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ew 21 : 1 - 11 ('종려나무와 나귀') - 종려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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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아름답게 변하기를 거부하고, 아름다움 곁에 머무르려고만 하는 사람들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과 그 곁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자로의 변화로 부르십니다.
오늘도 아름다운 예수님 곁에만 서지 마시고, 그 아름다운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 안에서 향기를 발하는 자리로 함께 나아갑시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가장 외롭고 고독한 존재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환호를 지릅니다.
자신들이 가진 겉옷, 당시 사람들은 겉 옷 한 벌이 전부입니다.
그런 옷을 바닥에 깔고서 예수님을 환영한다는 것은 그 분께 모든 것을 건다는 것, 그 분이 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자신들의 희망하는 바를 눈 앞에 보이는 예수에게 모두 걸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은 자신이 희망하는 바를 예수님께 거는 삶이 아닌,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내 삶속에서 살아가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 무리는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수와 다른 그 분의 행보를 볼 때에 분노로 변해버린것입니다. 실망감으로 예수를 더욱더 죽이려고 했떤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생각, 그 분의 마음, 그 분의 계획에는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방식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어 놓고 그대로 움직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머리 둘 곳 조차 없는 예수님, 이제 곧 몰아닥칠 어둠의 시간들, 고난의 시간들, 괴로움의 시간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시는데, 환호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의 소망의 실현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소리치고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 곧 죽을 자리로 가는 한 사람, 어쩌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덧 없는 삶인데, 그리고 누구 한 사람도 예수님의 인생에 관심을 두지 않는데, 모두들 자신들의 꿈 욕망 소망에 눈을 돌리고서 따라오고 있는데도, 놀랍게도 이 예수 안에 소망의 발걸음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계속해서 내딛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있을 때처럼 모든 것이 동시에 움직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이 방종으로 흘러갈 때는 아무도 그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멈춘다면, 그 사람이 고정된 한 점이 되어, 급히 달리고 있는 다른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게 한다. (파스칼)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모든 이들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딱 한 분 예수님은 멈추어서셨습니다. 그리고 고정된 점이 되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지를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자만심을 갖게 하고, 신을 모르고 우리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하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균형감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과 우리의 비참함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파스칼)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시고, 동시에 나의 죄됨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본문 속에 드러난 사람들과 예수님을 통하여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힘과 권세로 살아가는 방식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리로 돌아간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안에 울분이 가득하다.
해준데로 갚아주는 것, 힘은 힘으로 되쳐주는 것 시원스럽다. 후련하다.
(시리아 화학무기 vs 미국의 화학무기 공격)
과연 정당하다고만 말할 수 있는 부분인가?
그 정당함속에서 죄없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 괴로움을 우리는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give & take 방식은
둘 중의 하나는 죽는다.
더 나아가 둘 다 죽을 수도 있다.
결국 서로를 모두 죽이는 방식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종려나무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그 종려나무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예수님의 입성을 통하여 더욱더 외치고 있습니다.
(NKRV)
(NKRV)
3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종려나무는 구약 시대 여리고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행하신 전쟁의 승리의 흔적을 담고 있는 나무입니다.
곧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서 여리고 성의 거대한 권세를 무너뜨린 것처럼, 그와 같은 일을 예수님이 당시 로마라는 초강대국을 향하여 행하여 주실 것에 대한 기대와 바램과 소망이 종려나무에 담겨져 있습니다.
결국 힘으로 권세로 강력한 정권 로마를 무너뜨릴 것에 대한 희망이 소망이 종려나무를 흔드는 저들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힘으로 권세로 사는 세상에서 그 힘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통하여 당당하게 승리하고픈 마음 말입니다.
주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유명한 마사다 항전으로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무려 7년동안 계속되었다. 세계 최강인 로마 제국은 유대국가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해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68년부터 70년까지 유대의 열심당원들이 로마 수비대를 쫓아내고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이 때 열심당원들은 매년 동전을 만들었다. 유대 국가의 독립을 기념하는 동전에 새겨진 문양이 바로 종려나무였다.
70년에 로마 장군 디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렸다. 로마는 골칫거리였던 유대 국가의 반란을 진입한 것을 기념하여 동전을 만들었다. 그 동전에 로마를 상징하는 로마 군인과 유대국가를 상징하는 종려나무와 그 종려나무에 등을 돌리고 무릎을 꿓고 있는 유대인 여자를 새겼다. 그리고 동전 밑에 큰 글자를 새겨 넣었다. "유대 정복되다."
