기에 교회가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찾기 전에 그분이 나를 먼저 찾으셨고 내가 회개하기 전에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다. 그래서 거미줄 같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여기까지 살아왔다.
아아, 도대체 언제까지인가? 내가 얼마나 더 방황한 후에야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리하여 맨 처음 나를 당신의 자녀로 유혈이 낭자하게 흐르는 십자가 아래서 안아주셨던 때처럼 구원의 감격에 목매어 울게 될 것인가?
얼만큼 더 나 자신에게 실망한 후에야 비로소 목자로서 내게 아무런 선한 것이 남아있지 않고 목자로서의 영혼이 말라깽이가 되어버린 것을 인정할 것인가?
그리하여 이제 “예수여, 나를 도와 주옵소서. 그리하지 아니하시려거든 내 생명을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울부짖음으로 오늘의 기도가 내 생의 마지막 기도인 것처럼 드릴 것인가?
사방을 돌아보라. 모든 곳이 막혔고 이제 물러설 곳도 뒤돌아갈 곳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내가 살고 나의 사랑하는 양떼들이 다시 사는 길은 어디론가 물러나든가 현실을 도피하는 길이 아니라 힘들더라도 믿음으로써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길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쏘자! 쏘자! 기도의 화살을 쏘자!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삼층천을 향해 기도의 화살을 쏘자.
화살 하나하나마다 우리의 마음의 편지를 매달아 주님의 보좌 앞에까지 이르도록 물러서지 말고 온전히 기도의 화살을 쏘자.
거기서 날 위해 고난당하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 마음을 그분 앞에 정직하게 쏟아놓자.
그리고 마침내 죽은 자와 방불한 내 영혼을 살리시고 내가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부흥의 은혜를 주시도록 희망을 버리지 말자. 그렇게 되도록 기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치자.
여기서 인제 남의 끊는 거야. 창을 던진 거야. 그러니까 그래 문제는 뭐겠어? 본인이 그렇게 기도를 안 해. 그러면 거기서 피를 쏟는 심정으로 기도 못하는 불쌍한 성도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양심이 안 생기는 양심. 양심이 그걸 허락을 안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제 기도 시간 2시간 이상 하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함정이 뭔지 알아요? 그게 모든 좋은 결심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어요. 2시간 정해 놓으면. 그다음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약속했으니까 2시간은 해. 그런데 뭐해? 1시간 이상이 잡념 속에서 보내는 거예요. 기도하려고 엎드렸는데 그러다가 졸은 적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마귀는 형식만 남겨놓고 내용은 빼가는 거야. 그러니까 매사 무엇을 하든지 간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해야 되는 거예요. 그걸 내가 “토혈의 목회”라고 제목을 붙인 거야. 그게 포르마 비벤디가 되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돼? 도켄디가 꼬삐야 하게 된다. 이거야. 이제 괜찮아. 이제 시간이 있어. 일주일 있으니까 딱 여기까지가 한 주석이에요. 여기가. 그러니까 좋잖아. 그러니까 빙빙 돌지도 않았어. 이 안에서 다시 대지를 또 몇 개를 나눌까? 그런 거 하지 마. 그냥 1개야. 1통. 1통으로 그냥 딱 짜는 거야. 그래서 영력이 없다. 그다음에 그래서 너희들은 마귀에게 지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되겠냐 구해봤냐 하나님 앞에 성령을 달라고 구해봤냐 얼마나 더 간절히 매달려야 되겠냐. 그렇게 붙들고 딱 창 한 자루 딱 두 자루도 아니고 한 자루야. 갔다가 성도들이 가슴팍에다가 던져서 그게 갈비뼈를 깨고 등 바깥으로 튀어져 나와야 된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그게 현실 현실 현실일 때 말해준 것 같아요.

B. 회개에 합당한 열매

둘째로, 성령을 받자. 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바울을 흉내 내면서 짐짓 예수를 의지하여 악귀에게 명령하던 어떠한 유대인들과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봉변을 당했다.
