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_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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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경험하라 3장_십작가의 지혜와 능력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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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십자가를 경험하라. 제 3장. 십자가의 지혜와 능력.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바뀌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 2절.
이상한 전도지.
어느 날 우편함에 예쁜 전도지 한 장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하트 모양을 한 그 전도지는 좋은 종이에 인쇄 비용이 많이 드는 총 천연색으로 인쇄되어서인지 보기에 그럴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지의 제목은 행복하시렵니까 였습니다. 이어 한 장을 넘겨 보았습니다. 그 한쪽 면에는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목 아래에는 행복에 이르는 십계명이 쓰여 있었습니다.
(00:55) 첫째, 밝은 햇빛을 많이 죄십시오. 둘째, 맑은 생수를 많이 드십시오. 셋째, 양질의 소금을 섭취하십시오. 열제,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 글을 읽는 순간 제 마음 속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언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수에 끼어 팔리셔야 했으며 복음이 소금의 사음품처럼 소개되어야 됐습니까? 복음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요즘은 조국 교회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서 한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복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교회의 태도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01:46)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장 16절하고 한 사도의 고백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입니까? 그러나 교회가 이처럼 쉽게 세속의 정신과 야합하여 왜곡된 복음을 갖거나 십자가의 정신을 떠나는 것은 너무나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같은 신뢰를 고린도 교회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과 고린도
고린도시는 지금의 그리스남단 지중의 연에 위치한 한구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선박들이 많이 드나드는 도시였습니다. 여러 민족이 모이고 흩어지며 활발한 무역에 성행하여 경제적으로 부요하던이 도시는 타락의 대명사였습니다.이 고린도 시가 복음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주 50년 경이었습니다.
(02:42) 그러니까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을 이용하여 열심히 그리스도를 전했으나 심한 핍박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린도전서 2장 3절. 특별히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강론하며 복음을 전할 때 신라와 시모데가 마귀도로부터 내려와서 도와주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거기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지만 그들은 대적하여 회방하였습니다. 그때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던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03:28)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사도행전 18장 6절 그러나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격려하셨습니다. 어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회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이는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18장 9절 10절. 이러한 하나님의 격려에 힘입어 바울은 여기서 1년 6개월이나 머물며 복음을 전함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문제 많은 교회.
그러나 바울이 따는지 얼마 안 되어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04:20) 그중에서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무난 인사와 함께 바울을 근심하게 하고 있는 내용들이 1장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분열 현상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교재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모든 지식에 풍족한 자가 되어 경고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에게 속한 것을 뽐냈습니다. 꽤나 지식을 자랑하는 시대의 풍족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기에 자신들이 지적인 아볼로에게 속했다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05:01) 또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에게 속한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마 바울이 권세 있게 전하는 복음을 듣고 감화를 받은 사람들을 것이니라. 그들에게는 바울의 능력 있는 목회 사역과 설교가 자랑가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12 사도들 중 수지자인 베드로에게 속했다고 뽐냈습니다. 그들은 아마 베드로에게 위탁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목양의 명령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비록 이방의 도시였지만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과 베드로를 신앙의 원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크리스토파라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05:43) 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이름을 들먹이며 누구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그리스도 예수께서 속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교리와 신앙은 다른 분파 사람들의 것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예수님이 교회의 일파의 우두머리가 되실 수 있는 분인 것처럼 그릇 행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이때에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그리스도에게로 그들의 신앙에 관심을 돌리게 해주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난이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전서 1장 13절.
(06:31)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장 17절 18절.
십자가를 말한 배경.
그러면서 바울은 1장 18절에서 2장 16절까지 무려 30여절에 걸쳐서 갑자기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신앙과 삶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서 문득 십자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거론하고 있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의 초보였습니다.
(07:12) 이 이 정도의 기초적인 십자가에 대한 교리적인 지식을 고린도 교회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바울이 그곳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지금 교리적인 문제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를 부정하고 속죄의 교리를 부인하였기에 복음을 변증할 목적으로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다루고 싶었던 것은 고린도 교회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였습니다. 특별히 도덕적인 문제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의 질서 문제에 대하여 교인들을 말씀 안에 붙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언급해야 할 본 주제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이처럼 길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는 말합니다.
