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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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p42~79
1장 p42~79
빛으로산다는것 260223_131840
2026.02.26 목 오전 8:30 ・ 114분 21초
곽기욱
참석자 1 00:00
새로운 세 분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앞으로 계속 조인하게 될 텐데 아무튼 함께 이제 우리가 우리가 먼저 소개를 하고 그다음에 우리 목사님들 소개를 받도록 해줬습니다.
여기는 지금 오늘은 저기 저 이름하고 위기 잘 보내 저는 김준성 전도사입니다.
오늘 이제 오늘 10시에 스터디하고 지금 1시 스터디에 다시 들어온 겁니다.
3시까지
참석자 2 00:45
안녕하세요. 저는 윤우식 전도사라고 하고요. 저도 김준성 전도사와 같이 2학년에 이제 재학 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참석자 3 00:54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윤영광 박사라고 하
참석자 1 00:57
여기서부터는 이제 차치 2.0 스쿨이요.
참석자 3 01:00
부산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참석자 1 01:03
부산에서 매주 올라오셨어요 대단하죠. 대근 대근 상소해야 됩니다.
참석자 4 01:11
안녕하십니까? 저는 조인희 목사라고 하고 인천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참석자 1 01:16
감리교회 목사님이시고 열심히 하고 있어.
참석자 5 01:19
안녕하세요. 저는 곽기욱 목사입니다. 남양주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참석자 6 01:26
네 안녕하십시오.
참석자 7 01:28
안녕하세요. 저는 김학재 목사이고요. 저 하남에서
참석자 8 01:31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돼서 너무 반갑습니다.
참석자 6 01:38
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지금 안진윤 목사고요.
저는 이제 백석 총회 스승이고 지금 집은 김포인데 교회는 동두천에 있어요.
동두천으로 간 지는 이제 16개월 정도 됐습니다.
참석자 9 01:58
안녕하세요. 저는 합신교 다니고요. 서울 동대문에서 등대교회 목회하는 김양호 목사라고 합니다.
이번에 저희 교회에서 부종 분리를 했었는데 김남주 목사님 은혜 고 이 모임을 추천해 주셔서 그냥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오면서 한 분을 또 전도를 해 왔습니다.
참석자 10 02:22
네 반갑습니다. 저 이름은 박성민 목사고 지금 사역은 이제 평택에서 하고 있고 그다음에 이제 교단을 통합적이고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우는 교회 섬기고 있습니다.
참석자 1 02:38
박수로 환영해 주
참석자 1 02:44
오늘 오는 항상 오는 우리 아들을 김학래 박사는 오늘 발표회가 있어가지고 지금 다른 곳에서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린 책의 제 41조를 할 차례입니다.
참석자 1 03:14
그래서 이제 여태까지 한 내용을 조금만 처음 오신 분들 있으니까 이제 되돌아보면은 이제 23페이지부터 보시면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이제 이 한 권을 전부 다 펼친 건데 그래서 이제 하나님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천국 백성을 빛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빛의 의미가 뭐냐 27페이지로 넘어가면 신약 성경에서 빛은 크게 세 가지인데 물리적인 빛, 그다음에 윤리적인 빛, 그다음에 신학적인 빛 세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거는 너무 당연하니까 고려할 게 없지만은 이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심리에서 빛을 이야기할 때 윤리적인 빛만을 이야기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게 이제 윤리주의로 흐르기 때문에 그런 건데 사실은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건 신학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나 가치 질서를 보여주는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서 피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죠.
참석자 1 04:47
그래서 이제 빛이 뭐냐 28페이지에 빛의 본질인데 그 빛의 본질이 굉장히 이제 어려워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빛은 파장인 동시에 알게 입자다.
그게 이제 최근에까지 알려지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29페이지 상반절 둘 넷 여섯 여덟째 줄 보면 뉴턴이 이렇게 말했죠.
정확히 말하자면 광선에는 색이 없다. 광산에는 색의 감각을 일으키는 능력과 성질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빛의 색깔이라는 것이 인식하는 주체의 간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인간이 바라보는 노란 색깔의 꽃은 새들의 눈에는 보라색을 띤 회색빛으로 보인답니다.
그래서 이제 임마누엘 칸트가 물 자체 잉안지희라고 하는데 그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30페이지로 넘어가면은 빛인데 이제 발건과 반사예요.
참석자 1 06:08
그래서 다시 말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만이 빛이고 우리는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그걸 이제 과학 용어로 암체라고 하는데 발광체는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과 같은 것이고 암체는 다리나 지구처럼 태양으로부터 빚을 받아서 빚을 내는 그런 단체라는 암체의 존재인데 우리가 그런 암체의 존재다 이런 얘기입니다.
근데 인간 자신은 빛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제 33페이지로 넘어오면은 우리가 지금 이제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아까 얘기한 것처럼 이제 이 시대의 특징이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 그래서 여태까지 관 으로 버텨오던 유교적 영향들도 이미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새 이제 실용주의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실용주의라고 하는 사상은 너무 간단한 거죠.
뭐냐하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그리고 무엇이 무엇이 좋은 것인가 그런 것들을 결정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라고 본 것이 실용주의예요.
참석자 1 07:49
실용주의 그래서 이런 기독교의 세계관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의 등장이 다윗의 종의 기원에서부터 이제 심각하게 대두가 돼요.
당대로서는 혁명적인 체계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제 그렇게 넘어가다가 그다음에 이제 36페이지로 가면 실용주의의 폐해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나는데 그래서 이제 그 가운데에 파란색 발문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교육학 교수 리코나가 8학년 열등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치관 명료화 전략을 실시했던 한 교사의 이야기를 보고하였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가치가 없으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돼요 어떤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되는가라는 것을 각자가 결정해야 된다는 것이 그래서 학생들은 토론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때 선정된 것이 섹스, 마약 음주 결석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 교사는 이러한 교육 방법으로는 그들이 선정한 활동들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설득을 할 수가 없었대요.
참석자 1 09:31
왜냐하면 과거의 도덕적 이상을 가르치는 대신 학생들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과 가치관들을 훈련시킨 교육의 결과가 현실이기 때문에 이제 그거를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결국은 절대적인 가치와 도덕적 기본 기준을 거부하게 될 때 인간이 무엇으로 무엇을 바라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데 그래서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진리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빛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히틀러 시대 때 히틀러의 지지율이 99.7%였다.
그래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히틀러의 광기 어린 전쟁이야말로 이제 정말 독일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런 고난을 부여한 것이 그런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런데 이제 체스트 길버트 체스터턴 같은 경우 38페이지에 도덕에 대해서 이제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참석자 1 11:06
도덕이라는 것은 내가 나를 치지 않는다면 나도 너를 따르지 않겠다라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도둑에는 거래의 흔적이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한 것 같은 흔적이 있다.
우리가 이 신성한 장소에서 서로 치고 받고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종교를 수여함으로써 수호함으로써 도덕을 얻는 것이다.
용기를 기른 것이 아니라 신전을 소화하기 위해 싸우다 보니 용감한 자들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결하게 되려고 애쓴 게 아니라 제사에 적합하도록 정결하다 보니 깨끗한 자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물질주의가 일어나면서 이런 상대주의가 이제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되게 돼요.
그래서 이제 39페이지의 중간 정도 맨 위에 두 번째 단락에 보면 이제 1차 산업을 기반하던 사회의 안정성이 무너지고 그다음에 이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되죠.
도시화의 이제 생산을 위한 인프라들이 깔리게 되니까.
참석자 1 12:20
그러니까 이제 인류는 도시화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지금 현재도 전 인류의 95%가 2만 명 이상이 모이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요.
도시에 모이니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면 되기 때문에 이웃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이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그런 물적 요소와 인적 요소들 가운데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것이 없으며 또 동시에 절대적으로 하나만 가지면 충분하다라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이제 산업혁명과 함께 이런 상대주의가 이렇게 이제 더욱더 두드러지게 발전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놓고 그다음에 이제 41페이지로 넘어오게 되면 물질 문명의 발달은 이제 여러 가지 육체적인 질병과 정신적인 질환을 가져왔고, 과다한 자원의 개발과 산업시설 및 과도한 소비로 말미암아 지구 온난화와 공예 오염 질병들이 인간에게 되돌아오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은 산업혁명과 실용주의 안에서 이미 예고된 바이다.
참석자 1 13:42
그래서 이것이 결국 인간의 삶을 물질적으로는 풍요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 인간들이 일의 노예가 되어야 하는 그런 현상을 가져오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마지막 단락에 보면 존재의 질서는 가치의 질서입니다.
어떤 존재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알고 질서를 세울 때 가치관이 됩니다.
올바른 질서를 세우고 살아간다면 진리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과의 삶도 일치를 이루며 조화로운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기준들을 버리고 제멋대로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에 인간의 삶은 고단하고 비참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까지가 우리 지난 시간에 한 거예요. 딱 1시간 했습니다.