왜냐하면, 악귀들이 그들의 말에 굴복하는 대신 그들에게 뛰어올라 그들을 눌러 이겨버렸기 때문이다(행 19:16).
이것은 에베소 사람들이 볼 때 정말로 큰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영적 세계가 있으며 거기서는 악귀들도 바울과 예수께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사도행전 19:17–19 NKRV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여기서 “이 일”이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고 거기서 예수와 바울이 악귀를 이긴 그 사건을 가리킨다. 그들이 그 일을 알았을 때 “두려움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은 위로 들어 올려졌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와서 “자복하며 행한 일을 알렸다”. 그리고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 불살랐더니, 그 책값을 계산한 즉 은 오만이나 되었다.
여기서 “은 오만”이라는 것은 “은화 5만 개”라는 뜻인데 당시 에베소 지역의 은화의 단위는 그리스 문화권의 “드라크마”였다. 이 화폐의 단위는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을 의미한다. 로마 문화권에서는 이 단위를 “데나리온”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이제 당시 배경을 알아야 되는데 그 당시에는 3개국의 통화가 자유롭게 통용되고 있었어요. 첫째는 어디예요? 헬라돈. 두 번째는 로마돈. 헬라돈은 드라크마, 로마돈은 데나리온 또 히브리돈도 통영 부스 히브리돈은 뭐예요? 세겔. 세겔이 통용됐죠. 통용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성전에다가 돈을 바칠 때에는 드라크마나 데나리오는 사용을 안 했고 반드시 세겔로만 바쳤어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 드라크마하고 데나리은 명목 가치가 실질 가치보다 더 높은 ‘악화’였어요. 악화. 그런데 세겔은 표시된 금액과 그다음에 그 금속의 가치가 일치하는 ‘양화’였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금액과 실질이 일치하지 않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 이렇게 본 거예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어요.
이것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150불 곱하기 5만 일, 약 750만 불이고 이를 한화로 계산하면 약 108억 7400만 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이 엄청난 금액에 해당하는 마술하는 책들이 불사라졌으니 아마도 에베소에 있는 그런 책들 대부분이 불태워졌던 것이다.
그들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를 참으로 믿게 되자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자산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태워 버렸으니 이는 그 마술하는 사상이 얼마나 악하고 헛된 것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의 이 사건을 읽을 때마다 중세 말기의 한 사건이 떠오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지롤라모 사보라놀라(1452-1498)의 소위 “허영의 화영식”이다. 15세기 후반 프로렌스(현,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통치 아래 예술과 인문학이 꽃피던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도미니코회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의 눈에 비친 프로렌스는 교만과 사치, 성적 타락, 그리고 당시 보르기아인 알렉산더 6세에 부패한 교황권이 지배하고 있는 중세판 소돔과 고모라였다.
특히 당시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스페인 출신 귀족과 함께 살았는데 사제로서 독신 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하게 정부들을 두고 여러 명의 자식들을 낳았으며 이들을 교회의 권력을 이용해 왕족들처럼 키웠다.
그의 정부들 중에는 조반나 카테나이(1442-1518)가 있었는데, 그는 교황에게서 체사라, 후안, 루크레치아, 조프레 등 4명의 자녀를 낳았다.
또한 알렉산더 6세가 교황이 된 후 가장 큰 총애를 받았던 정부로 줄리아 파르네제(1474-1524)가 있었다.
그녀는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미녀였는데 당시 결혼할 교황보다 43세 연하의 정부였다.
1494년 메디치 가문이 축출되고 프랑스군이 침공하는 혼란 속에서 사보나롤나는 선포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리고 그는 프로렌스의 실질적 통치자로 부상했다.
그는 이 타락한 도시를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신권 정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사보나롤라는 약간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진 수도사이긴 하였지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염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명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이라고 불리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서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 사역의 전성기는 1491~1498년 사이였다.
