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은혜의 지배_15장

죄와 은혜의 지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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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은혜의 지배 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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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이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 죄와 은혜 지배에 관한 전체적인 교류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부분입니다. 그것은 신자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죽이지 않고 않고는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 죽임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의무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종칼빈의 지적과 같이 우리의 원수는 마귀도 아니고이 세상도 아니고이 자신입니다. 우리의 부패한이 본손이야말로 신자에는 우리가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데 가장 큰 계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00:55) 그래서이 교리를 진술하면서 우리는 어느덧 죄가 아주 끔찍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다룰 내용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조금 역설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집니다.이 죄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피흘리기까지 싸워 파멸시켜야 하지만 또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사실입니다. 서론 전제되어야 할 사실들. A 복음과 하나님의 지혜. 첫째로이 놀라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복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측장할 수 없는 지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 지혜는 얼마나 놀라운지 사람은 물론이고 마귀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01:47)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이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미련한 방법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거로 하나님께서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죄인들을 구원하는 지혜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누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십니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1장 24절.
(02:39) 죄와 관련해서도 복음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 있습니다. 죄의 계획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의 그런 계획이 그대로 성취되도록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더욱이 신자 안에 있는 죄를 말할 수 없이 지혜로운 방식으로 다스리심으로써 결국 그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B.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에서 말하는 죄. 둘째로 죄가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로 역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죄는 신자가 사랑하는 죄가 아니라 그에 대항하여 싸우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이어야 합니다.
(03:35)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자면 범죄한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인간이 다할 수 없는 지혜로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영관을 지으시는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저자이실 수 없고 그분의 궁극적이고 우주적인 창조의 계획이 그 죄에 의하여 좌절되지도 않습니다.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불순물들을 인하여 더욱 거색게 타오르듯이 결국 죄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서 윌리엄 핸드릭슨이라는 경건한 신학자는 이러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을 짤 때에 여러 가지 색깔의 명주실로 직조를 하는데 직조되는 앞면을 보면 수많은 실밥들이 지저분하게 매달려 있고 무늬도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뒷면에서는 날아다니고 신의 머물이 흐르고 사슴이
(04:39) 뛰어다니는 수가 놓이듯이 인간의 죄를 사용하여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계획도 그러하다고 설명합니다. 요즘도 자살을 많이 합니다만 옛날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살할 때 사용하던 방법 중 하나는 간수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간수는 농축된 바닷물에서 소금을 채취하고 나머지 짜고 쓴 물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노예살리 같은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자살라는 수단으로 자량의 소금을 먹었다고 하니 그것이 농축된 간수가 자살을 위한 물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이 간수를 한 살발 마시면 확실하게 목숨을 끊을 수 있었습니다.
(05:32) 그런데 그 간수가 무엇을 무엇에 사용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지금도 두부를 제대로 만들기 위하여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콩물을 굳혀서 두부로 만드는데 사용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우리가 늘 먹는 두부가 사람이 먹는 죽는 간수로 만들어진다고? 그렇다면 모든 두부에는 미당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독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니 분명하구나. 두부를 많이 먹으면 그 독성분이 누적되어 결국은 목숨이 위태로 붙겠구나.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두부를 많이 먹었지만 두부를 굳이 넣은간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06:23) 오히려 담백질만은 두부를 즐겨 먹는 먹거리로 선택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의 문제도 이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국에서는 소금이 자살하는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이 소금 없이 못 삽니다. 국, 찌개, 반찬에 모두 소금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음식 속에서 미량의 독을 먹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금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양질의 소금은 깨끗한 물, 맑은 공기, 충분한 햇빛과 함께 생전에 꼭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죄에게는 분명한 계획이 있습니다.