그다음에 이제 디번부터 시작 오늘 시작하겠습니다.
참석자 8 14:43
남겨주신 본성의 빛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모든 빛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시고 그 빛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빼앗아 버리셨다면 인간은 동물 물과 다름없는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 안에 흉이하게나마 그 빛의 일부를 남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성의 빛입니다. 이 빛이 올바르게 발견되고 적용되기만 해도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죄의 무모함과 광기 그리고 맹렬함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이러한 인간 안에 있는 본성의 빛을 이성으로 찾아감으로써 그것이 진리의 연원인 것처럼 생각하였던 일군의 무리도 있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사상가들 중에도 그러한 가치관 속에서 인간을 신화하는 경향을 지닌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가치의 근거를 찾는 사회적 활동은 크게 세 견해로 분류됩니다.
참석자 8 15:33
내재적 가치론, 외재적 가치론, 중용적 가치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들 중 내재적 가치론은 인간의 본성을 하늘이 내린 초월적 내재자 혹은 사물의 근원적 이치로 보고 유교적 본성을 거슬러 직접 상승하여 그것을 깨닫는 것이 인간 수양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측근해하는 마음을 사람들이 다 가졌으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사람들이 다 가졌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사람들이 다 가졌으며, 시비를 가리는 마음을 사람들이 다 가졌으니 인과 의와 예와 지가 밖에서 나에게 녹아 들어온 것이 아니다.
내가 본래 가졌던 것이지만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국제 유주의 실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홀로 행하여도 자신의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고, 홀로 잠을 자도 이불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
이러한 인용문들은 동북아 사상에서 나타난 인간을 내재적 신화가 이루어지는 존재로 규정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석자 8 16:25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힌두교나 불교 동북아 사상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그 사상들 안에 현대의 시대 정신과 교감을 이루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참석자 1 16:36
그게 그게 무엇이냐 하면은 인간의 존재를 신화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직 신과 같은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개발하고 촉진함으로써 이제 인간을 바꿔 놓을 수 있고 사회를 바꿀 수 있다라는 그런 거죠.
그래서 이제 힌두교나 불교 이런 동북아 사상들이 특히 힌두교나 불교는 특히 힌두교는 그런 성격이 굉장히 강해요.
그래서 아주 굉장히 수준 높은 철학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몇 번을 갔는데 거기 가서 보면서 이제 깜짝 놀랐는데 앙코르와트 제국이 생각이 13세기 14세기에 있었던 나라였는데 이게 엄청난 그 앙코로라트 유적이 유적보다 더 키가 크게 나무들이 자라가지고 가려져서 거의 보이질 않았어요.
그러다가 이제 1800년대에 독일 과학자가 가서 그걸 이제 역사가가 발견을 하고 이제 조명을 받기 시작했는데 철저하게 힌두 문화입니다.
참석자 1 18:10
근데 이제 이 조각부 만들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둥그런 기둥인데 앞에서 이 뱀 두 마리가 싸워요.
하나는 선한 뱀이고 하나는 악한 뱀이야 싸우는데 제 헉 하고 놀란 건 뭐냐 하면 그 큰 기둥을 다 뒤로 돌아가 보니까 꼬랑지가 두 개가 같이 붙어 있는 거야.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상이 뭘 보여주냐면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든지 뭔가 이렇게 과학의 위치에서 서로를 배제하는 그런 것들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것이고 본질은 선이나 악이나 다 뿌리가 같은 것에서 나온다 이렇게 보여주는 거죠.
아주 쇼킹한 신학적인 충격이었고 종교적인 충격이었어요.
그런 사상들이 굉장히 유행을 하고 있는 거죠.
참석자 1 19:16
그래서 이런 힌두교나 불교의 이런 사상들이 또 뉴에이지의 신비적인 사상하고 맞물리면서 그러면서 다시 이제 천문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사람들이 이제 별자리 등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서 또 그런 데서 인간의 운명을 잠시고 하는 그런 일들이 이제 생겨나게 되는 건데 그게 이제 현대 사상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됐지만 별에서 온 그대 같은 그런 드라마 같은 것도 보면은 이런 소재들을 끌어오는 거죠.
많아요. 그런 것들이 되게 많아요. 그러니까 그런 특히 이제 영화나 예술 같은 데서 이렇게 말하자면 묵시 문학적인 장르를 넘나들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신화하는 존재로 보여주는 것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지금 이제 절대적인 기준을 잃어버린 진리의 기준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대주의의 사상들이 이제 시도하는 그런 걸 이제 보여주는 것이죠.
그다음 그다음 사람 이거 없어요.
참석자 2 20:36
실제로 고대 철학 사상과 포스트 모더니즘은 상당 부분 일치하는 문화 종교적 코드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철학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도 발견됩니다.
그는 선과 악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참 행복은 선한 삶에서 비롯되며 그 선악의 판단 기준은 인간 본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자아의 완성이야말로 주된 선이라고 보았습니다.
내가 언급한 것들은 우리가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본성 속에서 취득하는 것이 영혼의 본래적인 욕망이라 한다면 우리가 욕구의 대상을 취하였을 때에 본성은 거기서 궁극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며 그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돼
참석자 1 21:15
이게 이제 이 탁월하다고 그래 가지고 미국에다가 급히 조언을 해 가지고 빠른 항공으로 스피드 포스트를 받아 가서 한 번에 다 읽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뭐냐 근데 이제 키케로 같은 사람도 이 사람이 이제 보세요.
스토아주의에 깊이 심취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갖다가 인간 본성을 휴먼 네이처라고 보는 거지.
근데 어디에서도 그 휴먼 네이처가 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해 우리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 거죠.
그리고 그런 인간의 본성이 온전한 자아로 완성되는 것이야말로 주된 선이라 그러는데 그리고 온전하게 되는 기준이 뭐냐 그런 거에 대해서 말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허공을 허공에 들어 빚을 잡는 것이 되는 거잖아.
계속 계속 이어
참석자 2 22:26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탈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본성의 빛과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그리움, 즉 종교의 씨를 남겨주셨습니다.
이것은 양심의 빛과 무한한 자에 대한 무의식적 갈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빛은 계시의 빛에 의하여 지도 받지 못할 때 그의 세계관과 결합하여 다양하게 굽은 모습으로 인간의 삶과 지상 안에 표출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대주의, 현대인의 쾌락주의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 쾌락의 탐닉은 단순한 악이 아니라 종교, 심리학, 심리적 현상입니다.
이렇게 쾌락을 탐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절대 가치에 대한 거부와 도덕, 상대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는 현대인을 비판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참석자 2 23:07
우리는 그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이 사실을 명확히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그것을 그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질병으로 여겨야 한다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견해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질병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영국의 문학가이며 비평가로서 CS 로이스 튤렵, 안씨 등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길버트 체스타터는 자기의 시대에 가장 탁월한 정통 기독교의 지지자로 불렸습니다.
그가 한 다음에 말도 저에 대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사창가의 문을 두드리는 모든 남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거절한 인간은 그 막연한 목마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석자 1 23:53
말이 재미잖아 사창가의 문을 두드리는 사고 밑에 각주 14번에 나오는데, 에브리맨 후, 낙스 온더 도어, 로브 블루트 이 루키 상가의 문을 두드리는 모든 남자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인 것 같아 읽은 사람 무슨 무슨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참석자 2 24:28
자신의 부족한 것을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재한 것을 부족하다고 느끼
참석자 1 24:33
그렇지 그렇지 그러니까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텅 빈 가슴을 이렇게 쾌락으로 찾아보려고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의식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은 사천가의 무늬고 창녀들이지만, 그 무의식 속에서 그가 찾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계속 읽어보세요.
참석자 2 25:03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누려야 할 지극한 행복을 육체의 쾌락으로 대신하려고 하는데, 광란의 쾌락을 통해 영혼의 갈증을 달래려는 시도는 인간은 더욱 목마르게 할 뿐이
참석자 1 25:13
인간을 더욱 목마르게 할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다음 사람
참석자 3 25:19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듯 신자가 도덕적으로 단정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단지 저에 대한 신적 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신자 윤리적 삶은 그가 거룩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신자의 거룩한 생활은 나 자신을 모든 가치와 질서의 기준으로 삼던 태도를 버리고 진리의 빛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깨달음은 철학적인 깨달음이지만 자신을 진리의 근거라고 생각하던 인간의 사상을 통하여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참석자 3 26:06
그것은 철학책을 감독함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성을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회개하다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다란 말은 희랍어 메타 노예오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다시 후회를 의미하는 메타와 생각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노예호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회개라는 행위의 핵심이 지성의 변화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써 인간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존재와 가치의 기준과 질서들을 복음을 통해 접하게 되고 성경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모든 학문을 통해 이 성경의 질서와 가치의 체계들이 참으로 최고의 것이며, 그 안에서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평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석자 1 26:55
이제 메탄 노에오에 대해서는 이제 할 말이 되게 많은데요.
