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시작되는 ‘거룩’의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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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11:44-47
레위기 11:44-47
[서론]
[서론]
요즘 시대에 '밥상'이나 '식탁'이라는 단어는 예전만큼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바쁘게 살다 보니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밥 한 끼 먹기가 어렵고,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자 대충 때우거나 배달 음식으로 각자의 방에서 조용히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오늘날의 식탁은 그저 '바쁘게 배를 채우고 일어나는 정거장'처럼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년 성도님들 세대에게 ‘밥상’은 단순한 끼니, 그 이상의 아주 각별하고 묵직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혹시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의 유명한 '밥상머리 일화'를 아십니까? 정 회장은 생전에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매일 새벽 5시 30분이 되면, 청운동 자택으로 모든 아들과 며느리들을 무조건 다 불러 모아 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지각이나 결석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 꼭두새벽의 밥상머리에서 정 회장님은 자녀들의 태도를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며 뼈대 있는 가풍을 세웠습니다. 그 가문에게 있어 새벽 밥상은 단순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 가문을 세우고 자녀들의 정신을 훈련하는 가장 엄격하고 중요한 '교육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성경을 보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백성들을 교육하시기 위해 이 ‘밥상’을 아주 중요하게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독하다가 가장 먼저 포기하게 되는 고비가 바로 레위기입니다. 온갖 복잡한 제사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레위기 11장의 '음식법(정결법)'을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깐깐한 영양사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단을 철저하게 통제하십니다.
"이건 먹어도 된다, 저건 먹으면 안 된다, 이건 부정하다, 저건 정결하다."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가족들과 외식할 때 즐겨 먹는 삼겹살도 먹을 수 없고, 몸보신한다고 먹는 장어나 기력 회복에 좋은 낙지와 오징어, 겨울철에 맛있는 대방어회도 전부 먹어선 안 되는 ‘부정한 음식’이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나 일부 이단 종파(안식교)에서는 지금도 이 구절을 지킨다며 돼지고기나 비늘 없는 해산물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우주를 창조하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이 매일 먹고 마시는 그 작은 밥상머리 반찬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엄격한 기준을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정주영 회장이 밥상머리에서 자녀들에게 기업의 정신을 가르쳤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삼시 세끼 마주하는 그 평범한 식탁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시는 가장 위대한 ‘거룩의 훈련장(교육의 자리)’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레위기에 차려진 이 까다로운 식탁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먹고 마시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가장 눈부신 '거룩'으로 변화되는지 발견하는 복된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론 1]
[본론 1]
성도 여러분, 우리가 레위기 말씀을 읽다 보면 참 답답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레위기의 뼈대만 잘 잡아도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이 아주 선명하게 보입니다. 레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10장까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다루는 ‘제사법’, 오늘 본문이 포함된 11장부터 16장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깨끗함을 유지할 것인가를 다루는 ‘정결법’, 그리고 17장부터 마지막까지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 것인가를 다루는 ‘성결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정결하다'는 것은 단순히 손발을 물로 깨끗이 씻는 위생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더러운 풍속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마주하는 밥상 위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선’을 그어 놓으셨습니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음식을 나누셨을까요?
첫째로, 땅에 사는 육상 동물입니다. 이 육상 동물들 중, 아무 고기나 함부로 잡아먹을 수 없었습니다.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굽이 완전히 갈라져 있어야 하고, 동시에 되새김질을 해야만' 정결한 짐승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나 양, 염소는 이 조건에 딱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참 좋아하는 돼지는 어떻습니까? 굽은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짐승이었습니다. 반대로 낙타는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아서 부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 한 점을 상에 올릴 때도 그 짐승의 굽과 입을 깐깐하게 따져봐야만 했습니다.
