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_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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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경험하라 2장_십자가가 말하는 두 가지 진리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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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4) 부서진 참 앞에 있는 것 읽고 읽고 들어가겠습니다.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감으로써만 그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행복과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멸망받을 몸에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에 완전한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을 참다한 안식과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 2장 십자가가 말하는 두 가지 진리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계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를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먼저 일체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01:11)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 16절 말씀
부서진 참호
저는 춘천이라는 도시를 참 좋아합니다. 자주 갈 기회는 없지만 호반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탁트인 시원한 정경과 너른강 그리고 호수가 자랑입니다. 오래전에 서울서 춘천으로 가는 길을 두 배로 확장해서 아 두 배로 확장해서 세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깨끗하게 새로 포장하고 단정한지 얼마 안 되는 가로를 가로를 차로 타 차를 타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까만 아스발트에 선명하게 그어 놓은 하얀 차선과 완공된지 얼마 안 되는 도료 도로 주변의 여러 구조물들이 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02:04) 더욱이 가로 주변 한쪽으로는 치연한 강과 호수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푸른숲이 우어져 있어 녹음을 즉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깨끗하고 말끔하게 단장된 가로 곁에 다 부서진 콘크리트 무더기가 흉악하게 철근을 드러낸 채 있었습니다. 달려오면서 같은 광경을 여러 번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알아보았더니 625 때 공상군의 포격을 받아 부서진 아군의 참모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나게 하고 싶어서 포탄으로 만신창이 된 폐어를 40년이 지난 오늘도 신장로 곁에 두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 그날의 처참한 상황과 목숨을 바쳐 그 참에서 국토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사망한 이름없는 병사들의 충성과 희생을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없애 버리지 않고 사람들 눈에 잘 뛰도록 길과 곁에 있게 했을 것입니다.
(03:11) 사탄의 전략
오늘날 교회가고 있는 신앙의 주제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십자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신약 성경에 제시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마다 항상이 십자가의 도를 신앙의 중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복음에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당 뛰어난 시금성은 바로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강단히이 십자가를 선포지 않을 수 없는 설교 동기들을 갖게 되고 성도들이 십자가의 진리를 인하여 감격하며 그 십자가의 권난을 통을의 실현되는 인생을 살아갈 때 교회의 모습은 신약 성경의 제시된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사단의 교묘한 전략 가운데 하나는 하나는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04:01) 만약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성공한다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세우고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있쓴다 할지라도 자신의 왕국이 별로 해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되게 하고 신앙으로 하여금 신앙 기독교 신앙이 되게 하는 성경이 기록된 기본적인 신앙의 도대를 잊어버리게 하거나 기억하더라도 그 본래 의미를 인식할 수 없도록 만으로써 사실상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 진리 위에 감받지 못하게 못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04:45) 그래서 교회가 커다란 영적인 각성을 경험할 때는 항상 잊어버렸던 복음의 진리들이 그리스도인 사례에 새롭게 기록된 일들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강단은 신앙의 중심으로 복음을 새롭게 회복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복음 진리 체험을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되는 일들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소생을 주시는 불신 하는 그 시대의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전하게 하는 일들을 기쁘게 행하셨습니다. >>
변함없는 구원 방법
십자가는 많은 기독교 교리 중 한수 요소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05:36) 십자가는 기독교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는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죽어버린 이대 올래오기에 불과합니다. 그토록 긴 구약의 역사가 하나의 시점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구원을 경험했던 수많은 성도들이 그 한 시점을 주목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단지 역사적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의 감격을 상실할 때 그들이 성경이 요구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본문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학문도 이렇게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상구되기를 거절할 때 하나님의 계시보다 인간의 사상을 높이는 대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06:31)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이 십자가를 통해서 멸망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과 생명의 자리로 옮기시고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부요하고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게함으로써 교회의 가난한 영적인 삶을 부요하게 변화시키셨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 사건을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하여 눈뜨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거절당하는 십자가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더 완강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07:20) 오늘날과 같이 과하게 발달하고 새로운 분명의 물결의 세상의 품조를 움직이고 있는 때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더욱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이 교만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거절합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뒤에 있는 헬라인에게는 미련에 보여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었을 만지사적인 삶에 몰두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가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구적인 삶과는 상관없이 죄인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십자가에 복음이 상식에 거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복음을 거절하기도 합니다.