(08:03) 하나님께서 세상에 전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장 28절 29절. 이들은 바울에 이어지는 권면을 깊이 받아들여야 하였습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1장 13절.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 그들은 세례를 받았으며 고린도전서 1장 13절.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고린도 교회는 부끄러운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08:49) 교회 안에는 심각한 파당이 생기고 고린도전서 1장 11절. 가정은 파괴되었으며 개모와 더불어 근친 상간에까지 이르는 표륜의 물결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용납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 2절.
육체 사랑과 자랑.
이 이 모든 문제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남아 있었던 옛사람의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고 할라인들은 육체적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이 글을 쓸 때마다 애타는 심정으로 육체를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고 호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아니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방식대로 살아가는 있었습니다.
(09:38) 그들은 육체를 자랑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생활의 방식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거듭난 가치감과 거듭난 생활의 방식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듭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그 위대한 고백을 남긴 것도 바로 고린도 교회든 갈라디아 교회든 성도들이 얼마나 쉽게 육체를 자랑하며 살아가기 쉬운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나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나 문제는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3절. 고린도 교회의 자랑의 동기와 방식이 세속적인 것이었다면 갈라디아 교회의 자랑의 동기가 종교적인 가식을 덮고 있었다는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습니다.
(10:26)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된 것도 바로이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3절 14절.
어찌 이런 일이
어째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의 물이라고 불리어지는 고린도 교회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앙과 삶의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면서 비그리스도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어째서 이들은 한 성령 안에서 같은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나뉘어서 분쟁하고 있습니까?이 빛의 자녀로 부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음란하고 타락한 시대에 자식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들은 한때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빈손 들고 나아가 믿고 세례를
(11:30)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8절. 그런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소중한 복음의 경험을 버리고 이처럼 무지하고 죄많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도록 만들어 버렸습니까? 모시 이들로 하여금 이처럼 도시의 정신에 매몰되어 타락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탈산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었을까요? 이들의 실패는 십자가에 대한 태도에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 때는 믿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십자가의 정신에 지배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십자가를 이해했지만 지금은 그 십자가가 더 이상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2:09) 이상한 결심.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미련한 십자가의 도가 자신들을 구원한 것과 그 십자가의 지혜가 세상의 지혜를 조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가 학식과 문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상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처럼 길게 십자가에 대하여 상기시키는 이유가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는 부패한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다루기에 앞서 자신의 개인적인 결단을 상기시킵니다.
(12:49)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5절.이 같은 바울의 회고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향한 번명 가운데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빠지고 있는 그러한 생각의 위험을 다소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쓰라린 경험.
(13:33)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고린도 교회에 이르기 직전 그가 가서 복음을 전했던 곳이 어디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고린도에 이르기 직전 아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덴데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입니다. 그곳에서 신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며 바울은 온성의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붕괴하면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틀림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분노는 거룩한 의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작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변혼하였습니다.
(14:14) 그들 중에는 상상대의 유수한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에피크로스와 스와 철학자들과 정론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사도행전 17장 18절 이들은 역사적으로 쾌락주의자들이었던 에피크로스 학파와 금육주의자들이었던 스학파 철학자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대단히 유창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 몸의 부활을 변증하였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바울의 변증을 희롱하기도 하고 다시 듣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실제로 그와 친분을 갖고 믿은이는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4절. 그다음에 전도하러 간 곳이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믿음의 바울은 아덴에서의 순교 태도에 대해 깊이 반성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14:58) 이방인들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장음한 능력보다는 증간적으로 자신의 지혜로운 말과 결론을 더 의지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덴에서 여러 사람과 결론하면서는 자신의 박식함과 예전에 교육받은 것들을 활용하는 일에 자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아덴에서 행한 그의 설교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며 대부분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 발래되어 있습니다. 그런 방식의 신 증명은 당시의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논쟁 방식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맥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아덴 선교를 실패로 이해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는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한번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논쟁과 결론의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라는 사실을 깊이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15:46) 그리고 고집스러운 인간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는 그곳에 십자가의 복음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리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전도 사역을 감당하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고린도에서 두 번째 출발을 한 것입니다.
작정하였노라.
