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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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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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쪽 그것이 바로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김경위의 등불 비유입니다. 이 두 가지는 빛의 두 가지 성격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길을 끄는 성질과 또한 그 빛이 비추어 다른 산물들을 보게 만드는 효과가 바로 그것들입니다. 예수님의 두 비유, 동네와 등불, 예수, 그리스 두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죠. 그것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의미하신 것이었습니다. 에스크리스도께서는 이 빛의 비유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시기 위하여 다시 보충적인 비유를 두 가지 언급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의 비유와 동경 위에 둔 등골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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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눈에 눈을 띄게 되는 빛의 성질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산 위에 있는 동네의 비율을 말씀하셨다면 어두운 강, 등경 위에 둔 등불의 비율을 말씀하신 것은 빛의 다른 사물들을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바르게 보기 하는 빛의 성질을 말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 위에 있는 동네의 비율을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여기에서 동네라고 되어 있는 히라바 단어 폴리스는 원래 도시 성장을 가리고 네, 높은 곳에 위치한 동네 고대에는 높은 지대를 택해 돌이나 벽돌로 성을 쌓고 왜적의 친임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곳에 성을 세운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이 낮은 지대에 위치한다면, 적이 쉽게 성벽을 넘어오거나 공승추 등 무기를 사용해 쉽게 성벽을 공극하여 허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높고 가파른 곳에 성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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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로, 앞서 세워진 도시 위에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허허 법판에 삶의 터전을 건설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과거에는 도시가 있던 지역에 다시 새로운 도시가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새 정복자가 나타난 기존의 문명을 허물고 다시 새로운 문명을 건설했는데 그래서 지금도 로마 문명의 터를 파보면 밑에서 시루떡 나오듯이 그리스 문명이 나오고 더 파들어 가면 그 전에 문명이 나오곤 합니다. 이게 진짜 가보면 신기한 게 뭐냐면 도시 옛날에도 도시가 인프라가 있어야 되잖아. 가장 중요한 인프라가 뭐야? 물이 물이 흘러야 된다고 한강처럼 이렇게 도시 한 한복판을 도시 한복판을 흐르거나 옆으로 흐르거나 어쨌든지 간에 물이 있어야 되는 거잖아. 그리고 조건이 다 까다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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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적의 공격이나 이런 것들을 다 계산하니까 우리가 땅은 넓어도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지역은 생각에는 그러니까 땅이 많아도 교회 할 때는 얼마 안 되는 거와 마찬가지란 말이야. 그런데 가보면은 이제 그 중세시대 때 터가 나와 이제 중세시대 때 유적이 나와. 이틀 캐드로 보면은 로마 시대 게 나와요. 로마 시대 게 나오는데 또 파 들어가면은 그다음에 그리스 시대 게 나오는 거예요. 더 파 들어가면 니켈 문명이나 그 이전의 문명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그게 이렇게 쫙 이렇게 깔아보면 시도 똑같이 똑같이 그래서 그때는 건축 자재 자체가 지금처럼 콘크리트나 이런 것들이 아니잖아. 흙으로 많이 했잖아. 특히 중동에선 흙으로 많이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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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출애굽기에 보면은 왜 성을 건설하는데 진흙 벽돌로 사용하잖아. 그런 것들은 두들기면 부서지는 거야. 그러니까 부서진 거 다 이렇게 부서트려 놓고 그 위에다가 다시 또 도시를 짓고 도시를 짓고 하면서 점점 높아져 가는 거야. 그거를 히브리어로 텔이라 그래. 텔. 그래서 히브리어 지명에 보면 테라미브 텔아마르나 무슨 테일테일 들어가는 게 맞는데 다 그런 지형을 뜻하는 거예요. 친구였기를 예 그다음에 특별히 파리스탄 지역을 포함한 중동 지방의 경우 흙 벽돌로 건물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흙 구조물이 헐리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일이 반복되며 집안 자체가 높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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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높아진 지대를 히브리어로 텔이라고 부르는데 테라 아이브, 테라비브 테렐아마르나 등의 지명이 모두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도시가 반복적으로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며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인공 언덕, 지대인 텔이 형성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산 위의 동네를 언급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보임 산 위의 높은 곳에 있는 동네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특별히 그 성을 찾거나 발견하라고 애쓰지 않아도 늘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 성의 도시가 모든 사람의 눈에 드러나게 된다. 그들이 보고자 애쓰거나 또 그 동네가 자신을 나타내고자 힘쓰지 않아도 결국 그렇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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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나를 따르면 모든 사람의 눈에 그렇게 띄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이렇게 하신 말씀이 잘 살아야 된다. 이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눈에 띄는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를 이 안에서 이중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라고 그거를 주석가들은 이런 사실들을 간과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하신 정확하게 그걸 보여주는 거야.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건 나중 문제고 너희는 어쨌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는 존재들이다. 그것을 그게 그 의미가 너희는 세상에 빛이오라고 하는 그 속에 포함돼 있다. 이게 계속 얘기해 보시고요. 언젠가 오늘 이 신문에 이것은 범법 행위를 저지른 인물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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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신문 기사를 쓸 때에는 이름, 석, 자, 앞에 괄호를 표시하고 나이와 직업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범인의 경우에는 생소하게도 장로라는 교회식품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보통은 건축과 회사원, 의사, 산업, 군용 등 직업을 기록하는데 왜 그 사람에 대해선 장로라고 기록했을까?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글을 쓴 기자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이기에 더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필요성을 중심으로 느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라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 눈에 특별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리스 교실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존재에 있어서부터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고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은 세상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장수로 구분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두 왕국은 누구를 주인 삼고 누구를 통치해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가에 의해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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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며 인간을 죽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가 세상나라입니다. 우리도 한때는 세상 나라에 속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까? 이 일은 우리에게 빛은 진리의 빛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복음을 통하여 빛을 더 쓰게 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의 지성을 압도하는 복음의 빛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을 아는 새로운 지혜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철학자들이 찾던 지혜였으나 세상의 학문으로서 오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신비 안에서 게시된 것입니다. 그 빛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사람이 얼마나 고귀한 형상을 가진 존재인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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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주인임을 깨닫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분에 있어서 진노를 받을 불순종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외에도 내적 변화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포함합니다. 바로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마음의 성향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도록 변화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것들을 아는 영적 감각을 새로이 갖게 되는 것이며 죄의 속박으로 노예 상태에 있던 의지가 은혜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내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돌감나무가 참감나무의 진액을 받아 새 나무가 되는 변화이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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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가 분명하다면 원리적인 면에서 그는 이 어두운 세상에 필연적으로 빛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성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은 그 성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을 보며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속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들은 두려워하는데 이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은 무서워 벌벌 떠는데 이 사람들은 평안합니다.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일에 이 사람들은 분노하며 정의롭게 일어섭니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과 이 사람들은 다른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기 전까지 아무도 그가 그리스도인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박쥐 같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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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가면 세상 사람처럼 살고 교회에 오면 교회 다니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의 현실적 이익을 따라 손바닥 뒤집듯 소속을 바꾸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세상에 가도 편하지 않고 교회에 가도 편하지 않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라가다 보면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구별도 없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겼다고 믿는 사람들과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넉넉하게 살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은 이웃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존재로 보는데 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다 죽는 것이 꿈이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 죽는 것이 꿈인데 이 두 사람의 삶의 양식이 같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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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앙의 원리를 따라서 핵심적인 진리의 가르침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산 위에 독니처럼 숨겨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참으로 교회되고 세상이 고유한 의미에서 세상이 된다면 둘은 현저하게 구별될 것입니다. 교회는 신학적인 의미에서도 윤리적인 의미에서도 구별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회. 오늘날 우리 우리는 교회의 문턱을 낮춰 사람들이 아무 저항감 없이 교회에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것이 선교적 적응이요. 정황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적으로도 잘못된 생각이고 심리적으로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첫째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세상과 동일하게 됨으로써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 세상에 구현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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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닮아가려는 교회의 조치는 언제나 세상의 정신을 교회에 유입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시에 있는 세상의 정신을 바꾸고 구체적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이 고린도시를 바꾸기보다는 오히려 고린도시의 정신이 교회를 변화시켰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물들였던 파당주의, 물질주의, 성적, 부도덕 등이 바로 그러한 결과입니다. 둘째로, 심리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교회는 세상과 다를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자기들과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결심하였습니다. 만약 그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나와 꼭 같은 인간이다 라고 생각했다면, 결코 교회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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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나와 무엇이 달라도 다를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도 교회가 사람에게 세상을 달지 않는 모임이 돼야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틀렸습니다. 세상이 어그러지고 지면 어그러질수록 교회는 더욱 꿋꿋하고 바르게 서야 합니다. 특히 빗나간 선교 마인드 어느 교회 청년들을 섬기던 한 자매에게서 직접 들은 간증입니다. 청년부에서 친구 초청 잔치를 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자신을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번 초청자에 예수안민 있는 청년들이 많이 오는데 순서 중 하나를 내게 맡겨줄 것이니 그들도 함께 부르며 좋아할 유행가 중 가요. 한 곡 불러줄 수 있겠니? 그 자매는 교회 전도행사에서 유행가를 부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서 가요. 