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_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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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경험하라 1장_십자가를 사랑하십니까?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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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제일 1장 십자가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 6장 14절 말씀.
창기름집 이야기.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올라온 어느 중년 부부가 시중에 시판되고 있는 참기름을 먹어보고는 통탄했습니다. 아무리 도시 사람들이라지만 이것도 창기름이라고 먹고 살다니 시중에 유통되는 가짜 내지는 저질 참기름에 혀를 찾던이 부분은 바로 오랫동안 참깨를 재배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도해지에서 참기름밀합시고 만들어내는 것들은 모두 참기름에 낙화생 기름을 섞거나 참깨 묵을
(01:07) 넣고 한 번 더 짜서 섞거나 저질의 수입계를 섞어서 볶아 짠 가짜 참기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짜 토종 참로 참기름을 짜서 다른 기름과 거의 같은 가격으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익이 박할지라도 그렇게 신용을 지켜서 장사를 하면 손님이 많아져서 장사가 잘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몇 달로 가게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집 참기름 맛이 이상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온 동네 사람들이 진짜 참기름 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경의 참된 복음 진리는 이들 부부가 시장에 내놓은 삼기름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02:03) 믿도 끝도 없는 피상적인 이해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무능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왜곡되고 빛발른 가르침에 젖어왔기 때문에 참된 복음이이 시대에는 너무 과격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 보다는 우리가 필요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빛발인 십자가 신앙은 이러한 유기를 말해 줍니다. 다른 무슨 다른 분이 먼저 좀 읽어 주시겠어요? 계속 제가 읽겠습니다.
감탄과 통탄.
어느날 신학교 교정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학하고 있는 젊은 목사님이 흥분된 얼굴로 제게 다가오더니 최근 세미나에서 어느 설교자로부터들은 교회 부흥의 비결에 대해 말했습니다.
(03:09) 교수님 그 강사가 그러는데 교회 부 부흥의 비결은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이랍니다. 그것도 많이 자 설교해야 된대요. 와 정말 충격받았어요.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십자가를 많이 설교하면 정말 교회가 부흥할까요? 저는 대답 대신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복음을 철교했는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제게 그런 사람들은 설교자와 대화하고 싶어합니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하여 좀 더 대화를 나누고 돌아갈 때 그는 복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돌아가는 그의 긴 모습을 보며 평탄합니다.
(03:57) 조국 교회의 현실을 그분들을 통해 보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에 눈 뜰 때
잠 있는 교회가 새로운 영적 각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 사랑을 새롭게 느끼고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부인하던 시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부흥 때에는 언제나 평범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이 충격적으로 경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나타난 구속 사건이 자신들 인생을 향하여 갖는 개인적인 의미에 대하여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나 알고 있던 십자가의 복음을 느끼게 시작하였을 때 그들은 언제나 충격이었습니다.
(04:45)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집단적인 영적 체험을 부흥이라고 불러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오늘날 조국 교회 교회 가운데 감들고 있는 냉랭한 영적 분위기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힘들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회로부터 받아야 할 영적 영향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단지 진리를 가르칠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심령 속에서 그 진리를 경험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어려움의 근원은 교회가 자신의 지체에게 신령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위탁하는 교회가 무엇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을까 되었습니까? 교회가 그토록 부흥을 원하고 성장하기를 갈망하는데 왜 생명에 있는 증거를 점점 사라져 가고 신자들의 삶은 점차 신앙과 유리되어 가고 있는
(05:49) 것일까요? 형식성이 많지만 생명이 있는 증거들은 점점 휘박하여 가고 제담은 많지만 삶의 배인 복음을 찾아 복음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이척하 이척하고 있는 기독교의 신앙뿌리를 생하게 해줍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바뀌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은적을 지니고 있노라. 갈라디아서 6장 14, 17절.
(06:43) 유일한 자랑거리.
