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15 주일오후예배: 예레미야 30:1-17;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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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1-17 입니다. 제가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귀 기울여 들으시길 바랍니다.
예레미야 30:1–17 NKRV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어찌하여 모든 남자가 해산하는 여자 같이 손을 자기 허리에 대고 모든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졌는가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먼 곳으로부터 구원하고 네 자손을 잡혀가 있는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을 함께 고백하겠습니다. 오늘은 90문을 고백하겠습니다. 제가 질문하면 함께 답하겠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0문: 심판 날에 의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답: 심판 날에 의인들은 구름 속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올려져 그분의 오른편에 세워질 것이고, 거기서 공개적으로 인정을 받고 무죄 선언을 받으며, 버림받은 천사들과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의인들은 하늘로 영접되어 거기서 모든 죄와 비참에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과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서, 특히 성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영원토록 대면하고 즐기면서,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몸과 영혼이 모두 완전히 거룩하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형교회의 회원들이 부활과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누릴 완전하고 충만한 교제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는 강단의 자리를 허락하시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말씀을 통해 저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이 죄를 이기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죄를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과 함께함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따라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노력하는 의인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아갑니다. 듣는 자들이나 전하는 자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통해 저희가 변화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후예배 강단에 나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 주간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 줄도 모르고 순식간에 지나갔는데요. 한 주간 또 열심히 사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를 주시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알려주시고, 더욱더 살 수 있게끔 우리에게 원동력을 불어 넣어주십니다. 오늘도 이 강단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라며, 함께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입니다. 아주 고요합니다. 그때 한 건물에 불이 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건물 전체에 매캐한 연기가 스며들기 시작하자 시끄러운 화재경보기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불안하다며 짜증을 냅니다. 급기야 누군가 경보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습니다. 건물 안은 다시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아휴 이제야 조용하네, 평안하다”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여러분, 지금 이 사람들이 누리는 평안은 진짜 평안입니까? 아니면 가짜 평안입니까? 모두가 가짜 평안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것은 생명을 앗아가는 가장 끔찍하고 치명적인 ‘거짓 평안’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은 고요한 상태이지만 실상은 불이 점점 퍼져 화마가 생명을 삼키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시대의 남유다 백성들이 바로 화재경보기를 끄고 다시 잠든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영혼의 ‘화재경보기’였습니다. 그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회개하라고 목놓아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경고음이 듣기 싫었습니다. 귀를 찌르는 것만 같았고 나에게 불쾌감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앙은 없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거짓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자장가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회개라는 근본적인 해결책 대신, 영적인 화재경보기를 꺼버리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백성들이 가진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드는 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에 귀를 닫아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예레미야 30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거짓 평안이 산산조각 나고, 끔찍한 고통이 찾아올 것을 아주 엄중하게 선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30장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0장부터 33장까지는 성경에서 ‘위로의 책’으로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잿더미가 된 절망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을 근본적으로 살려내시는 ‘새 언약’이라는 위대한 치유의 계획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인 화재경보기를 다시 켜고, 새 언약을 통해 참된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미래에 최종적으로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시게 될 그 하나님을 소망하는 교회가 되는 종말론의 말씀을 ‘하나님의 치료를 대망하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을 다 기록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주 독특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할 날이 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작부터 하나님께서는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기록하라”, 그리고 “날이 올 것이다” 이 두 말씀은 미래를 준비하시는 말씀입니다. 