(07:12) 죄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서 지배력을 얻고 싶어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고 우리의 영혼을 장악해서 신자이지만 불신자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하는 것이 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의 계획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합니다. 죄에는 그런 궁극적이고 파괴적인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계획을 가진 죄를 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죄로운 방식으로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은혜가 넘치게 하십니다. 1. 죄의 존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의 존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08:05) 우리가 분투하는 성화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죄는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고도의 성화에 도달하였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완전히 순결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도이 세상에서는 나는 죄를 완전히 죽였다. 그래서 이제 내 안에는 죄가 없다. 나는 절대적인 순결의 상태에 도달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우는 신자들 안에서도 죄의 존재는 지속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지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죄가 크면 은혜도 크게 하시고 죄가 지속적이면 은혜도 지속적이게 하십니다. A 탁월한 은혜 베푸심의 수단이 된 1. 죄임의 은혜.
(08:57) 신약 성경과 함께 청교도들이 대인 경건에 있어서 꿈꾸었던 이상은 죄를 죽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스스로 사랑하고 선택하고 잊지 않은 상태의 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지속적인 성화의 싸움을 통하여 죄의 경향성이 지극히 약화된 상태에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마치 내제하는 죄의 경향성이 거의 생명을 잃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약화된 상태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은혜가 매우 우세하게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09:48)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2. 회개의 은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통하여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또 어떻게 하여야 그 죄를 극복할 수 있는지도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죄를 깨닫게 되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간절한 기도로 마음을 쏟아놓게 되자 속에 깊이 들어와 자신과 하나되어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던 죄들이 객관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10:40)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신자로 하여금 더욱 기도하게 하고 기도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맛부터 싸우기 시작하자 죄는 죽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고 마음에는 죄가 깃뜨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은혜가 그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죄를 죽이고 나면 그다음에는 죄에 매어서 종처럼 살아가는 것이 절대 숙명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워지는 확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된 것과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최후 지배 아래 있던 자신을 변화시켜 준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세삼 느끼게 됩니다.
(11:30) 아, 복음에 이러한 능력이 있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고 운동력이 있어서 자우의 날선 어떤 금보다도 예리하여 내 심령을 파헤치고 영과 혼과 관절과 불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내 안에 있는 많은 것들을 드러내서 벌거벗은 것처럼 보여주는구나라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구약 성경에서 자인만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의 안에 바세바와 범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19)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으소서. 시편 51편 11 12절.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쳐들었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교재의 단절을 경험하였고 율법을 따라 제사를 려도 하나님의 면전에서 버림받은 것 같은 거절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로 말미암아 약기된 무서운 고통 속에서 성절이 하나님께 울부짖었고 거기서 그는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행복보다 자신의 마음이 정결해지고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회복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다윗이 범죄한 것도 나쁜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다윗 안에 살아나게 된 죄의 경향성도 악한 것이었습니다.
(13:08) 그러나 신학자 벤자민 오워필드의 지적과 같이 다윗은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죄와 구원에 관하여 구약 계시 속에서 최고의 경험적인 이해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범죄와 그것을 통절히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는 위대한 용서의 계시에 있어서 최고의 담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죄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죄를 통하여 그는 죄의 비참한 결과를 뼈인 고통 속에서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고 거기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가 이러한 일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용하셔서 신자에게 이러한 은혜를 넘치게 하신 것입니다.
(14:00) 결국 그는 죄 가운데 넘어져 비참한 처지가 된 자신을 조롱하던 자기의 양심과 그밖에 모든 이들에 대하여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다. 시편 6편 8절 3. 신자 안에서 경험되는 죄의 객관화. 그런데 때로는 부주의하고 태만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마음속에 죄가 쌓이는데도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용서를 빌면서도 여전히 그 죄를 사랑하고 또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그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이 결코 은혜의 기회가 될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죄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결코 죄가 은혜의 기회가 될 수 없습니다.
(14:52) 신자에게 죄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고 실제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죄 죽임을 위한 분투가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로서 죄는 은혜의 기회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죄를 주관적으로 사랑하는 신자의 영혼 안에서는 죄의 존재가 은혜의 기회가 될 수 없지만 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것과 더불어 대항하고자 할 때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존재는 오히려 은혜의 기회가 됩니다.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의 실천은 죄를 주관적으로 사랑하던 신자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의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죄를 주관적으로 사랑하던 상황에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퇴할 수 있게 됩니다.