이처럼 종려나무는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당시에 승리와 부활을 상징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민족주의를 심어줬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려 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종려나무는 죽은 나무에서 새순이 돋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종려나무를 가르켜서 ‘죽음을 이기고(승리) 다시 사는 나무’라는 의미에서 승리라는 상징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비록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죽음뒤의 부활에 대하여서는 더더욱 그림이 없었던 자들이었지만, 저들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힘과 권세 능력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승리의 삶, 상대를 짓밟아버리고 다시금 가장 높이 오르고자 하는 저들의 마음,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가 되어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몹시 힘들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 살아가는 방식
예수님에게는 무리의 기대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무리의 기대가 있습니다.
저들이 꿈꾸는 해방이 있습니다.
저들이 꿈꾸는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기는 곧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의 부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기는 곧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의 부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라도 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무죄하였던 예수님을 성난 무리의 외침에 따라 맡겨버린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향한 저들의 외침은 인기는 곧 예수님을 향한 요구입니다. 우리의 뜻대로 행하여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외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이러한 사람들의 인기, 그 가운데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요구가 있습니까?
오늘 나는 사람들의 소리, 인기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새번역)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 새번역)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사람들의 소리, 인기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뭔가 우리의 인생에 기준이 필요합니다. 늘 변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산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입니다.
자신들의 욕망, 소망, 꿈을 충족하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의 욕망, 소망, 꿈을 충족하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의 욕망, 소망, 꿈을 충족하기 위해서이다.
수시로 경험하는 삶의 소리
가장 적당한 때를 따라 움직이는 방식
평상시 4만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이지만, 거룩한 도시에 20만명의 순례자들이 몰려드는 상황은 최고의 찬스이었다.
유월절 절기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미묘한 흐름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 정권에 대한 반감의 최고조에 달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정점의 기간에 예수님이 행하실 일들은....
눈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살리십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선두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꿈꾸었습니다. 지금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때, 유월절이라는 명분이 있고,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시나리오가 작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라는 정권을 무너뜨릴 일만 남았던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분 예수, 그 분을 통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무리들, 너무나도 좋은 때를 만난 사람들, 이제 예수님이 뭔가 액션을 취하시기만 하면, 뭔가 선언하시기만 한다면, 독립을 향한 저들의 마음이 성취되어질텐데 말입니다.
배를 타고 있을 때처럼 모든 것이 동시에 움직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사람이 방종으로 흘러갈 때는 아무도 그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멈춘다면, 그 사람이 고정된 한 점이 되어, 급히 달리고 있는 다른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게 한다. (파스칼)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모든 이들이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딱 한 분 예수님은 멈추어서셨습니다. 그리고 고정된 점이 되어, 오늘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지를 어떤 방식으로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고 있습니다.
꼭 예수를 영접한 우리의 인생과 비슷한 마음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뭔가를 행하여 보려는 우리의 꿈과 희망,,,, 그러나 예수님의 흔적은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인도해가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방식
나귀의 의미
나귀의 의미
나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동물입니다.
부정한 짐승임에도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을 드려 대속하게 하는 동물입니다.
이 나귀의 특성 중의 하나가 주인에 대한 친밀함인데, 자기 주인이 제공한 구유가 아니면 먹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주인에게만 연합하려고 하고 주인에게만 순종하려는 습성입니다.
이런 무리들의 흐름에 대하여 예수님의 흔적이 던져주는 메세지는 ......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나신 곳이 구유라고 기록합니다. 거기서 구유란 말 구유가 아닌 나귀의 구유입니다. 그리고 입성하실 때에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무엇을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의 종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욱더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모든 능력을 다 가지신 예수님께는 더욱더 많은 유혹이 있었다.
능력이 많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 가진 능력과 축복들이 저주가 되는 소리다.
주님, 아버지의 것이 그 분의 것이었다. 아버지의 행하심이 곧 그 분의 행하심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순종하신다.
보여주신다.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소유를 하고 있어도, 기억하라는 말이다.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몸소 보여주신다.
순종,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너무나도 다른 하나님의 방식, 곧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나귀의 의미
나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동물입니다.
부정한 짐승임에도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을 드려 대속하게 하는 동물입니다.
이 나귀의 특성 중의 하나가 주인에 대한 친밀함인데, 자기 주인이 제공한 구유가 아니면 먹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주인에게만 연합하려고 하고 주인에게만 순종하려는 습성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나신 곳이 구유라고 기록합니다. 거기서 구유란 말 구유가 아닌 나귀의 구유입니다. 그리고 입성하실 때에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무엇을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의 종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진 힘과 권세를 통제하고서 온유함으로 평화를 지켜가며 살아가는 방식 (5절)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과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의 결합을 마태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들 두 구절은 구속자의 오심을 모두 약속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특별히 스가랴의 말씀 구절을 인용하여 적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Zechariah 9:9–10 NKRV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특별히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왕의 이미지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대중적으로 기대하던 공격적이고 정복적인 메시아의 모습과 현저하게 대조되고 있는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자로서 ‘온유하신 평화의 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d.). (electronic ed., ). South Korea.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나라의 왕으로 국한되지 않으시는 메시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땅 끝까지 이르리라.
