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15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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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23:1–12 NKRV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 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설교문 본문]
여러분, 솔직한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SNS에 올리는 나의 모습과,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의 모습은 같은가요? 예배 드릴 때 손을 들고 눈물 흘리는 나와, 집에 돌아와 가족에게 짜증을 내는 나는 같은 사람인가요?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많은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세대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핸드폰을 열고, 내가 올린 게시물에 몇 명이 반응했는지 확인합니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가 하루의 감정을 좌우합니다. 남의 시선이 나의 기준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 단순히 현대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2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똑같이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보다, 죄인이면서도 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더 싫어하신다."
처음 들으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시는 건 당연한데, 죄 없는 척하는 걸 더 싫어하신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고 나면, 이 말이 단순한 경구가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2000년 전 바리새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3장 1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평범한 사람들, 즉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1. 그들은 말하지만, 행하지 않았습니다 (1-4절)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당시 회당에는 실제로 '모세의 자리'라고 불리는 석좌가 있었고, 율법 교사가 그 자리에 앉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권위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신뢰했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가르침과 삶 사이의 괴리, 말과 행동 사이의 간격이 문제였습니다. 강단에서 하는 말과 집에서 사는 삶이 달랐습니다. 회당에서의 모습과 시장에서의 모습이 달랐습니다.
4절은 더 구체적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자신들이 만든 해석과 규정을 덧붙여 무려 613개의 율법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가 몇 미터인지, 손을 몇 번 씻어야 하는지, 어떤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삶의 모든 영역이 규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그 조항들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감시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그 무게를 함께 지지 않았습니다. 짐을 얹어주는 사람이었지, 짐을 함께 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헬라어 단어가 있습니다. '행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실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행할 의도가 없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구조적인 이중성이었습니다. 가르치는 것과 사는 것이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중성이 백성들에게 가져온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유가 아니라 정죄였습니다. 기쁨이 아니라 죄책감이었습니다. 613개의 율법 조항 앞에서 백성들이 느낀 것은 해방이 아니라 끝없는 실패였습니다. "너는 이것도 못 지켰어, 저것도 부족해." 율법은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죄책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의무가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느껴졌습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모습이 있지 않나요? 혹은 우리 자신 안에도요. 신앙 공동체에서 옳은 말을 하면서, 정작 삶에서는 그것을 적용하지 않는 모습. 성경적 연애에 대해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 기준을 지키지 않는 모습. 헌신을 강조하면서 정작 자신은 빠지는 모습. 예수님은 그것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2. 그들은 보여주기 위해 살았습니다 (5-7절)
5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일부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 행위 전체가 관중을 의식한 퍼포먼스였다는 것입니다.
경문 띠를 넓게 한다는 것은, 신명기 6장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과 이마에 묶는 작은 상자를 크게 만들어 눈에 잘 띄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옷술을 길게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수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기억하라고 옷에 술을 달라고 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더 길게 만들어 경건함을 과시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런 모습입니다. 도로에서 초록색 번호판을 단 차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법인 차량에 의무적으로 부착하게 한 번호판입니다. 원래 취지는 회사 차량의 사적 사용을 막고 투명성을 높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초록 번호판이 "나는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신호로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절제와 투명성을 위한 제도가, 오히려 과시의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문 띠가 정확히 그랬습니다. 표식은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주어졌는데, 사람은 그 표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잔치의 윗자리, 회당의 높은 자리, 시장에서 인사받는 것, '랍비'라는 칭호—이 모든 것을 그들은 좋아했습니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헬라어 단어 φιλέω(필레오)는 깊은 애착, 심지어 사랑을 뜻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인정을 단순히 즐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했습니다. 삶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외식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이것이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라고 기도합니다. 연기가 아닙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게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 옆에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언은 충격적입니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요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눅 18:14)
왜일까요? 하나님은 죄 없는 척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인정한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처음에 드린 질문의 답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보다 죄 없는 척하는 우리를 더 안타까워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은혜는 자신의 필요를 아는 사람에게만 작동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들립니다. 그러나 죄 없는 척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복음이 필요 없다고 느끼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스스로 차단되어 버립니다.
바리새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신앙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루를 살아가며 가장 많이 의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어떻게 보일까, 어떤 평가를 받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 시선이 우리의 말을 결정하고, 행동을 결정하고, 심지어 신앙의 모습까지 결정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경문 띠를 넓히고 옷술을 길게 했다면, 우리는 SNS 피드를 가다듬고 신앙의 언어를 포장합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사람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청년 여러분, 솔직하게 물어볼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배에 나오는 이유, 봉사하는 이유, 기도하는 이유, SNS에 묵상을 나누는 이유—그 동기의 맨 밑에는 무엇이 있나요? 하나님을 향한 진심인가요, 아니면 누군가의 시선과 인정인가요? 혹은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인가요? 예수님은 그 뿌리를 보고 계십니다.