대신 찬양을 부르겠노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교역자가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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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그렇게 생각이 없니? 그날 초청 행사에 오는 사람들은 다 신앙 없는 청년들인데 자기들이 세상에서 듣던 노래를 교회에서도 듣는다면 교회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지 않겠니? 결국 그 자매는 아무 결정을 못 내리고 나왔는데 그날부터 괴로움이 몰려왔습니다. 교역자 의견대로 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 뜻을 거스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교육자는 모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가 그 다음 주간 그 신학교 개강 집회 강사로 갔습니다. 당시 3일 동안 집회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교역자는 그렇게 한 주간 개강 수련회를 마치고 주일에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매를 조용히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개강 수련회가 있었는데,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 지난주에 내가 내게 친구 초청 집회에서 유행가를 부르라고 했던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내 뜻을 따르지 않는 너의 판단이 맞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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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빗나간 선교 방식에 대하여 후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정신이 무엇인지 공부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 세상과 같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지불식한 이 세상을 닮아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꼭 같이 세속화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견해이지만 설령 그것이 맞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등을 잔뜩 달아놓아도 그것이 불 꺼진 등이라면 등의 개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세상의 판단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의식하며 진리의 빛속에서 깨달은 신념을 따라 그 한 길로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따라 곧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처음에는 조롱과 비난이 쏟아질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세상도 저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의 모습이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등경 위에 든 등불 이어서 예수님은 등경 위에 든 등불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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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의미를 더욱 상세히 가르쳐주기 위한 설명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터께서는 말 아래 등불을 드는 어리석은 일들을 인간이 쉽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줌으로써 이게 무서운 얘기겠는데 보금자가 설교를 하는데 공부를 말하되 말하래 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뜨거워서 난리를 치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목사귀한 거였어요. 그래서 등불은 말 아래 두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은 암에 납니다. 계속 미루세요. 등불을 등교 위에 둔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는데 이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를 말 아래 두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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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이런 실수담을 고백하셨습니다. 먹회사육 초년배였던 시절에 이 구절을 설계하면서 본문에 나오는 말을 동물말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답니다. 말의 배 밑에 등불을 켜 보십시오. 그 말이 뜨거워서 길길이 날듯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등불을 켜서 말 배알에 켜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교를 듣던 많은 성도들이 뜨겁게 아멘했는데 이분이 설교를 마치고 가는 길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즉흥적 해석이 맞는 것인지 꺼림칙하더랍니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여 주석을 찾아보았더니, 이 말이 그 말이 아니랍니다. 동물에 나오는 말이라는 단어는 로마시대의 곡식의 부피를 재기 위해 쓰던 용기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곡식을 거래할 때 되나 말을 사용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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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에도 곡식의 부피를 잴 때 그런 도구를 사용했는데 로마시대의 대말은 모디우스로서 8.75L의 부피가 담겼다고 하는데 오늘날 영매에서 사용하는 단위인 1팩과 흡사한 용량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말만 한 크기보다는 약간 작아도 꽤 큰 용기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등불을 말 안에 두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래라는 표현이 그 용기 속에다 넣는다는 것인지 그 옆에 내려둔다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움푹 파인 말 속에 등불을 둔다는 의미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등불에서 비치는 빛이 옆으로는 뻗어나가지 못하고 위로만 비춰 천장의 동그란 빛만 나타날 것입니다. 방안 좌우 둘레의 어둠은 사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등불을 말 옆에 내려두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한쪽 면에 매우 커다란 말 그림자를 드리워 방 안을 어둡게 할 것입니다. 이 등격류의 두 군인 당시의 사람들은 누구나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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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존경의 의미와 등불과 관련된 당시 이스라엘의 생활 풍습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중경과 이스라엘의 가옥 중경이라고 번역된 단어 위크니아는 히브리서 9장에서는 등잔대로 또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산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의 일곱 근초대를 보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본문에 나오는 등경 위크니아는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휴대용 등불 위크노스와는 다른 것으로서 한 장소에 고정해 두고 사용하는 등불을 올려놓는 도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등불이 남성형이 되면은 들고 다니는 등불이고 등불 등불을 어떻게 들고 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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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사극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종이나 이런 걸로 된 그슬에다가 이렇게 들고 그다음에 이렇게 비치면서 다니잖아. 그게 인제 시편에도 나오는데 여호의 말씀, 나의 길에 빛이요. 등불입니다. 할 때 그 등불이란 말 남성형으로 쓰면 리코노스라고 쓰면은 그렇게 휴대용 등불이 되고 리크니아라는 여성형으로 쓰면 굉장히 고정된 들불이 되는 거야. 그런데 재밌잖아. 재밌잖아. 그러니까 뭐야? 이 사람들 생각에 여자는 집 지키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요즘도 자기 부인을 얘기할 때 우리 집사람 집사람 그러잖아. 우리 아내는 그 말을 되게 싫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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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또 우리말에 그러잖아요. 자네의 댁은 어디 갔나? 그 댁도 집이라는 뜻이야. 로마 시대 때 이 사람들의 생각은 뭐냐면 여자는 항상 언제든지 남편이 가면은 항상 집에 있는 사람이에요. 길에 집사람이라는 겁니다. 문화가 달라도 다 똑같잖아. 그런데 그건 고정으로 노는 거를 여성형으로 쓴 거야. 재밌지? 동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평민들의 가옥 구조를 염두에 두는 것이 해석에 도움이 됩니다. 아주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좀 달랐겠지만, 일반 서민의 가옥 구조는 대개 4개의 거주 공간으로 이루어진 4칸 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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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면 허니 뒤 앞마당이 있고 세 면이 방으로 둘러싸인 구조였습니다. 출입문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는데, 벽이 있는 붙인 방은 주로 창고나 부엌으로 사용되었고 이동만을 세워 마당에서 보이도록 열려있는 방은 가축 위로 쓰이거나 바느질, 옷감, 염색, 공부, 수리를 하는 작업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면에 보이는 빈 방은 온 가족이 사용하는 공간으로서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공간이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지방에는 바람 때문에 가옥에는 창을 크게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낮에도 집안은 어두컴컴하였습니다. 해가 져서 온 땅에 어둠이 내리게 되면 그들의 방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캄캄해졌고 등불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가옥 구조가 일반적으로는 디귿자 구조로 되어 있는 거죠. 그래서 마당에서 이렇게 들어가 보면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디귿자 구조로 되어 있는데, 대개 왼쪽이나 오른쪽에 뻥 뚫린 그게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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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가축, 가축이 있고 그다음에 아까 얘기한 것 같은 공구 같은 것들을 거기다 쌓아놓고 살고 그다음에 이제 정면에는 말하자면,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방이 있고 또 이쪽에 방이 있고 그렇게 그런 구조로 되게 되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제 하여튼 그 핵심은 낮에도 어두웠다 이거야. 그래서 그래서 등불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그다음에 당시에 일반적으로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는 방은 진흙을 말린 바닥이었습니다. 손바닥 위에 커다란 거적이나 손을 깔고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잤습니다. 방 안을 밝히기 위하여 사용하는 등불은 대개 올리브 기름을 사용하였는데 접시에 기름을 담고 붉은 무명실을 드리워 불을 붙이는 단순하고 평범한 등장부터 자기나 토기에 기름을 담고 심지를 뚜껑 중합니다. 위로 올라오게 만든 등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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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등불은 제게 그것들을 높이 올려 놓을 수 있도록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등경과 함께 사용하였습니다. 어두운 방을 밝히기 위하여 등불을 켰다면 당연히 그것을 어느 정도 높은 곳에 두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그것을 움푹 파인 커다란 용기인 말속이나 옆에 누워 어둡게 사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사용하던 등불은 식물의 열매에서 기름을 짜서 접시에 따르고 거기에 헝ut으로 만든 심지를 담가 불을 붙이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빛이라고 해봐야 희미한 호롱불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을 켜놓으면 나오는 와트 수가 한 5와트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여가타 가서 생각을 해보면 말도 안 되게 흐린 거죠. 그러나 등경유의 불빛은 오늘날처럼 환한 전깃불이 들어오는 시대에는 보잘것없어 보이겠지만, 해가 지면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던 그 시대에는 한없이 고마운 것이었을 게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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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등잔불의 불꽃은 손톱만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소경처럼 지내야 할 처지에서 구해주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불빛은 누구든지 밤중에 그 방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등경, 위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등경 위에 등불이 갖는 이러한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빛을 비추어 주변을 밝혔고 둘째로,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발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구별되어 드러나는 등경유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빚이 없는 사고 논문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만약 우리가 주위를 구애해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빛이 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겠죠. 세상 사람들의 눈에 여러분의 삶이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에 비치고 있다면 여러분은 말하래 듣을 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25:30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우리가 경계하는 세속적 그리스인이란 죄짓고 아그랭하고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가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세속적인 그리스인이란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나 사실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통치의 질서를 따라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중심이 된 사고 속에서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 사람들을 품는 가슴이 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예수 믿는 사람과 조금도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착각일 뿐입니다. 사실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속에서 구별구별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의 중심성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26:25
세속적인 사고는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따라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세계관이며 가치관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분열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둘을 조화롭게 양립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산적 위기는 교회가 신적 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역시 확립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탈신학적인 목회 상황에서 교회 세습화는 걸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약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청년들을 위한 집회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어느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당 현관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어떻게 운반을 들여놓았는지 모르지만 그의 노비 한가운데 빨간색 신형 승차가 한 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좌우에는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1등도 놓여 있었습니다.