이게 희랍어가 크게 그리스어가 크게 세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제일 오래된 게 호흡 호메릭 호메릭 그리스어예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같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고대 그리스어야 호머의 호메릭 그리스 그릭이라고 그래요.
호메릭 그릭 그다음에 이제 아티크릭이 있어요. 아티크릭 이거는 뭐냐 하면 이제 그 이후에 쓰여진 이제 후대에 이제 그리스의 신화나 문학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그런 호모보다 후세대의 것이고요.
그다음에 이제 코인의 그림이 있는데 코인의 그리기 바로 이제 성경이 기록된 거예요.
그래서 알렉산더 대제가 아주 현명해서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면서 제일 먼저 이 언어를 보급했어요.
그래서 제국이 커도 그 코인의 어 하나만 할 줄 알면은 제국 어디에 가서든지 다 의사소통할 수 있게끔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죠.
참석자 1 28:26
근데 그 이제 코인의 글리그에서 이제 이 메탄 노에를 이제 기독교 폰으로 들어오면서 이거를 회개하다로 바꿨는데 사실은 메탈 노웨어의 단어에는 회개라는 것이 개념이 별로 없어요.
그게 아니라 생각이 바뀌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생각이 바뀌냐 하면은 이제 플라톤 철학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제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제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이렇게 가짜들의 세계라고 보는 거죠.
가짜들의 세계라고 보는 거죠. 이제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거죠.
물을 끓이잖아 전기가 막 올라오잖아 이게 좀 어리석은 사람은 이거 새로운 물질이 막 생기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h2o h2o야 그 밑에서 끓고 있는 물도 h2어고 그걸 또 이제 그만 끓이고 냉동실에 집어넣으니까 꽝꽝 얼었어 얼음도 야 이거 완전히 새로운 것이구나.
그것도 h2어야 그러니까 전부 다 h2가 전기로도 나타나고 그다음에 물로도 나타나고 얼음으로도 나타난단 말이야.
참석자 1 29:41
그러니까 플라톤 철학에서는 어떻게 보냐 하면 이게 이게 이게 수많은 장난질이구나.
이게 우리의 감각 육체의 감각 기관을 이용해서 이 세계가 딴 것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착시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구나.
그러면 그런 속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은 이것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는 거야.
이건 물 그래 물이 어떤데 얼음 얼음이 그게 뭐 어때서 수증기 수증기가 뭐 어때서 그런 게 뭐가 중요한 거야 본질이 뭐냐가 중요하지 h2 그러면 세 개 다 같은 거네 이렇게 보는 거지.
그러면 결국 같은 거네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을 찾아가는 것 그게 먼저겠어 아니면은 다른 것을 찾아가는 게 먼저겠어 같은 것을 찾아가서 그거를 먼저 발견하고 그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거죠.
지식으로 이를 위로 올라가서 실제를 파악하고 실제에서 현상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참석자 1 30:49
이렇게 그래서 이제 이 플라톤 철학에서 소위 소위 얘기하는 체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인스테이션이라고 얘기했는데 체관인데 뭔가 이렇게 하늘의 천상의 세계에 대해서 뭔가 눈이 어느 순간에 확 띄어지는 거야.
떠지면서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이게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닌가 하는 거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의 그 사람의 의식은 메타 노웨어라 이거야.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이 다시 생각하는 거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된다.
이거지 그러니까는 생각의 전환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기독교권에서는 이런 거를 무시해요.
저는 근데 그건 굉장히 잘못된 거라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그래서 그래서 이제 기독교인들이 메타노에오라는 단어의 회개하다라는 의미를 부여했을 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회개를 하고 나면 사람이 생각이 완전히 바뀌더라 그거에 착안해서 이 메타노에요라는 단어를 회귀하다라는 단어로 선택을 하게 된 거야.
참석자 1 32:14
그래서 만약에 생각이 바뀐 것이 아니면은 그건 진정한 의미에서 회개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좀 더 그렇죠 어디에 어떤 것이
참석자 3 32:28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정직한 복음과 참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원히 구원받고 심판을 면하는 종교적 방법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사랑하기 때문에 현자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종교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이 구별된다는 것만을 가르치지 말고 두 영역의 구별이 결국은 어떤 통일을 위하여 필요한 구분임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즐거워할 줄 알고, 세상의 부조리와 악함을 보며 그것을 공격하고 개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을 길러낼 수 있도록 사상과 윤리의 힘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학문과 예술, 정치와 사회, 모든 학문 안에서 발견한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질서들과 연관을 이루는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참석자 1 33:24
다음 사람
참석자 4 33:25
오늘날과 같이 혼란스러운 포스트 모더니즘 상황에서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들이 고도의 지성을 갖춰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참석자 1 33:34
포스트 모저니즘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까도 뭐 2012년도에 벌써 포스트 모저니즘이 있다는 걸 놀랐다고 그러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은 본격적으로 언제부터 터지기 시작하냐 하면은 1900년대 초부터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은 1800년대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게 아마 내가 알기로는 18 한번 한번 찾아볼래요.
몇 년도인가 1863년도인가 그렇게 기억을 하는데 송혜기원 요새는요.
설계도 정확하게 안 하면 밑에서 전부 다 다 네이버로 다 찾아와요.
저거 아닌데 몇 년도야 1859년에 1859년에 89년에 1859년 출판 되네요.
1859년도에 발표됩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19세기 중반을 들어서면서 발표가 되는 거죠.
이때부터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이 시사 됐다고 봐야 돼요.
참석자 1 35:04
그런데 이때 종의 기원이 큰 충격을 준 거지 뭐냐 하면은 이제 하나님이 하나하나하나 따로 창조했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단세포 동물소부터 시작해가지고 이렇게 진화해가지고 원숭이 조상을 갖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이제 설명을 해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기본적으로 성경에 의해서 지탱되던 서구 사회의 어떤 도덕적인 도덕적인 질서라든지 가치관의 세계라든지 이런 것들이 이제 한 번에 위협을 받은 거예요.
근데 기독교권에서 그럼 그것에 대해서 적절한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느냐 그건 자꾸 순환주의로 들어가게 된 거야.
성경에서 기록됐다고만 얘기를 하고 자꾸 순환주의 쪽으로 돌아가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이제 이제 설득력을 잃게 된 거죠.
이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다음에 이제 또 하나의 변화는 어디서 나타나냐 하면은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러면서 이제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을 하는데 그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대두가 돼요.
참석자 1 36:25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대두가 되면서 이제 아인슈타인의 특별히 이제 일반 상대성 원리와 그다음에 특수 상대성 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공간과 시간 그 자체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이제 깨닫게 되는 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시간은 항상 똑같이 흐른다고 생각을 했는데 공간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제가 설명할 때 잘 듣는 설명이 뭐냐 하면은 이제 이렇게 생각해 머릿속에서 이런 그림을 그려보세요.
아주 그 콧놈처럼 얇은 막이 있단 말이야. 찢어지지는 않아.
그런 막이 상암동 운동장 같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넓은 축구장에 가득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이제 세 구슬을 각각 올려놓는 거야.
하나는 뭐 그냥 거의 뭐 본고만 한 걸 올려놓고 하나는 축구공만 한 걸 놓고 다 올려놔도 그럼 그건 각자 이제 쑥 들어간 곳에 있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면은 시간은 이제 어떤 식으로 묘사가 되냐 하면
참석자 1 37:54
이제 이렇게 옆에서 보면은 이렇게 평평하던 것에 여기에 쇳덩어리가 올라가요.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이렇게 해서 이렇게 굴곡이 생겨지는 거겠죠.
그래서 뭐냐 하면은 빛도 빛도 질량이 큰 물체가 있으면 휘어버리는 거야.
빛이 빛 자체를 이 빛 자체를 이 질량이 빨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을 때는 빛이 똑바로 흐르니까 빛의 속도와 시간이 똑같은데 근데 이게 이렇게 해서 가라앉아버리니까 빛이 갈 때 똑바로 못 가고 빛이 와서 이렇게 와서 아래로 내려가서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돌아서 이렇게 해서 이렇게 오게 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거야.
그러니까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 이제 기존의 시간관과 공간 관 같은 것들이 이제 다 바뀌는 거야.
그러면서 이제 천문학에서도 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참석자 1 39:13
그러니까 그 영화에 보면은 왜 우주를 갔다 오니까는 8박 9일 만에 갔다가 왔는데 여기 와 보니까 500년이 흘러가 버렸더라면 그게 이제 거짓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사실이에요.
인터스텔라 같은 데 보면 그 영화에서 나오는 다루고 있는 장면이 그런 장면이거든요.