이 이 모든 비조물들은 저마다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르는 물은 저마다의 노래가 있고 지절된 새의 노래도 저의 가락이 있습니다.이 될 만한 자는거리가 없는 사람 재만 사람이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선택하고 그것을 사용하고 빠져서 화면에 떨어져 버리는 자들이니다. 많은 사람들은 헛된 것들을 사랑거리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한말이 약기만도 못한 육체의 힘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 한다는 지나지 않는 금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 나는 묘비의 몇 글자로 새겨질 명예나 권세를 자랑러 이해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07:36) 그가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형태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었으니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마음과 영혼과 온 삶이 그분께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바라보는 사도의 정확한 인식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가 누구이며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지에 대해서 십자가보다 더 정확하게 말해주고 말해 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08:25) 그리스도의 생애를 돌아볼 때에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두운 밤 란함 빛을 바라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던 동방에 나타난 별의 이적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대 평화의 대원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 천상수문을 설교하시던 탈복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내어 쫓아 온전케 하시던 데가볼리와 갈릴리와 유대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재림의 사실도 그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인 상식을 뛰어넘어서 그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는 결고 자랑할 것이 없으니
문제의 심각성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지침으로
(09:28) 삼고 있는 우리들은 과연 사도이기 고백 앞에서 어떠합니까? 우리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 삶에도 그 십자가 외에는 다른 것들이 자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고 확신히 자리잡고 있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향하여 거기에 못 박힌 세상을 확인하게 됩니까?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보게 됩니까?이 이 모든 물음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월터 챈트리의 말대로 십자가에 대한 교회의 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부정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부정은 참 신앙의 중심부에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실천 사항이다.
(10:20)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고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설 수가 없다. 자기 부정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헌신이 시작되게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주님에 대한 복음 전파와 섬기면 문턱에 자기 부정이서 있다. 그것은 성결 다음에 오는 투쟁의 순간마다 느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요소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수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복음의 기초를 놓았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였던 사도가 이처럼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생각하였던 십자가가 왜 우리에게는 단지 종교적인 이념의 상징이 되고 말았을까요? 참된 부흥이 일어나던 시기마다 제연되었던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십자가에 참된 의미에 대한 감격이 급격이 그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라는 주님의 지상
(11:23) 명령을 단지 사회를 위하여 물질을 주고 섬기는 것으로 대치하려고 할까요? 교회 안에도 전재하는 칼날 같은 이옷과 세상 사랑의 주를 끊지 못하는 형식적인 신자들의 질이 멸한 신앙생활은 무엇 때문입니까? 복음에 대한 평범한 해석이 회중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교회가 신령한 은혜로 넘치는 것을 우정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이 이 모든 질문은 한결같이 하나의 주대에 맞다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입니다.이 모든 교회의 화석화 현상은 십자가 복음에 대한 경험적인 이해가 기박 해진돼서 기인합니다.
>> 잊혀져가는 십자가 >>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기념하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서는 단기 절기로서만 기념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조국 교회 중 비교적 복음주의적인
(12:28) 교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설교를 단지 고난 주간에들을 뿐이라고 말하는 교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단지 교리의 기초를 놓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거기에 붙잡혔으며 실제적인 생활이 부활의 정신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서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십자가 사건을 인하여 감격하는 교인들이 있었고 그러한 교인들이 있는 교회는 십자가 사건을 말함으로써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 있게 선포되고 있습니까? 설교자와 회중들은 다 같이 속죄하는 보혈의 능력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회정들이 십자가 앞에서 감격하며 이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복음의 광대함을 깨닫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13:32)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깊이를 인식하며 그 고난을 배우며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서 있습니까?이 이 모든 질문들은 우리를 점점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세상적인 의미에서의 부흥은 있으나 신령한 복음은 찾아보기 어려워하고 강요된 권위는 있으나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하나님을 느끼고 그 임에서 자신의 속됨을 깨달아 깊이 미우치게 하는 참회의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우리는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것들을 우리들은 오히려 생명처럼 중시하며 그분들이 생명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오히려 사소하게 생각하는 뒤틀린 종교를 십자가 아래 세우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들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4:30) 그러면 이렇게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그릇된 태도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에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체험이 없는 복음.
신약성경에 있어서 타의 추정을 부려하고 압도적인 주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예수의 권난입니다. 예수께서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은 시간적으로 불과 하루에서 일어난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복음서는이 하루 남짓단 시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13장을 걸쳐 생생하게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설립된 역사를 기록된 사도행전 십자가에 대한 선포를 듣는 일 없이는 책장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십자가에 대한 교회의 선포로 이어지고 있음 있습니다.
