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_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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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경험하라 5장_십자가와 자기 사랑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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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제 5장 십자가와 자기 사랑.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자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력과 안목의 정력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일서 2장 15-16절 말씀.
공포의 보수.
오래 전에 영화를 한편 본 적이 있습니다. 1950년대 남미 한 가난한 마을을 배경으로 돈벌이를 찾는 이들이 인생 역전을 꿈꾸는 영화였습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유전지대의 큰불 큰 부을 유전지대의 큰 부일이 났는데 그 화제를 진압하려면 막대한 양의 액체 니트로글리세린이 필요하였습니다.
(01:01) 그래서 정류 회사가 그것을 운발할 트럭 운전사를 모집하게 되었습니다. 리트로 글리 글리세리는 아주 작은 충격에도 쉽게 폭발하는 성질을 가졌으므로 그야말로 목숨을 거래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정류 회사와 계약을 맺은 주인공과 세 명의 동료들은 일학 청금의 꿈을 안고 운반을 시작하였으나 차례차례 폭사하거나 사고사하게 하게 됩니다.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은 천신만곳 끝에 그 액체를 계약한 장소까지 운반할 수 있었고 그에게 사례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너무 신이 나서 차를 마구 몰다가 낭떨어지 아래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고 맙니다. 예전에 본 영화지만 아직도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게 나와 있습니다.
(01:53) 주인공은 벼랑을 굴러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끝까지 그 보수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비묻은 손으로 잔뜩 움켜지고 있다가 숨을 거두른 순간 손이 펴지면서 돈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그 영화의 엔딩이었습니다.
신자의 세상 사랑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 생활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것을 중심으로 합니다.
(02:5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도 사실은이 같은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깊고 분명한 회심을 경험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회심의 경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몸과 마음이 하나님께 진 것을 느끼며 신생활하던별한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를 가리켜서 첫사랑했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03:42) 그러나 사도의 고백은 보다 체계적이고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이고 그들 속에 있는 새로운 삶의 궁극적인 동기와 자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진리들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는 먼저 자랑거리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동의해줄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랑거리는 곧 사랑거리입니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들은 모두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입니다. 사랑하면서도 떳떳이 자랑거리로 내놓을 수 없는 것들도 있지만 자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밝히 말합니다.뿐만 아니라 사도는 왜 자신이 십자가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두 개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04:37) 하나는 세상이 매달린 십자가이고 또 하나는 자아가 매달린 십자가입니다.
세계의 십자가.
우리는 여기서 모두 세계의 십자가를 봅니다. 예수께서 매달린 하나의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있는 두 개의 다른 십자가를 봅니다. 하나는 세상에 매달린 십자가이고 또 하나는 옛사람의 자아가 매달린 그것입니다. 그 두 개의 십자가는 다른 하나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들의 세상 사랑을 바라보는 사도의 애리한 시각을 발견합니다. 사도에 의하면 인간들의 세상 사람은 사람들을 향하여 역사하는 세상과 세상의 유혹에 대하여 반응하는 사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05:29)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인간의 거룩한 의무를 육체의 정력과 안목의 정력으로 바꾸며 살아가기를 즐기는 세상입니다. 사도의 눈앞에 드러난 세상의 정체는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력과 안목의 정력이야말로 세상으로 하여금 세상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건축할 때 하나님의 생각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사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추구점은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06:15) 이전에는 이전에는 비록 그런 식으로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은 다음에는 그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힘조 고백하고 있는 것은 나는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이 유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하기 전에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받은 것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6장 13절 말씀. >>
갈라디아 교회.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있던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입니다.
(07:05)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였으나 구약의 많은 의식적인 율법들이 아직도 신약의 기독교회의 구속력을 행사한다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 사역이 끝난 후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구약의 의식들을 여전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열심 있는 유대인들 사이에 여전히 유행하던 민족주의적인 편견에 놀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유대주의자들은 비록 복음을 듣고 산 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유대인들로서 그들의 동족과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07:56)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의 동족들이 이방인들과 교를는 것을 불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행하게함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을 피해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육체의육을 내려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할례를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로암아를 면려뿐이라. 갈레서 6장 12절. 결국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한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바울이 있는 사도가 아님을 입증하고자 하였고 바울이야말로 복음에서 율법의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그릇된 가르침을 만들어냈다는 모함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08:54) 이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거스르는 세상과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십자가를 필요로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세상 자랑과 세상 사랑은 언제나 하나임을 볼 수 있습니다.