그런 데서부터 이제 상대주의가 생기기 시작하고 또 하나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이 뭐냐 하면은 이제 그거는 사실은 뉴턴 저기 뉴턴이 아니라 그전까지 있었던
참석자 1 40:06
다윈의 진화론 말고도 또 하나 이제 상대주의를 가져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뉴턴이에요.
뉴턴 아이작 뉴턴이 흐린 키디아라는 책을 써요. 그래서 이제 그게 뭐냐 하면은 어
참석자 4 40:30
선생님 주차 단속이 있는 것 같아서 잠깐 이동 주차좀 하고 오겠습니다.
참석자 1 40:34
갔다 와
참석자 1 40:42
낚시 끊으면 또 속 쓰리잖아.
참석자 2 40:48
죄송합니다.
참석자 10 40:49
저 건물에다 넣어버리면 그냥
참석자 9 40:51
네 그런 거 보면 좀
참석자 4 40:53
네 알겠습니다.
참석자 1 40:55
8억 7천 원 납치당하는 거. 그렇죠. 근데 그렇게 이제 뉴턴주의가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천둥과 번개가 치면 하나님이 화나셨다.
뭐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단순한 과학의 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은 수식으로 다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것이 프리티피아의 이제 법칙이에요.
니턴주의가 들어오면서 그다음에 그 이전에 더 빨리 있었던 건 산업혁명이 들어오면서 이미 이제 상대주의가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것처럼 예전에는 이제 신발은 김준성이는 이제 신발을 늘 만드는 사람이야.
그다음에 여기 있는 전도사님은 우산을 만드는 사람이야.
그다음에 또 우리 윤영광 목사님은 예를 들자면은 냄비를 만드는 냄비를 만드는 사람이야.
참석자 1 42:07
그걸 갖고 와서 서로 물물 교환하고 다 아는 사람들이 교환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 신발 하는 사람 신발 하나 만드는 사람이 공장을 세워서 그다음에 간의 수공원이지 세 사람을 모두 모아서 너는 위창 너는 위창 너는 끈 이렇게 나눠서 작업을 해가지고 막 하는 거야.
대량 생산을 하려고 보니까 뭐냐 하면 판 만드는 밑판 만드는 공장은 a 동네에 있고 끈 만드는 공장은 b 동네에 있고 그다음에 우창 만드는 거는 c 동네에 있단 말이야.
서로 얼굴을 알 필요가 없는 거야. 그리고 이 끈 만드는 사람은 끝만 만드는 거야.
그렇게 해서 그다음에 마지막 기동에서 그걸 다 조립을 해가지고 순식간에 신발이 쏟아져 나오니까 생산비가 막 엄청나게 떨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하던 것보다 훨씬 더 싸잖아.
참석자 1 43:10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신발을 만들어 갖고 오는 사람은 시장에 나와서 이 사람 거 한 켠에 살 돈으로 이 공장에서 나온 거 세 편에 산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사람들 산업에서 도태되어 버리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돼? 이게 엄청나게 많은 끈을 끈을 사겠다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거야.
그리고 끈 만드는 공장이 들어서는 거야. 미창 사겠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거야.
그러면 그 미 미창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고무가 필요할 거 아니야 고무를 조달하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이런 식으로 그걸 인프라라고 얘기하는 거야. 근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그다음에 무슨 사업을 하려면 도시로 안 들어오면 사업을 할 수가 없는 거야.
딴 데 저 산속에다 공장 하나 차려놓으면 이게 뭐 이게 이 재료들을 조달을 받을 길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들어오게 되니까 그다음에 어떻게 했냐면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 거야.
참석자 1 44:13
왜 신발만 생산해 내면 되니까. 그러면서 이제 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거야.
왜냐하면은 예전에 한 사람이 다 만들 때는 한 사람이 그걸 만들었던 거야.
그러니까 이제 이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김준성이 말고 우리 동네에는 없다.
이 사람이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근데 이제 전부 다 이쪽에서는 끈 미창 우창 이렇게 바뀌니까 그러면 아무도 이게 절대적인 게 아니야.
상대적인 거예요. 다른 것과 만나야지만 겨우 완성이 되는 것들이니까.
그러니까 이제 다 상대적인 일에 종사하게 되는 거지.
그러면서 이제 그런 것들이 도덕에도 들어오게 되고 그다음에 나중에 여기 보면 나오지만 예술이나 모든 거에도 다 이런 상대지인들이 들어오게 되는 거야.
참석자 1 45:08
그러다가 더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냐면은 1940년대에 이제 1910년대에 이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다음에 두 번째 이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은 인간이라 맨 처음에는 이제 신이 지배하던 자리를 인간의 이성이 차지하게 된 것이 이제 최초의 사건이고 그렇게 해서 이제 1차 대전이 일어나고 나서 이런 광적인 전쟁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내야 되겠다 해가지고 나온 게 국제연맹 그다음에 이제 2차 대전에서 또 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잖아요.
죽은 사람이 4천만 명에서 7천만 명 정도 아무튼 된다 그러는데 그 당시에는 인구도 얼마 안 됐으니까 어마어마한 비율의 사람이 죽은 거죠.
그래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이제 그런 것들을 볼 때에 결국은 인간의 이상이 믿을 수가 없구나.
너 보자에서 내려와라 끌어내리고 나니까 이성을 대신해서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뭐가 남았냐 하면 각자 개인이 남은 거야.
참석자 1 46:38
심지어는 거기다가 인간의 의지를 올려놓은 철학자들이 쇼팽 하우거나 니체 같은 사람이고 그다음에 욕망이라고 하는 부정적으로만 여겨지던 것들을 왕좌에다 올려놓은 사람이 이제 사드 같은 철학자거든.
아 그러니까 그런 욕망에서 오히려 더 말하자면은 인간다운 중요한 점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욕망이라는 것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을 그 죄인들에게서 나오는 욕망이라는 것이 뭐겠어요?
그냥 끊임없이 솟구치는 한 없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대신할 때까지는 멈추지 않는 욕망인데 그거를 두어 봤더니 그래도 역시 파괴적인 결과밖에 안 나오는 지금은 어떻게 됐지 모르겠다.
이제 이런 상황이 된 거야. 그러다 보니까는 잘 들어보세요.
이제 얼마나 재밌냐면 사람들은 이제 영국이 전부 다 이제 신앙적으로 다 무너져 버렸다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나는 이제 영국에 이제 커넥션들이 많았어요.
참석자 1 47:56
지금도 가지고 있고 그래서 1년에 한 번 정도씩은 꼭 방문을 하고 영국 교회에 이제 초청받아서 가서 집회도 하고 하는데 잊혀지지 않는 게 20 22년도가 아니 아니 21년도인가 몇 년이지 안 됐는데 어쨌든 나를 부문의 강사로 불렀어요.
그래서 갔는데 8교회가 연합집회를 하는데 1800명이 수련회에 모였어요.
그런데 180명 전부 다 다가 10대 20대 30대 40대야 그렇게 사모할 수가 없어.
그때 이제 강사로 갔던 사람이 이제 나하고 팀 켈러하고 둘이 같이 갔거든.
근데 사람들이 모였는데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신앙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야.
그게 뭐냐 하면 빛이 강하면은 어두움이 있듯이 이렇게 상대주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휩쓸고 지나가니까 그 속에서 자기가 너무 존재의 의미를 발견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던 사람들이 딱 전도를 하게 될 때 눈물을 쫙 흘리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는 그래서 런던에서 런던 시티미션 같은 데서는 영국 사람은 그런 말이 있어요.
참석자 1 49:37
하우스에 캐스로 영국 사람의 집은 성이에요. 그래서 미국은 대문을 열면 정원이 나와 그리고 정원 저쪽에 집이 마주 보여.
근데 영국식은 어떻게 하냐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집이 나와. 그럼 마당은 뒷마당이 돼 있어서 자기 혼자만 엔조이 하는 거야.
그런데 거기를 두드린다고 하는 것은 심하면 그 사람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어.
그리고 또 그렇게 그런 식으로 전도하는 거 불법이거든.
근데 배를 누르면은 전도하러 나왔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나와서 얘기를 듣는 거야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불행해진 건 죄 때문입니다.
눈물을 쫙 흘리면서 복음을 맞아 대는 역사 이라는 이제 스코틀랜드 같은 데로 예를 들자면은 자유주의 교회들은 텅텅 비었어요.
근데 프리 처치라고 있거든요. 이게 이제 국가로부터의 간섭을 거절한다는 의미에서 프리처치야.
그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은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거든.
참석자 1 51:06
계속 교인이 들어가요. 계속해서 교인 들어 놀라운 일인 거야.
얘기하면은 수도 없이 많아. 얘가 근데 이제 진도 나가야 되니까 그다음에 어디 있지?
버스 문더님 상황에서 그다음에 저랑 한번 읽어보세요.
