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통히 여기시다
Notes
Transcript
<중고등부>
요한복음 11:38-46
“비통히 여기시다”
2026. 3. 15
조 정 수
할렐루야. 오늘도 이 아침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인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환영합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비통히 여기시다”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깊은 절망의 상황에서 일어난 놀라운 반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에요. 여러분은 언제 가장 마음이 힘들어요? 정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그런 절망감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시험을 망쳤다든지, 부모님께 거짓말 한 것이 들켰다든지, 뭔가 굉장히 후회되면서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너무나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나와요. 시험을 좀 망친 정도의 절망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절망이에요.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겁니다.
예수님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사역을 하셨는데, 그 중에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에 가끔 들리셨거든요. 베다니에는 특별히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삼 남매가 살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그들을 특히 아끼고 사랑하셨어요.
그런데 어느날 큰오빠 나사로가 병이 든 거죠. 그래서 동생들, 마르다와 마리아가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소식을 전했어요. ‘예수님, 우리 오빠가 지금 병이 들어서 죽게 생겼으니까 빨리 좀 오셔서 우리 오빠 좀 고쳐주세요.’ 이런 소식을 전한 거예요.
그러면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을 하셔야 맞을까요? 당연히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서 베다니에 오셔야 맞잖아요.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게 생겼다는데, 빨리 가서 병을 치유하셔야죠.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소식을 듣고서도 가만히 계셔요. 베다니에 안 가고 계속 가만히 있는 거예요. 자, 요한복음 11장 6절을 봐 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이 소식을 들으시고 뭘 하셨어? 이틀을 더 거기 유하셨죠. 유한다는 말은 머문다는 말이에요. 머물 유 자거든요. 이틀을 더 거기 머물러 계신 거예요. 지금 한 시가 급한데 이틀이나 시간을 지체하신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 나사로가 어떻게 돼요? 나사로가 죽어버렸어요. 예수님이 조금만 빨리 오셨으면 나사로를 치유해주실 수 있었을 텐데, 늦게 오시는 바람에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을 해요.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의 의미가 뭐예요? ‘예수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이런 말인 거죠. ‘빨리 오셨더라면 살았을 텐데, 늦게 오시는 바람에 죽었잖아요. 조금만 빨리 오시지...’ 이런 의미가 담긴 말이에요.
이 말을 언니 마르다가 했고, 동생 마리아도 똑같이 합니다. 32절도 봐 볼까요? 요한복음 11장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언니가 한 말을 똑같이 하잖아요. 그러니까 둘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빨리 오셨으면 살았을 건데, 늦게 오셔서 오빠가 죽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너무나 큰 절망 속에 있어요.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이 두 사람에게 너무나 큰 상처이고 아픔이에요.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이니까, 희망이 없어요.
우리는 죽음 뒤에 천국이 있고, 또 부활이 있다는 걸 알잖아요.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부활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어요. 그냥 죽으면 끝인 거야.
그런데 한 가지 독특한 부활개념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3일 동안 그 영혼이 다시 몸에 들어가기 위해서 몸 주위를 맴돈다는 것이었어요. 그러다가 다시 몸에 들어가면 다시 사는 거죠. 그리고 3일이 지나도록 못 들어가면, 그때는 영원히 죽는 거고.
자,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며칠만에 오셨냐면, 이미 3일이 지난 뒤에 오셨어요. 요한복음 11장 17절 봐 볼까요?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가 죽은지 사흘이 지나고 벌써 나흘째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때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으로는, 나사로가 더이상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겁니다. 영혼이 이미 떠나버렸다고 생각을 하니까,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어.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3일째까지만 해도, 아직 희망이 있었겠죠. 하지만 4일째가 되면서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을 거야.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도 안 되겠구나. 이제 다 끝났어.’ 이렇게 좌절했을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은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소망을 갖고 계셔요.
물론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감정이 있고,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비통히 여기셨다고 그래요. 오늘 말씀 제목처럼, 예수님이 비통히 이기셨어요.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비통히 여기다. 국어사전에는 ‘비통하다’는 말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프다’
예수님이 지금 몹시 슬퍼서 마음이 아프셔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몹시 슬퍼하실까요?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하실까요? 마르다와 마리아가 울고 있어서 슬프실까요?
예수님의 슬픔과 눈물은 사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슬퍼하시지? 예수님은 얼마든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실 수가 있거든요.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능력이 있으셔요. 그러니까 그냥 나사로를 바로 살려내시면 되는데, 왜 무덤 앞에서 슬퍼하실까?
요한복음 11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에게 네 오빠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을 하셨단 말이죠.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실제로 다시 살려내실 거예요. 부활의 능력이 있으시니까. 그런데 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아시면서도, 그토록이나 슬퍼하실까? 이해가 안 돼요.
여러분, 예수님이 왜 슬퍼하실까요? 부활의 능력이 없으면 당연히 슬퍼하는 게 맞죠. 하지만 부활시킬 능력이 있는데, 왜 슬퍼하실까?
사실은 답이 굉장히 단순해요. 왜 슬퍼하실까? 당연히 슬프니까 슬퍼하시는 거죠. 아무리 내가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있다고 해도, 어쨌거나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잖아요. 비록 며칠만에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그 며칠 동안에 나사로는 죽음 속에 있었어요.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 두 사람도 그동안에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겠어요. 그들의 그 모든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을 예수님은 공감하신 거예요.
예수님도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감하시고, 우리과 똑같이 울고, 눈물을 흘리셔요. 나중에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면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자신이 잡혀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고통과 죽음이 두려우신 거죠. 부활은 부활이고, 어쨌거나 한번 죽임을 당해야 되잖아.