둘째로, 물에 사는 수중 생물입니다. 바다나 강에 산다고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고기 중에서 반드시 '지느러미와 비늘이 모두 있는 것'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고등어나 조기 같은 생선은 밥상에 올릴 수 있었지만, 지느러미나 비늘 중 하나라도 없으면 모조리 식탁에서 퇴출당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 좋아하시는 시원한 낙지 연포탕, 기력 회복에 최고인 장어구이, 쫄깃한 오징어와 문어, 심지어 국물 내기 좋은 조개나 새우, 꽃게 같은 것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절대 입에 대서는 안 되는 부정한 것들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늘을 나는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곤충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 중에서도 독수리나 매, 까마귀처럼 남의 피를 흘리게 하거나 썩은 고기를 먹는 사나운 새 20종은 철저하게 금지하셨습니다. 벌레나 곤충 역시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은 다 부정하게 여겨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고, 오직 땅에서 펄쩍 뛸 수 있는 메뚜기 종류만 식용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살 때, 혹은 밥상머리에 앉아 수저를 들 때마다 얼마나 긴장했겠습니까? "이게 비늘이 있는 생선인가? 이게 굽이 갈라진 짐승인가?" 고기 한 점, 생선 한 토막을 입에 넣을 때마다 그들은 머릿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려야만 했습니다. 내 입맛대로, 내 욕심대로 함부로 먹고 마실 수 없는 사람들! 밥상머리에서조차 하나님의 까다로운 통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밥상이자 삶이었습니다.
[본론 2]
[본론 2]
여러분, 그렇다면 도대체 우주를 창조하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밥상머리 반찬을 까다롭게 통제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무슨 영양사라도 되시는 걸까요?
과거의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생과 건강'을 지켜주기 위함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뜨거운 사막 기후에서 돼지고기나 어패류는 쉽게 상하고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으니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소고기나 양고기라고 해서 뜨거운 사막에 두면 안 썩습니까? 똑같이 상하고 병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위생 때문이라는 것은 완벽한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짐승의 습성을 빗대어 해석하기도 합니다. 풀을 먹는 초식동물처럼 온유하고 착하게 살고, 남을 잡아먹는 육식동물처럼 잔인하게 살지 말라는 뜻이라고 억지로 비유를 풉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내 마음대로 꿰맞추는 아주 자의적이고 위험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다로운 음식법을 주신 진짜 이유는, 사람의 얄팍한 생각이 아니라 오늘 본문 44절 말씀에 아주 명확하고 묵직하게 선포되어 있습니다. 다 함께 44절 상반절을 눈으로 보시겠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식탁의 메뉴를 통제하신 유일한 이유는 바로 ‘거룩’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않고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못하게 막으신 부정한 짐승들의 특징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그 짐승들 자체가 도덕적으로 악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풍속이나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피째로 먹고 즐기던 짐승들을 의도적으로 금지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식탁을 이방인들의 식탁과 철저히 '분리' 시키신 것입니다. 생명(피)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이방인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도록 식탁 위에 거룩한 울타리를 쳐주신 영적인 시청각 교육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평생토록 가족의 삼시 세끼를 책임져 오신 우리 권사님, 집사님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매일 밥상을 차리고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수고롭고 반복적인 일상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지극히 평범하고 반복되는 밥상에 앉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수저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시장에 고기를 사러 갈 때도 "이것이 굽이 갈라졌는가? 이것이 비늘이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 세 번, 밥상머리에 앉을 때마다 자신이 이방인들과는 철저히 다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임을 뼛속 깊이 새겨야 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는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매일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통해 연습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밥상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식탁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날마다 확인하는 '일상의 지성소'였고, 세상과 나를 구별해 내는 가장 위대한 '거룩의 훈련장'이었습니다.