(15:21) 뒤어진 서신들 어 서들에도이 같은 현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과 그에 따른 부활 사건이 가장 중심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한 직업에 종사였던 사람들로서 다양한 계기로 그리스도의 어 부름을 받았고 성경을 갖지 아니하였으나 한결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십자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사도들 중 대부분은 비록 십자가 양보를 받으시고 골고다운덕에 함께 있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체포와 신문과 고난의 과정을 현장에서 어느 정도 목격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16:20) 것입니다. 더욱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실 때 운명하는 장면은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죽음이 죄인된 우리를 위한 고난임을 주님께서 이미 가르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주님의 고난의 현장이 있었으나 십자가를 경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
복음을 체험하라.
그러나 사도들은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님 사건을 통하여 그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오시자 그들은 구약 성경에 드러난 그리스도와 구원의 약속을 이해하게 되었고 오랫동안의 인류의 역사가 오직 점을 보고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7:12) 성령이 오시면 증거로 증거하기로 되어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증거를 십자가에서 증거받았던 것이었으니 단지 죄인의 몸으로 처형된 표족으로만 이해했던 그리스도의 순환에 대한 초대교회의 신념인 영적 경험을 통해 바뀌게 되자 십자가는 탄숨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 자리에 선 주제로서 만천하에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발견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이 같은 체험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복음 전도의 메시지를 소유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의 교립뿐 아니라 복음의 모든 진리들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였습니다.
(18:03) 그들은 도소관이나 강의 집에서 강습받는 십자가를 전혀 안 것이 아니라 경험한 십자가를 전한 것이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경험하는 가운데서 살아갔습니다. 복음 전하는이 일을 전념으로 삼은 사람을뿐 아니라 목사로 교사로 가르치는 자도 그리하였으며 이들과 달리 평범한 생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도 그리하였으니 단지 세상을 향하여 전파할 수 있는 종교적인 주제에 대한 변해를 소유하게 된 것이니다. 전파하지 않으면 안 될 기독교 신앙의 요체를 불처럼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약학자 나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 교회에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도덕적인 교훈이나 운면을 말하는 따위와 동인할 것이일 수가 없다.
(18:57) 교회가 주님의 교훈을 전하기했으나 믿는 자를 얻게 한 것은 결코적인 교훈에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 것은 교훈이 아니고 케리그마에 의해서였 우리는 사도들이 전하는 선포한 실제적인 내용을 얼마나 찾아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연구해야 한다.
오순절의 또 다른 의미
오순절 성령사 성령 강림 사건이 교회에 제일 먼저 행하신 위대한 일은 단순한 능력 부으심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의 일들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행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사도 사도들로 하여금 이전에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복음의 내용에 대하여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이해를 갖게 하였습니다.
(19:57) 무엇보다도 그들은 구약을 새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구약 속에서 소리치며 절규하듯 불리고 있는 수많은 예언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때 성령을 깊이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젖어 있던 유대주의 편견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구속 역사의 큰 물줄기를 보았고 그것은 오직 하나의 사건 곧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향하여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이 같은 사실을 깨달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큰 그 사건은 그 큰 구속사의 강물이 세계 전도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 전에 통과하는 수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20:45)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영적 체험이 가져 가져다준 변화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차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단지 이지로 아는 것과 영적 체험을 통하여 경험하는 경험으로 아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숲을 그림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그 숲속을 거의 보는 것과의 차이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십자가를 알게 됨으로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구속의 사건의 의미를 깊이 알고 성령의 은혜로서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에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21:39)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도적 체력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모두 십자가에 대한 체험의 부제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단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이례용 교리로서 차가운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교회는 사도적인 복음 전파의 제목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교회의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캐러는 교회가 그러한 복음의 내용을 단지 이해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그들의 가슴속에이 복음의 내용들이 살아서 역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 모든 복음의 내용들이 오순절에 체험되자 그들의 신앙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십자가를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22:33) 복음의 내용은 역사적 진실이었지만 그들의 그들이 선포한 쾌르는 복음의 내용을 해석하여 선포해 주고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갖는 의미를 밝혀 복음 앞에서 그들의 삶을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
잃어버린 선포.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향한 십자가의 선포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마음속에서 뒷발해 가는 십자가의 복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선포를 잃어버린 교회는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건은 십자가를 알게 되는 사건에 다름이 아닙니다.이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특별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23:26) 하나님을 한없이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신들의 인생을 오직 그분만을 위하여 넘치도록 수고하며 살아서 불꽃처럼 채워드렸던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살다가 갔습니다. 한결같이 연약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높은 수준의 신앙과 삶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요? 질그릇과 같이 연약했던 그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상상을 뛰어넘는 넘치는 헌신으로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다가 주님만을 위해 죽어갔는지 우리는 그저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볼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단지 한 때 체험했을뿐 아니라 그 십자가에 대한 영적 경험을 통해 일생이 거기에 굳게 붙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4:23) 그들은 십자가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임에도 사자처럼 살 수 있었습니다.이는 모두 그들이 십자가의 의미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십자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예수께서 구주라는 사실이 지적 어 지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 때문에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탐력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세상적인 정신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미래를 바라보는 전망이 어 때문이기보다는 과거를 생각하는 곳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이 세상을 사랑하기 쉬운 육체의 욕망 때문에 그것을 딛고 위의 것을 바라보기 보며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25:27)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과거의 역사를 회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가장 커다한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 사건을 회고 해고입니다.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경험적인 회고에 통하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 사랑을 받기 전혀 합당하지 않는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새로운 인생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에 비치고 있으며 죄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것도 모두 십자가의 은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한 그 이상의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속에 행하신 표입니다.