곧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키는 왕으로써가 아닌 모든 열방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마태 저자는 이렇게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그러한 상징적인 행동이 그 분께서 대중적인 기대와는 다른 그렇지만 실제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부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에 이어 “너의 구원자가 오신다.” ()
본래의 예언은 미리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옹호와 구원의 약속 그리고 마태의 인용에 의해 전달된 기대들을 보고 있습니다.
스가랴 말씀의 의미
예수의 도래에 관한 본질을 스가랴서를 통하여 마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시는 메시야는 정복하는 군사적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의로운 자로서 오십니다. 그는 평화의 시대에 때로 나귀를 모는 통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목자로 오십니다.
이사야의 말씀의 의미
Matthew 26:52–53 NKRV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꽂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어떤 일들도 일어나게 하실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렇습니다.
능력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욱더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모든 능력을 다 가지신 예수님께는 더욱더 많은 유혹이 있었다.
모든 능력을 다 가지신 예수님께는 더욱더 많은 유혹이 있었다.
능력이 많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 가진 능력과 축복들이 저주가 되는 소리다.
주님, 아버지의 것이 그 분의 것이었다. 아버지의 행하심이 곧 그 분의 행하심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순종하신다.
보여주신다.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어도,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소유를 하고 있어도, 기억하라는 말이다. 어떤 인생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몸소 보여주신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능력과 권세가 무용지물이 되는 자리,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너무나도 다른 하나님의 방식, 곧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늘 나는 사람들의 소리, 인기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새번역)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나귀의 의미
나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특별한 애정의 동물입니다.
부정한 짐승임에도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을 드려 대속하게 하는 동물입니다.
이 나귀의 특성 중의 하나가 주인에 대한 친밀함인데, 자기 주인이 제공한 구유가 아니면 먹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자신의 주인에게만 연합하려고 하고 주인에게만 순종하려는 습성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나신 곳이 구유라고 기록합니다. 거기서 구유란 말 구유가 아닌 나귀의 구유입니다. 그리고 입성하실 때에도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무엇을 의도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순종입니다. 예수님이 순종의 종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정리 말씀
우리는 힘과 권세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더라도 말입니다.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것인지
우리는 사람들의 인기를 따라 움직이는 자들도 아닙니다. 설령 저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얻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종려 나무와 나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좋다는 그 타임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 자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자리가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인생의 자리가 되어질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말씀 곧, 온유함과 평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신안에 있는 힘과 능력과 권세를 절제하면서,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평화를 지켜가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합시다. 주님의 온유함과 평화를 향한 그 분의 행보를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도 기억합시다.
종려나무와 나귀를..
Philippians 2:5–11 NKRV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 분의 순종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월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인구가 보통 크기의 5 ~ 6 배로 팽창 할 때였습니다. 사람들은이 기억의 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왔는데, 하나님 께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그들의 조상들을 구해 내고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가져 오셨던 시간을 상기시켜주는 축일이되었습니다. 이제 유월절 주간에 하나님의 어린 양 (, )과 새롭고 더 큰 출애굽을 시작한 ()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 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함이 다른 이들에게 생명이 되는 자리로 갈 차례입니다.
예수에 관한 스가랴의 예언은 또한 그가 평화로운 왕이라고 말합니다. 9 장의 10 절은 하나님의 왕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이 나귀를 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열쇠는 왕이 나귀를 탈 때입니다. 임금이 전쟁하기 위하여 가고 있으면, 그는 힘의 그림으로 마구를 탔다. 그가 전쟁에 가지 않았을 때 왕은 나귀를 타고 평화의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질 수있게 된 한 분으로서의 사명을 말해줍니다. 누가는이 기록을 기록 할 때 "하늘에서의 평화와 가장 높은 하늘에서의 영광"이라는 군중이 어떻게 부르짖 었는지 주목합니다. (; 강조 추가됨). 그런 다음 예수님이 도시 가까이에서 눈물을 흘리며 "오늘을 안다면 평안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 평화의 메시지는 자연의 적의 하나님에 의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메시지,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와 인간 사이의 평화를 가져 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화해합니다. 이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휘두 르며 이스라엘의 압제자들을 타도 할 지도자를 찾고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은 정치적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영적 평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입니다.
예수님이 가져 오게 된 평화는 이스라엘을위한 것이 아닙니다. 스가랴는 다가오는 임금이 "국가들에게 평화를 선포 할 것"이며 "그의 지배권은 바다에서 바다로 ... 지구 끝까지 확장 될 것"(9 9:10; 강조 추가됨)을 예언했다. 그는 세계적인 왕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지도자, 왕, 총리 및 회장을 다스리 시며, 그분이 성취하신 구원은 모든 민족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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