사보나롤라는 1491년 사순절 기간에 처음으로 대성당의 강단에 섰다. 이전까지는 자신이 있었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설교했으나, 인파가 너무 몰려들자. 두오모(The great) 대성당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두오모 대성당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시에서 제일 큰 성당을 두오모 성당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어로 The Great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상하게 도시마다 두오모 성당 얘기가 계속 나와요. 그런 이유 때문에
사보나롤라가 1년 내내 설교한 것은 아니지만, 사순절 40일 동안 그리고 대림절 4주 동안에는 매일 설교단에 올랐다. 그리고 절기가 아닌 때는 주로 주일과 주일 주요 축일에 설교를 하였다.
그는 거의 매일 설교하면서 성경을 권별 강해의 설교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성경 본문을 읽고 해설한 후 거기서 발견한 진리를 당시 프로렌스의 상황에 적용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 적용의 대가였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엄청난 설교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거야.
시민들은 이 연속 설교를 듣기 위해 매일 아침 대성당으로 모여들었으니 성당에 입장하려는 시민들로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사순절이나 대림절 같은 때는 매일 1만 명에서 1만 5천 명 이상의 청중 앞에서 2~3시간 동안 격정적으로 외치며 절규했는데 이는 엄청난 체력의 소모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매일 이어지는 금식과 열정적인 설교 때문에 사보나롤라의 외모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고 청중들은 그의 바짝 마른 얼굴과 함께 뚜렷하고 형형한 눈빛에서 더욱 강력한 영적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
사보나롤라는 당시 부패한 교황을 향해서 말했다. “당신은 교황도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자도 아니다. 사탄의 노예다”.
거듭되는 교황과 교황청에 대한 비난 때문에 보르기아인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사보나롤라에게 친서를 가진 특사단을 보냈다.
그리고 그 친서, 곧 특별 서신을 통해 사보나롤라가 자신을 비난하지 않도록 당부하며 추기경직을 제안하였다.
사보나롤라는 교황이 보낸 특사 여행에게 그 제안에 대한 대답을 다음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통해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튿날 설교에서 사보나롤라는 자기의 진심을 특사단과 프로렌스의 청중들 앞에서 선언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맥락이 어떻게 됐냐면 당시 죄수를 죽일 때 하얀 하얀 자루를 씌워서 하얀 자루를 씌웠단 말이야. 그런데 그거를 목을 치면 어떻게 되게 막 동맥이 팍 터져 나오면서 붉은 수건이 돼버리잖아. 붉은 두건이 되어버리잖아. 추기경의 모자가 빨간 모자잖아. 그 빨간 모자 말고 순두에 필요 없는 그 빨간 모자를 당연히 쓰고 싶다.
사보나롤라의 설교 사역의 정점은 메디치 가문이 축출된 1494년부터 1496년 사이였다.
그의 설교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시작되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수많은 청중들이 밤중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대성당 앞에서 기다렸고 새벽 3~4시 사이에도 수많은 인파가 장사진을 치고 예배당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당시 두오모 대성당에는 약 1만 명에서 많게는 1만 5천 명까지 입장했는데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찬 예배 장소에 한 명이라도 더 입장시키기 위해 나무로 임시로 만들어진 계단식 좌석을 만들어서 넣어야 할 정도였다.
사보나롤라가 설교하는 시간에는 프로렌스의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법정도 열리지 않았으며 도시의 시민들 전체가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다. 사브나롤라의 설교는 보통 2시간에서 3시간 가량 계속되었는데 미처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한 시민들은 창문틀에 매달려서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들으며 회심을 하였다.
그가 설교하는 예배당에는 거룩한 각성과 부흥으로 말미 암는 커다란 흐느낌과 통곡, 눈물과 떨림으로 가득하였다.
사보나롤라는 강단에서 피를 토하듯 말씀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육체적 수고를 동반했다. 그래서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면 너무나 기진맥진하여 실신하거나 한 번 설교를 한 후에는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몸이 상했다고 한다.
