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너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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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친구야 너는 아니
본문: 요15:1-17
주제: "신앙은 내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 애쓰는 '종교적 노동'이 아니라,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며 그분의 사랑을 공급받아 자연스럽게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친밀한 사귐'입니다."
[서론]
우리가 영상으로 본 그 노래는 사실 이해인 수녀님의 시 ‘친구야 너는 아니’입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친구야 너는 아니”
꽃이 필 때 꽃이 질 때
사실은 참 아픈 거래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아줄 때
사실은 참 아픈거래
친구야 봄비처럼 아파도 웃으면서
너에게 가고픈 내 맘 아니
향기 속에 숨겨진 내 눈물이 한송이
꽃이 되는 것 너는 아니
우리 눈에 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귀에 다 들리진 않지만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엄마가 혼잣말로 하시던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나는 날
이 세상엔 아픈 것들이 너무 많다고
아름답기 위해선 눈물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방금 들은 시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름답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보통 꽃만 봅니다. 예쁘게 핀 모습, 향기로운 모습만 봅니다.
그런데 사실 그 꽃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비를 맞고, 바람을 견디고, 뿌리에서부터 올라오는 긴 시간의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각자의 어려움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더 착하게 살아야지” “더 노력해야지”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본론1]
먼저 오늘 말씀에 대한 배경설명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로마병사들에게 붙잡혀 십자가를 향해 가시기 불과 몇시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달빛 아래 포도밭을 지나가시면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그 유언의 첫 마디는 무엇일까요?
15장 1절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7번 드러내십니다.
그 중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선언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왜 하필 포도나무일까요?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가나안 땅에 정성껏 심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들포도’를 맺는 실패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자신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제 구원은 어느 민족으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있느냐에 달려있다는 선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정의가 ‘혈통’에서 ‘관계’로 완전히 바뀐 혁명적인 순간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서운 단서가 달려있습니다.
15장 2절입니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잘라버리겠다는 것은 곧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가지는 실패한 이스라엘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 열매를 맺는 가지는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더 좋은 열매를 위해 불필요한 고집과 욕심을 쳐내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 속에 고통과 아픔이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고난은 우리를 죽이시려는 심판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풍성한 삶,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농부이신 하나님의 섬세한 돌봄과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은 우리를 포기하신 증거가 아니라 우리를 더 귀하게 쓰시려는 증거입니다.
그럼 가지가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4절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한번 동그라미를 쳐보십시오.
11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가지가 열매를 잘 맺으려고 스스로 수액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을 보셨습니까?
가지가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그저 나무에 붙어 나무가 주는 수액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의지와 노력을 해야하는게 아닙니다.
내 삶을 그 분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존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기독교가 종교가 아닌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혹은 고행으로 신의 호의와 보상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기안84가 한 방송에서 티벳 차마고도에 가서 ‘오체투지’라는 불교의 기도수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5보를 걷고 온 몸을 땅에 엎드려 붙이면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거의 하루 종일 이렇게 하니까 엄청 힘이 듭니다.
저는 이것보면서 비난한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애씀이 너무 애처롭게 보였습니다.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내 의지와 노력을 내려놓고 그 분이 주시는 사랑과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댓가를 치뤄야 하는게 아닙니다.
또한 ‘머문다’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한번 예수님 믿는다고 고백했다고 끝나는게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삶 속에서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전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에 유명한 대사가 있었습니다.
“내 안에 너 있다”
사랑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그 사람이 생각납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게 뭔지 원하는게 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이런 사귐을 원하십니다.
어떤 자매의 특별한 기도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번 골방을 찾아 기도할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자매는 시시때때로 스마트폰을 귀를 대고 예수님과 통화하듯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거창한 종교활동이나 완벽한 삶이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 주님의 마음을 살피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힘들때 의지하고, 기쁠때 감사하며, 선택할때 묻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본론2]
그러면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이 만들어내는 열매란 무엇을 말할까요?
12절입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말씀에서 ‘머물다’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의 최고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열매’라고 말하면 당연히 선행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라’고 말하면 너무 추상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요?
13절입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게 참 부담스러운 말씀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번에 이런 사랑을 베풀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곧바로 그런 사랑을 원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럴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자신을 내어줄수 있는 사랑입니다.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내 시간과 돈은 나 자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내 친구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삶이야 말로 목숨을 주는 사랑과도 같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단 10분의 시간, 단 천원의 물질을 내어주는 것도 아까워할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숨을 내어줄수 있겠습니까?
내가 지금보다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섬기는 삶이 곧 내 목숨을 내어놓는 삶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낮아짐과 섬김도 쉬운게 아닙니다.
내 힘과 의지로 하려고 하면 힘만 들고 지치기만 합니다.
성공한다고 해도 내 의만 내 공로만 쌓여 교만해질 뿐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또다시 ‘머무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게서 모든 수액을 공급받듯 주님께 그 사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내가 공급받은 사랑만큼 남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는게 아니라 예수님 안에 머물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 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경험한 사람만이 그렇게 사랑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15절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원래 주인이 시킨 것을 모두 지키는 사람은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까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지 종으로 여기시는게 아닙니다.
종은 일을 시키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친구는 동반자로서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이런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사람이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안에 머물며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을 내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여기시기에 자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친구 사랑을 자기 목숨으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종의 역할은 주인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친구는 주인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친구와 기쁨을 함께 누리고 함께 걷는 삶입니다.
종처럼 신앙생활하면 늘 해야할 일에 눌려 지치고 힘들기만 합니다.
하지만 친구처럼 신앙생활하면 주님과 함께 걷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그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들은 장담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함께 죽더라도 결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한다던 수제자 베드로는 3번씩이나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지와 열심이 가진 한계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네 힘을 빼고,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초대였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머물게 된 베드로는 어떻게 변합니까?
두려워 숨던 겁쟁이에서 복음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는 ‘진짜 친구’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머묾’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원수를 사랑하고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앙은 내 힘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내 힘을 빼는 과정입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날마다 넘어지지만, 그때마다 다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의지하고 의존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던 노력을 멈추고 주님께 의존할때, 사랑은 비로소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열매맺게 됩니다.
우리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 감동받는 이유가 뭘까요?
왕이 그 고장 사람들을 친구처럼 대해주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픽션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실제 그러한 왕이 지금도 함께 하십니다.
왕되신 예수님이 친구처럼 우리와 날마다 동행하십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한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거창한 희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소중한 시간 10분이라도 내어주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
내 마음 한 자락을 내어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기도해주는 것,
그 작은 머묾의 시작이 우리의 삶을 풍성한 포도송이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런 우리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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