27:21
승용차 앞에는 1등, 그 좌우의 오토바이는 2등, 그 옆에 자전거는 3등이라고 표지판에 붙어 있었습니다. 상품으로 사용하려고 전시한 것이 운명하였습니다. 저를 안내하였던 교역자 중 한 사람이 제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번에 불신자 초청 전도, 행사에서 전도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들입니다. 이 상품들은 모두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이 자발적으로 협찬해 주신 것들입니다. 개인이 친형성 잔들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오토바이 한 대 잔여가 한 대를 기장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들을 위해 상품을 걸기로 한 교회나 생활비를 아껴서 돈을 마련해 놓은 방로나 자동차까지는 못 내놓더라도 오토바이라도 내놓은 집사나 아무도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전두에 열심히 내도록 독려하겠다는 목표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일일 수 없습니다. 목표가 올바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여주기보다는 세상의 정신을 보여준다면 그 일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저는 열린 교회가 방배동에 있었을 때 어느 교회에서 방금 같은 구호가 실린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한 것을 직접 받아 읽었습니다.
28:21
우리 교회에 천 명을 등록시켜 주시는 분께 서울 지역 소재 32평형 아파트를 드리겠습니다. 가서 이거나 이거나 해보지 그래 어찌하든지 기회를 성장시켜보겠다는 목회자의 열의에는 동정이 가지만 그 방법이 너무나 세속적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그 빛으로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을 있는 등불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의 단점은 등불의 빛이입니다.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의 관점은 등불에 빛이 미치는 영향력을 이동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일반적으로 집안에 가족이 모두 모이게 되는 식사는 시간은 밤입니다.
29:16
해가 지면 가로등이 환하게 켜지고 네온사인들이 거리 곳곳을 밝히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밤이라고 해도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 연상되지는 않습니다. 이 전 세계를 여행해 봐도 우리나라처럼 전기를 겁 없이 쓰는 나라는 세상에 없어. 산유국들도 이렇게는 안 해. 뭐냐? 무조건 화나게 해놓는 거야. 그런데 그러니까 사실은 범죄율이 낮아지는 거는 사실이야. 그래서 가로등 불빛의 밝기를 절반으로 줄이면 범죄가 두 배로 늘어요. 밝기가 좋은 건데 너무 심하다. 얘가 너무 심해. 전기를 아껴 써야 되는데 너무 심해. 그 다음에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밤은 달랐습니다.
30:12
해가 지면 한 걸음도 앞으로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이 온 동네를 겪었습니다. 삽입이 되면 사람이 집 안에 들어와도 등불 아래까지 들어오지 않는 한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등경 위의 불빛은 비록 찬란한 빛은 아니지만, 방 안을 두루 비춥니다. 그리하여 그 어둠 속에서 자기가 있는 위치를 알려 줄 뿐 아니라 그 빛으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물들을 분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빛은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을 비춥니다. 이처럼 진리는 자신의 존재 효과를 모든 사물에 비추어 인간에게 하여금 알게 합니다. 빈경 위에 놓인 등불은 집 안 모든 사람을 위하여 비춥니다. 남자나 여자나 어린 어린이나 아이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누립니다. 이것은 우리로하여금 진리의 보편적 효과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었을 때 그 효과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31:11
질소인이 비추는 진리의 빛은 꼭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모든 사람을 비춥니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별과 나이, 연령과 성격, 직업과 피부색에 상관없이 어느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그리스도 인해 빚된 삶을 통해 진리와 마주치게 됨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본성의 빛, 그 이상의 빛,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은 진리만이 아닙니다. 사람을 미쳐야 하는 사람들조차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공통된 진리를 닮은 또 하나의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성의 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시의 형성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영혼 안에 남겨두신 희미한 진리의 빛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간 사회가 공통적인 도덕적 감정 도덕 감각을 가지고 질서를 유지하게 됩니다. 인간의 양심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32:05
신학적으로 일반계시라고 불리는 본성의 빛의 자격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종이 날뛰거나 비이성적인 광기로 도덕을 짓밟지 못하도록 어느 정도 막아줍니다. 흰자의 마음에는 진리의 빛과 본성의 빛이 각각 더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함께 적용하는 인간의 의지의 선택을 정합니다. 예전에 어느 성조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구들하고 모여서 대화를 하다가 생선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경험과 주위들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토대로 생선은 어디가 좋다고 열변을 토했는데 누군가 확신은 어조로 답했답니다.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서해안 어디 어디를 가야 진짜 회다운 회를 먹을 수 있단 말이야. 거기서 한번 먹어보면 여태까지 먹은 생선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될 거야.
32:48
그 말에 모두 의기투합하여 생선회를 먹게 하여 그것은 출발했다는 것, 최고의 생선회를 먹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들은 신명나게 고속도로를 달려 내려갔는데 갑자기 도로가 붐비는 차들로 막히기 잠시 후 갓길로 여러 대의 구급차와 견인차가 질주하였습니다. 바로 앞에서 대형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충돌한 차들이 서로 얽혀 얽혀 찌그러져 있고 여기저기서 불길과 연기가 나고 도로 위에는 흥건한 핏자국과 미처 챙기지 못한 소지품과 신발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때 정적을 깨고 동승한 친구 중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러 어디를 가고 있는 거냐 이제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그날 교통사고 현장에서 이들에게 비춰진 빚은 성경의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유하는 존재로는 구성적 깨달음이 그 고속도로의 사고에서 사고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33:40
그러나 그 인식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이 바쁜 시간에 한 일 팽개치고 이게 뭐하는 것이냐 하는 각성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맛있는 회를 먹을 것이라는 욕망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한낱 본성적인 깨달음도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호스러움을 갖습니다. 그러면 진리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얼마나 더 지대하겠습니까? 이처럼 빛이 인간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이 비와 인물 때마다 사람마다 다를지라도 빛은 그것과 맞닥뜨리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사물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그 빛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을 때 우리가 비추기를 원하시는 빛은 단지 이 본성의 빛이 아닙니다. 이러한 빛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이 세상 사람의 윤리나 도덕, 이방, 종교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34:35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셔서 비추게 하신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신학적인 빛이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행복을 보여줄 수 있는 윤리적인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 빛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빛을 보여주는 우리는 그들에게서 잊혀지고 그 모든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그 빛 때문에 새롭게 알게 되는 세계와 사물들의 질서가 그들에게 깊이 아로새겨지는 것입니다. 18세기의 복음 전도자로 탁월한 헌신의 삶을 살았던 존 웨슬리의 일화입니다. 비록 신학적으로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그의 이 일화는 진리의 빛의 영향력을 이해함에 있어 적지 않은 도움을 줍니다. 그가 복음 전도를 위하여 당시 신대륙이었던 미국에 가기 위해 배를 탔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배가 부서질 것 같은 큰 풍랑이 불어왔습니다.
35:32
이 풍랑 속에서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에르푸르트 수도원으로 가던 마르틴 루터가 떨어지는 벼락을 보고는 엎드려 하나님께 제발 살려 주십시오라고 애원하던 때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배 한쪽에서 경건주의의 일파인 모라비안 교도들이 조용히 둘러앉아 찬송하는 평안한 모습이 웨슬리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존 웨슬리는 죽음 앞에서 초연한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의 신앙에 무엇인가 심각하게 부족한 것이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날의 경험은 후에 웨슬리가 깊이 회심하고 성령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모라비아 교도들이 풍랑 속에서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웨슬리를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자가 누려야 할 진정한 평안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친 것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36:28
웨슬레 앞에서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그저 큰 폭락 세상 속에서도 자신들의 생명을 주님께 맡기며 평안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찬송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웨슬리의 시선 같은 것은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자신은 누리지 못하고 있는 또 다른 빛을 공란 속에서 찬송하는 그들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운 세상 속에서 예수 믿게 만들어주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삶으로 우리 안에 있는 진리를 비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결국 자신의 인생과 세상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올바른 방식으로 봤을 리 없는 사람들을 그 빛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리의 사람이 되고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만 하면 그의 존재 자체가 어두운 세상의 등불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두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입니다.