참석자 4 51:29
오늘날 제가 얘기했습니다. 오늘날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보편 교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미미합니다.
더욱이 개신교 안에서 나타나는 나타나는 결과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그러한 세계관 운동이 사회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목회의 내용으로서 가르쳐지는 것입니다.
매주일 드리는 공적 예배를 통하여 그러한 세계관에 입각한 설교가 울려 퍼져야 합니다.
신학을 통한 성경의 정확한 해석과 그 해석의 결과들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할 때, 목회자는 설교 속에서 그러한 통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한 사람의 신자가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따라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목회자는 먼저 구도자가 되어야 하고, 설교자는 먼저 가르치고자 하는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회심의 역사는 교회가 참된 진리를 가졌을 때 나타납니다.
참석자 4 52:2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한 줄기 분명한 진리의 빛이 비치자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가 드러났습니다.
진리의 빛 속에서 바라보니 이제껏 내가 생각하던 사물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질서들은 자의적인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세뇌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던 우리가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던 세상은 사실 우리 자신을 주인 삼은 삶이었구나.
그러나 진리의 빛을 바꿔 보니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존재이구나.
이제껏 내가 경험한 모든 불행과 고통, 그리고 변화 받은 후에 인식하는 이 세상의 악함과 더러움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올바른 질서들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구나.
세상적으로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오늘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창조의 목적을 깨달으며 무엇을 생각하였습니까?
참석자 4 53:21
우리가 이 세상을 더럽힌 것은 이 세상이 원래 더럽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영광을 세상에 돌렸기 때문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하나님 삼은 자의적 우상숭배였습니다.
이제껏 우리의 불행은 이 세상의 자원이 부족하고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웅장한 진리의 체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열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육신 하시고 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이 모든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벼락처럼 때리시는 우례이고 또 번갯불이었습니다.
참석자 1 54:02
부담스러
참석자 5 54:03
죄인이 경험하는 회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심리적 후회입니다.
여기에는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보다는 죄의 결과인 비참에 대한 자각이 더 크게 작용합니다.
이것을 희랍어에서는 메타 멜로마이라고 하는데 후회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회개는 참된 회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일어납니다.
참석자 1 54:25
예 그게 이제 가롯 유다가 후회하였다고 한 게 바로 이거예요.
메타 마이 그다음에
참석자 5 54:37
둘째는 신학적 회개입니다. 이것을 희랍어에서는 메타 노예오라고 하는데 회개하다 각성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죄의 본질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거룩함, 자신의 뿌리 깊은 죄성에 대한 신학적 깨달음이 동반됩니다.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게 되면 진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마음에 갖게 됩니다.
조나던 에드워즈는 이것을 하나님의 초자연적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정동할 줄 아는 감각이라고 보았습니다.
중생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초자연적인 감각이 있는데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신적이고 영적인 취향으로 그 본질 전체에 있어서 앞선 종류의 지성의 감각 중 어느 것과도 다르고 다른 오감 중 어느 것과도 다른 것이며, 영적인 영적이고 신적인 일들에 있어서 자연인들에 의해 인식되는 어떤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이런 마음의 새로운 감각의 행사로 참된 성도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참석자 5 55:44
이것은 마치 꿀의 달콤한 맛이 꿀을 보거나 느끼는 것으로서 꿀에 대해 인간이 갖는 개념과는 다른 것과 같다.
내가 말하고 있는 이것은 말하자면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다.
참석자 7 55:59
복음의 진리는 저항할 수 없는 무한한 권위와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지성을 압도하고 우리의 마음을 덮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회심을 경험할 때 눈물을 흘리며 참여야 합니다.
진리와 상관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과 그로 말미암은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진리의 빛이 없어서 어둠 속에서 살았던 날들을 후회하며 울었고, 또한 명백하게 그 빛이 우리 주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의지로서 그 빛을 알기를 거절하며 살았던 날들 때문에 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직도 누군가가 이 빛을 모르기 때문에, 예전의 자신처럼 어둠 속에서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살아가 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이 빛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숙명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그 빛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진리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을 향하여 복음의 빚진 자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참석자 7 56:57
이것이 바로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효과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운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은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도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명의 핵심을 다메섹의 경험에서 설명한 것은 복음과 소명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이해입니다.
이에 대하여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석자 7 57:51
따라서 내려지는 결론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에 그분의 복음뿐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 대한 소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실만이 바울의 사도로서 사도로의 부르심 앞에 있는 안에 있는 강제력의 요소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잡힌 바 되었다고 느꼈으며, 복음 전파에 대한 숙명적인 신적 강제력 아래 놓였음을 느꼈다.
바울이 느낀 복음 전파에 대한 신적 강제력은 예전의 자신처럼 진리의 빛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비롯되어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백성을 보시고 그들의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상태를 보시며 마음 아파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이입된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진리와는 상관없이 상관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한때 진리를 알았으나 더 이상 그 진리에 붙들려 살지 않습니다.
참석자 7 58:54
어쩌면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로 종교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만을 터득한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자신들도 행복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빛의 자녀들이지만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석자 6 59:13
하나님과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너희는 복수이지만 빛은 단수입니다.
이 사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일시의 큰 언덕에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맞은편에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과 마주하였습니다.
각자의 손에는 다양한 크기의 거울이 들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짝만한 거울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만한 거울을, 또 어떤 사람은 티스푼보다 더 작은 유리 조각들을 들고 서 있습니다.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의 빛이 무수하게 많은 거울에 의해 반사됩니다.
거울의 크기와 모양이 각기 다르므로 반사되는 빛의 크기와 모양도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거울들은 각기 달라도 반사하는 태양빛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참석자 6 1:00:09
이것은 마치 비록 그리스도인의 성품과 재능은 각각 달라도 이 어두운 세상에서 모두 하나님 그 빛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다양함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원인이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교리적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은 현재적 설법입니다.
즉 앞으로 빛이 될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하여 빛이 되라는 당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너희는 어두운 이 세상을 비추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신 바로 그 빛이다라는 직접적이고 현재적인 선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 백성 혹은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야 함은 피할 수 없는 사명이며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 힘써야 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참석자 6 1:01:08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없는 빛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것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그 빛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빛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참석자 1 1:01:23
네 여기서 보면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이 마태복음 5장 14절에 나오잖아요.
그 앞에 뭐가 나와요? 그 앞에 무슨 내용이 나와요?
팔이 나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서 팔복이 나오죠.
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보냐 하면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그것을 예수님께서 우리가 적용할 때는 거기에 우리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지만 거기에서 지시하는 1차적으로 너희라는 것은 팔복의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참석자 1 1:02:07
그래서 결국은 빛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빛이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고 자신의 죄와 공동체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자가 되고, 그리하여 교만을 버리고 온유한 자가 되고, 불의를 버리고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고 등등등등등 이렇게 칠복의 조건을 갖췄을 바, 팔복 팔복의 조건을 갖췄을 때 그때에 그 사람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할 때 그 사람이라는 거지.
팔복의 사람이 되면 그는 본인이 의식하지 않아도 이미 빛의 사람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근데 뭘 보여줘요? 팔복의 완전한 팔목을 완전히 누렸던 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거를 이제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사람들이 이제 아무래도 성경은 우리 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 말씀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슬쩍 어떻게 할까? 주님이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석자 1 1:03:30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어요. 빛이라 직설적으로 직설법으로 말씀하셨지 빛이 되라라는 명령령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에요.
활복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 얘기 저 앞에 있는 저 팔복 책이 초록색으로 쓴 책이 바로 이제 그것들을 펼친 거예요.
깊이 있는 팔복이 펼친 것들. 그다음에 드럼 사랑 한번 읽어 보세요.
참석자 9 1:03:57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없는 빚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빚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내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 성경의 진리라는 사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사실은 신자의 마음속에서 어떤 식으로도 사라질 수 없는 빛입니다.
만약 이러한 빛이 없다면 그는 참으로 이 세상의 빛으로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순간 강력하게 뿜어내는 빛의 발현뿐 아니라 그 빛이 사라져 가는 것도 경험합니다.
참석자 9 1:04:54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새가 식은 후에는 더욱 단단한 새가 되듯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타오르던 마음도 씻어지면 예전보다 더 강하게 됩니다.
인간이 확신을 잃어버리면 열을 가하고 담금질을 한 새가 단단해지듯이 그 마음이 딱딱해진다.
만약 당신이 제재에 각성한 후에 그것에 대한 확신을 상실하게 된다면 또다시 각성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참석자 10 1:05:25
이러한 신자의 내면의 변화는 그 마음이 지속적으로 진리의 빛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빛과 관련하여 신자는 최초로 그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는 것의 필요성과 함께 그 진리의 빛을 자신 안에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에 중요성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분의 속성을 드러내는 모든 진리의 빛은 무한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세계를 통해, 인간과 역사를 통해 그 진리의 빛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 빛이 자신 안에 검증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해 가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며 반복입니다.