(08:09)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십자가의 권을 예언했던 이사야 선지자도 이미이 같은 일들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소리 같아서 좋은 모양도 없고도 없었지 우리가 보기에 흠무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사야 53장 2절과 3절 말씀.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고난이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예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까지 오고 버림받게 될 것임을 미리 가르쳐 준 것입니다.
체험적인 고백.
(09:00)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가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를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16절 말씀. 바울은 십자가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고백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만 가상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고백을 또 한 곳에서 고백을 또 한 곳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0:01)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사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그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까? 그는 세상 사람들이 동의해 줄 수 없는 자랑거리를 붙들고 살아갔기 때문에 전에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그는 세상이 싫어하는이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자기 스스로 선택한 자랑이 아니라 신적인 강제력으로 자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사로잡힌 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오직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10:50) 오직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오직이 십자가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도 구원하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흘러가고 사상이 바뀌고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태도도 시대의 변에 따라 변화 변화하여 왔습니다. 기독교 사상이 더 많이 환영받던 때도 있었고 덜 환영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곧 십자가뿐이었습니다.
말하는 십자가
오늘도 피로물든 그리스도의 예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 말해 줍니다.
(11:35)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고 어떻게 하나님의 소망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지를 알려 줄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지를 말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 무엇을 말해 주시려고 그 십자가의 진리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으셨을까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에 이르는 한 사람들마다 그렇게 피묻은 십자가 앞에 홀로 직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신 구원 계획은 무엇일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도 사람들에게 일일이 동일로 구하지 않고 갈보리산 위에 우뚝 서서 시대를 떼어놓고 나라를 건너 인정과 지식의 관계 없이 구원받은 우리들과 아직 버려진이 세상의 영혼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 무엇일까요? 사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서 십자가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해게 됩니다. 즉 십자가는 우리가
(12:40)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
죄인임을 말함
십자가를 통해 들려오는 첫 번째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소망 없는 죄인임을 밝히 말합니다. 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수니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 십자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영원한 표적입니다. 하나님은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사실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싶어하셨습니다.이 표적을 볼 때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13:32)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치와 고난이 바로 나 때문인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와이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먼저 말합니다. 저는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이 각각 어떤 형편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성장의 과정을 거쳤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에 대하여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지독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망이 없고 스스로 자신을 개선할 여지와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소망없는 죄인들임을 압니다.
(14:17)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어둠 가운데 멸망의 운명을 친구삼아 먹고 자던 우리의 인생에 대하여 십자가를 통해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고통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죄인들이었는가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사람들은 모두 세삼 자신을 비롯한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토록 소망이었고스러운 존재였는가 하는 사실에 대하여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떠나 있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는 사람들마다 모두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15:06) 우리의 인생이 버림받아 죽어 있는 범죄한 영혼의 껍데기를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죄인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나기 전까지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소망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이 기쁨의 소식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인간의이 길은이 같은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찬란하게 불타 올랐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51) 우리가 아직 죄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말씀 >>
이상한 교회 성장론
현대 교회 성장의 보여주었다는 묻고 있는 자로서 트러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언젠가 교회 성장을 위하여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 세미나에서 제한습니다. 죄에 대하여 많이 성경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에 대해서 하십며 심판보다는 하나님을 내 용서에 대하여 말하시죠.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을 설교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사도가 추구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배치 배치되는 주장인데 강의 내용 중 다른 것들에 관해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이 발언에 관하여 잘못된
(16:54) 것이라고 정하게 말아야 됩니다. 복음적이고 미신적인 점을 통해 교회가 성장한다면 그 교회가 과연 그리스를 드러낸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교회에서는 죄에 대하여 집요하게 설교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회중들은 죄의 심각성을 체험을 통하여 알아야 합니다. 벌거벗어진 죄로 그 더러운 죄의 상처들이 일어나도록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결국 성도들에게 있어서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나 하나님과의 감옥을 위하여 부름받은 아닙니다. 거룩한 삶의 관심을 가지면 될수록 거룩한과는 정반대의 주제에 대하여은 이해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게 됩니다.
(17:46)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고 아는 사람에게 일어난 공통적인 열망이 있습니다.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갈망이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교통 영적인 교재 은혜 주신 감사를 드린이 모든 관계를 자우하는 가장 커단한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적이 넓된 은혜의 강조를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에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죄와 심판의 심각성에 대한 제각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깨닫게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인임을 안다는 것.