육체를 자랑함.
그는 먼저 육체를 자랑하는 일에 관 일에 관하여 말합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09:50) 갈라디아서 6장 13절 14절 말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은 자랑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다가 그러나라는 말로서 자신에게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자랑거리가 있음을 말합니다. 사도는이 같은 자신의 자랑거리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하는 사람들인지를 상기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가 말한 고백 가운데서 그러나라는 말이 주는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그러나라는 말을 중심으로 앞에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육체를 자랑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고 뒤로는 한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41) 육체를 자랑하는 이들은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으며 그러나 나는 반오 기록된 그들과는 다른 자랑거리를 보이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
세상은 세상을 사랑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육체를 자랑하며 사는 일이 일반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는이 세상 사람들이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며 어 육체로 자랑을 삼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육체를 자랑삼으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하여 하신 일들에 대하여 무관심하고자신들의 외모에 관심을는 것만큼의 운명에 대하여진게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11:42) 나아가서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거스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립보서 3장 18절 19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그들 가운데는 사력깊은 사람들도 있어서 보다 같이 있는 일들을 위하여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감각적인 쾌락과 땅의 보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런 것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12:32) 그러나 인간들은 즉시 이런 것들이 자신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아무런 힘이 없고 무언가 영혼을 향한 어 갈망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 중 지각 있는 사람들은 이상적인 가치들 곧 과학이나 예술,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 이웃에 대한 사랑과 진실한 봉사, 휴머니즘의 실현 같은 것들을 추구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모두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이 모두 세상에 속해 있고 모두 지나가는 것들이라고 말합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장 17절.
(13:18) 결국이 모든 인간의 추구가 우리에게 필요한 저편의 것을 이편의 것으로 바꾸어 줄 수 없습니다.이 모든 일들은 죄와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보다는 나은 유익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화해하게 할 수도 없고 저주받을 부로부터 깨끗게 할 수도 없으며 눈물로 가찬 세상에서의 고통을시킬 수도 없습니다.이 이러한 고상한 추구조차도 단지 세상 사랑에 변형된 형태일 뿐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자신의 육체와 세상 생각을 신처럼 따바들어 섬기며 육체의 정욕을 쫓아 살아가는 삶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인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로 가는지에 대하여진하게 생각할 결도 없이 바쁘게 살아갑니다.
(14:06)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본성적인 목마음이 있어 그분을 찾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세상을 사랑하고 보다 영원한 것보다는 순간적인 즐거움과 성취를 위하여 살아가려고 합니다. 금생에서의 분깃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주는 것은 두세평 남짓한 한자락의 무덤뿐이것만 그들은 여전히 세상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를 신처럼 섬기며 육신의 소욕에 불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14:53) 그들은 부끄러운 죄악들을 자랑스러운 영광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에서 구하지 아니하고이 세상에 유행하는 풍조에서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잠깨여 일어난 순간부터 시작해서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온통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세상은 세상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세상의 물결에 마주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
바울도 한때는
이 시간에 우리는 그러나 내게는이라는 말을 쓸 때의 바울의 심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5:48) 그리고 그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사도가 반박하고 있는 육체를 자랑하려는 유대의 주의자들의 생각이 사실은 이전에 바울 자신이 생각하고 추고하던 바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하기 이전에 한때 그도 자신의 대적들과 같이 세상 사람들처럼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들을 자랑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유도 유대 종교 지도자를 꿈꾸던 젊은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은 육체를 신뢰하던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하고
(16:52)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립보서 3장 4-6절 그는 한때 육체를 자랑하 하였습니다. 몸에 남겨진 할례의 표를 사랑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과 정통적인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엄격한 규례를 따라 살아온 것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열심을 자랑하였습니다. 왜냐면 그것들이 자신을 구원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랑할 만한 것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난지 8일 만에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할례를 받았으며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의 족속이었으며 정통 히브리 히브리인이었으며 율법을 철두 철미하게 지키고 살았으며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열심에서 교회를 박해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17:46) 그는 당대의 석학 가말리아의 문화에서 수학하였으며 또한 운변의 신 헤르메스라고 착각하게 할 정도로 엄변에 뛰어난 달병가였으며 아덴에서는 수학파 철학자들과 에피크로스 학파 철학자들을 압도할 정도로 철학에 달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이 모든 것들을 고상하게 여겼으며 이런 이것들을 할 수 있는 한 자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지만 이제 그는 그러나라고 말합니다.이 한마디로서 이제 바울은 자신이 이전과는 다른 삶의 원리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바울이 비난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자랑하는 삶을 살아왔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동의해 줄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8:4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육체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신앙과 삶의 변화는 자신에게만 일어난 예적인 사건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라고 단호하게 말함으로써 자랑거리에 있어서 세상의 풍조를 줬지 아니하고 자기가 자랑하는 십자가를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아니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사도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도의 영혼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체험이었습니다.