당시 프로렌스는 멸망 직전에 있었는데,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메디치 가문의 몰락이다. 몰락의 가장 큰 이유는 프로렌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위대한 로렌조로 불리던 로렌조 데 메디치(1449-1492)의 죽음이었다.
로렌조는 역사적으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을 후원하여 피렌체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든 뛰어난 인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역설을 마주하게 되는데 나중에 자신과 메디치 가문을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게 될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프로렌스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 바로 로렌조였다.
그는 당시 사회적으로 촉망받던 사보나롤라의 명성을 듣고 당시 당대 유명한 철학자이자 지식인이었던 피코 밀란돌라(1463-1494)의 추천을 받아 프로렌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사람은 굉장히 유명하다. 르네상스 역사를 말하면서 이 사람을 말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 이 사람이 쓴 책이 있는데, 『인간 존엄성에 관하여』라는 라틴어로 된 그 책이에요. 그런데 아주 대단한 문장가입니다. 결혼도 안 했어요. 귀족인데 그리고 23살의 나이에 900개의 인류 인생의 문제에 대한 900개의 질문을 제시하고 전 세계의 철학자들을 초청해서 자기와 토론을 벌이자고 해요. 자기가 다 뱃싹하고 그때 비행기 없으니까 뱃싹하고 여행비하고 강세로까지 다 줘서 불러서 그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둘째로는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침공이다. 1494년 그가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로렌조를 이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1471-1503)는 무능한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이탈리아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되었으나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민심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침공해 오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프로렌스의 핵심적 요새를 넘겨주었다.
결국 피오레 메디치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1503년 프랑스군과 전투하다가 후퇴하던 중 가릴리아노 강에서 배가 뒤집혀 익사했다.
이에 무주공산이 된 프로렌스는 잠시 사보나롤라가 다스리다가 시민혁명으로써 공화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사보나롤라의 설교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494년 9월 21일일 것이다. 그는 1492년부터 창세기를 본문으로 노아의 방주 시리즈를 설교하고 있었다.
그는 노아의 방주, 각 부분인 나무, 못 등을 그리스도인의 미덕에 비유하며 수년에 걸쳐서 이 시대를 위한 방주를 지어야 한다고 외쳐왔다.
그리고 마침내 1494년 9월 21일 방주가 완성되고 홍수가 시작되는 장면을 설교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날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전설이 된 것은 기가 막힌 타이밍 때문이었다. 그의 홍수 설교와 프로렌스가 받은 침공의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날 사보나롤라는 강단에 올라가서 창세기 6장 17절 의 말씀을 외쳤다. “보라네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바로 그날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끄는 대군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국경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프로렌스에 전해졌다.
사보나롤라가 3년 전부터 예언했던 북쪽에서 오는 하나님의 칼, 곧 심판이 실제로 닥친 것이다.
사보나롤라가 “보라 홍수가 밀려온다” 라고 사자처럼 표현하자. 대성당 안에 있던 수많은 청중들은 마치 실제로 홍수가 닥친 것과 같은 거룩한 공포에 휩싸였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바로 사보나롤라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당일에 예배당의 풍경이나 정확한 설교 내용 그리고 청중들의 반응은 역사적 기록에 의한 생생한 사실로써 증명됐다. 그런 자료들 중 두 가지만 제시해 보겠다.
루카란 두치(1436-1516)는 프로렌스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약 70년 동안 도시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 『프로렌스의 일기』에서 1494년 9월 21일 예배당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성당 안에는 공포로 가득 찼으며 모든 청중들이 울부짖으며 자비를 구했다.”
또 한 사람은 로랜드 디 필리퍼 비올리(1465-1524)의 속기록이다. 그는 원래 전문 교육을 받은 공증인이자 속기사였다.