3.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앙 공동체 (8-12절)
이제 예수님은 대안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직함을 갖지 말라거나 리더십을 거부하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 모두의 진짜 선생, 진짜 아버지, 진짜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순간, 신앙 공동체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무너진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앉으셔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에서 예수님은 가장 핵심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여기서 '섬기는 자'는 헬라어로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입니다. 이 단어는 당시 식탁에서 음식을 나르는 하인을 지칭할 때 쓰이는 낮은 신분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은 공동체 안에서 위대함을 추구하는 방법을 완전히 뒤집으셨습니다. 세상은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이 낮아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자기 비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낮아짐입니다. 세리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자신을 비참하게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 솔직함이 하나님과의 진짜 관계를 열었고, 바로 그 관계에서 진짜 낮아짐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 자신이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의 자리로 내려오심으로 이 원리를 몸소 살아내셨습니다.
4. 짐을 지우는 자와 짐을 내려놓게 하시는 분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르친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율법이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613개의 율법 조항 앞에서 백성들이 느낀 것은 해방이 아니라 끝없는 정죄였습니다. "너는 이것도 못 지켰어, 저것도 부족해." 율법은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죄책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의무가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초청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 시스템 전체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짐을 지우는 자들에게서 떠나, 짐을 내려놓게 하시는 분께로 오라는 초청이었습니다. 평생 정죄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한 마디는 하늘이 열리는 소리와 같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지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은혜보다 정죄를 먼저 만난 사람, 자유보다 규칙을 먼저 배운 사람, 사랑보다 심판을 먼저 느낀 사람—그들에게 신앙은 짐입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기쁨이 없는 분, 하나님이 늘 나를 심판하실 것 같아 두려운 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의무처럼 느껴지는 분.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균형을 짚어야 합니다. "죄인이어도 괜찮아, 은혜가 있으니까"—이것은 오늘 말씀의 결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값싼 은혜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정죄한 것이 잘못이었다면, 은혜를 빌미로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똑같이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은혜는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십자가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신 값이 바로 우리 죄의 무게였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셨다면, 십자가는 필요 없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그만큼 무겁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진짜로 만난 사람은 죄를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십자가 앞에서 더 선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에서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은혜는 죄 가운데 머물 허락이 아닙니다. 죄에서 나올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진짜 회개와 단순한 죄책감은 다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죄책감은 나를 향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니"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진짜 회개는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구나"로 나아갑니다.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준 것은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죄책감은 사람을 무너뜨리지만, 회개는 사람을 일으킵니다.
적용: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을 세 가지로 정리하며 적용하고 싶습니다.
첫째,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말이 신앙 언어로 포장되면 "나는 꽤 신앙이 좋은 편이야"가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바리새인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복음이 들리기 시작하는 자리입니다. 단, 죄를 인정한다는 것이 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죄의 무게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진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둘째, 내가 의식하는 시선이 누구의 시선인지 점검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의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바라보는 대상이 바뀌면, 사는 방식이 바뀝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할 때 우리는 포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의식할 때 우리는 솔직해집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똑같이 살 수 있는 신앙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오늘 하루, 가장 먼저 의식하는 시선이 누구의 시선인지 돌아보십시오.
셋째, 낮아지는 연습을 하십시오.
공동체 안에서 섬기는 자리를 찾으세요. 눈에 띄지 않는 자리,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리.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위대함이 자랍니다. 그리고 그 낮아짐은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동시에 그 죄인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은혜를 깊이 알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낮은 자리가 어색하지 않게 됩니다. 나를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알기 때문에, 그 낮아짐이 기쁨이 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완벽한 신앙인이 아니라, 솔직한 죄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신앙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퍼포먼스'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버리고, 혹은 알면서도 감추고, 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갔습니다. 표식은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주어졌는데, 그 표식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사람의 시선을 하나님의 시선보다 더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필요 없어졌고, 은혜가 필요 없는 삶은 하나님과 멀어진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르친 종교는 백성들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경건한 기도 문구도, 긴 옷술도, 높은 자리도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청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이 무겁고 지치십니까? 하나님이 늘 나를 심판하실 것 같아 두렵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어느새 신앙이 포장이 되어버린 것 같아 공허하십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초청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의 무게를 예수님이 대신 지셨으니, 이제 그 무게를 혼자 지고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포장을 내려놓으십시오. 죄 없는 척을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의 시선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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