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18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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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 본문에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여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것은 가나안 사람이라는 것 뿐입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녀가 살던 곳은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역인데, 이곳은 당시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이라는 이방 신을 섬기던 곳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도 없고, 성경도 없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환경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닥쳤습니다. 딸이 귀신 들린 것입니다. 그것도 "흉악히" 귀신 들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딸이 매일 고통받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내 눈앞에서 내 아이가 무너져 가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아실 것입니다. 내가 아픈 것보다 내 자녀가 아픈 것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을 때, 부모로써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처음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본문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기 전에 이 여인이 어디를 갔는지, 무엇을 시도했는지, 마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 있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등장합니다. 혈루증이라는 것은 피가 멈추지 않는 병입니다. 열두 해면 12년입니다. 이 여인이 12년 동안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마가복음 5장 26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많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한 사람에게만 간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큰 괴로움을 겪었습니다. 가진 것도 다 써버렸습니다. 12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태는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은 충분한 믿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여인이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한 뒤에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도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에 살던 어머니였습니다.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이 어머니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시도했을 것입니다. 그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도 찾아갔을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자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딸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온 한 선생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는 이여인의 행동이 깊은 신앙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품위 있게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체면도 다 버리고, 길에서 울부짖으며 달려온 것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으면, 제자들이 "저 여자 좀 보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따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속에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라면, 이 여인의 절박한 외침을 들으시고 바로 응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침묵이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부르짖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자 입장에서는 무시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여인을 귀찮아합니다. 제자들이"시끄러우니까 그냥 보내 주십시오."말 하면서 예수님 가까이 있던 사람들마저 이 여인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은 사실상 "너는 내가 온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 왔다.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에 내가 너를 도울 이유가 없다 — 이렇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첫 번째는 침묵이었고, 두 번째는 거절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한 번은 흔들렸을 것입니다.
"아, 이분은 나를 도와주실 분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이 여자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 앞에 와서 절합니다.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딱 한마디입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긴 말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고백도 아닙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제발 도와달라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 번째 반응은 무엇입니까? 26절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개"로 번역된 원어의 의미는, 거리에 돌아다니는 들개가 아니라 집 안에서 기르는 작은 강아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완전히 모욕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쉽게 풀면, "밥상에 있는 음식을 자녀가 먹어야지, 그것을 강아지한테 줄 수는 없지 않느냐" — 이런 뜻입니다.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강아지는 이방인을 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여인은 예수님께 세 번이나 거절 당한 것입니다. . 첫 번째는 침묵, 두 번째는 거절, 세 번째는 "개"라는 말.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아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돌아섰을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하며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분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27절에 보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대답을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은혜가 넘쳐서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신앙 고백"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그렇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말은 이런 뜻일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개입니다. 개 맞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를 뭐라고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개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제 딸만 살려주십시오."
이것은 신학적 고백이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은 엄마의 말입니다.
체면이 어떻게 되든, 자존심이 어떻게 되든, 내 딸을 살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키워보신 분은 아실 것입니다. 내 아이가 위험에 처하면,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아이만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실 이 여인의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28절을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크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동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진심으로 나를 믿어서 온 것이냐?"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혹시 다른 데 먼저 갔다가 안 되니까 나한테 온 것 아니냐?"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신앙이 순수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제대로 알고 온 것이 맞느냐"고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절박함을 보셨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은 그 자리를 보셨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예수님밖에 없어서, 부서진 채로 엎드린 그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큰 믿음"이라 불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통틀어서, 예수님이 누군가의 믿음을 이렇게 "크다"고 칭찬하신 경우는 단 두 번뿐입니다. 한 번은 마태복음 8장의 로마 군인 백부장이고, 한 번은 오늘 본문의 이 가나안 여인입니다. 둘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격이 완벽한 바리새인에게는 "큰 믿음"이라고 하시지 않고, 자격이 전혀 없는 이 사람들에게 "큰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로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있는 곳에서 말씀만 하셨는데, 집에 있는 딸이 나은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어떤 마음으로 왔든, 어떤 동기로 왔든, 예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그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잠시, 이 본문이 마태복음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마태는 사건들을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메시지를 묶어서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5장 1절부터 20절에 바리새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태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 이야기 바로 뒤에 오늘 본문인 가나안 여인 이야기를 배치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신앙이 깊다고 인정받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율법을 가장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절차와 형식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5장 8절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자격도 있고, 지식도 있고, 형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이방 여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성경도 모릅니다. 신앙도 정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동기조차 불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마태가 이 두 장면을 나란히 기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격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얼마나 잘 준비되었는지,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지가 기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 나아갔는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부끄럽습니다.