마찬가지로, 나사로가 병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은 슬프신 거예요. 내가 얼마든지 빨리 와서 죽지 않게 고쳐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부러 이틀 늦게 온 것도 미안하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것도 너무 슬픈 거예요. 그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슬퍼할지언정 그들처럼 절망하고 있지는 않아요. 예수님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 속에 계십니다. 나사로가 반드시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
자, 오늘 본문 39절을 같이 읽어볼까요? 39절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이 갑자기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래요.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나라랑 달라요. 동굴을 파서 거기에 시체를 넣고, 동굴 입구로 큰 돌로 막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지금 그 돌을 옆으로 옮기라는 거예요.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죠. 시체가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돌을 왜 치워? 이제 와서 뭐 하려고 그러지?
세상의 지식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헛수고라고 생각하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자체적으로 한계를 정하고, 도전하지 않으려고 해요.
‘어차피 열어봤자 냄새만 나는데, 뭐하러 열어봐? 열면 그 안에 뭐 좋은 것이 있대?’ 하고 포기해버린다고.
그런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알려면, 결국에 문을 열어봐야 돼요. 그냥 닫아놓고 있으면 평생 그 안에 냄새만 가득하다고 믿고 사는 거예요. 사실은 그 안에 엄청난 기적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죠.
우리는 다들 한계를 정해놓고 살아요.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한계, 내 성적이 더 높아지지 못한다는 한계. 좋은 대학에 못 간다는 한계. 건강해지지 못한다는 한계.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기대감을 내려놓고, 내가 정해놓은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거죠. 그 한계를 넘어야 하는데, 괜히 헛수고 하기 싫고, 또 실패했을 때 실망감이 클까봐 아예 도전하지를 않아요.
그러나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야 합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옮겨야 합니다. 옆으로 치워버리고, 결과를 보는 거예요. 물론 도전한다고 해서 다 결과가 좋을 수는 없어요. 그 안에 정말 냄새만 가득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 성공하든 실패하든, 도전하는 그 때 우리가 성장하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는 해보는 거예요. 뭐가 두려워서 안 해? 그냥 해봐. 실패하더라도 그냥 해. 무조건 해.
저는 새벽에 3시 반에 일어나요. 하루에 한 다섯 시간도 안 자는 거 같애. 3시 반에 일어나서 씻고 교회 오면 4시야. 4시에 교회 불 켜고, 난방 켜고, 음악 틀어놓고, 그러고 어른들 태우러 차량운행 가요. 갔다 와서 5시에 새벽예배 드리고 또 어른들 모셔다 드리고나면 6시 10분쯤 돼요.
그러면 그때 내가 뭘 할까? 제 핸드폰 알람에는 6시 20분에 큐티 알람이 돼있어요. 바로 사무실 가서 큐티 하려고 제가 알람을 해놨어요. 그리고 7시에 알람이 하나 또 울려. 운동. 큐티 마치고 7시에 바로 운동 하려고 맞춰논 거예요.
그런데 이 알람대로 몇 번이나 내가 했을까? 1월에 알람 맞췄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딱 세 번 밖에 안 했어. 벌써 75일 가까이 지났는데, 딱 세 번. 왜냐면 너무 피곤해요. 9시까지 추근해야 되는데, 그 전까지 좀 더 자고 싶고, 쉬고 싶고. 그래서 세 번 밖에 못했어요.
그래도 날마다 도전해요. 알람도 계속 있어. 오늘 새벽은 꼭 성공해야지. 꼭 성공해야지. 하면서도 또 실패해. 그러고 출근해서 큐티하고, 운동은 아예 안 하고. 그렇게 쳇바퀴처럼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래도 내일은 오늘과는 다를 거라고 기대하면서 살아요. ‘에이, 어차피 내일도 안 할텐데, 알람 다 꺼버려야지’ 이러지 않고. 여전히 알람을 해놓고, 내일은 피곤을 이겨보자고 다시 한번 결단하고 자는 거예요.
여러분이 볼 때 별거 아닌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그게 뭐 어렵다고 세 번 밖에 못해? 여러분이 3시 반에 일어나봐. 쉽게 안 된다니까.
여러분에게도 여러분 나름대로 도전하는 일들이 있겠죠. 공부, 운동, 연애. 뭐가 됐든, 여러분 스스로 안 된다는 한계를 정하지 말고, 문을 닫아놓지 말고, 그것을 치워버리고 도전해 보세요. 되든 안 되든, 일단 해.
우리 선생님들도 도전해요. 내일 새벽예배 참석, 도전해. 뭐 어려운 거 아니잖아요. 다다음주에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가 있는데, 우리 친구들도 그때 참석해 봐. 색다른 은혜를 누릴 수가 있어요.
도전할 때, 특별히 예수님일 믿고 의지하며 도전할 때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 오늘 본문 43절 44절을 봐 볼까요? 43절 4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고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아멘.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죠. 시체에 천을 감아놓은 모습 그대로, 마치 미라가 걸어나오듯이, 나사로가 걸어나왔어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그리고 이 엄청난 기적의 시작은, 돌을 치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마음에 있는 한계의 돌을 치워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한계의 돌, 자존심의 돌, 불신의 돌, 고집의 돌, 두려움의 돌. 치워버리고, 내가 바라는 꿈을 향해서 도전하는 거예요.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님이 그 도전을 도와주실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절망 속에 있더라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더라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을 믿고, 담대하게 도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