37:29
칠레의 빛과 인간의 행복,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그것을 상세히 설명하실 때 등불을 소재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왜 하필이면 그리 밝지 않은 작은 등불이었을까요? 우리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 그 빛이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 찬란한 빛을 생각한 사람들은 이 작은 등불의 비유가 이어질 때 의아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실 때 태양과 같은 찬란한 빛으로 여기신 것과는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등불로 충분한세상 등불은 그 자체로 태양과 같이 찬란한 빛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등불이 빛이 고유한 빛을 바라고 있는 한 어둠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빛입니다. 이 세상이 워낙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빛이라 등불이라 불러주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고 진리대로 산 것도 없습니다.
38:27
그런데 우리가 어찌 세상을 비출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각자 현실에 몰두하며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는 것 없이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가장 쾌락에 탐닉하고 현실에 몰입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영혼과 진리에 대한 갈망은 지울 수 없이 남아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혼과 진리에 대한 갈망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영혼과 진리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빛을 찾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그 빛과 그 빛이 아닌 다른 빛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기에 빛 같지 않은 빛을 보고 거기에 자신의 희생을 맡기려고 하는 것이지. 진리의 빛을 찾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때로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주인공 딴 사람 보고 하라.
39:20
그래 여러 해전 오늘 여성 타이트가 나는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은 발매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음란 출판물로 혐의를 받아 검찰의 수사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지만 그로 인하여 이 책은 순식간에 장안의 화제작이 되었고 잠깐 사이에 웃었습니다. 인간의 성적 자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인데 자신의 자유로운 경험을 토대로 쓴 책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기독교 잡지사로부터 그 책의 서평을 청탁받고 그 책을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서평은 잡지에 실렸고 또 잡지사에서는 그 내용을 인터넷에도 게재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주 강력하게 성형자인 나를 비난하였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저에게 저자와 책에 대한 강도, 높은 은색적 비난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40:12
물론 책의 내용과 저자 주장하는 성적 자유에 대하여 그것이 죄라는 사실과 부덕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성적 일탈은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의 빗나간 표출이라고 해석하면서 저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긴다고 표현하였고 이것이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 사실 저는 그 책을 읽으며 그녀의 곤궁한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위하여 한동안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저자 안에 있는 치열한 성적 자유에 대한 갈망을 들버듯였던 네, 지적과 같이 그녀가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의 또 다른 표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저는 그 저자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 여인은 특별히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도덕에 빠졌다. 기보다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어둠 때문에 쾌락주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41:07
그런데 이후 그 저자의 인터뷰 기사를 통하여 알게 된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후 몇몇 사람들은 이른 새벽 그녀의 집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인생을 어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기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만약 누군가 그러한 부도룩한 삶에 독립하지 않고도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알려주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진리가 주는 행복이 그들이 추구하던 쾌락,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려주었다면 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일렬히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끝까지는 밝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엄청나게 유명한 배우는 아닌데 결국 이 여자가 예수를 믿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됐어요.
41:59
그때 내가 충격을 받은 거는 이거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라는 책을 썼는데 받은 인세만 5억이라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그때 5억이니까. 엄청나게 큰 돈이었죠. 그리고 책을 아예 볼 수가 없게끔 이렇게 비닐로 싸가지고 그렇게 판매를 했는데 이 여자가 이제 이 책을 쓰고 나왔는데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저렇게 성에 대해서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서아무개야. 서아무개라고 하는 그분은 뭔가 자기 주관이 뚜렷한 가운데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42:58
그래서 새벽에 와가지고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선생님이 저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하는데 묻더라는 거야. 그런데 결국은 나는 그 책을 볼 때부터 그 여자가 예수 믿을 거라는 거를 내가 감지를 했어요. 기도를 했어요. 결국 예수를 믿게 되겠죠. 서갑숙이라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제 세월이 지나가 있냐 그다음에 두돌은 자신을 보라고 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존재의 기관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한 미담을 생산하기 위한 공동체가 더욱 아닙니다. 윤리적 삶이 아름다운 곳에 살 수 있지만 도덕 자체가 우리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43:56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생활은 도덕을 따랐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거룩함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알기를 원하는 신학적 탐구와 진리에 부합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윤리적인 추구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신학과 윤리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그 열매로서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이 없는 윤리도 삶에 따르지 않는 거룩도 참된 경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람으로서 결합됩니다. 데스브리스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44:50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칠게 풍랑이 있는 밤바를 홀로 비추는 등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등대는 뱃사람들에게 자기를 보라고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등대가 어둠 속의 빛을 발하는 것은 자기를 조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오. 자신이 전달하는 빛의 의미를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가 항구다 혹은 여기가 위험한 지역이다 라고 말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 켜둔 등불도 그러합니다. 그것은 등불 자체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빛의 도움을 받아 방 안에 사물들을 분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45:39
세상에 그 빛인 우리 신자들의 존재 요인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아니었다면 오해했을 것들을 올바르게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의 자체를 보지 못할지라도 그 진리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신자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이제껏 바라봤던 세상과 사물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방식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어둠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도 어둠이 있지만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스스로 어둠에 갇히는 것도 더 커다란 어둠이 될 수 있습니다.
46:38
성경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어둠의 심각성이 물리적인 어둠의 심각성보다 훨씬 크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하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죄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뀌었느니라 물리쳐야 할 마음의 어둠. 성경은 진리와 관련하여 우리의 지성의 어둠을 두 가지로 가르쳐 줍니다. 객관적 어둠과 주관적 어둠이 그것입니다. 객관적 어둠이 지식을 어둠으로 물리칠 수 있는 어둠이라면 주관적 어둠은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부당한 사랑을 물리치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 어둠입니다.
47:31
이것을 좀 밖에 있는 어둠이고 하나는 안에 있는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객관적 어둠입니다. 이 어둠에 대하여 시인은 말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죄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러한 어둠은 본인이 주관적으로 붙잡은 어둠이 아니라 지식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둠입니다. 이 어둠에 대한 처방은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 어둠은 진리를 알기만 하면 물러갈 어둠입니다. 둘째로, 주관적 어둠입니다. 이 어둠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요?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떠나 죄에 빠져 자기 욕망을 따름으로써 생겨나는 주관적 어둠입니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부당한 마음의 사랑이 그의 오성의 판단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48:23
쓸모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 그의 마음에 어둠을 도입하여 사물들의 존재와 가치의 질서를 올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이 그 원인입니다. 이런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경의 진리를 통한 성경의 강력한 조명과 하나님의 은혜에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우심은 그러한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간과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그 빛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경을 배우고 학문들을 통하여 그 진리가 어떻게 세계와 인간 안에 확장되어 존재하는지를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은혜로 날마다 다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언급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49:10
세 사람, 곧 천상에 속한 사람이 필히 옛사람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옛사람으로 인생을 시작하기 마련인 데다가 비록 옛사람은 쇠하여 가고 세 사람은 날마다 자란다 할지라도 가시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는 지속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빛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령으로 매 순간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새롭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한순간도 빛의 사람으로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야말로 진리를 깨닫기에 가장 좋은 마음이고 진리를 깨달은 마음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놀라운 이해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탁월한 이해력은 올바른 사랑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비초입니다. 아는 것을 사랑하는 것은 모르는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낫고 사랑하는 것을 아는 것은 사랑하지 않고 아는 것보다 탁월한 것입니다.
50:08
그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사랑하라고 주신 대상인 한 말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등불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사는 것입니다. 이 소명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 지혜가 우리를 빛으로 드러나게 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비추어져 진리에 속한 것과 거짓에 속한 것을 분별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의 복음은 바로 이 지혜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여전히 복음과는 관계없이 헛된 꿈을 쫓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불러주신 거룩한 목적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더욱 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2장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죠.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게 3장입니다.

3장

51:07
사실 이 앞에 부분은 3장을 말하기 위해서 쓴 것이고. 3장 뒤에 부분은 3장 때문에 쓴 것이다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두께를 놓고 봐서 3장 하나가 5장으로 되어 있는데, 두께가 3분의 2 예 딱 3분의 1 정도면 정말 재밌어요. 자 그다음처럼 들어가는 말 예수 브릭스터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51:54
이같이 너희 밑에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여기서 이같이라고 하신 표현은 앞서 언급하신 두 가지 비유 즉 산 위에 있는 동리와 등불의 비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씀 하나씩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을 세상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빛이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 빛을 제대로 비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위문이 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토께서 우리를 빛이라고 부르셨는데 우리는 왜 이러한 의문에 직면해야 할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꿉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키에서는 우리를 비치라고 현재 직설법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그 빛으로 비치게 하라.