그런 의미에서 아덴에서의 실패 이후에 찾게 된 또 다른 사역지 고린도에서 이렇게 자음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는 다시는 말과 지혜가 아름다운 것을 신뢰하지 않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물론이 말은 그가 전도에 있어서 지혜를 사용하기를 포기했다거나 무지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 지성적으로 깨닫게 하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16:32) 다만 열심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말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물을 통하여 증거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랫동안 복음 전도를 위하여 일원 전문가 잡지 않게 고린도 교회에 들어서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제 자신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사람들의 영혼이 획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젠네의 사역을 통하여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에게서 말과 지혜 아름다운 것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는 평생 그 일들을 위하여 공부해 왔고 그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종교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도 자신에게 있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들을 다시 말해서 육체의 자랑거리들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17:25) 그러나 그 이제 그런 것들이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데 그것들로서 많은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깨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가면서 그는 다시 복음 전파의 초보자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지혜 고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증거되어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야 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밀어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한 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하기에 앞서 그토록 길게 십자가에 대한 진리를 상기시키는 이유입니다.
(18:12) 두 종류의 사람들
이 세상에는 그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고 조롱하며 배척하니라. 사도는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당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패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장 18절 19절. 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거절할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대한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들 있습니다.
(18:47)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속죄 사건의 의미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옛날에 자하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자랑거리들을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차는 것들로 날려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모든 자랑과 꿈을 십자가에 묻은 사람들입니다. 앞에 사람들은 땅의 일을 바라며 사는 사람들이지만이 사람들은 하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이 사람들에 대하여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느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9:33) 빌립보서 3장 20절 21절.
제 3의 인간들.
그러나 성경은 이 같은 두 불류 인간들 사이에 제3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도 교회 교인들이 바로 그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십자가를 삶으로 자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도 거듭난 가치가 아니라 이전의 가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육체입니다. 이들에게 십자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들은 어떤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비웃거나 대척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20:13) 십자가가 기독교회 상징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별 이일을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십자가를 잘 안거리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인도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면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좋은 교리에 대하여 지적으로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성경적이고 정통적인 교리를 깊이 체험하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여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이 같은 여러 질문들은 고린도 교회가 처한 형편을 차례로 살펴봄으로써 답변될 수 있습니다.
(20:57) 두 폭의 그림.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편지를 받는 수신자의 명칭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1장 2절 3절 여기에 나오는 표현 중 우리의 눈길를 끄는 것은 편지를 받는 수신자의 명칭의 일부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입니다.이 문구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21:39) 이것은 마치 서로 반대되는 형상을 담은 두폭의 그림이 겹쳐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교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협력하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공경하며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지배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라 세상의 풍조와 대적하고 인간의 풍조를 거슬러 나가는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죄악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도시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조선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번영한 도시 한가운데 섞여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교회의 교인들은 보이지 않는 나라의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고린도라는 말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도시를 가리킵니다.
(22:21)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하고 스스로 주인 노릇하며 제멋대로 살아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타락한 도시의 재명사입니다. 그들의 꿈은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고 그 도시에 자랑은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신 아리스토파네스는 제멋대로 황상을 사는 사람을 가르킬 때 코렌디아 조마이라는 단어를 제하였는데이 단어의 의미는 고린도인처럼 되다. 고린도 방식으로 살다 고린도 사람들처럼 성적으로 도둑한 생활을 하며 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른 도시에 방상한 삶이 얼마나 널리 알려졌으면 그 도시에 이름을 딴 단어가 영적 철학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으니까.
도시의 특징.
고린도 교회가 자리잡고 세워진이 도시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23:10) 첫째로 이 도시는 학문이 많이 교류되는 도시였으며 다양한 시견이이 도시 안에 있었습니다. 의견이 많으면 말이 많고 말이 많으면 논쟁이 그치지 않는 법입니다. 각 사람들은 학파를 이루었고 각 학파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거짓했으며 거기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개척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결속해서 강력한 파당을 형성해 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에 논쟁하는 도시 정신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시 정신이 교회에 파고 들어오게 되어 교회를 바울파, 개바파, 아볼로파, 그리스토파로 갈라지 놓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성결한 정신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잃어버릴 때 도시 정신이 교회 속에 파고 들어오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3:56)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서 있는 도시는 어떤 지배 정신이 어떤 정신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정치와 경제의 문화가 집중된 서울 수도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우월한 정신은 무엇입니까? 한구 도시인 부산의 지배적인 정신은 무엇입니까? 도시마다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세속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사람들에게 그 정신의 물결을 따라 살도록 강요합니다. 복음 전파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도시가 교회로 말미암아 복음화 되든지 혹은 도시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도시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날 한 도시의 정신은 엄청난 물결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도시인들을 그 정신에 굴복시키고 있습니다.
