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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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를 지키는 반석
제목: 나를 지키는 반석
본문: 출애굽기 17장 1-7절
본문: 출애굽기 17장 1-7절
찬송: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찬송: 342장 너 시험을 당해
말씀의 문을 열며: 르비딤
말씀의 문을 열며: 르비딤
오늘 우리는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아 인생의 뜨거운 광야 한복판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납니다. 본문 1절은 이들의 여정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여기서 우리는 ‘르비딤(Rephidim)’이라는 지명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지탱하는 곳’, 혹은 ‘휴식처(Resting places)’라는 달콤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을 걷는 순례자들에게 이 이름은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약속이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종려나무 숲이 보이고 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올 때, 타들어 가던 목과 먼지 쌓인 발을 가진 여행자들은 환호합니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고,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며, 그늘 아래서 지친 몸을 뉘이는 상상만으로도 기운이 납니다. 오아시스는 사막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자,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이런 고정관념을 일순간에 무너뜨립니다. 이름은 분명 ‘휴식처’인데, 현실은 ‘마실 물이 없는’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불순종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철저히 순종하며 도착한 곳이, 기대를 가장 잔인하게 배반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황혼녘을 지나고 계신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오늘 이 르비딤에 서 계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60평생, 70평생을 주님 뜻대로 살려고 우리 나름대로 몸부림치며 달려왔습니다.
이제 자녀들도 다 키웠고 사회적 소임도 다했으니, 이제는 좀 쉴 만한 ‘르비딤’에 도착한 줄 알았는데, 왜 우리 삶에는 여전히 물 없는 광야 같은 갈증이 가득합니까?
예기치 못한 질병이 우리 몸을 치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우리를 고독하게 하며, 다가올 미래가 안개처럼 뿌옇게 보일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주님, 명령대로 왔는데 왜 갈증입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 갈증의 현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어떻게 대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순종의 길 위에서 마주한 마른 땅
순종의 길 위에서 마주한 마른 땅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도 때때로 깊은 결핍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물 없는 곳에 이른 것은 그들의 실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우리를 물 없는 르비딤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갈증의 자리로 인도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평생토록 파 내려왔던 ‘가짜 르비딤’들을 끊어내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 은 이 비극적인 노력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리는 건강이 허락될 때 그것을 생수인 줄 알고 마십니다. 자녀가 잘될 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결해 줄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 웅덩이를 팝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을 때 비로소 안심하며 그것을 ‘나만의 르비딤’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 ‘터진 웅덩이’에 중독되어 진짜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를 가장 깊은 결핍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세월이 흐르며 마주하는 육체의 쇠약함이나 예전 같지 않은 환경은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재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은 우리가 쥐고 있던 낡은 웅덩이를 내려놓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이신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려는 ‘거룩한 성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락함보다 우리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참된 안식’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는 우리의 무례함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는 우리의 무례함
갈증이 찾아오면 우리 영혼은 아주 위험한 단계를 밟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결핍에 당황하지만, 곧이어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기 시작합니다. 3절을 보면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쏟아붓습니다.
원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세를 넘어 하나님을 향한 공식적인 ‘소송’으로 번집니다. 2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여기서 ‘다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리브(rîb, רִיב)’는 단순한 말다툼이 아닙니다. 이는 고대 근동 법정에서 공식적인 ‘소송’을 제기할 때 쓰는 전문 용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고 피고석에 앉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약을 위반했다고 고소장을 날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7절에서 불신앙의 종착역에 도달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장이 옳은가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불과 얼마 전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신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고, 바로 앞 16장에서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장의 목마름 앞에서 그 모든 기적을 단번에 잊어버립니다.
이 모습은 마치 주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가족을 위해 정성껏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등 뒤에 서 있는 철없는 자녀와 같습니다. 식탁에는 이미 숟가락이 놓여 있고 구수한 찌개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는데, 배고픔에 짜증이 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엄마, 우리를 굶겨 죽일 작정이에요? 당신이 내 엄마인 게 맞긴 해요? 엄마라면 지금 당장 배부른 증거를 내놓으라고요!” 어머니가 그동안 베풀어온 모든 희생과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 잔인한 폭력이, 지금 결핍 앞에서 하나님을 고소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거대한 원성 앞에서 위대한 지도자 모세조차 무너집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모세 역시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살기 어린 눈빛 앞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영적 영웅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 앞에 벌벌 떠는 평범한 노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오만함과 모세의 비겁함은 사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깊은 죄악과 연약함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결핍이 생겨도 재판관이 되어 하나님을 심문하고, 조금만 위협이 닥쳐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두려움에 떨며 타인을 탓합니다. 이 연약함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우리의 벌거벗은 본모습입니다.
깨어진 몸의 틈새로 흐르는 생명
깨어진 몸의 틈새로 흐르는 생명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불의한 재판에 대응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법정, 그 차가운 피고석에 친히 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대 근동의 법정에서 왕이나 재판관은 권위 있게 의자에 앉아 있었고, 피고인은 그 앞에서 판결을 기다리며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반역한 피조물 앞에서 피고인의 자세로 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서다’라는 말은 ‘아마드(’amad, עָמַד)’는 바로 그 굴욕적인 피고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반석 ‘곁’이 아니라, 반석 ‘위’(‘알 하추르’, עַל־הַצּוּר)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그 반석을 치라.”
상상해 보십시오. 모세의 지팡이는 애굽에 재앙을 내렸던 ‘심판의 막대기’입니다. 그 지팡이가 내려쳐진 곳은 공허한 바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지팡이는 마땅히 매 맞아야 할 죄인인 우리를 비껴가, 우리 대신 심판을 받기 위해 서 계신 창조주를 내리쳤습니다.
반석이 깨어집니다. 하나님이 그 매를 온몸으로 받으셨기에 그 깨어진 틈새로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 에서 이 비밀을 선명하게 풀어줍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사순절의 중심인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라는 반석 위에서 우리 대신 피고석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던졌던 그 수많은 원망의 돌들, 그 불신의 소송들을 우리 주님이 몸소 다 받으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깨뜨려 물을 내어준 이 사건은 인류 역사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은혜입니다. 주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을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생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인내나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에 쥔 돌을 내려놓지 못하고 씩씩거릴 때조차, 우리를 대신해 지팡이에 맞으시고 스스로 깨어지신 ‘영원한 반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내려놓고 생수를 마시는 사순절
돌을 내려놓고 생수를 마시는 사순절
말씀을 맺겠습니다. 인생의 광야에서 마주하는 결핍은 우리를 파괴하려는 재앙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신 매 맞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려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우리 손에 꽉 쥐고 있던 ‘원망의 돌’을 펴는 것입니다. 타인을 향해, 세상을 향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던지려 했던 그 서운함과 분노의 돌들을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 그 돌은 누군가를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깨어진 반석 곁에서 감사의 눈물로 쌓아 올리는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인생의 황혼녘에 만난 갈증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자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하며,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위해 이미 깨어지신 그 반석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시며, 지금도 그 깨어진 틈새로 은혜의 생수를 흘려보내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려는 오만을 버리고, 나를 대신해 매 맞으신 그 반석 위에 내 삶을 굳건히 세웁시다. 그럴 때 우리는 르비딤의 메마른 땅에서도 노래할 수 있으며, 광야의 고통을 넘어 부활의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영원한 반석,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생수처럼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음에도 마주한 갈증 앞에서 하나님을 고소했던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손에 든 건강의 돌, 실망의 돌, 회한의 돌을 이제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깨어지신 반석,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만을 갈망합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그 사랑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