52:5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하여 비추어야 할 그 빛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빛은 우리의 빛이 아니라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진리인 그 미세의 미침을 받음으로써 어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A 허락을 뜻하는 명령, 우리가 그 빛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너희의 그 빛으로 비치게 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허락을 의미하는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너희 빛이 빛나도록 두라. 우리가 처음 예수극서를 믿고 기독교 진리를 깨달았을 때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지식들은 이미 그때 모두 주어졌습니다. 이 세계 이해에는 아무것도 영원한 것이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53:45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던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통해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성경이 기록되어 있고 모든 인간은 그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이 올바른 인생이 되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모든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의 마음속 빛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믿은 은혜와 사랑을 늘 간직하며 산다면 우리는 충분하지는 않아도 세상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전달하여야 할 중요한 진리를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진리에 대한 처음 인식이 원리적으로는 사라지지 않아도 그 선명한 현재적인 인식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받았던 그 선명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희미해지고, 확신도 사라져 갑니다.
54:44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은혜가 떨어지고 변심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악망하던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신 축복 때문에 마음이 부유해지고,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통하던 사람들이 부유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의 번영에 만족하게 됩니다. 의회 들이고 목마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목마른 사람들이 됩니다. 이런 모든 우리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리에게 주신 그 빛을 가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빛이 빛나도록 내버려 두라 빛나게 하라. 허용하라 가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그 빛 원문은 그 빛을 너희 빛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어진 진리의 효과로 그 빛은 결코 우리로부터 발생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그 빛의 근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빛이 우리의 빛이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교리적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55:43
이를 진리를 소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진리와 합치될 때 그것은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이 바울의 복음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0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와 같은 표현은 빌레 문서에도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가친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인데 왜 사도바로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의 소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56:41
바오리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기원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친숙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자기 안에서 발생했던 의미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의 인격과 삶이 복음이 주는 의미와 친숙하여 일체를 이루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사도 안에 계시고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을 소유한 것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그 빛의 기원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삶이 그 진리의 빛에 친숙하도록 합치되었기에 그 빛을 우리의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와 합치된 교회의 지체가 됨으로써 공동적으로 진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을 너의 빛이라 부르신 것은 타당한 것입니다.
57:36
진리를 위탁하신 복음의 능력은 허공에 나타나는 능력이 아니라 그 복음 진리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와 그 지체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위탁받은 진리를 올바르게 파수하고 풍성한 가르침으로 자기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자 각 사람이 그 진리를 나의 진리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자기화할 때 비로소 세상에서 진리의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이러한 선포를 대하며 우리는 자신들이 진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자신 있게 나의 빛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진리의 힘은 그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전파하는 진리에 자신의 인격과 삶을 합치시킬 때 많은 사람에게 드러납니다. 진리는 교회에 위탁되었습니다.
58:32
그리고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 진리의 빛을 열쇠 삼아 다른 것으로는 결코 열 수 없는 하님의 나라를 열어 사람들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께서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주자들을 엄히 꽂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화 있을 진저 너희 율법 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19세기 자유주의 신앙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올 때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버리고 민본주의적인 신앙으로 돌아섰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이적, 그리고 예수 그리스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모두 부인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복음을 파수하고 있던 교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물마시들이 들이키고 있을 때에도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59:31
소수이기는 하지만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성경의 위대한 진리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경건주의 신학자인 필립 야코 스페노와 요한 알브레히트 벵겔, 그리고 요한 로렌츠 폰 모사이입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독일의 교회 설교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고분적인 생명력을 잃어가고 이성주의가 득세하자 살아있는 신앙, 새로운 삶이라는 표현을 내걸고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한미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태도는 결국 설교단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독일 교회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제목들의 설교들이 주일 강당에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의 음료로서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에 말할 수 없는 축복.
01:00:27
가족들을 축사해서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면 더 좋음 등 이외에도 예수님께서 결혼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교의 소재로 삼거나 심지어 부활절을 앞두고는 사람이 생매장 당하는 것의 위험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설교가 선포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사실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과학적 합리주의로 재보니 사실성을 입증할 만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고급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모두 거부해 버렸고 그러자 마지막에 남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교사로 이 세상에 보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적인 분위기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01:01:24
교회 역사를 보면 재미있는 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복음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가 남는 건 도덕밖에 없잖아. 그래서 도덕주의에 기울어지면서 윤리적인 설계를 많이 해. 그때가 가장 타락한 때였어.
01:01:44
그러니까 기독교 위원들을 받쳐주는 것은 결국은 도덕적인 설교가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웅장한 정통 신학의 가르침들 그러니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 하는 거 오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감으로써는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토대가 질 때 성결함, 거룩함의 결과로서 도덕적인 생활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제 한국 교회들 참 큰일이야. 설교는 있는데, 그 설교는 고급이 없어.
01:02:41
그러니까 여러분 방지혜 목사님 알죠? 그 박윤선 목사님 친구였고 104세까지인가 사시고 돌아가셨죠. 101살에 미국 집회를 오셨다고 그래요. 100살에 참 대단해요. 그런데 그분이 그러시더래. 요즘 설교에는 피 냄새가 안 나. 그리스도의 고열의 경쟁자가 그게 이제 결국은 뭐냐면 설교자는 자기가 먹은 것을 토해내게 돼 있어요. 먹은 것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기 때문에 피를 못 토하는 거야. 그리고 그냥 그거 다 사라지거나 마지막에 남는 건 뭐였어요? 뭐가 남겠어요?
01:03:40
그랬더니, 세상에 칭찬을 받으면서 살아야 된다. 세상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인공주의의 노도와 같은 물결이 당시 사회의 전 분야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을 뒤덮고 심지어 신학과 성경까지도 뒤덮어 버렸습니다. 급기야. 합리주의의 물결은 교회 설교단까지도 덮어버렸습니다.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외치는 복음이 성도들에게 나의 복음이 될 수 없었기에 시대의 사조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모든 학문과 사상에서 사실상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제거하면 이처럼 계몽주의와 과학적 합리주의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온 유럽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뒤덮어버렸습니다.
01:04:38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확신과 하나님 없이 스스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 당시 유럽인들에게 복음에 대한 고전적 외침은 아무런 설득력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교회들은 급속도로 쇠퇴하였고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년들도 와해되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복음 진리가 정말 나의 것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참된 기독교의 진리를 적절하게 전하고 올바른 것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강하게 박혀 그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부각할 수 있기 전까지는 현실의 상황을 기억하며 그 빛을 바랄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이 시대에 물들지 않는 확고한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적 신학을 사랑하고 선교도의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고자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의 고금을 나의 고금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01:05:37
참으로 고금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다운 지혜이며 여러분의 마음과 삶이 그것과 일체를 이루어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오늘 하나님 말씀은 여러분에게 이것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리를 확장하신 우리에게 복음의 진리를 위탁하신 분이 숫자에게 대해서 놀이를 통해 그 빛이 세상에 비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와 우리가 일지를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빛이 비지게 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비티창으로 너희와 일지를 이루어서 너희의 삶을 통해 환히 비지게 하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빛 때문에 예전에 보지 않던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과 자기 자신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통해 진리의 빛이 확장됨으로써 이 땅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지. 그러므로, 듀오의 정체는 그 빛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 빛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선모합니까? 그분의 빛이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처럼 온전히 성취되기를 갈망합니까?
01:06:37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빛은 진리의 확장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빛과 함께하는 사랑은 자기를 구심적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심적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질서로 주님은 그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입권받은 후 저 천국으로 바로 향하지 않고 여전히 이 땅에 나와 있는 이유는 바로 존재와 인격과 상을 통해 우리를 움직이고 있는 그 빛과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은 참 그 빛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을 그 빛이라 불러주셨지만 우리는 항상 그 빛으로 나타나고 또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초대 교회처럼 복음이 능력 있게 역사하던 때에도 그리스도인은 침체에 빠지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핍박이 두려워 신앙의 정절을 버리거나 하나님의 일에서 이탈하기도 하였고 또다시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01:07:36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풍부하게 받았던 다윗이 영적 어둠 속에서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며 기름 도움받을 때 주어진 성령이 거두어질 위기를 경험한 것은 좋은 예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으로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그 진리의 빛을 모든 교회가 언제나 같은 정도로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 속에서 위대한 부흥과 함께 세워진 에베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벌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에 그 빛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인이지만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항상 동일한 빛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더욱 찬란하게 비추기도 하고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01:08:29
이 어두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지닌 그 빛의 가변성과 불변성에 대하여 숙고하여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 빛의 불변성 먼저 세상에 남겨두신 그리스도인이 가진 그 빛의 불변성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불나여금세상에서 게 하는 근거가 그리스도시라는 점에서 그 빚은 불변합니다. 그리고 그 빚의 불변성과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위격의 불변성, 복원적 교회의 영원성, 지상교회에 대한 섭리가 그 첫 번째, 그리스도의 위격의 불변성, 첫째로, 그 빛의 불변성은 그리스도의 위격의 불변성으로부터 추론됩니다. 귀에는 영원전부터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당신 자신을 귀 안에서 가장 잘 나타내셨습니다. 교회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삼유로서 함께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01:09:27
교회는 타락한 세상과 완성될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갑니다. 그리하여 이미 있던 교회에서 완성될 기회로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이루시는 구성 역사에 있어서 예수교수를 중심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지 아니하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이로서 영원한 관능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과 세계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이시며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서에 들어가시고 구원받은 자들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타락한 세상에 구속을 잃으신 그리스도 곧 성자는 영원한 인격이십니다. 구원하시는 성부가 사랑을 보여준다면 희생하시는 성부가 사랑을 보여준다면 희생하시는 성자는 은혜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믿게 하시는 성자는 교통하심으로써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가 되셨습니다. 하나님 진리요. 사랑 자체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삼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드러납니다.