(24:43) 그리고 그 정신을 거쳐서 살아갈 수 없도록 강요합니다. 도시로부터 밀려오는 세속적인 정신의 물결은 그 파고가 높고 교회로부터 세상으로 흘러 들어가는 맑은물은 너무나 미약한 물줄 뒤에 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 노래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내 비판소리도 내게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장 23절 24절. 여기서 물같이 강같이라는 말은 작은 물이 아니라 커다란 강과 뜻을 알 수 없는 시면의 깊이를 가진 그래서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설 수 없는 물의 흐름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25:29)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 도시가 변화되어 하나님께 돌아오고 세속 정신의 지배를 받으며 제멋대로 살기를 좋아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대로 주대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영광스러운 도시의 변화를 변화가 있기 위해서는 복음의 개월이 아니라 넓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전설적인 강부와 같은 엄청난 능력이 교회를 덮을 것 뒤덮을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렇게 한 도시를 뒤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들거리던 철학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세상이 자신의 내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하던 정치가들이 하나님의 위험 앞에 누친다고 생각해.
(26:15) 높고 낮은 인간들의 사상들이 하나님의 지혜물에 잠기고 복음의 강물이 도시를 뒤덮을 때 그때가 바로 부흥의 사도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기를 소원했던 것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도시 안에 살아가면서도 삶의 근원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그 십자가로부터 올라오는 생명의 수액을 먹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도시가 복음화 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육체 사랑의 극치
또한 고린도 고린도에서는 도덕적인 방만이 시대에 정신이었습니다. 이 중심에는 아프로디테라는 사랑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서 약 천여 명의 제위의 충분들이 몸을 팔고 있었습니다.
(27:10) 신은 온통 도덕적인 불결의 팔목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나는 육체 사랑의 끝이며 배교와 우상숭배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거룩한 삶에 대한 전적인 포기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하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 그리하고도 너희가 우리로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안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전서 5장 1, 2절 말씀 이러한 죄악은 바로 고린도시의 불한 도시 정신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관용하는 마음도 그 모든 도시로부터 배운 것이었습니다.
(27:54)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연한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교회와 세상이 별다를 끝없는 상황이 되어지기 일일 수입니다. 교회와 세상 속에는 서로를 평준화하려는 끊임없는 작용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은 할 수만 있으면 교회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세상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게 하라.
교회가 이러한 세상의 물건로부터 교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죄를 미워하고 의에 속하며 본성적으로 세상의 지배를 치러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뻐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28:42)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하여 교회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하여 각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과 그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는 사실 그리고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모든 백성들은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이처럼 세상 물결을 거슬러 살기는 힘썼지만 그러한 노력들은 너무나 자주 매우 적은 열매를 거두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성결한 복음의 물결을 흘려보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을 바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영향력은 곧 그리스도인 각자의 영향력의 총입니다.
(29:29) 그리고 부패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신령한 영향력은 곧 그들이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향력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러한 도시를 잘 아는 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번 그들의 구속의 근거를 확인시키고 어 십자가의 복음을 들려주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린전서 1장 30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구원받은 자로서 예전에 세상에서 살아가던 것들을 부러워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명령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닙니다.
(30:13) 애굽을 떠나 광야에 들어섰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회를 기억해 보십시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고 때로는 승리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전투에서 이기기도 하고 많은 나라와 왕들을 항복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때마다 나타나셔서 앞서 행하시며 그들의 걸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놀라운 일들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 생활 동안 그 교인들 대부분은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속히 애굽에서 돌아가서 고기국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을 향한 소망으로 마음이 불타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0:55) 단지 이전에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옛 사람의 일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의 가치를 깨닫고 세상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지식과 은혜를 알며 거듭난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교리적인 지식을 넘어서 체험을 통해 앎으로써만 가능해집니다.
