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8:1-4 고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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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Intro.

오늘 주보에는 본문이 나와 있는데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에 추가할 말씀이 있는데 -4도 함께 보겠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운전하며 기도를 하는데 두 지체의 삶의 고민스러운 부분이 계속 제 마음에 뜨거움을 주셔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주 간 묵상한 본문을 적용으로 돌리고 차 안에서 내 머리를 때린 추가된 말씀을 메인 본문으로 돌렸다. 순전히 두 지체를 위한 메시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메시지임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럼 본문을 함께 교독하겠다. . -30은 함께 합독 하겠다.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우리는 자문자답을 고통에 관해 자주 한다. 왜? 나에게만! 왜 네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행복이 아닌 고통에 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다 ( 막 1:40–45; 눅 5:12–16)

8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ㄱ)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다 ( 막 1:40–45; 눅 5:12–16)

8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ㄱ)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다 ( 막 1:40–45; 눅 5:12–16)

8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ㄱ)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A report of Jesus' actions healing people from various illnesses and diseases.

그럼 본문을 함께 교독하겠다. 마 8:1-4. 마 11:28-30은 함께 합독 하겠다.
여러분 행복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타인에게서나 또는 스스로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고통당하고 계십니까?는 자주 듣는 질문은 아니다. 아마도 고통은 우리가 꺼려하는 단어이기도 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울반석교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저는 1번의 결혼식과 4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음 주면 2번째 결혼식을 하객으로 참여 할 것 같다.
여러분 행복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타인에게서나 또는 스스로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고통당하고 계십니까?는 자주 듣는 질문은 아니다. 아마도 고통은 우리가 꺼려하는 단어이기도 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울반석교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저는 1번의 결혼식과 4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음 주면 2번째 결혼식을 하객으로 참여 할 것 같다.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우리는 자문자답을 고통에 관해 자주 한다. 왜? 나에게만! 왜 네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행복이 아닌 고통에 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다 ( 막 1:40–45; 눅 5:12–16)

8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ㄱ)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그럼 본문을 함께 교독하겠다. . -30은 함께 합독 하겠다.
우리는 자문자답을 고통에 관해 자주 한다. 왜? 나에게만! 왜 네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 행복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타인에게서나 또는 스스로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고통당하고 계십니까?는 자주 듣는 질문은 아니다. 아마도 고통은 우리가 꺼려하는 단어이기도 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울반석교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저는 1번의 결혼식과 4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음 주면 2번째 결혼식을 하객으로 참여 할 것 같다.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행복이 아닌 고통에 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우리는 자문자답을 고통에 관해 자주 한다. 왜? 나에게만! 왜 네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행복이 아닌 고통에 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I. 행복과 고통

오늘 주보에는 본문이 나와 있는데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에 추가할 말씀이 있는데 -4도 함께 보겠다. 어제 집에 가는 길에 운전하며 기도를 하는데 몇몇 지체들의 삶의 고민스러운 부분이 계속 제 마음에 뜨거움을 주셔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주 간 묵상한 본문을 적용으로 돌리고 차 안에서 제 머리를 때린 추가된 말씀을 메인 본문으로 돌렸다. 순전히 그 지체들을 위한 메시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메시지임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럼 본문을 함께 교독하겠다. . -30은 함께 합독 하겠다.
그럼 본문을 함께 교독하겠다. . -30은 함께 합독 하겠다.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여러분 행복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타인에게서나 또는 스스로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고통당하고 계십니까?는 자주 듣는 질문은 아니다. 아마도 고통은 우리가 꺼려하는 단어이기도 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울반석교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저는 1번의 결혼식과 4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음 주면 2번째 결혼식을 하객으로 참여 할 것 같다.
여러분 행복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타인에게서나 또는 스스로에게 자주 듣는 질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고통당하고 계십니까?는 자주 듣는 질문은 아니다. 아마도 고통은 우리가 꺼려하는 단어이기도 하며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서울반석교회 반년도 지나지 않아 저는 1번의 결혼식과 4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다음 주면 2번째 결혼식을 하객으로 참여 할 것 같다.
우리는 자문자답을 고통에 관해 자주 한다. 왜? 나에게만! 왜 네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객체로 언젠가는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행복이 아닌 고통에 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기쁨과 즐거움의 절정으로 예표 되는 결혼식을 행복으로 슬픔과 아픔의 절정인 장례식을 고통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행복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걸음조차 땔 수 없는 육신의 질병으로 받는 고통도 있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 기대했던 것에 성취에 도달하지 못할 때의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 사랑하는 연인과의 헤어짐,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가족 구성원 등 우리는 여전히 셀 수 없는 고통이 나와 내 주변에 있음을 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각각 하객과 조문객이란 입장에서 언젠가는 그 식의 주체로 서있게 될 것이다. 상반적인 두 식에 우리가 웃고 울 듯, 행복과 고통은 여전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는 이 순간에도 존재하고 있다.
고통에 관하여 자주 묻는다. 왜? 나에게만! 왜 네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행복을 바라보는 기준과 잣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한다. 그러나 고통은 그 반대이다.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라를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행복한 가정은 그 이유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행복은 대부분 유사하지만. 불행 저는 고통이라 표현하고 싶다. 고통은 저마다 의미와 무게가 너무도 다양하다. 걸음조차 땔 수 없는 육신의 질병으로 받는 고통도 있으며, 불면증에 시달리는 고통, 기대했던 것에 성취에 도달하지 못할 때의 상실감에서 오는 고통, 사랑하는 연인과의 헤어짐,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난 가족 구성원 등 우리는 여전히 셀 수 없는 고통이 나와 내 주변에 있음을 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고통에 관하여 자주 묻는다. 왜? 나에게만!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존재하는가?
행복이 아닌 고통에 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이 전제되었으면 한다. 고통이라는 것이 저와 여려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2. 내려 오시니