(18:39)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싶었던 것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강한 자각으로 다가오는 것과 함께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이 편지를 쓸 때 그는 순교의 순간이 얼마나 남 얼마 남지 않는 인생의 노년기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때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처음하기 전에는 자신이이 세상에서 제일 큰 자인 줄 알았습니다. 회심하기 전 그의 본명이 큰 자라는 의미를 가진 사울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자신에게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9:41)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고 어리석은 존재이고 작은 자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많은 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에게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만남의 은총을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후에 야곱에게야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서 9절 말씀. 그러나 그가 더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깨닫게 된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에 대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새롭고 깊은 인식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20:42) 그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았으나 스스로 모든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이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에게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혼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떻게 드러내게 하려 하시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시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21:30) 에베소서 3장 7절에서 9절 말씀. 그렇지만 순교를 앞둔 인생에 말련해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계수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괴수는 헬라로 프로토스인데 이것은 첫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죄질의 경중에 따라 중죄인과 경한 죄인이 있었 있습니다. 사도의 생각에는 만약에 하나님께서이 세상의 인간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줄로줄세우신다면 자신이야말로 첫 번째 자리에서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이 소망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십자가는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소망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깨달음의 깊이만큼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감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2:24) 용서받은 자의 고백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는 노년에 예수를 믿으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남다리에게 고생하신 길을 걸어오신 그분이 예수를 알기 전 어둡고 난급한 일을 당하실마다 괴로운 마음으로 읽처럼 되내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지도 못하신구나. 나는 정말로 죄라고 어 죄라고는 없는 사람인데 누구를 해꽂지한 적도 없고 남의 것을 훔칠 적도 없는데 왜 나에게만 이렇게 특별한 고통을 찾아오는지 그 외에 할머니는 은혜로운 과정 은혜로운 과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어서 돋보기를 쓴 채 굵은 어 글자 성경을 한 줄 한 줄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23:21) 하나님께 논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마음껏 평화를 누르려 지내셨습니다. 그러다가 불체의 질병을 겪게 되셨고 결국은 그 질병으로 인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마른 얼굴에 평상이 누구 계시면서 평온한 눈빛으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새롭게 고백하던 그분의 모습을 잃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죄가 많은 사람 같구나. 이렇게 커다란 은혜를 받으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갚아들이지 못하는구나. 결국 할머니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극한 기쁨 가운데 제품에 안겨을 거두셨습니다.
빗나간 하나님과의 관계
죄를 제적할 때 구체적인 악행을 생각지 마십시오.
(24:20) 형법을 어기고 수사간의 추적을 받아야 하는 그런 죄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여기서 외치고 있는 죄는 물론 그러한 것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빛나가 버린 것을 말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 구체적인 악행과 하나님을 등진 삶의 뿌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제법,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직을 삶의 신조로 삼고 거의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법을 준수하면서도 불편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절제된 시민이 있을 수 있습니다.
(25:04) 그리고 바로 여러분이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가 형법상의 범죄나 경찰관의 추적을 받아야 하는 사회적인 악의 기초에서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한다면 말씀드린 이러한 도덕적인 사람들은 십자가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약간의 관계를 가져야 할 필요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와의 만남도 그들에게는 그스로 감격스러운 사건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를 보십시오. 그는 감격하며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만큼 도덕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열심으로 율법을 지켰고 그래서 그 율법의 의로는 틈이 없는 자였다고 스스로 고백하였습니다.
(26:00) 그리하여 그는 육체에 관한 한 자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자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모든 견해가 혁명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 단지이 세상에서의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의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견해가 바뀌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바뀔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깨게 된 사람들이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나 지탄받는 자나 자신처럼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나 율법의 약속 밖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과 사 수 있는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6:58) 그리고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미래에 죽을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존재들이 바로 인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들은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바람과는 배치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존재 그 자체가 진노의 대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입니다. 십자가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떠나 있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하나님과 생명적인 결합 속에서 그에게로부터 오는 은혜의 빛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완전히 떠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합니다.
(27:47)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문제였습니다.
젊은 관원의 갈등
어느 날 많은 부자임 가원기도 하는 풍년 예수 집에 나와습니다. 정말이 사람은 사람이지 그런 돈이 많을뿐 유대인의 종교적 문제는 공예 의원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만 유족했을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정적인 양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들은 교만해서 신앙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었거나 세상적인 일에 빠져서 종교심을 잃어버리기가 심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청년은 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마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보내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에서 보준 그의 형통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28:4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 한 사람이 달려와서 끌어 앉아오되 전하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성을 얻으리라 이런 달려왔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오래도록 고민해 맞다는 사실을 입중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저를 시급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한 문제는 그렇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고민은 존지하고 저희가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지 않은 것 자신의 고민은 더 많은 성을 불러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부가 어울리지 않도록 어한 자림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부르고 그렇습니다.