(19:34)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러나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십자가를 자랑하는 세상 사람 보기에는 어리석은 삶을 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실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총망되던 장례도 잃어버렸고 동족들에게는 반역자 취급을 받아야 했으며 종교적인 동료들에게는 변절자로 낙인 지켜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이 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의미와 구원의 가치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8) 십자가의 고난을 앎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을 통해서 알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그 십자가에 자신의 삶을 위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의탁 위탁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도와 방향은 달라도 세상을 사랑하며 육체를 자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이 세상에서는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외적인 외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도가 된 우리에게는 모두 그러나 내게 내게는이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21:21) 나아가서 그 고백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특징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희미한 씨앗들이 남아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추구를 영적인 무지 속에 왜곡되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목말음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마셔도 마셔도 그치지 않는 갈증 밖에는 더해 주는 것이 없는 세상 사랑을 그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살아갈뿐 아니라 세상 자체를 깊이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22:13) 이것이 바로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숙명적인 사랑.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살 만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못 살 곳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을 사랑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손에 넣지 못한 것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세상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그야말로 위대한 힘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상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보람을 느끼건 혹은 절망을 느끼건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세상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23:07)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와 자거리를 잠시만이라도 생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에 대해서 말할 때 가슴튀고 흥분하는지 잠시만이라도 귀기울여 보십시오. 더 좋은 학벌, 더 좋은 명예, 더 강한 권력, 더 많은 재산, 더 안락한 직장, 더 비싼 자동차, 더 화스러운 집, 더 으리으리한 별장, 더 짜릿한 쾌락. 귀는 들어도 족하지 않고 눈은 보아도 차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관심이 세상에 있습니다.
(23:56) 왜냐면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들이 세상 안에 모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가 구원의 가치를 하고지 못한 사람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세상은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망은 불꽃처럼
세상의 특징은 욕망입니다. 불같이 타오르고 아무리 삼켜도 꺼질 줄 모르며 번져가는 불길과 같은 욕망이야말로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세상의 특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순간의 쾌락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무참히 질밟는 일이 공공년이 통용되는 곳이 어디입니까? 사람들의 다툼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사람들의 범죄가 어디에서 발생합니까? 욕심이 없는 곳에는 다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욕망
(25:02) 때문에 더욱 죄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그 죄악들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 그들의 눈을 더욱 흐게 하여 참된 것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욕망의 눈이 먼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고 그 죄는 더욱 그들로 하여금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육체의 습관에 길드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물을 단편 어 인생의 허물을 한편으로 느끼면서 그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찾아야 할 감각을 더욱더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항하며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찾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율 배반적인 모습들이 바로이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25:58) 성경은이 점에 대해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이제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야고보서 1장 14-16절. 이러한 세상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명백히 말합니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력과 안목의 정력과 이생의 사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26:49) 요한일서 2장 15-17절.
겁없는 정욕.