01:10: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자신의 위격과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인이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골을 얻으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당신의 진리를 보여주시는 통로로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인간이 당신께 나오기 위하여 만나야 할 진리 자체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 되심은 그분의 위격의 영원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대하여 진리가 되시는 것은 잠정적 조치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인간 혹은 교회가 맺은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일부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성자의 영원한 위격 안에서 우리에게 그분을 진리로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진리심을 알게 됩니다.
01:11:2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진리에 대하여 온전히 아는 유일한 길입니다. 인간이 이제껏 이성만으로 발견한 모든 빛을 합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비치는 진리의 빛에 비한다면, 그것은 찬란한 태양볕 아래에 있는 희미한 등잔불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 동안에 자주 당신을 진리로 소개하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비친 것은 바로 이처럼 진리요. 그 빛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빛이시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연합됨으로써 그 빛에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그 빛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누리고 있는 한 진리 자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불변하는 그 빛을 갖게 됩니다.
01:12:17
이 복음적 교회의 영원성 둘째로, 그 빛의 불변성은 복음적 교회의 영원성으로부터 추론됩니다.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나타나는 그 빛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복음적인 교회는 그분 영적으로 연합된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영원하시므로 교회는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비추는 그 빛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교회의 머리로서 빛의 원천이 되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이 세상의 진리를 보이십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웰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교회의 소명, 성화, 그리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하신, 영광에 대한 그분의 모든 계획의 토대가 되신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 10절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선하신, 선하신 기쁘심을 따라 그분의 자신 안에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뜻의 신비들을 신비들은 천상교회와 연합될 여기 지상교회의 성화가 구원에 있어서 그분 자신의 영원하신 영광과 관련한 그분의 계획들이다.
01:13:18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주신 모든 계시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천상세계에서 이루신 왕국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나라이며 지상세계에 세우시려고 하신 나라도 당신을 머리로 하는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교회이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이며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시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 라고 기도하신 것은 두 나라에 있어서 중심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시는 이 세상에 주신 계시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는 곧 진리에 대한 계시입니다. 교회가 진리신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는 이 지상의 교회의 상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위격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보편교회는 영적으로 그 빛이 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영원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01:14:11
그러므로, 그 몸의 일부가 된 지상의 교회들과 또 거기서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 빛의 참념으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그 빛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인 그리스도인 한 사람으로서의 그 빛은 사라질 수도 있고 더 빛날 수도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지역 교회는 그 빛을 현저히 상실하기도 하고 완전히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한 몸으로서의 보편 교회 빛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약하게 빛이나 언제나 하나님은 교회가 그 빛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그리스도가 교회 머리시기 때문에 교회가 그 빛이며 그것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3. 지상 교회에 대한 섭리. 셋째로, 그 빛의 불변성은 지상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추론됩니다. 교회가 그 빛으로서 가지는 불변성은 부품 교회를 영원히 보존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01:15:08
또 내가 내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성자의 이러한 약속은 성부와 관계없는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서께서는 교회를 음부의 권세로부터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닐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신적인 의지의 실현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세상은 그 위친 그리스도의 교회를 싫어하여 육박하였고 그것은 물리적인 박해와 사용적 억압으로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사상이 교회를 스치고 지나갔고 근대에는 계몽주의에 거센, 물결 교회를 덮쳤습니다. 나라와 제국들에 의한 치열한 박해가 있었고, 이성주의로 흘러가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나라가 속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는 그 빛을 영원히 제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란이 지나가면 정말 공통 교리는 더 견고해졌고 빗박이 지나가고 나는 교회는 더욱 강하여졌습니다.
01:16:04
기독교 역사의 한 부분을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쇠퇴하는 것 같고, 때로는 종말이 가까운 것 같았으나 결코 그 빛의 흐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외형적으로만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마다 주신 영적 부흥을 통해 많은 세상 사람이 고봉으로 돌아왔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은 자신이 붙들며 살아가는 기독교의 내용들을 진리로 확신하고 다시 붙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 교회에서 진리의 불이 꺼지는 것 같으면 저 지역의 교회에서 진리의 불길은 타올랐고 이 시대의 진리가 희미해지면 다른 시대의 교회가 누렸던 진리의 도움을 받아 그 빛을 밝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부평 교회 전체를 붙들고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덧붙여진 성도들의 공동체가 영원히 그 빛일 수밖에 없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01:16:55
교회 전체로서의 그 빛, 여기서 그 빛의 불편성과 관련하여 다음에 사실을 숙고해야 합니다. 그의 정체성은 그 빛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사랑 안에서 인류를 구속하셨고 진리 자체로서 모든 존재와 가치가 되신 것처럼 진리 안에서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모든 신절장신과의 신변 영적 여러분 안에서 그 빛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빚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음부의 군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그 빚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 고백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고백이 불편하도록 유지해야 합니다. 단지 외적인 형식화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 고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01:17:50
신자들은 그 빚을 증가하는 교회의 증언을 위하여 빚을 믿게 된다는 사람들입니다. 교리를 통하여 자기가 죄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를 믿어 회심하는 순간 소유하게 된 중요한 진리의 빛은 점차 사라지지 않습니다. 일심의 숨과 마음속에 주어지는 진리의 빛은 기독교 신앙의 기둥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 이 스크리스토께서 우리를 위해 시착하여 주고 싶다는 믿음과 성경은 사람의 글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확신은 신앙적으로 방황하고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고 또 기도에 힘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확신까지 쉽게 흔들린다. 그러나 의심하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부인할 수 있다면 그의 거듭남은 참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01:18:46
중생과 함께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에 속하는 진리의 빚은 일단 주어지고 나면 확신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완전히 그 빚에 꽂히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거의 다 꺼져 가는 불꽃이 내뿜는 빛의 세계는 결코 같을 리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교회에는 그 빛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지역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교회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하고 파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편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편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약속에 따라 영원합니다. 때로는 진리의 빛이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힘의 지기도 하지만 결코 그 빛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일은 일어날 수 일어나지 않습니다.
01:19:43
이것은 복음초 교회의 영원성이 그리스도와 하나님길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하게 해석되고 성의 역사가 충만하여 많은 사람이 그 빚을 소유하고 지역 교회는 자신들의 선교체 안에서 그 빚을 찬란하게 비춥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의 해석되지 않고 교회가 그 빛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주 희미하게 비춥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세우신 보편교회와 연관을 완전히 끊지 않으십니다. 안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진노 속에서 어느 지역 교회들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빛을 잃어버리고 거의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든 지경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지키십니다.
01:20:42
이사 42장과 마태복원 12장에는 꺼져가는 심지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 진리의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이것이 바로 진리의 그 빛으로 주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진리의 그 빛이 있고 따라서 그 빛에 지체된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의 빛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그런데 등불은 심지를 올려 환하게 빛날 수도 있고 심지가 신통치 않고 기름에 기름도 부족하여 이사야 선사의 언급처럼 꺼져가는 등불일 수도 있습니다. 등불에 기름이 다 떨어져 심지의 불꽃이 꺼져 갈 때 그을림이 나기 시작합니다.