내 기도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사업이 잘 안 될 때, 건강이 안 좋을 때, 삶이 힘들 때, 그때야 하나님을 찾는 내가 부끄럽습니다.
잘 될 때는 예배도 빠지고, 기도도 안 하다가, 힘들어지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기도해도 되나?" "이런 동기로 하나님을 찾아도 되나?" 그래서 우리는 주저합니다. 믿음이 좀 더 정리되면, 마음이 좀 더 깨끗해지면, 그때 하나님 앞에 제대로 나가야지 — 그렇게 미루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우리가 잘 아는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 이야기 가 나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재산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이것은 "아버지, 저한테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만큼 큰 모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 탕진했습니다. 성경에서 허랑방탕하게 썼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결국 남의 집에서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가장 더러운 동물입니다. 그 더러운 돼지를 치는 신세까지 떨어진 것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고 싶을 만큼 굶주렸습니다.
그때 이 아들이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한테 너무 잘못해서 죄송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배가 고파서입니다. 여기 있으면 굶어 죽겠는데, 아버지 집에 가면 품꾼이라도 해서 밥은 먹을 수 있겠다 — 이것이 이 아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계산을 한 것입니다. 진심 어린 회개라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물론 이 아들도 돌아가면서 할 말을 준비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8-19절).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의 출발점은 뜨거운 회개가 아니라 그저 배고픔이었습니다. 힘들어서, 배고파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 그래서 아버지에게 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과 닮지 았습니다.
가나안 여인도 다른 방법을 다 시도한 뒤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예수님 앞에 왔을 수 있습니다. 이 아들도 다 탕진한 뒤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간 것입니다. 둘 다 동기가 완벽하지 않습니다. 둘 다 순수한 마음으로 온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간 곳은, 하나는 예수님 앞이었고 하나는 아버지 앞이었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아들에게 묻지 않습니다. "네가 왜 돌아온 것이냐?" 묻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이냐, 아니면 배고파서 온 것이냐?" 따지지 않습니다.
아들이 준비한 고백을 다 듣기도 전에, 달려가서 안아버립니다. 아버지가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 집안의 어른이 달려가는 것은 체면을 버리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체면도 버리고 달려가서 아들을 안은 것입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말합니다.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서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이 아들은 품꾼으로 받아달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겼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다 아들의 신분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거늘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오매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첫째 아들의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이 아들이 지적하는 것은 둘째의 삶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 — 둘째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져가서 탕진한 사람입니다. 올바로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배고파서 돌아왔는데,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둘째 아들이 올바로 살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다 탕진한 것도 사실입니다. 배고파서 돌아온 것이지, 진심으로 회개해서 돌아온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첫째 아들이 보기에, 이런 사람을 아들로 다시 받아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을 보십시오. 31-32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첫째 아들의 지적에 반박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가 잘못 산 것 아니라고 변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네 동생이 사실은 진심으로 회개해서 돌아온 것이다"라고 설명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공정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만났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아들이 어떤 동기로 돌아왔든, 어떤 삶을 살았든, 내 아들이 돌아왔다 —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달려가 안아주시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이고, 은혜였습니다.