(15:45) 이 회개의 과정 안에서 실제적인 죄임이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은 기도의 실천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기어올리는 진실한 기도의 실천이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의 실천은 주관적으로 사랑하던 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죄를 죄로서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을 드리는 진실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대체로 한 번의 기도 실천으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특히 마음이 굳어 있거나 은혜로부터 멀어진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반복적인 기도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울어나오는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를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죄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16:36) 그래서 그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죄를 묘하고 죽이기까지 싸우게 합니다. 자가 기도 속에서 이렇게 죄를 인식하고 신음하면서 실름할 때 그것이 곧 영혼이 죄와 맛부터 결전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영혼의 씨름을 통해서 죄는 급속히 생명력을 잃기 시작하고 마음은 은혜로운 틀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138편 3절. B 우리 안에 남은 죄가 아름다운 이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죄의 집배라는 측면에서 보면 죄는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17:28) 그러나 신자가 주관적으로 사랑하던 죄를 버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며 더불어 싸우려고 할 때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 어려움을 인해 은혜를 구하게 됨. 첫째로 그 어려움을 인하여 은혜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순종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어 빛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기 시작하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더욱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18:18) 그리고 그 도움을 구하는 과정을 통하여 그의 마음은 거룩하게 연단되고 성품의 올고둠을 회복하게 됩니다. 죄는 영혼 안에서 속임과 강압으로 역사하여 신자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죄의 지배가 있는 신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죄는 정욕을 통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힘을 공급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을 계수롭지 않게 여기는 담대함을 줍니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 죄책감도 현재히 약화됩니다. 죄책감은 영적인 무모함을 막아주는 제동 장치인데 그마저 사라지거나 현재의 악화되 약화되면 그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하여 마음이 담대질 것입니다.
(19:16)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죄가 가져올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도 대담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어느 순간에 자기가 너무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많은 죄를 지은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또한 그러한 자신의 범죄한 상태에 대하여 아파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 때문에 불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꺾게 됩니다. 이것을 자기 깨어짐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은 이렇게 부단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20:01)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는 악한 부패성이 우리의 뼈속 깊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패성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타락과 선한 일을 향한 무능으로 나타납니다. 아, 우리의 악함이 얼마나 크고 뿌리 깊은지요. 날마다 절망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신앙 고백을 해도 살 깊이 뼈속 깊이 박힌 더럽고 부패한 번성이 얼마나 우리를 순종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하는지요.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철저한 자기 부인과 진실한 깨어짐이 필요한 것도 바로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자기 의에 대하여 끊임없이 깨어져야 합니다.
(20:47) 그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뿌리깊은 악한 본성을 자각하고 절망하는 것만큼 오직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우르러 바라보는 절대 의존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성화의 먼부림의 도상에 있는 신자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거룩해져 가기를 사모할수록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우리의 악함과 부패성을 발견하고 아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령 깊은 곳에서 아직도 끊지 못하고 있는 즐긴 세상 사람과 자기 신뢰를 발견하고 그런 자신을 용납해 주는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21:34)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피흘리기까지 죄와 더불어 싸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가 어찌 아버지의 마음에 기쁘시기까지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불결함과 거룩한 자녀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사이에 존재하는 그 엄청난 차이 앞에서 우리는 울고 맙니다. 어찌하든지 우리가 진실하고 거룩한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은데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거룩함에이를 수 없기에 우리는 자주 깨어집니다. 그래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깨어지고 스스로를 신뢰하던 자기 의에 대한 자랑에서 깨어집니다.
(22:17) 그리고 그렇게 흐르는 눈물이 우리 마음에 더러운 눈을 씻어내면 사라졌던 안광을 회복하게 되고 오직 소망이신 그리스도만이 또렷히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아 비쳐난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위로가 되는지요. 이러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종에 거룩하게 하는 조과는 그 사람의 온 마음과 영혼의 미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시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04) 베드로전서 1장 22절. 다시 말해서 신자가 죄와 싸워 그것을 이기고 순종할 때에 그 과정을 통해서 마음과 영혼은 은혜를 회복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신자의 전 삶을 거룩한 영향력으로 쇠되게 하십니다.이 모든 일은 우리 안에 죄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이 은혜로운 역사는 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죄를 인식하고 죄와 더불어 분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전속을 은혜 공급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아, 악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하심이여, 지혜의 부요하심이여.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기를 포기하게 함.