(29:34) 사실 어쩌면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청년보다 더 나이가 어리신 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하는이 청년에게 있어서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영생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중심을 이루던 열 가지 명에 대하여 보내하던 청년의 얼굴에 이색이 많이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한 그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자 선생님이여 그것은 내가 어릴 수 없었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지금도 한 가지 두 것이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구조적인 죄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이 부자 청년을 정죄하는 것이 구원을 잊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이 부족였다면까지 계명을 열심히 지켜온이 사람은 얼마든지 소망을 가질 수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 않았겠습 그러나
(30:40)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지적은 지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내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내게 있는 것을 다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 하늘에서 보아가 내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는 비록 많은 계명을 법대로 지키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믿음이 예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 마음을 다하고 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이는 이것이 크고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그와 같이 사랑하라니이 두 계명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력이 젊은 청년이 내게 있는 것을 다 팔라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았을 때 그런
(31:45)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때 그는 스스로 많은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으나 가장 중요한 사랑의 율법을 저버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영생의 문제를 영생보다는 자신의 소유를 더 능히 여기고 사랑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런 스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바로 그가 계명 중 아무것도 죽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이 있었으나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으로 탐심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그 탐심의 지배받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우상을 그의 삶속에 갖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32:33) 인간의 모든 악은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의 죄의 기도를 기초가 기초하여 열매를 드러내는 것이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인간의 상처와 죄하게 우리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십자가에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참혹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신이 죄인 중에 계수임을 고백하고 있는 바울 그가 정말 그렇게 죄인이었습니까? 그토록 자책해야 할만큼 흉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도덕적인 젊이었습니다.
(33:24) 종교적인 인물이었고 자기가 믿는 신앙의 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선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아는 지식으로는 흠이 없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는 십자가 앞에서 고백합니다.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소망없는 죄인이라고 일깨워주는 십자가 앞에서 고백합니다. 믿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계수니라. 디모전서 1장 15절 말씀. 사도 바울이이 글을 쓴 것은 다메색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일이었습니다.
(34:14) 그는 순교의 소문이 들리는 옥속에서이 글을 썼습니다. 구원의 주님을 만난 이후로 오로지 그말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았던 자신의 선교적 선교자적인 삶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주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치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나 유대인들에게 40에서 하나 가만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막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화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해 위험과 강도의 유험과 동족의 위험과 과 이방인의 위험과 신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예수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줄이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35:19)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서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옛하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데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게 거짓말을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서 31절 말씀.
백발의 고백.
이는 이제는 선싸움을 다 싸우고 백발의 사도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임을 깨닫는 모습을 보십시오. 어느단적인 교파에서 이렇게 자신이 죄임을 끊임없이 깨닫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며 아직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하기도 합니다.
(36:18)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평생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살았던 사도가 이처는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죄인을 고백하는 것은 오리려 그의 거룩한 성품과 영적 삶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가르쳐 줍니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고 종기적으로 헌신된 삶을 산다. 살았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참된 의미를 깨닫는 그 순간 자기가 바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차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은 믿도 끝도 없는 파괴적인 정세 어 정제 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37:17)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이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지적할뿐만 아니라 그리고 죄인들을 위해 대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이 같은 사도의 인식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쓴 편지의 머릿 부분에 잘 나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 1, 2절 말씀.
(38:09) >> 십자가를 아는 지식.
십자가에 관하여 안다는 것은 십자가 자체를 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은 어 같은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진리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얼마든지 십자가에 관하여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그의 문의 성품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표로서 알게 되는 것처럼 십자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그 십자가를 체험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망이 없는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39:01) 그리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수많은 성도들에게이 십자가가 영원한 찬송의 제목이 되었는지 하늘나라에서조차도 어린 양이 성도의 영원한 찬송의 대상이 되시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도구다 언덕에 우뚝선이 십자가는 성자의 가까운 삶을 살아왔던이 사도만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이 세상에는 오직 죄인들만 존재할 뿐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죄인들만 존재합니다. 두 종류의 죄인들이 존재하는데 용서받은 죄인과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피묻어 골고다 언덕에 선 그 모습을 바라보게 함 우리가 인임을 가르쳐줍니다.