당일에 있었던 사보나롤라의 설교와 이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 등을 “타키그라피”라는 고유의 속기법을 사용하여 사보나롤라의 숨소리와 청중들의 탄식과 설교 중 낭독된 라틴어 구절들까지 실시간으로 기록하였다.
그는 사보나롤라를 끝까지 존경했던 충실한 신앙의 제자로서 사보나롤라 사후에도 그의 설교의 기록들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데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
이에 대하여 조반니 프란체스코 미란돌라는 자신의 책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생애』당일 설교를 직접 들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조반니 미란돌라는 아까 얘기 나오는 피코 밀란돌라의 조카예요.
"사보나롤라가 심판을 설교하였을 때 청중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으며 성당 벽이 흔들릴 것 같은 압도적인 공포를 느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프로렌스의 ‘허영의 장례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이탈리아의 카니발, 곧 사육제 기간은 사순절을 앞두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음란하고 무질서한 축제를 즐기는 시기였다.
1497년 여전히 프로렌스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사보나롤라는 그 타락한 축제를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회개의 예식으로 바꿀 것을 결심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순수한 아이들이 세상을 정화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소년들을 모집하여 일종의 종교 경찰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소년들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사치스럽고 음란한 허영물들을 내놓으십시오.” 라고 요구했다.
시민들은 보석과 화장품, 경건을 해친다고 여겨지는 도서들과 오락기구, 악기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책들과 고대 신화를 다룬 예술품들을 내놓았고 그것들은 시뇨리아 광장에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나무 재단으로 쌓아 올려졌다.
그 높이가 18~20m에 달하였으며, 8단으로 된 거대한 탑 모양으로 세워졌다. 맨 아래층에는 화장품과 가발, 중간층에는 카드와 주사위가, 위층에는 세속적인 책과 예술품이 등이 쌓였다.
그리고 제단의 맨 꼭대기의 허영과 사치를 상징하는 괴물 모습의 인형이 세워졌다.
오후가 되자 사보나롤라가 나타났다. 커다란 나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제단. 네 귀퉁이에 불이 붙여졌다.
불길이 치솟자 군중들은 일제히 찬송가를 부르고 종을 울리며 환호하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에베소에 있었던 마술 하는 책의 소각식을 생각나게 한다(행 19:19).
이때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의 거장이었던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가 자신의 그림 중 누드화나 세속적인 주제의 작품들을 그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보티첼리는 죽을 때까지 사부놀라에게 받은 신앙의 가마를 간직한 채 쓸 쓸쓸히 자신의 생을 마감한다.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 결정적인 원인은 “불의 시험” 사건이다. 그를 시기 하던 반대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당신의 예언이 진짜라면 그대가 불길 속을 걸어가도 타지 않을 것임을증명하라”고 도전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이 기적을 보려고 시뇨리아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양측의 지루한 논쟁과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인해 시험은 무산되었다.
기색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사보나롤라가 겁을 먹고 속임수를 썼다며 분노하였고 프로렌스의 민심은 하루 아침에 그에게로부터 싸늘하게 돌아섰다.
이튿날 산마르크 수도원에서 체포된 사보나롤라는 1498년 5월 23일, 그의 사랑하는 제자 도메니코와 실베스트로와 함께 화영장으로 끌려갔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작년에 허영의 장례식을 거행했던 시뇨리아 광장이었다.
처형 직전에 주교는 사보나롤라의 수도복을 벗기며 공식적으로 성직을 박탈하였다.
이때 주교는 선언했다. “나는 너를 지상의 전투적 교회와 천상의 승리적 교회로부터 분리하노라.”
그러자 사보나롤라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반짝이는 두 눈으로 즉시 주교의 선언을 교정해 주었다.
“당신이 지상의 전투적 교회로부터 나를 분리하는 것은 맞지만, 천상의 승리적 교회로부터는 나를 분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권한에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형대를 향하는 사보나룰라가 받은 고문을 기억하면서 한 관리가 물었다. “이런 고통을 당신은 어떻게 견딜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보나롤라는 대답했다.