(23:59) 둘째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기를 포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모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칼빈은 말합니다. 인간은 명백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주시하고 난 다음 자기 자신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는 한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이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래적 교만으로 인해 제시되는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우리의 불의와 더러움과 어리석음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을 항상 의롭고 올바르고 지혜로우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4:47) 회심의 경험은 이러한 사실에 대한 좋은 증거입니다. 우리가 회심의 은혜를 경험할 때는 반드시 새롭게 된 자기 인식이 동반됩니다. 예전에 죄 가운데 살 때는 전혀 몰랐던 자신의 참 모습을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나의 원래의 모습이었구나. 참으로 내가 이런 죄인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두시아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호자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셨었는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에 가 요동하며 집의 연기가 충만한지라.
(25:49) 그때에 내가 말하되다 나여 망하게 되었으라.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배웠음이로다. 이사야 6장 1절로 5절.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지독한 자기 사랑과 무자비함, 야비함과 교활함 그리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스스로 자신의 어 인생에서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뼈속 깊이 된 교만함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26:40)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죄 자체가 이러한 작용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그것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 신자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그러한 은혜의 작용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잔존하는 죄가 없었더라면 결코 불가능했을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사용하셔서 그 놀라운 지혜와 권능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3. 그리스도의 중보사에게 탁월함을 의지하게 함. 셋째로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할 때에 우리 자신은 스스로 아무 선한 것도 없는 단지 비참한 죄인일 뿐이라는 절망적인 자기 인식을 갖게 됩니다.
(27:36) 이러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죄와 완전히 결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이렇게 절망적인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로 우리의 죄와 악함을 극복하고 그 면전에 서게 하실 뿐이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인식할수록 십자가를 의지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세상에 속한 정부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28:24)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우리 안에 잔하는 죄로 인하여 우리는 가치 없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중보자적인 권난의 위대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이 은혜로운 역사는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가지고 있던 계획이 아닙니다. 죄가 원했던 것은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배반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29:0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고 사단의 간교한 계략을 능가하는 지혜와 능력으로 그 죄를 인간의 은혜의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죄와 싸우면서 잔존하는 죄로 인하여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게 될 것은 죄의 계획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은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자랑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의지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게 하셨고 복음 안에 있는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아 우리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지혜에 감탄하여 사도 바울의 찬송에 동참할 뿐입니다.
(29:58) 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청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서 11장 33절.이 이 죄의 능력에 대하여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죄의 능력에 대하여는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신자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교리는 두 가지 이치 안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신자 안에 죄가 있어도 싸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죄의 능력보다 더 큰 은혜의 능력을 궁급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죄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는 한 죄가 그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0:58) 이 죄보다 큰 은혜의 능력을 주심 첫째로 신자 안에 죄가 있을지라도 신자가 죄와 싸우려고 하면 죄의 능력보다 더 큰 은혜의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신자 안에 남은 죄로 인하여 넘치는 은혜 안에 담긴 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능력에 대해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심으로써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십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던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기를 시작할 때에 죄가 매우 강력한 세력으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침체에 빠져 있는 동안 은혜의 능력은 고갈되고 죄의 영향력은 증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죄가 신자의 영혼 속에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31:43) 은혜의 합법적인 통치가 있는데도 죄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신자를 린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지성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느끼고 의지적으로는 그 죄의 강력한 세력을 깎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혼란과 좌절 가운데서 낙심하게 되면 오히려 더욱 쉽게 범죄하게 되고 죄의 세력은 더욱 강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계획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원하는 것은 단지 자신의 요구에 한번 우리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와,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대신 죄의 계획을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32:30) 그런데 죄의 이러한 계획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신자가 계속 영혼의 어둠 속에야 합니다. 