이 이 세상과 정욕과 자랑은 모두 하나입니다.이 세상의 정신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을 향해 타오르는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보는 것들의 지배를 받아 생겨난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이 욕망의 불길이 너무나 맹렬하게 타오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죄악된 욕망으로 불붙게 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나 죄의 지배를 받는 육신이 자신을 자극하는 안목의 정력과 손잡으면 욕망의 불길은 저절로 치열하게 타오릅니다. 그 불길은 너무나 맹렬해서 양심이라는 물로 끌 수 없고 도둑이라는 물로도 그 불길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27:42)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불길 같이 타오르는 인간의 사악한 탐력을 지성이라는 찬물로 꺼보려고 하는 것은 마치 불타는 빌딩 위에 한 바가지의 물을 쏟아 붙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사악한 욕망들이 빚어내는 비극을 막기 위하여 법을 엄격하게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철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의 담장을 타오르는 욕망은 언제나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어이 불 정욕의 불길은 너무나 맹렬하게 타올라서 양심을 사르고 도둑을 넘어서며 지성의 통제를 삼켜버립니다. 드디어는 하나님의 율법까지 불태워 버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흥청거리는이 도시의 죄악상을 바라보십시오. 모두 육체의 정욕을 만족하게 하고 안목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생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타락한
(28:46) 도시를 만들고 있습니다. 번창하는 향당문화를 보십시오. 육체의 정욕을 채우고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거칠 것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여 용기 있게 하고 세상을 향한 사랑은 육체의 정욕과 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용기를 줍니다. 요한은이 세상의 특징을 먼저 육신의 정욕과목의 정욕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이 이 얼마나 날카로운 통찰입니까?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가를 따먹음으로 에덴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그 순간이 어 되었을 때 그 비극이 한 순간에 어 시선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억합니다.
(29:41) 더욱이 그 선악과를 바라본 순간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이 생각나는 대신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뱀의 말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눈이 밝아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이 모두 한순간의 시선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금지된 실과를 포함직도 하고 먹음직스럽게 느낀 하와의 안목의 정욕은 그로 하여금 육체로 손을 내밀어 돌힐 수 없는 죄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186쪽입니다. >> 예. 윤성민 목사님 먼저 읽어 주세요. >>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
부패한 이 시대의 타락상을 보십시오. 끔찍한 일들이 순간의 쾌락을 위하여 자되고 있으며 세상에 있는 자랑거리들을 자기의 손에 넣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짓밟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당연시되고 있습니다.
(30:44) 세상은 그런 짓들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죽켜 세워 주기도 하고 이런 자랑거리들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능한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무참하게 폭행하고 첫참하게 때려 죽이는 장면들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흥미 있는 오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살인하는 장면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와 소설들이 앞다투어 팔리고 있고 술취하는 것과 관통과 가정을 파괴하는 가공할 부끄러운 일들이이 세상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와 소설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재물을 손에 넣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31:36)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슴이 쓰라질 정도의이 엄청난 부패와 타락들을 세상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이 욕망은 서로 충돌해서 끔찍한 범죄를 낳기도 합니다.이 이 모든 세상에 가공할 타락과 하나님을 향한 극단적인 반역은 모두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고 싶어하는 세상의 정력이 빚어낸 결과들입니다. 또한이 세상의 특징은 이생의 사랑입니다.이 세상의 특징은 현세의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이렇게 살다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동료들의 시신을 옆에 둔 문상의 자리에서도 하투를 치다가 욕심이 중돌하여 서로 다투기가 십상인 것이 바로 어 바로 어리석은 인생들에 하는 일입니다.
(32:33) 그들은 더욱이 죽음 넘어 있는 세상과 영혼의 운명에 대하여는 더욱 무관식 무관심합니다. 오직 육신의 호흡이 계속하는 날, 계속하는 날 동안은 세상만이 그들의 관심이 대상이고 거기서 얻은 것을 자랑하는 재미로 살아가고 거기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사고는 거대한 시대 정신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 정신을 따라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은 국외자로 간조합니다.
영혼을 준비하라.
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영혼을 갈망하지 않고 구원을 사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죽어가는 영혼의 외마디 소리를 이러한 세상 사랑으로 감추며 살아갑니다.