“주께서 나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으셨는데, 내가 그분을 위해 이 정도의 작은 고통을 참지 못하겠습니까?”
군중들 중 많은 사람이 여전히 그가 성자라고 믿었고 그래서 그의 유골이나 성물을 가져가려고 했다.
이를 두려워한 피렌체 정부는 그의 유해를 완전히 불태운 뒤 그 재를 모두 프로렌스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아르노 강에 모두 뿌려버렸다.
사보나롤라는 마르틴 루터보다 약 30년 앞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서 종교 개혁자들에게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보나롤라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시편 51편과 31편에 대한 주해를 썼는데 거기서 루터는 사보나롤라가 자신과 동일하게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붙들었다는 확신을 얻었다.
따라서 그는 이단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복음의 증거자로서 죽었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그의 주해를 엮어 책으로 출판해 주었다. 그리고 그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한 그가 쓴 이 책, 작은 책에서 그가 자신의 공로나 선행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간구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서만 의롭다함을 얻기 원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그를 불태우고 오명을 씌워 없애 버리려 했을지라도 보십시오. 그는 다시 살아나서 우리와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보나롤라의 예언적 열광주의는 경계했지만, 칼뱅 역시 그를 하나님의 탁월한 종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장 칼뱅은 페라라의 공작부인 레타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보나롤라를 높이 평가했다.
“나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견고히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하나님의 탁월한 종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장 칼뱅은 자신의 유명한 책 『기독교 강요』 최종판 제4권 9장 14절에서 말한다.
“나는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와 같은 어떠한 경건한 인물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루터도 가고 칼뱅도 가고 사보나롤라도 갔다. 그리고 그 타락했던 도시 프로렌스는 현대의 도시로 되돌아왔다. 이 도시 곳곳에 솟은 크고 작은 십자가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곳은 성경과 세상이라는 도시다. 지금도 이 도시는 여전히 또 다른 마술사와 마술하는 사상과 길 잃고 연약한 양무리들을 노락질하려는 악한 영들이 판을 치고 있다.
누가 그 불쌍한 양무리들을 위해 울어줄 것이며 예수처럼 바울처럼 자기의 목숨을 바쳐 구원해 줄 것인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그들을 다시 십자가 아래서 떨어지는 그리스도의 핏줄기를 맞으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설교는 작은 물결처럼 흔들리지만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바위처럼 굳건하다. 그들은 마치 절대로 하나님 앞에 깨어지지 않도록 태어난 사람들처럼 오랜 세월 그렇게 버티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묻는다. 나의 목회는 저들의 영혼들을 변화시키고 있나?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초라한 영력에 가슴이 조여들 뿐이다.
도대체 언제인가? 내가 저들의 영혼이 불쌍해서 심히 통곡하고 교인들은 그러한 내가 가엾어서 흐느껴준 것이 언제였는가?
언제쯤이면 우리가 그토록 오래도록 꿈꿔왔던 부흥의 날이 도래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오늘의 이 수치스러운 탄식과 후회를 부흥의 불길로 날려 보내고 그 부흥에 불타오르는 빛과 열에 취하여 모든 성도들과 내가 손에 손에 손을 맞잡고 환희의 찬가를 부르는 날이 언제 올 것인가?
기도하자. 다시 강조하노니 우리 모두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자. 목회의 본질에 자신을 바치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바싹 메말랐던 계곡과 같은 우리 교회의 영적 골짜기에 푸른 강물이 넘쳐 흐르게 하실 그날을 기대하며...
00:02
헬이죠. 헬 헬레신, 토이스, 카토이, 쿠싱, 텐, 에페손, 카이, 에페페센, 포부스 판타스 아우투스 카이 에메갈륜 투 에메갈륜에투 토오노마투 큐리우 예수 좀 길죠? 그런데 그런데 투토 이러이러한 사실들이 알려졌다. 에게네토 그노신 알려졌다. make known 이런 뜻이죠.