(26:22)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고 불안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길을 열어 주었을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 안에서 죄악을 이기고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과 권세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우할래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불리하게 하는 법점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 그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 권세들을 무력 무력화하여 드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 느이라. 골 골로디서 골로새서 2장 13에서 15절 >>
사죄 이상의 능력
이처럼 십자가는 이전에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죄사함을 보여줄뿐 아니라 그것을
(27:27)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두운 세상을 그것처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움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은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불가능한하게 합니다. 복음 사역의 현장에서 크게 쓰임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파가 시대를 초월해서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 사건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사를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될 때 받는 가장 커다한 유익은 십자가의 정신에 의하여 지배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28:15)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으로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 이러한 상관 관계에 대해 사도는 말합니다. 너희 안에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권이시나 하나님과 동됨을 취할 것으로 얻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졌고 사람들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고 지금까지 할 수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이 놀라운 구속의 사건이 체험을 통하여 개인의 삶에 적용되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리스도를 드러낸 삶으로 이어갈 수 없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이 놀라운 구석의 사건이 험을 통하여 개인의 삶에 적용되지 아니하고는 결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로 드러내신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에 의하여 지배받는 영적인 삶의 개선 없이 단지 생활에 대한 종교적인 아 일들 일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헛된 망상입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영혼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모든 결단과 그의 내면의 세계의 변화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30:09)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추구하는 가치들을 헛된 것으로 여겨 기꺼이 버리고 세상에서 인정해 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 것들을 가장 가치 있게 여겨 그것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회심은 단지 시작이다.
우리는 비록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우리가 교인이 된 것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순간 그 순간에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이 세상과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 사건은 그 앞에서 참회하는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위하여 영생의 씨앗을 뿌리는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31:01) 이전에는 자신이 왕노릇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하며 상식과 개인의 가치로 삶의 기준으로 기준을 삼았던 삶의 태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기준으로 삼으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을 갈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이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체험을 통해 깨닫는 것과 함께 이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자연인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은 이같이 십자가 사건의 체험적인 특성을 잘 드러내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에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31:55) 왜냐면 십자가는 단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해 줄뿐 아니라 인간의 빛 비참함에 대하여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사건은 사건은 역사적으로 2천년 전에 일어났으나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참여할 때 그때 그 사건은 지금 우리에게도 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이 같은 체험은 우리 영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정신으로 세상을 사는 일들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십자가 정신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영적인 삶의 개선 없이 단지 삶에 대한 종교적인 광요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헛된 망상입니다.
(32:57) 그것이 가능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 죽으셨겠습니까?
십자가로 불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영혼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하는 모든 신앙적인 결단도 그의 내면 세계의 변화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와의 만남 없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 16장 24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신 같은 시각에이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33:48) 십자가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전한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희생적인 삶의 마침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큰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며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부인하기 위하여 치어야 할 희생들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성찰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고난의 아픔을 느끼게 하고 감동받게 합니다.