기록하게 하시는 것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보게 하신다는 뜻이고,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미래의 어떤 한 시점을 내다보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 “날이 오리니”라는 표현은 가까운 미래나 먼 미래의 사건을 모두 가리킬 수 있는 관용구로 성경은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30장 말씀은 가까운 미래, 또는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준비하는 종말론적인 의도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포로가 된 백성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주 세심하게 볼 필요가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포로가 된 백성의 정체로 유다만을 말씀하시지 않고 이스라엘, 즉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 포로에서 귀환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선지자이고, 지금 시점은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 북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주시키고 이방 민족을 사마리아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치는 바람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혈통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성경에서도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 귀환에 대한 말씀이 등장하지 않고, 신약에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하는 이유도 바로 이 이방 민족과 섞여 산 배신자라는 낙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와 유다 모두를 말씀하고 계시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31장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 되시며, 원래 하나였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가깝게는 유다의 바벨론 포로 귀환이지만, 멀게는 후에 사마리아인으로 불리게 될 북이스라엘까지 포함시키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향한 구원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1-2절은 어떻게 보면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30장을 비롯하여 위로의 책이라고 불리는 33장까지 예레미야가 유다에게 전하는 말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이나 기대가 아니라 이 말씀의 출처가 어디이기 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레미야가 전하는 소망의 메세지는 예레미야가 하고 유다에게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전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실성을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망과 긍정적인 메세지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 같았는데, 5절에서부터 뒷통수를 맞은 것마냥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로 백성들의 죄와 잘못을 하나님께서 지적하기 시작하십니다. 5절을 보시면 “우리가 무서워 떠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안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샬롬’입니다. 우리가 보통 평안함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내 주변 상황이 안정되고 소란스럽지 않을 때입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이 편안하거나 아무런 문제 없이 조용한 상태라는, 나에게서 출발하는 의미로서 우리는 평안함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평안함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가 온전히 유지될 때, 창조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부어주시는 총체적인 복과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즉, 쉽게 말해 하나님이라는 뿌리에 단단히 접붙여진 나무만이 누릴 수 있는 생명의 공급이 성경이 말하는 평안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평안이라는 개념을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지만, 성경에서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주변 환경과 상황이 내가 볼 때 좋지 않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성경은 이것이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5절은 지금 유다 땅에 그 평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덮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과거 모세를 통해 하나님과 맺었던 시내산 언약을 철저히 깨뜨리고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우상과 강대국들을 의지했고, 고아와 과부를 억압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 이것에 실패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때부터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요시야로 인해 남유다에 일시적인 신앙 회복이 있었지만, 이후 남유다는 다시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깨뜨린 것입니다. 생명의 뿌리가 잘려 나갔는데, 잎사귀가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언약이 파기되었으니 샬롬이 거두어지는 것은 당연한 영적 원리입니다. 평안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안 계시는데 평안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 큰 문제를 가져다 준 것은 당시 예루살렘의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이곳에 있으니 바벨론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평안하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통해서도 알아가고 있지만, 성막과 성전은 어떤 공간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시는 곳이지,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주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의 주체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이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공간인 성전을 마치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부적처럼 삼아 성전이 있으니 안전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핵폭탄과 같은 강력한 무기가 있어서 다른 나라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지금 생명을 위협하는 화마가 오고 있는데도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의 시끄러운 ‘화재경보기’ 소리를 꺼버리고, 오히려 내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자장가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무서운 막대기를 들어 유다를 치신 이유는 단순한 분노가 아닙니다. 그들이 안주 하고 있던 ‘거짓 평안’이라는 환상을 철저히 박살 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짓 평안이 무너져 내리는 그 두려움의 순간이야말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시 기억해 내는 영적 각성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까지 성경 읽기 표에 따라 사사기 말씀을 알아보았는데요. 사사들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사사는 삼손입니다. 이 삼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전에는 이방 민족의 압제로 인해 부르짖던 백성들이 이젠 하나님께 부르짖지도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 완전히 섞여 살고 있는 거짓 평안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타협하며 사는 것이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것이 평안임을 삼손이 가르쳤듯이 바벨론을 통해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사용하심으로 유다의 거짓 평안이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짓 평안이 깨진 자리에는 심판의 고통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하시면서 말입니다. 6절입니다. “너희는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 어찌하여 모든 남자가 해산하는 여자 같이 손을 자기 허리에 대고 모든 얼굴이 겁에 질려 새파래졌는가”