이때 신자가 은혜의 세계를 앎에 있어서 지성적으로 무지하다면 죄는 자신의 계획을 성취함에 있어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됩니다. 영혼의 어두움은 지성의 놀몸에 의하여 더욱 죄가 역사하기 좋은 환경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죄는 신자의 영혼을 어둠 속에 계속 가두어 두려고 지성으로 하여금 신령한 세계를 깨닫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믿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체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33:18) 고린도서 4장 3절 4절. 일단 신자가 영혼의 어둠과 지적인 눈먼 가운데 있어 죄의 속임수에 잘 넘어가는 상태가 되면 그다음에 죄는 강압으로 영혼을 강력하게 억압하며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죄가 번성할 때에 신자의 영혼은 그 힘이 약화되며 총명은 흐려지게 되고 마음은 부패하고 굳어지게 되어 죄의 속임소와 강압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획득된 죄의 지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합니다. 조국적으로는 신자의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죄의 즐거움을 빼앗겠다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의 강압 때문만이 아니라 죄를 버리면 함께 빼앗길 즐거움 때문에도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34:05) 죄는 자신을 버리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그렇게 하면 죄의 즐거움도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즐거움을 믿기로 영혼을 자신의 지배 아래 가두려고 합니다. 죄가 이처럼 치밀한 계략과 큰 능력으로 다가올 때에 신자는 황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시인은 당과 같이 고백합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으로 우르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 시편 40편 12절 이때 신자는 죄가 엄청난 힘으로 자기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율법의 송사로 하나님의 용서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34:50) 그러면서 죄와 싸울 의지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강압하는 힘을 강하게 느끼는 상황 속에서의 싸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약간의 혼란을 느끼실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죄가 매우 쉽게 죽는다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하여 전혀 혼돈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끊임없는 현신, 총체적인 순종, 일체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누구도 자기 안에 잔존하는 죄를 완전히 멸하였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35:3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빌립보서 3장 12절.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죄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뛰어난 경건 속에서 살았던 사도 바울도 이로 인하여 좌절할 만치 말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공고한 사람이로다.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3절 24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 할 때에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36:18) 이 힘은 바로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능력이며 이로서 죄와 더불어 싸워이길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이 은혜의 능력은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더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나님을 의지하며 순종하기만 하면 역설적으로 죄의 잔존이 더 큰 은혜를 공급받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B. 싸우고 있는 한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심 둘째로 신자 안에 죄가 강한 힘을 얻고 있을지라도 신자가 그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죄가 그를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이는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울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강화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와 더불어 싸우는 한 신자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37:03) 죄에 대한 신자의 순종은 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죄에 대해 전폭적인 순종이든 부분적인 순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의 정도 문제일뿐 본질은 같습니다. 신자가 겉으로는 죄와 싸우면서 속으로는 그 죄에 순종한다면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신자가 죄의 저항에도 마음이 죄를 완전히 버리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은 점점 그러한 지루한 추쟁에 대하여 실증을 느끼게 되고 은혜는 약화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실증은 죄를 죽이는 경건한 의무에 대하여 육체가 게으음에 빠지도록 방치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게으음은 마음의 정력으로 이어집니다.
(37:44) 잠언 21장 25절. 그래서 결국 죄는 점점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얼마 가지 못해서 죄가 이기게 됩니다. 이러한 이치를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지금 신자가 어떤 죄를 짓고 있다고 합시다. 그가 죄를 짓는 것은 죄에 대한 욕구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누르는 데는 항상 힘이 필요합니다. 죄에 대한 욕구가 적으면 그것을 누르 힘이 적게 들지만 그면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진자가 죄와의 싸움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이런 죄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죄를 억제하고자 할 때에 경험하는 영혼의 피곤함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38:27) 죄의 낙을 지속적으로 누리고 싶은 타락한 욕구와 죄를 떠나 정결해 주고 싶은 신령한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다 피곤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으로는 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죽임을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이 명백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외면함으로써 죄 가운데 살아가는지요. 그렇던 성화의 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었는지요. 죄는 그것을 죽이려는 정직한 의지가 없는 신자에게는 쉽게 이길 수 없는 척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성령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죄임을 실천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39:07) 자신은 약하나 은혜를 주시는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죄와 더불어 싸우십시오. 그것을 미워하고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복음의 원리로 돌아와서 믿음으로 은혜의 수단을 활용하여 순종함으로써 죄와 싸우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죄를 이길 은혜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아 자신과의 언약에 충실하려는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은 얼마나 큰지요 죄인을 질멸치 아니하시고 약한 자를 공급해 주신 은혜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으신 언약의 백성들이기에 점점점 3. 죄의 가책에 용서의 은혜를 베푸심.