행복이 아닌 고통에 관하여 오늘 함께 주의 말씀 가운데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소망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산에서 내려오시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8장 이전에 5-7장은 예수님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 설교이다. 5-7장은 예수님이 가르침이라면 그 말씀 뒤에 나오는 8장부터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의 실제적인 행동이 나오시는 것이다.
오늘 1절을 다시 보세요!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내려 오심을 본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의 긍휼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처음 맞닥뜨린 사람은 어떤 질병을 가진자 입니까? 나병 환자이다. 문둥병, 한센병이라고 불리운 사람이다.
나병에 대해 잘 아시죠? 손가락 발가락 코와 입과 귀가 떨어져 나가도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이다. 무엇이 없는 것입니까? 감각 기능을 상실하여 온몸으로 전이 되어 갑니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몸이 마비 되어간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는 자신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방어할 경고체제가 상실하여 그의 몸은 점점 악화 되어 가는 것이다.
나병 환자가 많은 아프리카에서는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나병 진단을 한다고 한다. 뜨거운 숯불을 만져보고 고통이 있으면 나병이 아니고 고통이 없다면 나병이라고 한다.
나병의 비참함은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병환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과 단절된 체 인생을 살아가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다.
# 내려 오시니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산에서 내려오시니”라는 표현이 나온다. 8장 이전에 5-7장은 예수님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 설교이다. 5-7장은 예수님이 가르침이라면 그 말씀 뒤에 나오는 8장부터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의 실제적인 행동이 나오시는 것이다.
오늘 1절을 다시 보세요! 수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내려 오심을 본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의 긍휼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신 모습처럼! 그런데 처음 맞닥뜨린 사람은 어떤 질병을 가진 자 입니까? 나병 환자이다. 문둥병, 한센병이라고 불리운 사람이다.
나병에 대해 잘 아시죠? 손가락 발가락 코와 입과 귀가 떨어져 나가도 아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이다. 무엇이 없는 것입니까? 감각 기능을 상실하여 온몸으로 전이 되어 갑니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몸이 마비 되어간다. 그러므로 나병 환자는 자신의 뼈가 드러날 정도로 상처를 입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방어할 경고체제가 상실하여 그의 몸은 점점 악화 되어 가는 것이다.
나병 환자가 많은 아프리카에서는 매우 원시적인 방법으로 나병 진단을 한다고 한다. 뜨거운 숯불을 만져보고 고통이 있으면 나병이 아니고 고통이 없다면 나병이라고 한다.
여러분에게 혹시 지금 아니면 이번 주 또 아니면 최근에 고통 때문에 몸부림 치는 일이 있었다면 여러분의 마비된 잠든 영혼을 깨워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 아닐까요?
숯불 만져 앗 뜨거워했을 아프리카의 원시적인 진단처럼 여러분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생각을 하게 만들고 현재의 여러분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매우 오묘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깨우시는 방편이다. 물론 즐거움과 기쁨 속에 우리 존재를 일으키시는 것도 저는 부정하지 않지만, 오늘은 고통에 관하여만 다루고자 한다.
나병의 비참함은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병환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하나님과 단절된 체 인생을 살아가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다.
왜 제가 죄와 나병을 연결하여 말 할까요? 왜 하나님과 단절된 교제를 나병과 연관하여 제가 언급 했을까요? 레위기를 보면 나병에 걸린 자는 제의적으로 부정하다 취급을 받았으며 사회의 공동체 밖, 즉 진 밖에서 살아야 했다.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되었다. 죄로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 여러모로 나병은 죄인의 실제 상태를 표현해 준다.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친히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은 단순한 이적과 기적의 놀라움을 표현하기 위한 메시지가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다른 질병들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을 때는 ‘치유하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병을 고쳐 주셨을 때는 오늘 3절의 말씀처럼 “깨끗케 하다”라 표현이 사용되었다.
우리에게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상태와 위치가 온전한지 아니면 위기에 처해 있는지 알길 이 없다. 고통이 없는 것은 나병처럼 감각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아픔과 찔림의 유익은 우리가 주님을 깨닫도록하기 위해 고통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3절처럼 즉시 그 나병환자를 고쳐 주셨다. 즉시라는 말처럼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에 대해 엿볼 수 있다. 또한 구약 레 14장은 인용하여 나병치유를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 할 것을 말씀하신다.
3. 고통의 극복에 관하여
그러나 우리가 고통의 유익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것도 있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여러분! 오늘 무슨 주일인지 아시죠? 종려주일이다. 예수님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이다. 모두가 호산나 외쳤다. 무엇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셔야만 했습니까?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셨지요? 그래야만 저와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의 핏값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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