인간에게 인식되는 아름다움은 인간의 사랑의 원인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선하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여겨 사랑하게 되는 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참석자 10 1:06:23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제아무리 아름답게 보인다 할지라도 끝없이 마음이 이끌려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사상도, 존재도, 사물도, 인간이 무한히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무한한 이끌림은 오직 진리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진리만이 인간의 무한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진리 자체이시며, 또한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무한한 선이시며 무한한 아름다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과 아름다움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선과 아름다움은 신비하여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더욱 갈망하게 되고 다른 아무것으로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참석자 10 1:07:14
부르고 외치시사 나의 귀먹음을 깨뜨리시고 비추고 밝히시사 나의 눈몸을 쫓으시니 당신의 내음을 풍기실 때에 나는 취했고 당신을 그리워했으며, 당신을 맛본 뒤에 더욱 기가를 느끼오며 당신이 나를 만지시니 그 평안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참석자 1 1:07:33
그다음 사람
참석자 8 1:07:35
인간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건하고 신비로운 영적 경험 속에서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창조 세계 안에서 발견하며 그 아름다운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발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 구현되고 증진되도록 자연과 사회에 헌신하며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진리로 말미암는 이 행복을 알려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며, 곧 그리스도인의
참석자 1 1:08:03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거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만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래서 바라를 고르는 돌멩이 1개, 그다음에 이름 없이 담장에 피어난 이름 모를 들불들을 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는 거죠.
그 한 본보기를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드레핀 백합을 보아라 그런 것들이 모두 오히려 솔로몬의 아름다운 옷보다도 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모든 심지어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에까지 해도 그거는 이제 하나님을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자연적인 것들을 본받은 것들이거든요.
우리가 그러니까 그런 모든 자연 세계 속에 녹아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성품과 계시된 은혜를 찬송할 수 있는 그런 영성이 그게 진정한 영성이라는 거 계속해서 좀 더
참석자 8 1:09:42
이를 볼 때 성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며, 목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아름다움의 부녀입니다.
교회의 질서, 사랑의 질서, 성도의 영혼, 영혼의 은혜, 하나님의 통치 이 모든 것은 인간이 그 질서를 따르고 있는 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수단들입니다.
진리는 모두 아름다우며,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서 그 진리는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한 인간의 영혼은 진리를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진리를 닮은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어떤 국면을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존재하고 있는 무한한 진리에 비하면 무한히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그 진리를 안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을 항상 사랑과 영혼으로 인도합니다.
참석자 8 1:10:32
왜냐하면 진리를 안 사람은 자신이 발견한 진리의 아름다움이 사랑과 영혼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발견하고 아우구스티누스트는 다음과 같이 그 감격을 피력합니다.
진리를 아는 자는 그 빛을 알고, 그 빛을 아는 자는 영원을 압니다.
사람은 그 빛을 압니다. 오 영원한 진리요. 참된 사랑이시오.
사랑스러운 영혼이시오.
참석자 1 1:10:53
이게 아주 유명한 말이에요. 유명한. 그래서 그 밑에 보면은 노비트, 베리따 댐, 노비트 암 노비트 암 노비트 아이 따르니 다 댐,
참석자 1 1:11:15
에트베라, 카리타스, 에트카라 아이테르니다스 이 고백록에 나오는 내용인데 아주 외워야 할 정도로 유명한 말이에요.
어거스틴의 자명한 어록이에요. 그다음에 다음 사람, 그다음 사람
참석자 2 1:11:38
진리는 시간과 공간, 그 모든 것을 향하여 뻗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초월하여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절실히 알았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실증과 영혼에 대한 무관심은 진리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해야 할 인간의 마음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리는 끝없고 영혼은 아무것으로도 가둘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복음을 통해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그 일을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는 마땅히 죽을 때까지 그 진리를 추구하며 그 빛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여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는 동기는 무수히 많을 것이며, 또한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참석자 2 1:12:18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성욕심과 죽으심, 부활을 통하여 나타난 사랑을 알게 되고 나면 가야 할 길은 같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과 회심은 존재론적으로는 새로운 사랑의 성향을 부여받는 것이고, 인 인심록 론적으로는 진리의 탁월함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석자 3 1:12:40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 양떼들을 목양 받게 하신 목적은 목회 사역을 통해 성도들에게 진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선한 의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실로 진리보다 탁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일 것이며, 그러나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진리 자체이신 것이다라는 언급은 목회 사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문화를 대하는 우리 모든 태도에 있어서 확고한 좌표로 삼아야 할 발언입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 공적인 예배를 통해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는 것, 진리의 빛 앞에서 회개하고 고치는 것, 그리고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 것 등의 실천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더욱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하셨던 그 위치로 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참석자 3 1:13:31
예배는 진리와 관계되어 있기에 구별된 시간이고, 기도는 진리이신 하나님께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에 부합하고 살도록 매달리는 시간이 시기에 특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없으면 우리가 진리에 부합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사모하여야 할 것이고, 교회는 진리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기는 곳이
참석자 4 1:13:56
진리는 그 자체가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안 모든 사람을 그 무한과 영혼 속으로 잡아끄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회심하고 나서야 우주의 무한함이 경이롭게 느껴졌고, 인간의 심리와 시간의 무한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비단 처 한 사람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 진리의 영원성과 무한성에 지속적으로 이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빛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빛을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늘 있던 사물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고, 자신에 대하여 또 하나님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참석자 5 1:14:44
이 하나님의 영광과 빛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빛과 밀접하게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영광의 용래를 분석해 보면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체적 영광, 발산적 영광, 효과적 영광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첫째로 본체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는 정이 될 수 없습니다. 사물에 대한 정의는 그것이 한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과 견딜 수 있는 다른 사물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한자이시고 다른 사물들과 나란히 비교될 수 있는 사물이 아니시기에 정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수로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서술처럼 말입니다.
본체적 영광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참석자 5 1:15:47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그분 자신의 고유한 탁월하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합된 모든 속성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그분의 모든 행하심으로부터 빛이 비치게 하시며, 자신의 영광 이외의 모든 것을 어둡게 하여 보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발산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인 쉐키나를 가리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어떤 특별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가 신의산에 올라갔을 때 빽빽한 구름과 함께 머물렀던 하나님의 임재, 광야 교회이던 시절, 성막 위에 머물렀던 구름 기둥과 불기둥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로서 하나님 자신이 거기 계신 사실을 지시하는 표지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참석자 5 1:16:48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동일하게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특별한 임재를 하나님께서 다른 장소에 덜 계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동일하게 계시지만 특별한 목적을 갖고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강력하게 나타나기도 하십니다.
특정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장소적이고 시간적인 임재를 가리켜서 발산적 영광이라고 합니다.
참석자 7 1:17:19
셋째로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이 세상에 높이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은 소멸되거나 감소될 수 없으며, 더욱이 인간의 위에 훼손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은 펴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인간이 그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거나 업신여기는 것에 따라 하나님 이름의 위상이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여김 받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가변적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효과적 영광이라 부릅니다. 즉 하나님의 효과적 영광이 높이 드높을 때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높아지며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반대입니다.
이는 마치 태양 자체와 일기의 관계와 같습니다.
참석자 7 1:18:26
인간이 경험하는 변화무쌍한 기후와 날씨의 변화는 대기권 때문입니다.
비바람과 눈보라, 천둥과 번개, 그리고 우박과 같은 것들은 모두 대기에서 일어나는 기후의 조화입니다.
그러나 날씨에 변화무쌍한 현실과는 상관없이 구름과 대기권 너머에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빛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태양 자체는 빛을 잃은 경우가 없으나 땅에서 볼 때는 때로는 때로 구름에 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비바람 앞에 힘을 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에 대한 효과적 영광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참석자 6 1:19:05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에 대한 효과적 영광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도 하고 모욕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충만한 영광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본체적 영광이 이 세상에서 그에 합당한 이름의 영광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으시기에 인간으로부터 당신의 영광을 인정받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인정하며 살아감으로써 세계와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성취하고, 또한 그 안에서 인간 자신도 가장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호와가 음으로 너를 불렀쓴.
즉 내가 내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또 이렇게 말합니다.
참석자 6 1:20:01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들과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처럼 인간은 효과적인 영광을 드러내며 이 땅에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효과적인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처럼
참석자 9 1:20:25
그 미스로 부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진리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은 그 빛의 나를 통한 빛을 더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빛을 먼저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즐겁게 할 것이며, 나아가 그 빛을 모른 채 어둠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등 뒤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과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당신의 장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짓으로 부르신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간격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당을 널처럼 보하라. a 신학적 의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의미는 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불러주신다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요소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
참석자 9 1:21:33
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먼저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진리요 급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세상의 빛이라고 일컬음을 받은 것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빛의 비유를 생각할 때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신학적 사실입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이 비유는 그 빛이 무엇인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단순히 인도주의와 도덕주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빛으로 생각하는 접근을 처음부터 차단합니다.