(39:52) 셋째로 죄로 인하여 가책하는 신자에게 용서를 베푸심으로 은혜를 더하십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항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책이 있습니다. 이것을 죄책감이라고 부르는데이 죄책감은 신자가 죄로 말미암아 빠지기 쉬운 영적 대담함 혹은 무모함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가 오래 계속되면 그 죄책감은 물론 죄에 대한 인식도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책감의 사라짐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죄책감의 약화는 오히려 죄에 대해 담대해지도록 만들어 줄 뿐입니다. 역설적으로 죄의 집배 아래 있던 신자가 정작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나아갈 때는 약화되었던 죄책감이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40:40) 이때 율법의 송사의 도움을 갖습니다. 양심은 더 같이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너를 버리셨고 너의 죄는 용서받게 너무 크다고 외칩니다. 이때 신자의 영혼은 힘을 잃고 파리해집니다. 죄 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에게 약속된 은혜에 대한 기대를 능가하는 양심의 가책이 그를 짓누르고 죄와 싸울 용기를 아삭아갑니다. 죄는 부당한 양심의 가책과 주엄한 율법의 송사에 도움을 받지만 신자는 아무도 돕는 자 없이 버려진 것 같습니다. 죄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하여 잠시 계속되던 진실한 범부림은 점점 힘을 잃는 영혼으로 인하여 함께 약화됩니다.
(41:25) 아,이 얼마나 가련한 처지입니까?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상황을 얼마나 저주 만납니까?이 이 글을 쓰고 읽는 동안에도 이러한 실패 가운데 홀로 느끼던 지난 날 저의 영혼에 대한 기억과 지금도 죄 아래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괴로워하는 지체들에 대한 생각으로 눈물이 흐릅니다. 어떻게 만난 하나님인데 어떻게 주신 구원의 은혜인데 좋으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는 대신 그렇게 죄의 지배 아래에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을 인생을 허의하고 있음을 믿는 것일까요? 아, 어찌하면 우리에게 햇빛보다도 밝은 복음의 교리가 잘난하게 비쳐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우리 모두 그 빛 가운데서 죄를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진실한 사랑과 공경의 마음으로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신 그리스도만을 섬기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용서를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사대 은혜를
(42:29)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십니다. 신자가 죄를 사랑하는 한 죄는 자신을 파괴할 기회이지만 신자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용서를 구하는 한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기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경험되었습니까? 그분의 용서를 통해서가 아닙니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항상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죄 때문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넘치는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43:11)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죄는 더 이상 양심의 송사로 힘을 얻지 못하고 신자는 용서 율법의 참소로 가련한 처지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속죄는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보사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면 두 가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놀라운 자유함과 하나님의 자비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은혜의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실까요?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43:55) 첫째로 죄가 있기에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죄의 정제하는 능력을 중식시키십니다. 둘째로 사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A 죄의 정죄하는 능력을 종식시키심 첫째로 죄가 있기에 용서를 베푸심으로써 죄의 정제하는 능력은 종식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죄가 있는 곳에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십니다. 죄의 용서가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진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죄의 무거운 짐을지고 살아가다가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듯한 자유를 경험됩니다.