(34:37) 아,이 시대의 교회는 과연이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해 줌으로써 무세처럼 굳어져 있는 그리스도인의 가슴을 그분의 사랑으로 녹아지게 하고 있습니까? 누가 저들의 강철같이 차갑게 굳어진 뺨에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설교자들이 하늘의 능력으로 그 은혜를 선포하는 강단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아는 지식만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십자가를지는 삶을 배우게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택할 것인지 세상을 택할 것인지 결단을 촉구하며 다가오는 순간 순간의 선택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바를 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35:37) 추술를 위하여 순간의 안락을 버리는 것,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육신의 아픔을 기꺼이 택하는 것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수치를 마아하지 아니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위해 자신의 낮아짐을 개치 아니하는 것이 모든 아름다운 삶은 십자가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기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계속 재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
이어져야 할 고난
보십시오. 그리스도 어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으나 그의 고난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36:26)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셨으나이 땅에 다하지 못한 단식은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탄식으로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잠들어 있는 세상의 빛을 잃은 교회를 향한 성령의 단식은이 땅에 계속될 계실 때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몸부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자신들을 위하여 탄식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여전히이 땅에 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난을 십자가에 주목하게 될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을 하여금 문제가 많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며 역사의 모든 바람 앞에서 신을 견디며서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37:16) 왜냐하면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빛 고백으로 적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회복과 십자가.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대한 간격 없이 살아가는 어 사실상의 비복음적인 삶에 대하여 책임을 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탁받은 신적 기관입니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풍자와 사조를 배우고 세상의 습관을 따라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 앞에 와 예배를 드리지만 일주일 내내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38:05) 대본 사람들은 세상과 싸우는 대신 달발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깨울 수 있겠습니까? 더 정확히 말해서 설교자들이 아니면 누가 그들과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된 비복음적인 삶에 대하여 각성하도록 만들어 주겠습니까? 선명하고 순수한 복음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조차 충격적인 감탄을 불러일히는 현실은 통탄해야 할 사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언제나 세상이다.
세상은 언제나 십자가를 싫어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가르치는 세상과 죄인에 관한 생명 은혜를 거절하는이 땅에 살아갑니다.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38:57) 이 이 모든 일에 대한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받는 영적인 영향력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수록적인 영향력을 뛰어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교회 안에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의 가슴 속에 이와 같은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십자가를 설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단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감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십자가와의 기쁜 만남을 통하여 영적 체험을 소유하고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십자가 진리의 내용들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39:49) 십자가 많은 기독교 교리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것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간증이 설교자 안에 역사하여 교회가 신 십자가 신앙을 회복할 수 있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들이 십자가를 버리기 전에 강단히 먼저 십자가를 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만약이 십자가가 설교자들에게 단지 고난 주간을 상상시키는 설교 주제에 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심령 속에 십자가 사건이 새롭게 경험되는 것에서는 언제나 십자가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주목하는 성도들이 숨겨났습니다.
(40:39) 카이퍼와 십자가.
오늘날 아브라함 카이퍼는 헤르만 바크 벤저민 워필드와 함께 칼빈주의 신학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3대 신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신학을 배우고 목회하던 시기는 바로 유럽에서 합리주의 신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였습니다. 성경의 신적인 기원이 부인되고 문서설이 각광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신약에 기록된 복음의 내용들과 기적들은 전설로 취급되었습니다. 젊은 카이퍼 역시 그러한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카이퍼 자신은 목회하던 교회에서 당대 지성인들을 끌어앉는 설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복음의 씨앗 대신 합류주의 합리주의의 모래
(41:45) 모래 합리주의의 모래로 가득찬 합류주의의 모래로 가득찬 설교였습니다. >> 카이프가 그렇게 설교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출사가는 한 노파가 스스로 자신이 행한 설교에 만족케 하며 강단을 내려오는 카이퍼 목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목사님, 참으로 유익한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다음 주일에는 부디 십자가를 설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젊은 카이퍼 목사는 그냥 웃으며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노파이 같은 간증은 매주일 대풀이 되었습니다. 결국 파이퍼 목사는 십자가를 설교하기 위하여 성경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커다란 영적인 각성과 복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42:39) 결국 그는 합리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학을 버리고 칼빈주의로 돌아서게 됩니다.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복음의 눈을 뜨게 하고이 같은 복음에 대한 경험은 그의 신학적인 입장을 뒤바꾸어 놓게 된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깊고도 분명한 체험이 있고이 같은 체험의 한복판에는 십자가에 대한 영적 체험이 있었습니다.