이 말씀은 아주 넌센스 같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가 있는가 물어보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질문은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자식을 해산하는 남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 사회에서 용맹한 군인들은 국가의 방패이자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건장한 남자들이 마치 출산을 앞둔 산모처럼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며 새파랗게 질려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의지하던 모든 군사적, 정치적 힘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고 철저하게 파괴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출산을 앞둔 산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 그 자체입니다. 산고가 찾아오면 그야말로 응급 상황입니다. 이 군인들이 마치 산모와 같이 두려움이 너무 커서 그들이 해산의 고통을 경험하는 여자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얼굴이 창백해지기 때문에, 그들의 감정이 얼굴에서도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그 날은 유례없는 공포의 날이 될 것입니다. 유다는 엄청난 피해의 대상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 이 ‘해산하는 여인’의 비유에는 더 깊은 하나님의 탄식이 숨어 있습니다. 6장 24절에서도 유다가 겪을 아픔을 두고 “해산하는 여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열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거룩한 신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랑되시고 이스라엘은 신부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열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이스라엘은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통로였습니다. 이것이 다윗과 솔로몬 때 이루어졌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통해 주변 민족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즉, 신부 된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생명의 복음을 잉태하여 이방 민족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해산’하는 영광스러운 수고를 감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며 세상과 간음을 저지른 창기가 되었습니다. 이방을 품어 생명을 낳아야 할 그들이, 도리어 자신들이 숭배하던 이방 제국인 바벨론에게 짓밟히며 포로로 끌려가는 죽음의 산고를 겪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잃어버린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7절은 이 심판의 날을 “야곱의 환난의 때”라고 부릅니다. 보통 “야곱”은 북이스라엘을 뜻하지만, 예레미야서 맥락에 따라 예레미야는 그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고통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1차적으로 이 심판의 날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는 날이지만, 바벨론 침공을 넘어서서 이것은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사명을 잃고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갈 때 겪게 되는 철저한 영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잃은 성도는 생명을 잉태하는 기쁨 대신, 세상의 노예가 되어 의미 없는 징계의 고통만을 겪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나님께서 내리고 계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겪게 될 이러한 심판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주고 싶으셔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초한 일이며, 심판과 고통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더욱이 죄가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게 될 때 죽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은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공격받게 되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언약궤가 쓰러지지 않도록 붙잡은 웃사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제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일까요? 12절과 13절을 보면 절망의 깊이는 이제 바닥을 칩니다. “너의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너의 부상은 중하도다 너의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너의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의학적 은유’를 사용하시면서 이들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유다의 죄악은 이집트와 앗수르라는 세상의 훌륭한 동맹국들을 처방전 삼아 자신의 병을 치료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병세만 악화된 영적 말기 암 상태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너의 악행이 많고 너의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너의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너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는 위기를 벗어나고자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들의 군사가, 그들의 정치가 위기의 유다를 벗어나게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힘을 의지해 보았자, 위기의 순간에 세상은 우리를 차갑게 버립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줄 것만 같았던 세상은 언제 나에게 그랬냐는듯 너무나 쉽게 버립니다. 인간의 어떤 윤리적, 종교적, 정치적 노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완벽한 파산 선고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공격받았고, 주변국들이 배신하였습니다. 유다는 자신을 강하게 할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해 행위를 한 것입니다. 이들의 상처는 생명을 위협하는 중상이고, 심지어 치료약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냥 죽을 일만 남은 시한부입니다.
여러분이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무나 비참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가장 절망하는 순간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느낄 때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거기에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원동력을 얻게 되는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너희는 죽을 일만 남았다”라고 시한부 선고만 내리십니다. 암 말기 환자에게 내릴 진단은 이제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너무나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죄의 길을 따를 때의 결과는 바로 이처럼 비참함과 죽음, 그리고 절망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철저한 절망의 밑바닥, 도무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역설이 시작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인간은 스스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신이 직접 위대한 치료자가 되어 백성을 살리시겠다고 뛰어드십니다. 하나님께서 심판과 함께 치료의 메세지를 전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다 백성들이 회개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 백성들은 이제 심판받을 날만 앞두고 있는 시점이며 회개하며 돌이키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17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세상이 교회를 향해 “아무도 찾지 않는 버림받은 자”라고 조롱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견디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뜨거운 사랑과 열심이 상처입은 유다를, 이스라엘을 치유하십니다.