자기 사랑에 빠져
셋째로 이 고린도시는 저마다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상업시였습니다. 십자가의 정신 없이는 인간의 부패한 욕망은 자기 사랑의 열심을 내게 마련입니다.
(31:40) 다른 사람들의 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원래 상업 도시는 제리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이익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끝으로 간절한 옷으로 사랑의 장인 고린도서전서 13장을 받아야 하였던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인 것도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였지만 십자가와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자 그 도시의 정신이 교회를 침벌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명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그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32:17) 그리고 그 사랑을 삶의 원리로 하여 어두운 세상을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시는 달랐습니다. 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예리한 경제적인 이해 관계와 욕망이었습니다. 그러한 도시에 하나님께서 어 고린도 교회를 세우실 때 그분의 기대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도가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사도의 어떤 뜻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고린도 교회가이 같은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도시 정성을 물들어 교만해지고 분쟁하고 방평한 생활을 일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린도 시를 복음 안에서 알아되게 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도록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자기만을 위하는 도시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33:19)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어 이러한 개인적인 변화들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은이 사람들이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8절 고린도와 같은 세상을 거쳐서 살면서 복음의 정신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자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에 귀를 기울인 적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0절 11절
교회도 세상처럼
그러나 이들은 실패하였습니다. 교회는 도시를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하나되게 하는 대신 도시의 영향을 받아 분열하고 있었고 고린도시에 그리스도인의 순교를 가르쳐 주는 대신 도시와 함께 불건한 성적인 사랑이 동참하게 되었으며 이옥의 사로잡힌 도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은 심어지는 대시에 그 도시로부터 자기 말을 위하는 이기심을 교회 안에 그려들어왔습니다.
(34:17) 고린도 교회가 육체를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이유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9절 31절. 그리고 이렇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 교회는 원래 그렇게 실패했던 교회가 아니고 한때는 복음에 대한 감격으로 십자가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던 교회였습니다. 결국 십자가를 잃어버리자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게 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도시 한복판에 우뚝서 있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외치며 자랑할 십자가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자랑하는 독자 여러분 고린도 교회의 실패를 통해 우리의 삶을 들여다 봅시다.
(34:54)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무엇이어야 했을까요? 그리스도의 교회는 십자가의 정신에 의하여 지배를 받을 때 비로소 그분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속에서 십자가가 그들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그들은 한때 성도라고 불리던 물이었으나 고린도시에 교만한 말은 꾼과 다름없이 거룩한 말씀의 도를 가지고 분쟁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지만 십자가의 정신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급속히 예 생활의 습관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이 상막한 고린도시에서 그들이 사랑을 베푸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이 온 심령으로 십자가를 붙잡는 일은 실패하자 오히려 교회의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35:40) 이 이 모든 실패는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를 경고히 붙잡고 나아가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숨쉬고 계셔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며 온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라.서 에서 3장 15절 16절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 도시에 그 신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서 그들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잘 보독적인 잘못을 지적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그 달입니다.
(36:24) 십자가를 놓친 교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부패와 탄락 그리고 신앙의 실패를 십자가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세상 고린도시를 십자가에 못 받고 그 죄악의 낙을 쫓기 원하는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도 더불어 십자가에 매달아야 했습니다. 세상은 그 도시의 정신을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이라고 담대히 자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이 잔소한 원리를 떠나자 고린도 교회는 밀려드는 세속의 물살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려나가는 신앙의 침몰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7:10) 이것은 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워두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이해하고 함께 깨닫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십자가의 의미에 우리의 마음과 삶이 사로잡히고 그것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영적인 삶이 우리의 중심에 와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이 없는 영적인 삶은 헛된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이런 방식으로 붙들고 또한 십자가에 사로잡히는 일에 실패하자 성도의 이름은 더렵해졌고 세례는 무색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값싼 세상의 욕심과 교환되었고 교회는 세상을 향해 외칠 구원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불신앙과 부패와 맞서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투항하여 죄악의 낙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37:58) 한 성령께서 그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지만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섬겨 하나되게 하는 일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우린 무얼 배우나?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고린도 교회의 실패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했고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계속 피를 흘리셨습니다. 창끝에 찔림으로 그의 심장은 터졌고 그의 찢겨진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온 물과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2,년 전 피로물 들어갈보리 언덕에 선 그 보혈의 십자가를 통해 회개하는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8:46)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혹한 고난을 통해 당신과 우리 사이에 갈라놓은 노인 높은 담을 무너뜨리고 무너진 담장의 자녀 위해서 장자와 같은 우리들을 용납하시고 화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는 평화 막힌다물 모두 하셨네. 주 평화 우리의 평화 우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려 화목제물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우리가 바로 그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라 하나님과 동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39:51)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 말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커다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마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커다한 충격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상시 대수롭지 않게 느끼셨 느껴지던 말씀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의미가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40:30) 그러나 대부분의 시기의 사람들은 이처럼 죄인을 찾으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와 넓이를 깨닫지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조차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자신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감격을 삶의 원천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대한 경험 없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41:08) 특별히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이이 말씀을 기록한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니라. 요한일서 4장 9절 10절.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구속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합니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믿으십시오. 거룩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받으신 것은 여러분들을 사망의 죄악에서 건져내시기 위함이 없습니다.