01:21:40
그러면 사람들은 심지를 제거하거나 혹은 입으로 불거나 손으로 비벼서 불꽃을 아예 꺼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그렇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않으셨습니다. 그 울림을 내며 살려가는 심신조차 등포를 여겨주시며 다시 기름을 부어 타오르게 하셔서 어둠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그 빛에 가벼운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그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머리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그 빛에 참여함으로써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십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에 주신 그 빛은 불변하는 빛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가변적인 빛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증명해 줍니다. 그 빛의 현실적 가변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01:22:33
가변적 교회에 위탁하신 성도 개개인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빛은 공동체를 밝히는 진리의 빛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빛의 가변성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교회에 위탁하신 진리의 빛과 그 교회에 속한 개개인의 진리의 빛 사이에 연관성의 문제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 진리의 빛을 교회에 위탁하셨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결국 교회에 위탁된 그 빛의 확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우리가 가장 미워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에워싸던 어둠입니다.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누구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없는 나라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던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나라,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01:23:25
내 거룩한 섬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암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니라 하박국 선지와도 동일하게 말입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는지라 목회사역을 통하여 성경이 해석되고 한 교회에서 밝은 진리의 그 빛을 언제나 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저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한 교회가 목회사역을 통하여 말씀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에도 거기에 소속된 소수의 무리의 마음속에는 진리의 빛이 활발하게 타오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예외적인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교회의 찬란한 진리에 그 빛이 가득하면 그 빛은 성도들의 마음에 담겨지고 성경 안에서 그 유익을 공동체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빈익대만 밥을 먹지 않으려는 아이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매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01:24:22
부모에게 매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밥을 먹게 하는 것인데 가장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둘째로, 굶기는 것입니다. 스스로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을 때까지 음식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소아정신과 의사들이 자주 권하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음식 먹기를 아주 좋아하는 친구들과 같이 생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식사 시간에 식구들이 밥 안 먹고 장난치는 자신에게는 무관심하고 밥 잘 먹는 친구에게는 관심을 보이며 칭찬해주는 것을 보면 아이의 태도는 바뀝니다. 아이는 밥을 먹고 자신도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식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는 영적 생활에도 이와 유사한 원리가 작용합니다. 은혜에서 멀어져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잘 들리지 않는데 옆에서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이골처럼 달게 받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01:25:16
그런데 문제는 성도의 마음에 은혜가 멀어지면 성령 충만한 성도들보다 자기처럼 병든 사람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불만이 가진한 성도들은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기쁨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 불편하고 싫습니다. 자신과 비슷한 저지의 신앙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불평이나 하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빛과 그 운명을 같이 하는 존재입니다. 예스 그리스도를 믿고 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라는 것은 진리와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왜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다른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지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당신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려고 하십니까? 특별히 행복할 만한 환경이나 조건이 아닌데도 당신이 그렇게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어인인 당신 자신만의 언어가 아니라 그렇게 묻는 세상 사람들의 언어로 충분히 답할 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01:26:14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의미이고 책임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진리의 그 빛을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 빛은 불변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소유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삶의 방식의 상태에 따라 찬란하게 밝은 빛을 내뿜을 때도 있고 완전히 사이어서 거의 꺼진 등불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서 이처럼 진리의 운명이 마치 인간의 모든 교회에 달린 것처럼 경련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처럼 마치 진리가 인간에게 메인 듯 보이기도 하는 것은 그 진리의 빛이 거기에 합치된 사람들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진리가 인간에게 매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리에 매여 있습니다. 진리가 인간을 의존하여 빛을 발하거나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리에 참으로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에 그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01:27:13
이는 마치 거울로 반사하여 어두운 방으로 빛을 비추던 사람이 거울을 치워버리자 방안이 다시 어두워진 것과 같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의 동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진리로서 존재합니다. 문제는 진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빛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학문이 깊은 교수님 한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사기가 매우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많은데 강좌를 개성해도 들어줄 학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연구를 놓아버릴 수는 없기에 지금은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계속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제자들을 둔 선생님들은 참 불행할 것입니다. 좋은 선생님에게는 훌륭한 학생이 나오기도 하지만 탁월한 학생들이 유능한 선생님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는 학생들의 열렬한 탐구지가 가르치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01:28:11
저 역시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를 해보면 어떤 청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듯이 잘 흡수합니다. 특히 강의의 경우 잘 깨달은 뒤에 돌아오는 질문은 깊이도 있고 예리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나면 한편으로는 공부한 보람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연관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됩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심과 경관의 열망이 있는 성도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커다란 축복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어느 성도와 대화하는 가운데 그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이러저러한 교류를 설교하셨는데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면서 한 해 동안 살아보니 어떤 때는 그 말씀대로 살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끝까지 그 말씀을 지키기가 어렵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그 유효기간은 두 달쯤 되는 것 같습니다.
01:29:07
르네마드 성도의 이러한 반응은 설교자인 제게 참 우울한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런 눌러감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저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주의 깊게 살펴보니 성도들의 삶이 참 게으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선한 일이나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더욱 게으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 저렇게 살까? 일본의 어떤 기사는 바둑을 두다가 쳐서 피를 토하고 죽어. 토혈국이라는 기보를 남겼다는데 인생에 있어서 신앙이 오락만 못할까? 저는 깊이 탄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에서 그러한 게으름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게으름이라는 시리즈로 설교를 하였고 코일 그 내용들을 책으로 나와서 많은 독자에게 사랑도 받았습니다.
01:30:02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설교를 듣고 또한 책을 읽고 많은 성도가 배운 바, 진리와 멀어진 채 살아가는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놓고 회개하며 씨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진리, 빛을 더욱 많이 발견하고자 몸부림칠 때 어찌하든지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려고 목직,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힘쓸 때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 찬란한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혼자서 수없는 밤을 고민해도 해결할 수 없었던 없던 인생의 문제들이 그 빛으로 말미암아 해결이 됩니다. 인생의 문제는 반드시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돈도 건강도, 젊음도 있었으나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을 받고 이 세상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에 붙들려 사는 행복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돌이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빛밖에 없는 것입니다.
01:31:00
그런데 때로는 진리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것 같습니다. 또 진리를 싫어하는 많은 사람을 보면서 이 세상에 진리가 설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그 빛을 왕 건강이 미워하고 거절한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것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가는 존대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변적 교회의 진리를 위탁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이 냉담하고 성도라 불리는 사람들이 진리와는 관계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들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부리로 진리를 가로막음 또한 인간의 부리가 진리를 훼방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진리는 위대하고 완전한 것이 아닌가? 아무리 인간의 불의가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진리는 꺾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인간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진리 자체를 망가뜨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잠시 그 빛을 가로막아 자신과 이 세상이 역사하지 못하게 훼방할 뿐입니다. 인간의 불의가 진리를 훼방하기도 한다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01:32:00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부터 나타나다니 한 시골 마을 가난한 집에 남자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하나꾼은 자식을 희망으로 훌륭히 키우려는 어머니의 노력에 따라 그 소년은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얼마 후, 그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대신 비밀 조직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학습하게 됩니다. 결국 그 소년은 신학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로서 살아가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대중의 그 아이는 유명한 정치가가 되는데 그가 바로 러시아의 이오시프 스탈린입니다. 그가 신학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의 삶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사람이 스탈린인데 봐야죠. 어떻게 죽었는지 아세요?
01:32:53
마지막에 죽을 때 실장마비가 왔는데 의사가 이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신장은 신장은 와이가 왔는데 왜냐하면, 하도 자신을 암살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가지고 거처하는 곳을 미로처럼 만들어 그래가지고 외딴 방에 가서 심장으로 어떻게 걸렸는데 그러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찾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결국은 죽어요. 그러니까 그다음에 읽어보세요. 비탈리는 키플리스 신학교를 들어가기 이전 우리의 교회 학교를 다닐 때부터 찰스 다윈의 책을 참독하여 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01:33:47
그의 친구가 스탈린에게 성경 말씀을 전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오히려 친구에게 다윈의 책을 권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신학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치안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갔고 유물론 사상이 급속히 유포되었습니다. 아버지에 의하여 사랑하던 사람이 살해당하고 러시아를 탈출하여 왕명의 길을 택한 그의 딸은 후일 자기 아버지 스탈린을 아주 단순하고 잔인한 사람이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이처럼 진리는 불의한 자들에 의하여 가로막히기도 합니다. 진리는 분명히 존재하며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가 햇빛이 비치듯이 물리적으로 비치게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통하여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빛을 비추는 일은 사람에게 위탁되었으나 또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로막히기도 합니다. 사람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부리로 말미암아 진리의 빛이 가려지기도 합니다.
01:34:41
인간이 더 보탬 것 없이 그 자체가 완전한 진리이지만 진리와 관계 맺는 삶을 통하여 진리는 역사하기도 하고 빛을 잃기도 합니다. 복음을 통하여 인간에게 알려진 기독교의 진리도 그러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우리 속에서 우리를 세상에 그 빛으로 부르고 계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절은 산으로 갔지만 교회는 도시 속으로 파고 들어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고 또 수도원이 속세를 떠났다고 하지만 그러나 속세가 수도원을 따라오지 속리산이라는 말 알아? 속리산 저기도 속리산 몰라? 충청도에 있는 속리산 리산인데 그게 무슨 뜻이냐면 세상 속 자에다가 떠날 리 자에다가 산 산 자야. 그러니까 얼핏 보면은 세상을 떠난 산이다. 이렇게 살잖아.