이 치료는 잠시 잠깐 상처를 완화만 하는 땜질식 처방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 신학의 정점인 ‘새 언약’입니다. 과거 시내산에서 맺은 옛 언약은 끊임없이 죄를 향해 다렬가는 인간의 굳은 마음을 완벽하게 고칠 수 없었습니다. 옛 언약이 부족해서도, 허술해서도 아닙니다. 인간의 아집과 죄가 언약을 완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처방을 내리십니까?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치르게 하시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아예 우리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넣으시는 ‘영적 심장 이식 수술’을 단행하십니다. 따라서 새 언약 백성들은 이전과 완전히 다릅니다. 죄로 가득한 심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하는 성령님이라는 심장으로 이식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전인격이 변화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약속이 8-9절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
여기서 말하는 다윗은 부활한 역사적 다윗이 아니라, 장차 오실 참된 메시아, 곧 신약에서 밝혀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해결하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인해 받는 고통과 상처에서 해방시키시고,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완치를 성공하십니다. 세상의 멍에를 꺾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왕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의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고치는 유일한 길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 성도는 더 이상 억지로 율법을 지키며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기꺼이 이기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라는 아픈 메스를 상처 부위에 대셨지만, 그 목적은 백성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려내는 종말론적 대수술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치료가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최종적으로 완치를 선포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3-4 입니다.
요한계시록 21:3–4 NKRV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공격받아 입은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날에 언제 상처를 받은 것마냥 깨끗하게 다 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이미 이루어진 치료를 보게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완치를 선포하실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고백한 대요리문답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인들은 하늘로 영접되어 거기서 모든 죄와 비참에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과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서, 특히 성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영원토록 대면하고 즐기면서,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몸과 영혼이 모두 완전히 거룩하고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형교회의 회원들이 부활과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누릴 완전하고 충만한 교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평안은 십자가의 언약 위에 세워진 진짜 샬롬입니까? 아니면 죄를 숨긴 채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거짓 평안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평안을 깨뜨리실 때 우리는 고통받고 상처를 입을 것입니다. 죄를 없애기 위한 수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프게 하시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낫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한번 비춰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 삶에 죄악의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어 성령님께서 경보기를 울리시는데,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무시한 채 죄가 주는 달콤한 거짓 평안의 자장가에 취해 있지는 않습니까? 내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부둥켜안고, 돈과 사람과 명예와 동맹을 맺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동맹국들은 위기가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듯 우리를 반드시 배신합니다.
이제는 영적인 화재경보기를 우리는 항상 켜놔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처럼 나를 아프게 찌르고 시끄럽게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살리는 생명의 음성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평안은 우리의 고칠 수 없는 상처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셨으며, 죄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참된 다윗이십니다. 그분이 이루신 ‘새 언약’ 아래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 무너진 우리 삶의 기저는 다시 세워지고 열방을 살리는 생명의 해산자로 회복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기억하시며 우리의 치료자이신 하나님을 항상 대망하며 하나님께서 내리신 완치라는 처방전을 받아 모든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누리는 우리 새순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두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함께 오늘 말씀을 두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듣기 싫고, 시끄럽기만 한 소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사실 유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계속 그 길을 가면 고통과 상처를 받을테니 나에게로 와서 치료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메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기록하게 하셨고, 미래를 위해 약속하셨습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죄의 비참함을 깨닫고 죄를 껴안고 어리석게 자해하지 않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죄를 계속 품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상처만 줄 뿐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의 모든 상처를 치료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벽한 처방전을 내리시고 우리가 더 이상 상처 입지 않도록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완전한 고통의 해방을 소망하는 귀한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놓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는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지요. 죄가 저희에게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 줄 모르고 그것이 좋다면서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저희에게 대수술을 감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지금은 여전히 저희가 죄와 투쟁하면서 고통도 받고 상처도 입지만, 나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키시고, 저희에게 완치를 선포하실 그 날을 대망하는 복된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며 이 세상에 죄에 저항하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저항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항상 알려주시고, 이 세상의 거짓 평안을 저희가 가는 곳곳에서 복음을 통해 깨뜨리는 저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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