(39:55) 의 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언덕에 십자가는 사라졌으나 지금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위해 우뚝선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죄인들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모인 것이 교회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용서받은 죄인들에게 용서의 위대한 가치와 축복을 아직 용서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전해주도록 명하십니다.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정죄된 자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적시어 흐르고 있는 그 붉은 피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흐르는 피이며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죄악 때문에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믿는 것입니다.
(40:48)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용서 위에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그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빚진 자
그러나 이 십자가는 이미 용서받은 죄인에게도 다시 한번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런이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번 자신이 주인을 깨닫고 있습니다. 옥속에 갇혀서이 편지를 쓰면서도 그는 자신을 남다른 학자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대한 사도로 황기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충성되게 하는 길을 걸어가고 넘치는 헌신과 마음이 없는 맡겨 주신 조직 조건을 감당해 온 것을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 받은 형상의 형상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훌륭한 업정은 단지한 태양빛 아래오르는
(41:51) 한동광의 양소의 질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고난의 형상을 상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일이 얼마나 부정한 일인지를 순교를 앞둔 순간에 다시 한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깨달은 자신의 죄인된 것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이었으니 그는 자신보다 많은 더 많이 범죄하며 사악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또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자기를 위해 죽으신 것이 분명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신 상을 만날 때마다 그는 자기 속에 모든 그리스도의 행된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42:48) 그렇습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를 죽이는 살인의 참여한 자로 하나님과 성도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쁘다 모든 사람이 믿을 만한이 말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보시려고 행하셨다 하였도다. 주인 중에 내가 승리니라. 디모데전서 1장 15절 >>
십자가 앞에 서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와 같은 마음으로 피로 물들어 말하는 십자가 앞에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것이 좋으신 주님에게 얼마나 부당한 일이었는지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형벌하신 그 사랑을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우리의
(43:52) 구원을 위해 당신의 영광을 버리신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와 그 유대한 구원을 사랑으로 주도하신 성부 하나님과 짐승처럼 미련한 화인 맞은 양신 가운데 거룩한 그 사랑을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돌리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 단지 용서받은 죄인들이임을 깨닫게 됩니다. 용서받은 자들로서 하나님 앞에 누리는 모든 은혜로운 특권과 좋은 것들은 오직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값으로 못 바뀌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표적
십자가로부터 들려오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습니다.
(44:49)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속에서 사도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많은 죄인들 중라고 말합니다. 그러는이 말은 결국 사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이 가장 흉악한 죄인을 깨닫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 긍휼를 입은 가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얻는 자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 1장 16절. 여기서 기록된 그러나라는 말을 앞서 언급된 죄인됨의 고백을 뒤집는 말입니다.
(45:42) 그는 십자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흉악한 죄인에게 어떻게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독생자 외아들이 십에 못박히신 하나님의 사랑이 사도를 죄인에게 합당한 죄와 형벌에서 구해 내셨습니다. 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진로 십자가에 위대할 수는 여기에 있습니다.
(46:32) 왜 그렇습니까? 바로이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단지 죄인을 못 박아 죽이는 형태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형태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잔혹한 처형과 죽음 위에 아무것도 아니 아닙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가 자로 여긴 바 되어 비참하게 처형 당한 하느님간 예수가 받은 저주의 은적을 말해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를 고백 사도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는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의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를 못 바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리라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단언하합니까? 우리 주님의 생애를 돌아볼 때 자랑할 만한 일이 얼마나
(47:38) 많았습니까? 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셔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던 자신의 사역의 세계를 바라보며 얼마나 자랑할 만한 일이 많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필이면 왜 멸망의 십자가였습니까? 왜 저주의 십자가였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미련하고 부끄럽게 여기는 고난의 십자가 어떻게 그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그에게 죄인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의로움을 깨닫게 해주실뿐만 아니라 그래서 소망이 얻게 된 자신과 같은 죄인에게 나타난 위대한 사랑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48:33) 그리하여 그는 그 사랑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범죄하 십자가는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진 인간을 당신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신의 위대한 지혜이며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었습니다. >>
위대한 사랑의 힘.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사랑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십자가에 나타난 위대한 사랑의 힘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사도 자신도이 같은 십자가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49:21)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일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서 5장 13에서 15절.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가능했으나 하실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서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을 기뻐하셨습니다.