이 아버지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겹치지 않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어디를 먼저 갔다 왔든, 예수님은 묻지 않으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동기가 회개든 배고픔이든, 아버지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그들이 돌아온 자리, 엎드린 자리가 어디였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이었습니다. 아버지 앞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첫째 아들도 닮아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다 지키고, 형식을 다 갖추고, 겉으로는 완벽했지만 마음이 멀었습니다. 첫째 아들도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기고 명을 어긴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둘 다 옳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한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대 세계에서 질그릇은 가장 흔한 그릇이었습니다.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가장 값싼 그릇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쉽게 깨지는 그릇이었습니다. 금으로 만든 그릇이나 은으로 만든 그릇은 깨져도 녹여서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가치가 있으니까 다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그릇은 한번 깨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고칠 수가 없습니다.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깨진 질그릇 조각은 쓰레기통에 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그릇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바로 그 질그릇이라고 말합니다. 연약하고, 깨지기 쉽고,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단단한 척하지만, 사실은 금방 깨집니다. 시험이 오면 흔들리고, 어려움이 오면 무너지고, 유혹이 오면 넘어집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보배이신 그 주님이 바로 이 질그릇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금 그릇을 고르시지 않았습니다. 은 그릇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단단하고 깨지지 않는 완벽한 그릇을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깨지기 쉽고, 값싸고, 하찮은 질그릇 — 바로 그 안에 가장 귀한 보배를 담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이 바로 그 질그릇입니다. 이방인이고, 자격이 없고, 동기도 불분명하고, 어쩌면 이방 신에게 먼저 갔다 온 사람입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닙니다. 탕자도 질그릇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회개가 아니라 배고픔 때문에 돌아온 아들입니다. 누가 봐도 아들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달려가 안아주셨습니다. 하찮은 질그릇 안에 가장 귀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질그릇입니다. 연약합니다. 잘 깨집니다. 동기가 늘 순수한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에 먼저 기댑니다. 돈에 기대고, 사람에 기대고, 내 능력에 기댑니다. 그러다가 다 무너지고 나서야,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어서야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도 합니다. 탕자처럼 다 탕진하고 배고파서 돌아오기도 하고, 가나안 여인처럼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그릇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가치 없는 그릇에 가장 귀한 보배를 담으셨습니다. 동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부서진 채로, 절박한 채로, 어쩌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라도 주님 앞에 나온 그 자리 —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이라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염치를 찾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차리면 안 됩니다. "내가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도 되나?" "내 동기가 이런데 기도해도 되나?" 이렇게 따지면 안 됩니다. 가나안 여인은 염치를 버렸습니다. 개라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탕자도 염치를 버렸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해 놓고, 배고파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염치없음을 "큰 믿음"이라 부르셨고, 아버지는 그 아들의 염치없음을 달려가 안아주셨습니다.
혹시 오늘 가나안 여인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다른 방법을 다 써봤는데 안 되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신 분이 계십니까. 혹시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이 예배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이것저것 기대봤는데 다 무너지고, 배고프고 힘들어서, 이제 하나님밖에 없겠다 싶어서 오신 분이 계십니까.
괜찮습니다. 어떤 마음이든 상관없습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신앙이 정리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리면 됩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도우심을 구하면 됩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 모두는 다 질그릇입니다. 단단한 사람 없습니다. 흠 없는 사람 없습니다. 동기가 늘 깨끗한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우리를 다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부족함을 아시고,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것까지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모습 그대로 나와서 주님 앞에 구할 때, 주님은 그 모습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가나안 여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네 믿음이 크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 부끄러워서 주저하지 마십시오. 염치 때문에 미루지 마십시오. 금 그릇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깨진 그대로, 부족한 그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가셨듯이,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듯이, 주님은 지금 우리가 나오는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이 늘 온전하고 분명한 것만은 아님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부족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의 상태보다
주님께 나아오는 그 방향을 보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게 하옵소서.
꾸미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면서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오늘도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어떤 모습이든 주님께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