(33:31)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육체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마지막은 육체와 함께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삶을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이 없심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이든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7-8절 말씀. 인생은 반드시 영혼을 향한 인생입니다. 인생은 결코 스스로 깨닫게 된 삶의 허물을 감추기 위하여 육체의 욕망에 따라 멋대로 살아갈 어 살아갈 장난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34:23) 삶을 언제나 진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결과가 죽음이고 세상의 죽음보다 진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이 인생의 영원한 영혼을 향한 유일한 기회인 것을 잊고 어 살아가지 않는지 세상에 살는 것 때문에 영혼과 영혼과 영혼에 대한 가치를고 지내지 않는지 언제나 되묻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은 어 세상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완료의 십자가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하여 밝히 말합니다.
(35:2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주목할 것은 사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라고 고백한 그것이 현재 완료동사 에스타우로타이로 쓰여진 점입니다. 원어대로라면 십자가에 못박히고는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시점은 과거에 일어난 것이지만 그 영향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고 또한 세상이 바울에 대하여 못 박힌 것은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흘러가 버린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채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며 돌아가셨을 때 세상은 이미 믿는 자들을 대하여 못박혔습니다.
(36:22)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살기가 등등하게 다메색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예수를 만났고 그분 앞에 엎드려 주여 누구시니까라고 고백하였을 때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현재 완료 시제로 표현된 십자가에 못박히다라는 표현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삶과 심령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매일매일 그의 삶 속에 제연된 구속 사건으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자신이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자신의 삶의 의미는 오직 그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소명의 원천 >> 소명의 >>
소명의 원천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차가운 교리도 아니었고 누가 만들어 놓은 신학적인 유산도 아니었습니다.
(37:25)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의 영적인 생활 속에 끊은 힘 없이 제연되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을 증거하며 그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 백일 수 없게 하는 신적인 강제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지 아니하고는 화가 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처절한 신적인 강제력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거룩한 복음의 복음 전도의 길을 고난 속에서도 걸어가게 만든 온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한테 수많은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십자가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생애를 살아가도록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38:15) 사실 영 영향 영향을 받고 있다는 표현으로도 충분하지 않는 신적인 강제력이 그의 삶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같은 신적인 강제력은 복음 전도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그의 소명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자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신 그 일에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39:08) >> 십자가가 지배합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있는 신앙의 정서는 너무나 차갑거나 혹은 쓸데없이 뜨겁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을내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별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이 모든 매마른 반응은 우리에게 교리로 아는 그 이상의 십자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경험하게 되자 오래 세월 지니고 있는 그의 심령의 삶을 영예 기치고 있는 십자가를 간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수 어 없을만큼 더 크고 심대한 영향을 그에게 끼치고 있었고 수많은 자랑 그를 하차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만큼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40:07) 사는 못박히 구라는 말을 현재 완료 동사로 쓴 것을 바로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십자가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현재 완료의 사건이 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건이 지금도 여전히 여러분들의 심령에 삶의 생각에 욕망의 지배를 행사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혹 혹시 우리들의 매마리고 시상적인 영적인 생활과 영식적인 신앙 생활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지 과거에 일어나는 사건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의 한때 강격한 사건을 끝나군 지금은 단지 예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앞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죄사함의 추억만이 우리의 삶을 더욱 방정하게 만들거나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41:10) 오늘 피로 물들이 물들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그의 십자가의 의미를 온 영혼과 온 마음을 느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에게는 24가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다시 그의 마음에 제현되고 있는 사건입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한 번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러므로써 세상과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이제껏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가이 십자가의 사건의 현재 완료로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그를 거룩한 사도로 만들었고이 믿음이 그로 하여금 세상과 죄를 이기며 육체를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42:10) 두 개의 십자가
그러면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라고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사도가 그의 고백 바로 앞에서 육체를 자랑하는 다수의 사람을 언급한 뒤에 그러나 내게는이라고 말한 것처럼 여기서도 육체를 자랑하는 갈라디아 사람들과 자신을 대조시키며 나를과 내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사람에 대하여 못박혀 있는 것이나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못박혀 있는 상황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이 사건은 십자가 때문에 사도 바울 자신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42:57) 그렇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함으로써 사도의 영혼 속에 일어난 매우 특별하고 독특한 일입니다. 세상과 우리의 옛사람의 자는 한 통속입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세상을 이야기할 때이 세상은 단지 구원받아야 할 세상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고 교만하며 자기를 뽐내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구원받기 전에 그 세상 속에서 숨쉬고 그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지배를 받으며 우리도 똑같이 살아왔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43:44)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번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에베소서 2장 1-5절 말씀. >>
살아있는 세상.