윤리적 접근보다는 신학적 접근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참석자 10 1:22:40
한 사람의 도덕적인 삶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상 만물의 질서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세워지는 건물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도덕적 행동은 그의 신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 신념은 세상 만사가 마땅히 정의되어야 하는 도리에 대한 신념입니다.
그 도리에 대한 이해가 체계적이고 확고하면 일관된 도덕 생활이 나오고, 그렇지 못하면 도덕 생활이 우발적이고 자의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 내세, 절대 가치, 기준 등에 대한 믿음이 도덕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윤리적 행동의 동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있고, 그렇게 살게 하는 은혜로운 가마는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성육신 안에서 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항상 그리스도인의 모든 거룩한 삶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에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참석자 10 1:23:41
이 십자가에 대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현재 완료 시대로 고백합니다.
함께 못 박혔나니는 희랍어로 쉬네스 타우로 마이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효과와 영향은 지금 자신 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참석자 8 1:24:17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또한 우리를 빛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을 생각하게 합니다.
시간 세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신성과 인성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찬란한 신성의 빛을 인성 안에 감추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숨기신 것은 아닙니다.
신앙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찬란한 신성의 빛을 비추어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그 유명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라고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신성의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성의 빛은 믿음으로 나아온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비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의 빛은 인격과 삶의 모범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비추어졌습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참석자 8 1:25:12
하나님을 암 들음과 봄 첫째로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 유대인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이 오디오로 듣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삶은 비디오로 보듯 정확하게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발견하고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사랑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우리를 위한 허목 제물로 들이심으로써 입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참석자 2 1:25:52
이렇게 이루신 숙제 사역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중생과 회심을 통하여 당신과 우리 사이에 독특한 영적 관계를 수립하셨습니다.
죄에서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과 결과들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자원들을 공감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관계의 독특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중생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연합은 신비로운 것이며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그리스도의 교회 일부가 되게 하심으로써 그 빛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당신에 관한 탁월한 지식들을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목회로서 소유하게 하십니다.
참석자 2 1:26:30
성령 안에서 교회를 한몸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그러한 연합 안에서 그 빛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둘째, 성화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성품과 정신을 닮아감으로써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가 그 빛 자체이셨기 때문에 빛으로 나타나셨던 것처럼, 신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본받음으로써 그 빛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에 관해 많이 배웠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어둠과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죄인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그들의 헌대를 오로 만지시며, 땀을 흘리시고, 더러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그들의 팔을 씻기시고,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참석자 2 1:27:14
무서운 율법의 칼을 든 하나님이 아니라 한 손에는 우리를 때리시는 사랑의 회초리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우리를 치료하고 싸매시는 용서와 위로를 들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 없던 세례와 창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위로와 안식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품은 완벽한 쉼의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은 빛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며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까?
십자가에서 공예와 사랑을 함께 나타나게 보여주는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그 빛에 참여하는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석자 3 1:27:52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삶, 둘째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삶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빛의 근원이 될 수 없으나 빛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써 빛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찬란한 지식의 빛을 받고 예전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이 세계는 우리의 숭배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돌보고 갖고 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을 드려야 할 일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결코 숭배의 대 대상일 수 없고, 나의 진정한 보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모든 지식의 연관을 알게 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참석자 3 1:28:47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경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 지식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지만, 또한 그것은 인간에 의하여 버려지기도 하고 취하여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
내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보태지 못하게 할 것이오.
내가 내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내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참석자 4 1:29:1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 가지 차원으로 작용합니다.
언약적 차원, 인식적 차원, 그리고 헌신적 차원이 바로 그것입니다.
첫째, 언약적 차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 실패하는 것은 언약을 파괴하는 행위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의무는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인식적 차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잊혀질 수도 있고 또 거부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었습니다.
셋째, 헌신적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지 이성으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순종하게 하는 내적인 동기로서 작용합니다.
이것은 곧 계시를 통하여 알게 된 계명에 대한 외적인 순종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사랑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참석자 4 1:30:06
이스라엘 백성은 이 지식을 공동체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과는 구별되는 경건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지식을 말한 지식을 의미하는 희랍어 단어는 그노시스, 희랍어 단어 그노시스는 히브리어에서 지식을 의미하는 다트에 동치합니다.
참석자 5 1:30:34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명백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리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방식은 구약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명료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참석자 5 1:31:12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이 언급하는 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핵심은 곧 불의한 인간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앎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러한 신구약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복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을 보여줍니다.
참석자 7 1:31:52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의 지성적 특징을 구원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경험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새로운 찬양의 내용을 갖습니다. 이제 그들은 천사들이 알고 싶어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의 영, 영광스러운 사역들에 대한 이해를 갖습니다.
이것은 전에 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구원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그리고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죽기까지의 사랑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것들을 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찬송의 제목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의 빛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커다란 행복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빛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진리의 교통을 이루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참석자 7 1:32:51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빛은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더욱 깨달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신자의 노력과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결코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은혜와 부패라는 개혁주의 경험적 청교도 신앙의 유장한 담론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오늘날 비윤리적인 행위로 사람의 지탄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을 오르내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 영화 속에서까지 사회적 반감과 지탄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이러한 사람들 중에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어떤 이들은 한때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빛의 비춤을 받았으나 그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신앙의 현재성입니다.
참석자 6 1:33:52
이전엔 아무리 신앙을 경험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매일 진리의 기도 앞에서 그와 하나 된 삶을 살아가려는 수고와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그렇게 비비윤리적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에는 쉽게 익숙해야 하지만 익숙해지지 않지만 아기는 쉽게 익숙해지며, 또한 익힌 바 선을 행하는 것보다도 익히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많고, 또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은 후에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탁월한 구속 경련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공적 경건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받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기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불변성으로 인하여 교만하지 말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그 빛 가운데 머물고자 끊임없이 애써야 합니다.
윤리적 논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불러주셨다는 두 번째 의미는 윤리적인 것입니다.
참석자 6 1:35:02
히라어 성경은 그 빛이라고 기록할 뿐 아니라 세상에도 전반사를 붙여 그 세상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으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이 지니는 윤리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의미와 인간의 진정한 자유,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에 대하여 숙고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의미, 성경에서 세상을 뜻하는 단어 코스모스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로 있는 그대로 실제하고 있는 현재의 세상입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배제한 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로서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후 회복하고자 하시는 세상입니다.
셋째로 탈락하고 구속받아야 할 세상입니다. 이 세 번째 의미에서 세상은 죄를 특징으로 합니다.
성경에서 이 세상은 종종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참석자 6 1:36:0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은 곧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빛으로 존재해야 할 이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간 세상.
하나님께서 한때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였으나 지금은 타락한 세상의 인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세상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바로 그러한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진리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킬지 모르지만 인간을 참다운 행복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참석자 6 1:36:58
눈부신 과학의 기술로 우주를 여행하고, 사물의 미세한 세계와 천체의 거대한 우주를 헤아린다 할지라도 그것들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무엇으로도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의 발전이나 물질의 풍요는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과학적 진리는 인간의 육체를 풍족하게 할지 모르지만, 영혼을 자유하게 하여 진정으로 인간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게 하는 것은 오직 진리의 규칙, 진리의 빛뿐입니다.
참석자 9 1:37:33
이 진정한 자유 신학교 시절 만난 선배 하나는 소련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지역은 냉전 시대 소비에트 연방이라 불리던 공산국가였습니다.
그때 이 선배가 하던 일은 소련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인을 찾아내어 탈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걸리면 목숨을 내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다음에 얘기는 그 선배에게서 직접 들은 감정입니다.
선배는 어느 나이 든 부분을 치밀한 작전 끝에 미국으로 망명시켰습니다.
상당한 액수의 뇌물을 공무원들에게 뿌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몇 명은 목숨을 내놓고 수행한 작전이었습니다.
1년은 무사히 미국에 정착한 그 노부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간절하게 이런 부탁을 하였습니다.
선교사님 우리를 다시 소련으로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그래서 깜짝 놀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우리는 여기와 같은 자유로운 세상으로 오면 마음껏 신앙생활하기가 더 좋을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참석자 9 1:38:37
어른이 신앙생활하는 게 훨씬 좋고 행복합니다. 여기는 핍박도 없고 먹을 것도 지쳐지지만 서서히 심장이 부패해지며 영적 무장이 해제됩니다.
비슷한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느 안과 의사에게서 들은 실화입니다.
그 의사는 무료로 계양 수술을 해주는 사람이었는데, 신앙심이 깊은 어느 무의탁 노인을 수술해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그 할아버지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한 줄 몰랐어 보이지 않던 때는 좋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줄 몰랐어.