00:47
파신 모든 유다이오스 유다 사람과 또 그리고 헬라 사람들 그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은 예배소에 거주하는 유다인들과 펠라인들 모두에게 이 일이 알려졌다.
01:14
카이 FXN 그리고 그들이 믿었다 그리고 카이 에페페센 포버스 아무튼 에페페센까지 끊고 가히 에페페센 포버스 두려움이 에페페센 떨어졌다. 어디에? 에피판타사우토우스 그 모든 사람들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에메갈륨, 네토 이거는 들어 올려지다라고도 번역이 되고 굉장히 크게 되다.
02:09
Magnify라고도 이렇게 번역이 돼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들어 올려졌다. 혹은 크게 되었다. 커지게 되었다. 위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뭐냐 하면 토, 오너마, 투 큐리오 예수 주 예수의 이름이 들어 올려졌다. 재미있잖아요. 두려움은 그 두려움이 한 두려움이 그들 모두 위에 떨어졌다.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은 들어 올려졌다.
02:56
그 다음에 18절 폴로이테톤, 테피스튜코톤, 엘콘토 폴로이 많은 사람 그리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에 많은 사람들 그런데 그게 누구냐 하면 에피 에피 에피 에피 에피 에피스튜드 콘톤 코톤 믿음 많은 사람들이 엘 콘토 왔다.
03:47
그리고 X 엑소무로구매노이 그러니까 이제 호물로우기고이 호물로우구에서 온 건데 이게 뭐냐? 고백하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고 그리고 아낭겔론테스 이렇게 새롭게 말을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이야기해요. 그런 이야기들, 이야기들을 했다. 모레 뭐에 대해서? 타프락시스 아웃텀, 그들이 자신들이 행한 바에 대해서 이러저러 이야기를 하였다. 하였다. 그러니까 아마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신앙을 고백하고 동시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다고 사람들 앞에 고백을 한 것 같아요.
05:11
거기까지만 뭔지 알죠? 이칸노이 상당수의 사람들이 누구 중에서 페리에르가 이건 뭐냐 하면은 에르가라는 말이 있고 페리하고 두 개가 합쳐진 거예요. 그래서 이건 원래 이상한 짓을 할 때 이상한 짓이라는 뜻이에요. 원래. 그런데 그게 여기서는 이게 마술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거예요. 그래서 프락산톤 분사죠. 프락스가 프락시스가 실천이니까. 마술을 마술들을 행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순행, 순회냉칸테스 가지고 왔다. 뭐를?
06:09
타스, 비블루스 그 책들을 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그냥 우리말 성경에서 마술하는 책이라고 번역을 했잖아요. 그렇죠? 그 비슷한 맥락일 것 같아요.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여기서 마술하는 말은 안 나와요. 그런데 이제 책을 그 사람들이 책을 가져왔으니까 마술하는 책일 거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카테카 카테 카이온 불태워버렸다. 에노피온, 판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렸다.
06:47
그리고 수냅, 수냅, 수냅, 수세피산 타스티마스 아우톤 그것의 값을 그것의 값을 수네페시산 계산했더니, 해론 판명되었다. 뭐로 구리우 뮤리아다스 판테는 오만으로 판정이 되었다. 뭐가 불태운 책의 값이 오만이었다. 얘기예요.
07:46
포토스 이와 같이 해서 크라투스큐리오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흥황하고 힘을 얻었더라. 이렇게 됐어요. 특별히 문제를 일으킬 만한 그런 거는 없어요. 이거를 가지고 마지막 부흥에 관한 설교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고 정리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크게 혼선을 좀 피하기 위해서 에베소에 임한 부흥 이렇게 제목을 잡고 그다음에 에베소의 부흥이 어떻게 임했나 한번 설계를 작성해 보세요. 이만큼은 지금부터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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