(44:37) 그리고 이러한 용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 경험됩니다. 사실 죄는 우리에게 이러한 자유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계획은 우리를 속박하고 어둠 속에 억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죄를 용서의 죄로 삼으셔서 정죄하는 죄의 능력을 종식시키십니다.뿐만 아니라 신자의 마음과 영혼의 말할 수 없는 자유를 주심으로써 무엇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이 이 놀라운 일이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죄를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45:24) B.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둘째로 사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신자가 진실로 미우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사용하셔서 오히려 죄의 계획을 사절시키십니다. 오히려 신자가 사제의 경험을 통해 새롭게 획득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으로 다시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은 신자의 진실한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고 유지됩니다. 그래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에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제의 경험을 통해 이미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시키시거나 더 깊고 넓게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죄를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46:10) 그러면 신자가 사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아는 것일까요?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몇째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게 하십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첫째로 사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신자가 죄 가운데 있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경험하는 바가 사라지거나 현재의 주로 들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을 경험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상실하고 정죄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들을 향한 분에 넘치는 호위를 의미합니다.
(46:50) 그리고 이러한 은혜는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하여 슬픔을 동반한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죄로 말미암아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그들을 다시 부르시는 은혜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이 하나님의 은혜는 자비와 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신자가 죄의 용서를 경험하게 될 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과 같은 죄인들이 저한 비참한 상황에 대하여 슬퍼하시는 사랑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신자를 떼어놓기 위하여 신자 안에 들어왔습니다. 신자가 죄를 사랑하고 그 죄와 함께 먹고 마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47:32) 그러나 신자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제 은혜를 구하자 오히려이 잔존하는 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신 성품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죄를 통하여 참여하는 인간들에 대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써 사실은 하나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공로 없이 용납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이며 얼마나 우리가 그분과의 교재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는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제를 경험하고 죄와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시대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가 사악한 죄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오히려 용서의 은혜를 구하며 죄에서 돌이키는 신자들에게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48:17) 그것은 그 하늘로부터 자신에게 쏟아지는 자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간들에게 막을 수 없도록 부어지는 자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참여하는 자신의 자녀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아버지인지 알게 됩니다. 죄에게 이런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지혜가 죄의 계획을 능가한 것입니다.이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된 둘째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하심으로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이 이 자비는 스스로의 죄 때문에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그들이 처한 죄의 결과인 고통과 비참함 때문에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8:55)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잠하게 된 인간의 상태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슬픔을 동반하는 사람입니다. 죄인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입니다. 죄는 항상 죄의 결과를 가져오고 그 결과는 비참함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뿐 아니라 죄의 결과인 비참함도 정직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영혼 안에 들어온 죄의 영향력이 총명을 흐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례를 판단하고 분별하여 생각으로 하여금 받아들일 것과 거절해야 할 것을 알게 하는데 영혼이 죄로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인식하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의 총명을 회복시켜서 죄와 죄의 비참함을 밝히 보게 하십니다.
(49:41) 성령의 가장 중요한 역사는 이처럼 죄인들에게 자신의 죄와 죄의 비참함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사제 은혜를 경험할 때 이러한 처지에 있는 자신을 향해 오래도록 품고 계셨던 하나님의 연민어린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는 미워하시지만 아들의 피로 갑주고 사신 자신이 지의 결과로 비참하게 된 처지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시는 슬픔을 동반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제의 경험 속에서 신자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 하나님의 이러한 선하신 마음을 외면한 채 살았던 방종한 날들에 대해 회개하고 그 가운데 역사하던 죄를 혐오하게 됩니다.
(50:24) 저는이 자비를 눈물이 가득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겁니다.이 자비는 죄인의 죄보다는 그 죄로 말미암아 처하게 된 비참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인간이 비참해진 것은 죄로 말미암은 결과이며 그것은 인간 자신이 택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다 생각하신다면 사랑린 슬픔을 가지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죄를 지어온 그의 모든 삶은 미워하시지만 아들의 피로 사신 자신의 소중한 자녀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사랑린 슬픔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이 곧 긍휼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정체입니다.
(51:08) 3.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알게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자신을 향하여 부당하게 행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이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에게 화목의 희망을 가지고 훈계와 경고를 반복하면서 용서하시기 위하여 형벌을 지원하고 계속적으로 돌보시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때 죄인들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죄를 증벌하지 아니하고 삼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조의 은혜를 경험하고 회개하는 죄인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후회가 있습니다.