세상은 살아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고 죄의 지배를 받는 세상은 정지되어 있는 있지 아니하고 격렬하게 움직입니다.
(44:30) 결코 그 움직임은 멈추지 않습니다. 우아한 몸으로 몸짓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하고 협박어린 목소리로 사람들을 유협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친구처럼 불러서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소유된 사람들을 달래기도 합니다. 달콤한 달콤함 속삭임으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사람들의 선과 악수함으로써 죄악에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누숙한 말솜시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자랑거리들이 얼마나 찾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이러한 유혹은 그리스도의 인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세상의 목표는 옛사람의 욕망을 우리 가운데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45:18) 그리하여 우리의 거듭난 속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의 신앙생활이 힘겹게 느껴지고 우리가 찾고 추구하는 것들이 가치없게 느껴지며 또한 우리들이 이제껏 살아온 믿음을 지키는 생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상해 주었는지 반문하는 폐어를 불러일으킵니다.이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두 세상이 살아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함으로 죄악을 향하여 살게 하고 세상 가운데서 마음을 거두지 않도록 우리를 사로잡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만큼은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습니다.
이 세상 죽이기
>> 한때 세상은 십자가 못 바갔다가 다시 풀어준 것이 아니라 예전에 바울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십자가에 못박힌 그 세상이 지금이 순간까지
(46:23) 계속해서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가 온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인격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때 바울은 유혹 한때 바울을 유혹하던 세상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버렸습니다. 시체가 되어 생명을 잃어버리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적어도 바울에 대해서는 세상이 그러하였습니다.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십자가를 잡힌 바울을 더 이상 말로 유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육체를 자랑하며 살도록 끊임없이 유혹하던 세상의 두 손은 십자가에 처참하여 못박혀 버렸습니다.
(47:16) 커다란 대멋으로 나무에 달련 누구도 뺄 수 없게끔 되어 버렸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율법을 열심으로 지키며 율법을 따라 살도록 그를 끌어다니며 세상의 두 발로 뼈가 깨어지도록 못 박혀서 더 이상 바울을 끌고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바울로 하여금 육체를 자랑하게 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세상은 이렇게 죽어 버렸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순간 세상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이제 먹고 마시고 자랑하고 법내며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오리려 구원받지 못한 그 상태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긍휼히 여겨야 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 무지한 곳이었습니다.
(48:11) 나 달려 죽은 십자가
바울은 또 하나의 십자가를 말합니다.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있어 왔노라.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을 사랑합니다. 명예를 자랑하고 재력의 긍지를 느끼며 권력을 뽐내고 미모를 자랑합니다. 얼마되지 않는 지식과 흑덩이 같은 물을 가지고 자랑합니다. 그들은 이생의 자랑속에 가려져 신음하며 죽어가는 영혼의 고통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것이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장단을 맞추고 육체를 자랑하도록 가르치는 세상의 조종을 그리고 거기에 기쁘게 반응합니다. 이것은 모두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49:04) 의 그 지배를 받는 세상과 죄의을 살기를 즐거워하는 우리의 자아가 만날 때 불신앙은 먹구름처럼 번져갑니다. 육체의 열매가 독서처럼 자라고 우리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의 참사랑으로부터 멀어져갑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자는 세상처럼 동일하게 십자가에 못박혀버렸습니다. 육체를 자랑거리로 생각하던 바울의 자의 머리에는 커다란 가시 면류관이 씌어졌고 세상의 유혹에 대하여 답하던 그의 두 손은 뼈가 어스러지도록 커다란 나무 십자가에 피흘리며 박혔습니다. 세상이 부를 때에 그토록 빨리빨리 달려가던 그의 발이 이제는 발목을 뚫고 들어온 커다한 모습으로 인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정욕을 쫓아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의 의를 자랑하던 바울의 심장은 옆구리를 뚫고 들어온 예리한 창끝에 찔려 물과 피까지 다 쏟아내고내었습니다.