넘치는 헌신의 원동력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토록 헌신적인 순교자의 삶을 가능하게 하였던 그 원천적인 힘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이 구속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43:41) 그의 고난으로 점철된 모든 선교의 여정을 붙잡아 준 것도 오직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준다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절. 그렇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사랑에 붙들려 사로잡힌 사람들은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하며 즐거워할 수 없는 일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즐거움으로 견니다. 그들은 그 보혈의 능력으로 자신을 다 불사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설교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4:28)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핏빛 사랑이 골수에 사무친 불이 되어 복음을 전하고 또 영혼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너무나 쉽게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육체의 이을 따라 살기 쉬운 인생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고 이생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순수한 동기로 힘에 넘치도록 헌신하며 살게 하는 위대한 헌신의 원동력도 오직 십자가를 아는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그 복음 앞에 깨어나게 되도록 교회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아닌 것들 안에서 안주하는 대신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 아닌 것들을 인하여 위로받기보다는 오히려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며 진리 아닌 것들을 인하여 세상과 화목하기보다는
(45:31) 참된 것들 때문에 세상과 싸우기를 소원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통하여 교회는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된 영적인 각성과 진정한 신앙의 부흥을 갈망하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리라.
그러므로 고난 주간은 특별히 따로 지켜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에선 설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런 기간에 떠게 특별 형사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언제나 복음의 정신에 젖어 있고 예배는 항상 십자가의 영에 압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쉽게 복음의지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기 쉬운 교회의 세속적인 속성 때문에 우리는 고난 주간을 지키기도 합니다.
(46:34) 그렇기 때문에 고난 주간을 통하여 특별히 십자가의 신앙을 회복해 보려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이기한 절기라고 절기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란스러운 행사나 구호보다는 고요히 하나님 말씀 앞에 나아와 세상 세속에 찢은 마음의 각질를 벗겨내고 십자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로 이러한 말씀을 계기로 하여 교인들의 정신과 삶이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요란스러운 행사나 일과성 프로그램에 기대여 걸기보다는 성도들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의 신앙의 삶 안에 사라진 복음의 요소가 요소와 허기진 영혼의 공허함을 직시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고 싶은 겸비한 마음을 갚도록 도와야 합니다.
(47:34) 십자가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 꿇고 자신의 죄를 뉘칠 수는 깊은 결단과 신앙의 도전들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심파조의 애통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떠난 자신들의 삶에 대한 애통이 교통에 배우게 되는 복스러운 각성의 은혜가 교회에 넘쳐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사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적인 삶의 변역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고 그 현장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제조명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감격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에 대한 선포를 통하여 양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얻어 누리려고 하는 극적인 위함의 자세를 새롭게 진단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신들에게
(48:37) 주어진 그 가슴한 성도의 기억과 대속의 은혜를 인하여 공격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이 대속의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이 얼마나 끔찍하고 같은지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십자가의 충성에 대하여 마음의 눈을 들려야 합니다.이를 위하여 무엇보도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의 중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 고백은 먼저 십자가의 고백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49:24) 그리스도인는 먼저 자신이 중심되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에 사는 그 감안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르지 않아야 할 감동.
우리가 십자가를 전전하고자 할 때 그 주제에 대한 감동이 마르지 아니하도록 자신의 영적인 삶을 관리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나게 하여 이미 2천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대해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50:28) 말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갈라디아서 십자가에 못박히다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이전에 일어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이래적 고난이나 다메색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한 유례적 회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타우로타이는 현재 완료 시제입니다. 이것은 한번 십자가에 못 바뀐 사건이 현재까지 바울의 실존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욕인한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자신의 영적인 삶 속에서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마음에 깊이 다가와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는 모든 구원의 은총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오는 성도의 즐거움과 약속된 미래의 기업의 풍성함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중심과 부활로 말미암았음을
(51:33) 깊이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여 사는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도 바로이 십자가 아래서의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인락을 따라 사는 삶의 불편함을 느끼고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섬김을 위하여 긴장하고 고난을 받는 헌신의 길을 택하게 하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의 일입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신약 시대와 같이 구원에 관한 모든 계시가 밝히 드러난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과 십자가 아래 산다는 것은 같은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계시하셨고 십자가는 그의 사랑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 이외에 삶의 소망이 없음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52:38) 지나며 하나님을 진 세상을 밝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쳤던 사랑신 오로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예수님이 찢신 몸으로 가르신 휘장과 뿌리신 보혈로 새롭게 여신 그 핏길을 걸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새로운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기를 빕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