차라리 눈 뜨기 전으로 돌아가고싶소. 진정한 자유는 몸의 자유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 자원의 궁핍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이 모든 부당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참석자 10 1:39:31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의 구속을 통하여 이중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신분의 자유와 상태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신분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종, 마귀의 자식의 상태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부를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연분을 얻게 되었고, 믿음과 의와 구원의 부사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상태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를 마음과 영혼의 모든 악한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경험하는 모든 악과 고통은 죄에 의하여 이야기된 병적 중상입니다.
이것은 참 행복은 인간의 참 행복은 자유에 있습니다.
그 자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양도할 수 없는 독특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윤리적인 삶은 바로 이러한 내적 자유,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상태의 열매입니다.
참석자 10 1:40:28
지금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를 갈망하여 도덕의 기준을 거부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방중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의 추구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속박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석자 8 1:40:45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이라고 표현하셨을 때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비관적 세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세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사도 바울 바울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나타남이라고 감격하며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이셨도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 빛을 허공에 비추지 않으시고 어두운 세상에 비추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교회의 목회와 성도들의 인격과 생활을 통해 드러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마음이 어두워졌고, 그리하여 빛으로 부름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신학적 의미를 올바로 알지 못합니다.
참석자 8 1:41:37
그리고 그 신학적인 의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에게서 윤리적인 의미를 쉽게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신학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기 때문이 인간에게 있는 공통적인 윤리 의식들과 양심의 빛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쉽게 발견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직접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들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을 보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이익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그 세상이 우리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은 윤리를 통해 인간의 적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사람의 행복과 절대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참석자 8 1:42:22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하나님께만 보이도록 사용되는 윤리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봐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이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세계와 역사와 이웃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 관계에 충실하게 사는 삶과 그 관계 너머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 둘이 분리되거나 그 둘 중 어느 하나 때문에 다른 하나가 무시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도덕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열광주의자들 모두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그 빛이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에게 한 빛이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참석자 2 1:43:03
최고의 섬김 영광을 드러내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섬김은 그 빛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빛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조나단 에누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그분의 지성 혹은 의지 안에 있다.
그분의 지성의 영광 곧 충만하심이 그분의 지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 안에 그 특별한 좌수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과 충만하심은 그분의 거룩하심과 동락이다.
오늘날 우리 조국 교회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이 세상에 반영하고 있습니까?
참석자 2 1:43:40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뜻을 따라 하나님과 세계와 교회와 역사와 우리 인간을, 인간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것들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설정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이 세상을 향한 선한 의지, 곧 타락하고 구원받아야 할 이 세상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죄인을 사랑하되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치와 가치의 질서와 도덕의 기준들을 드러내게 하는 방식으로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이 세상을, 이 세상에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진리의 빛을 비추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 진리의 사랑, 그 빛으로 살아가는 도덕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론,
참석자 3 1:44:23
하나님께서 죄 많은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신앙을 도구 삼아 이 험한 세상의 파도를 타고 넘으며 인생을 쉽게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녀들을 세상에 두신 것은 어둠에 익숙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 빛으로 어둠을 이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을 비추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 빛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진리의 빛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의 삶으로 도덕적 감화를 끼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도덕주의는 신학이 없는 윤리이며, 도덕이 없는 복음주의는 자기 만족적이고 소비적 영성에 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그 빛에 참여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정직하고 영향력 있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참석자 3 1:45:16
모든 교인이 진리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고 일평생 그 십자가의 의미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더 큰 복음의 능력과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삶으로 뻗어나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으로 쇄신하는 일에 이바지하지 아니하는 모든 종교적 혜택은 자기 만족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영성으로 굴러 떨어져 자신만을 위하여 소비되고 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하여 빛으로 부르신 신학적인 의미와 함께 윤리적인 의미를 강조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참석자 1 1:45:56
그다음 페이지를 넘겨보시면 이제 오늘 우리가 공부한 내용이 한 번에 쫙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에 빛이 있는데 신약의 빛의 용래가 세 가지 물리적 윤리적 신학적 의미 있고, 그다음에 그 빛은 신자들, 그 발광과 반사 그러나 인간 자신은 빛이 아니다.
도덕적 상대주의가 왜 시작되었는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고, 하나님과 영광의 빛,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이미 노력하여 빛이 되어야 될 사람이 아니라 이미 세상의 빛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빛, 그 빛으로 부르시는 하나님, 그 빛으로 부르심의 신학적인 의미, 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빛으로 부르신 사람들의 윤리적인 의미, 세상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세상, 최고의 섬김, 그다음에 결론 이렇게 되어가는 거죠.
그래서 이 책 전체가 여기 보세요. 이 책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이렇게 두 기둥 표현이 돼요.
참석자 1 1:47:22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지식 사랑, 그 지식은 신학의 체계와 신학의 체계와 지성의 명료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윤리적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지식과 그러니까 사상과 하나는 사상의 기둥과 하나는 윤리의 기둥인데 사상과 윤리의 기둥인데 이 사상은 지성과 관련되고 그다음에 윤리의 기둥은 사랑과 관련이 되는데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이렇게 아치처럼 이렇게 엮어주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게 이제 기독교가 견고하게 서는 비결이고 그게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의 하나의 가치에 청사진이 되어야 되는 혹시 오늘 수업에 대해서 질문하실 거 있으면 하시죠?
없어요. 그럼 제가 물어볼까요?
참석자 1 1:48:50
다음 모임 다음 이 빛으로 산다는 것의 모임은 3월 모임은 3월 9일 날 갔습니다.
제가 기도 제목이 있는데요. 좀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3월 제가 26일 날 출국해서 4월 6일날 돌아와요.
이제 그때는 이제 우리가 좀 잠깐 쉬게 되겠는데 덴버 신학교에서 초청을 했는데 이제 맨 처음에는 그냥 한 20~30명 모이는 클라스에서 이제 발표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학교 측에서 이제 학생들 전교생을 모아놓겠다고 그리고 교수들도 전부 참석시킬 테니까 강연을 해달라고 그러는데 그래서 지금 이제 제가 논문을 어제도 8시간 어제도 6시간이나 교회 갔다 와서 이제 쓰고 지금도 계속 한 80% 썼어요.
그래도 다행히 근데 가기 전에 아예 책까지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가야 되니까 지금 시간이 급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쓰고 있는데 제네바의 부흥 운동 19세기에 제네바에서 있었던 부흥 운동 우리 지난번에 설교 시간에 루베이 운동 나온 거 있잖아요.
참석자 1 1:50:25
그거를 가지고 이제 제목을 19세기 유럽의 문맥에서 본 제네바 부흥 운동의 재평가 뭐 그런 식이죠.
리컨시더링 오버 제네바 르베이 무브먼트 인 나인티엔트 유럽 나인티엔트 센추리 인 유럽 이렇게 제목 영어 제목이 붙었거든요.
그래서 어쨌든지 간에 통역 없이 이제 저도 해야 되는데 이게
참석자 10 1:51:11
일어나지 않지 내 마음에
참석자 1 1:51:14
아니요. 그 내용이 제네바라는 거고 어디로 가시죠?
미국 덴버 신학교에 덴버 신학교인데 그래서 이제 영어로 해야 되는데 이제 나는 이제 기대하기에는 뭐 어떻게 하든지 하긴 하겠죠.
근데 이제 그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지난 시간에 제네바 르베이 운동 가지고 이제 설교 준비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그 운동이 없었으면 사실은 우리에게 칼빈이 안 알려졌을지도 몰라요.
그런 정도의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그래서 이제 내가 어제부터 이제 간절히 기도하는 바는 하나님 한번 이 강연이 폭탄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면서 자유주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이렇게 이제 바르트의 신학을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이제 미국 사람들에게 한 번 그 강연을 모두 듣고 나면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을 정도로 은혜를 받고 다시 한 번 제네바의 부흥이 덴버에서 일어나야 되겠다 하는 그런 소망을 갖도록 기도를 좀 많이 해 주세요.
참석자 1 1:52:42
이건 진짜 기도를 많이 해야 돼 원래 따지자면 사실은 이게 원래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려고 그랬는데 갑자기 상암동 콘서트장으로 가게 된 거거든요.
상암동에 노래방은 6명이 들어가면 되는데 이 상암 경기장은 5만 명이 6만 명이 들어간다며 그러니까는 이제 그렇게 경기장에서 말하자면 콘서트를 하게 되는 건데 하나님이 하시려니까 보내시는 거겠지 그러고 그냥 뭐 쫄지 않고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서 최선을 다해서 선포하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보자 그래 그렇게 해서 한번 그 사람들이 나의 강의를 통해서 덴버 신학교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범을 15분 쉬었다가 우리 처치 2.0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을 가지고 공부하게 하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참석자 1 1:54:01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의지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이후에 있을 시간에도 주님이 동행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참석자 5 1:54:17
아멘
참석자 1 1:54:19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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