(50:06) 그의 자은 결국 머리를 떨고 죽어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었던 것입니다.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처럼 그는 세상을 사랑하도록 반응할 수 없게끔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온 영혼으로 체험하자 도무지 세상을 위하여 살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2천년 전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을 이렇게 변화시켰던 그 위대한 십자가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가문의 사람이건 십자가는 그것에 관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졌고 삶의 높은 도둑 덕성을 얼마나 많이 지었든지 십자가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50:56) 여러분들이 이 시간까지 죄악 가운데 있어 사심을 입지 못해 곤고한 심령이 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는 여전히 여러분과 같 여러분과 같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해심을 볼 바울의 해심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그리스도를 찾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구속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까? 밤석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것은 결코 그가 바라고 원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얘기치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이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던 때에 찾아오셔서 그에게 그리스도를 보이시고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51:44) 그를 구원하셨고 그는 자기를 구원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이 십자가는 우리 가운데 웃뚝써서 우리들에게 진리를 말해 진리를 전해 줍니다. 누구든지이 십자가를 진실로 경험하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입니다. 결코 세상 사랑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 것을 자랑해도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격렬하게 유혹하며 다가오는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내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새로운 십자가의 경험이 필요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52:31) 우리의 자아가 진실로 자랑해야 할 것을 자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만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새 사람으로 받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새로운 십자가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누가 십자가의 사랑에 눈물을 범죄를 계획하게 계획하겠습니까? >>
왜 죽으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리 자기를 사랑하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침을 뱉었습니다. 제쪽을 때리고 같이 어 관을 씌웠습니다. 홍파를 입혀 그부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세상이 그분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분은이 세상에 구원을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고이 땅에 오셨고 영광의 도리를 가르쳐 영생의 도리를 가르쳐시며
(53:37) 병든 자를 고쳐주고 줄인 자를 먹이시고 고통받는 자들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목자 이런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무리들을 찾아오셨지만 그렇게 자신을 찾아온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저주했고 버렸습니다.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한 사람의 사수가 되어 흉합범들과 함께 동료로 취급받으며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못박셔야 했습니까? 성경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를 우리는 평안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도다.
(54:36)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5, 6절 말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바꾼이 세상의 피모든 성과 화해의 악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종교하신 구원의 주님의 얼굴에 침뱉은이 세상의 입에 입맞 수 있겠습니까? 있다는 말입니까? 그분의 십자가를 못박혀 어 주기까지 미워한이 세상의 가슴에 어떻게 안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제가 존경하는 설교자 요한네스 크리스토스무스는 주 4세기 중엽에 태어나 5세기 첫까지 살았던 사람입니다.
(55:41) 그는 386년에 자신이 태어난 안디옥에서 사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12년 동안 수석 설교자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안디옥에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봉사하고 있을 때 제국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사망하였습니다. 바로 397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동방 기독교 세계의 노른 자위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크리스토스무스는 그러한 자리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노플의 귀족들은 그의 명성자한 설교를 자신들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의 납치하다시피 그를 콘스탄틴로 데려갔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크리스토스토무스는 부패와 향락의 물결에 잠긴 그 도시에서도 정직하고 금적인 생활과 능력 있는 설교로 감화를 끼쳤습니다.
(56:41) 한편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그의 강직함과 순결한 정신과 삶은 타락한 특권층에 미움을 샀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이 설교자의 삶이 거치는 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부패한 성직자와 황후 에우독시아의 옷을수로 박해를 받다가 번도 폰투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순교의 길을 갔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황우를 비롯하여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핍박을 받을 때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정 나를 버리려 나도 너를 버리노라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A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