(41:52)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바로 당신을 멸망할 지옥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누구도 당신을 구원할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얽면 죄악과 슬픔의 차들을 끌어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향하여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게 되었던 간수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홍문이 부서졌음에도 불구하고 도망하지 아니한 지수들 앞에서 부복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42:35)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 구원을 받으리까? 이때 바울이 대답했던 그 대답은 또한 하나님께서 같은 질문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아오는 당신을 향해 주시는 응답이기도 하노니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사명서 16장 30절 31절.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등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십자가를 주목하라고 공고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그 참혹한 고난은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43:20) 지금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커절한 죄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음을 믿고 그 사실을 온 마음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받았지만 마치 고린도 교회의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처럼 세상과 짝하며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도일한 사랑으로 성경의 증언을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밀쳐진 십자가 마음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심령한 가운데 우뚝서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44:06) 마음을 다여 하나님 앞에 간고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가 여러분의 영적인 삶과 생활의 중심이 오도록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 십자가가 한 종교의 차가운 상징으로써 가이라. 우리 삶을 구족하고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찬란한 빛으로 살게 하는 위대한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실제적인 능력이 되도록 십자가를 경험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가 성도들의 삶 중심에 서게 하는데 실패했고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혐의 미를 새기며 그것을 끝까지 붙드는데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멀어졌고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육체를 자랑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44:52)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십자가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던 그 십자가가 그들에게는 자랑거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화장에 속해 얼마나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떻게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는지가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주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신령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 그것을 받은 자신들의 신앙적인 우고보를 자랑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십자가가 무너지자 인사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데 올바르게 기어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45:33) 이 모든 실패는 그들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과 삶의 삶 가운데이 세워지는 길이 없이 결코 풍성한 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자랑스러운 존재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재적으로 경험하여 살아가는 영적인 삶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는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서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46: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서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흐느끼는 노 사도
바울이 전지를 뜬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다메색에서 만난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부였습니다. 젊은과 폐기에 넘치던 청년 시절은 지나가고 윤기 있던 피부는 육로의 위험과 배로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죽고 배고 부검에 맞는 고난의 세월을 통하여 깊이 고하였습니다. 인생의 황원 길에 들어선 반백의 노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서 있었고 거기에는 30여년 전에 못박힌 사울이 달려 있었습니다.
(47:02) 그 사람은 후회하였으나 그의 속사람은 십자가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 그 십자가는 언제나 살아서 그의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생각하고 고난의 정신으로 말하며 이생의 정신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권난을 받으시록 그는 더욱 고난의 거룩한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고 싶어하였습니다. 그의 삶이 그리 십자가의 고난을 따라 살면 살수록 부활의 위대한 능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육체 가운데 사나 지푸기와 같은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면 살수록 그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47:45) 순교의 종소리를 들으며
그는 이제 세상이나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들을 위하여 사는 전도 교회와 같은 길을 걷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별을 위한 순교의 종소리가 서서히 들려오는 인생의 석양에서 조용히 비겨오는 노를 받으며 그는 다시 한번 확신의 찬성으로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후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장 14절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