(50:06)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고 그 백성들을 그 십자가 배아 자기의 사랑을 주시는 일들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계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더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6절에서 8절 말씀 >>
인내로 온 사랑
이이어서 본문은 죄인 중에 계수인 바울에게이 같은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대하여 말해주 내가 긍휼를 입은 가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먼저 일체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시매라 사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음으로 나타났습니다.
(51:09) 이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사도가이 글을 쓸 때에 어떤 심정이었지를 이해할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구원받았고 그 이후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사역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제 가까이 다가온 순교의 순간을 기다리며 주님의 품에 안길 때를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를 처될 때까지 잠으셨다면 선이든 후 바리세파 종교자를 꿈꾸던 집전에는 그를 버리셔야 마땅했습니다.
(52:01) 만약 하나님께서 그가 공식적으로 종교에 대비함으로써이 아침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참으셨다면 하나님의 사람 스데반을 돌러기 위하여 찬송를 던졌을 때에 던져버려줘야 마땅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려고 다메색으로 떠날 때까지만 청다면 그는 도상에서 부활에 주님을 만나는 위대한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며 살아왔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교만한 평경과 종교적인 아집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속에든 뛰한 열심은 그러 하여금 점점 하나님을 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더 멀어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52:56) 동전을 거절한 거지
한때 교회에 기고하면서 교회를 섬기며 예배당도 돌아다기 전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으로 봉사하고 살처럼 교회를 지키고 청사하는 일도 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들은 제가 매우 공한 형편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원래 교회 같은 곳에서 청하지 않은 손님이 자주 찾아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중 한 부류가 공룡을 하러 다니는 거지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와서 촬량한 모습 목소리 좀 보태 달라고 하기에 300원을 주었습니다. 사실 그때 저의 형편으로는 분명히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 것 좋았다고 생각하며 내밀었더니 거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리 내가 거짓지만이 300원을 줍니까? 이렇게 말한 거지의 표정에는 노한 기색이 영역했습니다.
(53:50) 상당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기를 거절하던 결을 기억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거절하였을 때에 그것은 작은 선물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위와 사랑을 거절한 것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 자신을 거절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을 저버리지 말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버림받은 영혼들에게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호소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54:40)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수로 행하느니라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리로니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20절 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들려오는 두 번째 음성을 들으십시오. 십자가는 소망이 없는 죄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너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55:27)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형벌하셨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하여 아들을 재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보다도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내어 주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아들을내어 주시는 희생을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은이 일을 하셨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었기에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를 원하지도 않던 그때에 당신의 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받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셨습니까? >>
하나되게 함.
(56:17)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에 온수가 되어 불라의 담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 막힌 담을 헐어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하여 사람들 사이에 화해와 일체를 이루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온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시고 된 계명의 율법을 하셨으니이는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세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57:15) 온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에게 평안을 전하시는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3에서 18절.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금도 나누었던 사람들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이 세상에 속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눴던 사람들이 하나가 됩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더 큰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회복에 이르는 길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감으로만 그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행복과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58:12)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지옥에서 천국으로 멸망받을 몸에서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우리의 삶에 완전한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영혼에 참다운 안식과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이 글을는 당신이 아직도이 십자가 아래방인으로 남아 있다면 오늘도 피로 물들어 말하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화회의 초청을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이 진실로이 고난의 십자가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는다면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59:00) 그 사랑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자랑하십시오. 그 십자가가 여러분들을 구한 것을 가슴에 영원히 아로새기십시오. 고난의 십자가가 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뛰어난 표적이 되었는지 대답할 말이 있게 하십시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며 살아가는이 세상은 십자가를 향하여 거침없이 덜어놓는 당신의 자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말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넘치는 구속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합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사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사로잡힌 우리의 모습을 수 있어야 합니다.
(59:43)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인간의 죄인된 모습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함께 드러나는가 하는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통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거룩하게 하는 위대한 힘을 말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지도 바래지 않는 것.
사도가이 불별의 아름다운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한지 2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보다 언덕의 십자가도 이미고 사도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이 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로 하여금 그 십자가 앞에 할 말을 있게 만들어 줍니다.
(1:00:30) 언제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에 구원하보자 하는 세상의 한마당이 이렇게로 물든 십자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가슴여하는 십자가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보내셔서 그 위대한 도를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 왜냐하면 세상이 바뀌고 인간의 풍조가 갈라 열리어도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구원의 방법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가운데 웃어서이 세상에 버려진 영혼과를 잃은 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하여 생자를 주었노라.이 이 사랑 앞에 당신은 어찌하시니까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