[본론 3]
[본론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시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기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깐깐하게 금지하셨다면, 오늘 예배 끝나고 가족들과 삼겹살 구워 먹고 방어회 먹는 우리는 다 율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삼겹살을 먹든 장어구이를 먹든 아무런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그 무겁고 엄격했던 음식법은 더 이상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신약성경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인간은 겉으로 깨끗한 소고기를 먹고, 비늘 있는 생선을 골라 먹는다고 해서 거룩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이미 남을 미워하는 마음, 시기 질투, 교만과 탐욕이라는 썩은 냄새 진동하는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돼지고기가 우리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죄악들이 우리를 철저하게 부정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하나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레위기에서 절대 먹지 말라고 했던 네 발 가진 부정한 짐승들과 기어 다니는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주님, 저는 부정한 것을 평생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호통을 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부정하다) 하지 말라!"
성도 여러분, 그 보자기 안에 들어있던 징그럽고 부정한 짐승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온갖 죄악과 허물로 얼룩져서, 도저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밥상에 함께 앉을 자격이 없었던 흉악한 죄인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깨끗해질 수 있었습니까? 구약의 모든 복잡한 율법들이 가리키고 있던 단 한 분, 유일하게 정결하고 흠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온갖 율법을 다 지켜도 스스로 마음의 죄악을 씻어낼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먹고 마시며 지은 죄, 우리가 입술로 토해낸 모든 부정한 죄악들, 평생토록 씻을 수 없었던 우리의 그 더러운 허물들을 당신의 온몸으로 다 뒤집어쓰셨습니다. 가장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부정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율법의 엄격한 요구를 완벽하게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한 정결함과 거룩함은 내 힘으로 삼겹살을 안 먹고 꾹 참아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굳게 믿을 때, 그 예수님의 보혈이 내 영혼을 덮어 나를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의 은혜 덕분에, 율법의 무거운 멍에는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이제 예수의 피로 씻음 받은 우리는, 그 어떤 음식을 먹어도 결코 부정해지지 않는 참된 자유를 매일의 식탁 위에서 누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고 참된 자유를 얻은 우리는, 이제 매일 마주하는 우리의 식탁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미국의 사진작가 ‘에릭 엔스트롬’이 찍은 <은혜(Grace)>라는 아주 유명한 사진 작품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도 식당이나 어느 그리스도인의 가정집 액자에서 한 번쯤은 보셨을 것입니다. 사진을 보면,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낡은 식탁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깊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앞의 식탁에 차려진 것이라고는, 묽은 수프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덩어리뿐입니다. 고기반찬은커녕 그 흔한 채소조차 없는, 너무나도 가난하고 초라한 밥상입니다. 하지만 그 식탁 한가운데에는 두꺼운 ‘성경책’이 놓여 있고,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깊은 평안과 감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할아버지의 식탁이 부정한 식탁일까요? 고기반찬이 없고, 값비싼 생선이 없으니 가치 없는 식탁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빵 한 조각과 수프 한 그릇뿐이지만,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성경)을 중심에 모시고 드리는 이 식탁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가장 정결하고 ‘거룩한 식탁’입니다.
우리는 이제 레위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삼겹살을 피하고 비늘 없는 생선을 골라내며 거룩을 증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가 마주하는 밥상머리에서 ‘감사’와 ‘사랑의 언어’를 흘려보냄으로써 우리 식탁의 거룩함을 증명해야 합니다.
평생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밥상을 차려내고 일터를 지켜오신 우리 권사님, 장로님, 집사님들! 이제 여러분 가정의 식탁을 ‘잔소리의 자리, 세상 근심과 돈 걱정을 나누는 자리’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남편과 아내를 탓하고, 자녀들을 정죄하는 부정한 언어들을 우리 식탁에서 철저히 몰아내십시오.
대신, 그 밥상머리를 ‘축복의 제단’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을 때,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은혜의 식탁을 만드십시오. 혹시 홀로 식사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외롭다 한탄하지 마시고, 그 식탁의 빈자리에 예수님을 초청하십시오. 주님과 깊이 교제하는 성만찬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올릴 때, 김치 하나만 놓인 소박한 밥상일지라도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지성소가 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한 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며 여러분이 차려내고 마주하는 모든 식탁이, 생명을 살리고 가족을 회복시키는 ‘가장 거룩하고 눈부신 은혜의 식탁’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