(51:46) 내가 왜 그렇게 오래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였을까?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나같이 쓸모없는 죄인에 대해 그토록 오래도록 참으셨을까?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방송하게 살던 지난 날을 가슴 아파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신 자들에게는 항상 자신을 향하여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를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오리 참으심을 보이사 그의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는 본이 회개 하려 하심이니라.
(52:26) 디모데전서 1장 16절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됩니다. 이렇듯 신자로 하여금 놀라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죄 죄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이 죄를 사용하셔서 일체후 오래 참으시는 자신의 상품을 보여 주십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경고한 삶을 살아갑니까? 어떻게 충성스럽게 죄와 싸불러 싸우고 자신을 부르신 거룩한 소명의 헌신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까? 죄인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지 아니하고는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53:03)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을 본받으며 죄와 더불어 피흘리기까지 싸우도록 동료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34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참된심대로 살게 하는 가르침을 거절하며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기를 고집하는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 가운데 멸망했을 것입니다.이 이렇듯 신자가 죄 때문에 놀라운 오래참으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죄가 계획한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자들에게는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게 됩니다.
(53:41)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함으로써 신자는 더욱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을 노리게 됩니다. 죄는 악한 것이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간 신자는 그 과정을 통해 성화되어 갑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고 순결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구원하신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죄와 더불어 싸워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는이 무거운 죄의 짐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영광 가운데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이든지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54:21) 은혜로부터 멀어져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죄일 뿐이지만 그 죄를 버리고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하는 습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죄나 죄를 사랑하는 죄인 안에 있는 자원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심며 그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택한 죄 때문에 영혼히 공고하고 육신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서이 세상이 자신에게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55:00)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나라가 하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단존하는 죄를 통해이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전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하고 영원한 조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는이 세상에서 나그레로일 걸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렇습니다. 죄와 더불어 싸우는이 고단한 순례의 길을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호흡이 멋을 때까지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하든지 우리가 참된 신자가 되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계획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55:42) 우리 안에 끊임없이 역사하심으로 죄를 죽이는 능력의 근원이 되셨던 성령께서도 이러한 삶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이겨서이 어두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 소망이 없는이 세상에 찬란한 빛을 밝혀 아버지의 영광을 보여주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어디에서 살든지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보람을 다한 것입니다.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우리의 죄를 은혜가 넘치게 하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아멘.
한 눈에 보는 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
서론: 전제되어야 할 사실들
A 복음과 하나님의 지혜
-복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내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함.
B.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에서 말하는 죄.
-여기서 죄는 신자가 사랑하는 죄가 아니라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임.
I. 죄의 존속을 은혜의 기회로 삼으심.
A 탁월한 은혜 베푸심의 수단이 됨.
1. 죄 죽임의 은혜.
2. 회개의 은혜.
3. 신자 안에서 경험하는 죄의 객관화.
-신자가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대항하고자 할 때 죄가 은혜의 기회가 되는 것임.
B. 우리 안에 남은 죄가 아름다운 이유
1. 그 어려움을 인해 은혜를 구하게 됨.
2.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기를 포기하게 함
3.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탁월함을 의지하게 함.
II. 죄의 능력에 대하여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심.
A 죄보다 큰 은혜의 능력을 주심.
B 싸우고 있는 한 죄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심.
III. 죄의 가책에 용서의 은혜를 베푸심.
A 죄의 정죄하는 능력을 종식시키심.
B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심.
1.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됨.
2.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됨.
3.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알게 됨.
스터디
제15장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
1. 죄의 계획이 신자의 영혼을 지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용하셔서 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과 도전을 간수와 두부의 예화를 통해 생각해 보십시오.(386-387)
2. 신자 안에 남아있는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하는 수단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고, 이 사실이 주는 교훈과 도전을 나누어 보십시오.(393-398)
3, 죄의 능력에 대해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심으로 죄 있는 곳에 은혜를 넘치게하신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400-404)
4. 죄의 가책에 용서의 은혜를 더하신다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죄책감의 순기능은 무엇입니까?(405)
5.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죄인들에게 용서의 은 혜를 베푸심으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십니까?(407-408)
6. 신자가 사죄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아는 것입니까?(408-411)
7. 죄를 버리고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하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깨닫고 느낀 바를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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