01:35:39
그런데 사실 원래는 그게 아니라 산분리속 속리산이야. 산이 세속을 떠난 게 아니라 세속이 산을 떠난 산이다. 산분리속. 사람이 살면 거기가 세상이 되는 거야. 미친 듯이 막 그 산꼭대기에다가 수도원을 지어놓고 거기서 막 그냥 매일 금식하고 매일 고행을 하면서 마지막에는 죽어서 거기다 자기 해골을 하나씩 다 쌓아놓잖아. 어? 그런데 거기에 거의 세상이 있는 거야. 거기에.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살아야 될 곳은 그런 산속이 아니라 세상이에요. 세상.
01:36:31
왜냐하면, 진리의 빛이 가려지는 것도 인간들에 의해서 가려지고 나타난 인간들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배우고 배우고 배우지 말아야 할 모든 것들을 다 인간 속에서 세상 속에서 배우게 되는 거예요. 그게 형의 정신이 돼야 되는 거예요. 자 오늘 공부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쉬웠어요. 소감이 어땠는지 몇 분만 얘기해 보시죠. 오늘 공부가 어땠어요? 어떤 걸 느꼈어요?
01:37:19
저는 예전에 교회 사역을 할 때 전도 집회를 하게 되면 성도분 한 분이 사람들이 올 때마다 3만 원씩 돈을 줬어요. 돈을 줬는데 처음에는 그걸 비판했었거든요.
01:37:41
그렇게 해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건가 하는데 또 어떤 분은 얘기하기를 그렇게 돈을 써서라도 복음을 듣게 한다라면 그게 더 유익이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해서 사실 거기에 설득이 됐었는데 오늘 읽은 말씀 책 중에서 보면은 결론이 좋다고 할지라도 가는 방법이 다르면 그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했었을 때 저는 그 생각이 그 생각이 났었거든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확실하게 그날 교회에 와서 무엇인가 자신의 상식을 깨뜨리는 진리의 빚을 받았다면 그 사람이 3만 원을 원하지를 않을 것이고. 원하지를 않을 것이고.
01:38:39
또 어떤 사람이 그곳을 봤기 때문에 교회를 왔다라고 한다면, 그러면은 아마 그 사람은 관심사가 돈에 있지 자신에 있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서 사실 선교도 선교도 사실은 선교대 가면 사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빵을 먼저 주고 옷을 먼저 준 다음에 결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지는 상황이 오게 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어쨌든 그런 제 생각이 좀 깨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방금 목사님 말씀하셨던 것처럼 돈이 아닌 부금이어야 되는데 잘못 그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가지고 한때 어떤 문제도 있었냐면요. 교회에서 콘서트를 여는 거예요. 너무 많죠.
01:39:39
그런데 콘서트를 여는데 시시한 사람이 아니라 옛날 말로 동황신기 같은 사람을 초청을 합니다. 그 당시에 한 번 초청하는 비용이 4500만 원이라고 그래요. 노래 몇 곡 불러주고 갔는데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들이 인제 얘기하는 주장점이 뭐냐 하면 아까 말씀하신 거하고 똑같이 그렇게 8500만 원을 써서 3천만이 와서 말씀을 듣게 한다면, 1만 5천 원밖에 안 되는데 1만 5천 원을 써서 한 사람의 말씀을 듣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사실 그런 경우에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은 진짜 희소하거든요. 그런데 그건 하나의 정신의 문제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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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여기서 선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고등학생 하나가 이렇게 했어요. 고등학생 하나가 부산에 있는 친척 집을 내려갔어요. 친척이 얘기하기를 야 너 여기 서울 올라가다가 여기 여기 해인사라는 데가 있다. 하잖아. 거기 한번 들러봐라 굉장히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자리다. 얘가 이제 거기 갔어. 그래 가지고 쭉 이렇게 둘러보는데 스님이 이제 팻마루에 앉았다가 네, 일루 와봐라 불렀어요. 그러니까 넌 누구냐? 그러니까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고등학교 2학년인가? 다니는 아무개입니다. 넌 여기 왜 왔냐? 그냥 절 구경하러 왔습니다. 왜 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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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왜 사니? 그러면서 대화를 시작했는데 딱 1시간 반 대화를 나눴어요. 우리 애가 집에 올라왔어요. 서울로 올라와서 올라오자마자 엄마 아빠한테 무릎을 뚝 꿇고 절을 하면서 엄마 아빠 나 학교 자퇴하겠어요? 뭐 할라고? 그렇죠? 천주교 만든 집안이었다. 뭐 할라고? 저 불교에 귀하고 싶어요. 집안에서 난리가 난 거지 이게 뭐 가톨릭 집안에서 신부가 된다. 그래도 싫다 그럴 판인데 중이 되겠다고 하니까 그런데 마침 그 집안에 사촌 형이 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인제 일본에서 일본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이었어요.
01:42:29
그러니까 인제 삼촌에게 얘기를 해서 얘가 인제 인간으로서 성숙해서 자아가 생겨서 자기의 인생길을 찾아가려고 했는데 막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그래서 결국은 가서 스님이 됐어요. 그 스님이 70세가 돼 가지고 글을 쓴 거야. 그런데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 그런데 그 옆에서 얘야 이리 와봐라. 너는 왜 사니? 그렇게 1시간 반 동안에 물어봐. 준 사람이 성철 스님이었어요. 성철 스님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놀라운 이야기가 불교에서는 많이 나오는데 기독교에서는 별로 잘 안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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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면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은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뭐냐 하면 불교는 세상 사람들의 고민을 끌어안아.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은 불교를 포교해야 될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 인문학적인 이해가 있다고. 기독교는 그것이 현저히 부족해요. 그래서 막 떠들고 이야기하는데 자기네들끼리만 알아듣는 이야기로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마 전도할 때 당신은 왜 사십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거야. 예수님 그 천만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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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그런 것들이 인제 하나의 약점으로 작용을 그때 인제 그 청년이었던 사람이 성철 스님 다 돌아가시고 나서 70세가 되어서 고등학생이 70세가 될 때까지 거기에 절에서 산 거야. 그리고 그 글을 쓴 거야. 가슴이 먹먹하게 울리더라고. 왜? 이런 울림이 드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공부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이 책을 공부하고 나면 좀 그런 마음이 좀 생겨나는 듯합니다. 자 또 혹시 질문이나 혹은 의견 있습니다.
01:44:50
좀 질문을 하나 더 말씀을 드리겠는데 지난주 토요일날 총신대 출신 목사님을 성경세면 한다고 담임 목사님이 오셔서 같이 했는데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해서 이것은 목사님이 충신대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아디아포라고 성경에는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야기하고 또 예배를 드리는 예배 횟수를 그렇게 많이 들여서 뭐하냐? 새벽기도 북묘 철야 이런 것보다는 삶 자체가 예배가 되면 되는 것이라고 저는 들었을 때 목사님한테 배웠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데 말을 하고 싶어도 전도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력적이기 때문에 이것이 그래서 제가 우선 저한테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01:45:41
그러니까 예배가 넓은 의미의 예배는 삶이고 좁은 의미의 좁은 의미의 예배는 이제 우리가 공적 예배인데 그런데 결국은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쳐야지만 삶을 예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예배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것도 귀찮아하고 버거워하고 성경이 명백하게 동성애를 근무하고 있는데, 그걸 아디아포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예배 횟수만 줄인다고 해서 삶이 예배가 될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 감사 목사님도 그 교회는 왜 맨날 이상한 사람만 불러? 아니 한 번도 문제가 안 되는 사람을 부른 적이 없어. 꼭 맨날 문제가 되는 사람만 불러.
01:46:37
아니 그렇게 갈 사람도 여기 중에 아무나 데리고 가도 그분보다 나가야 돼. 아니 정신 출신이라도 그렇지. 그런데 정신 출신 중에서 왜 그렇게 죽잖기만 부르냐고. 저 모르겠으면 나한테 와서 소개시켜 달라 그래. 그래서 그리스어인이 빚을 산다고 할 때 그 빛은 근본적으로는 그리스어인이고 그리스어로 인한 그 진리로 감화되어진 성도들의 영원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어인들의 도덕과의 관계라고 생각이 드는데 윤리와 도덕이 이걸 좀 어떻게 구분하거나 혹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윤리와 도덕 가운데 어떤 게 좀 더 상이돼 있는지 윤리는 도덕은 나한테 얘기지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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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원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말로 그 따오더 따오더라 그래 따오더 따오는 뭐냐 하면 길이야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고. The 덕은 the the라고 하는 덕은 주관적으로 거기에 합치해 가는 거야. 그러니까 도덕이라는 말은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과 그다음에 인간이 거기에 합치된 상태를 가리켜서 도덕이라고 부르는 거야. 도덕적 상태라고 부르는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이제 구체적인 그런 사람이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냐 그걸 우리가 윤리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또 질문 있으면 하세요. 자 없으면 우리 오늘 공부를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람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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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예 알려고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시대에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이런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시고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빌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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