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_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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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경험하라 4장_십자가와 생명의 은혜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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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십자가와 생명의 은혜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내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출애굽기 17장 6절 말씀
맛사의 사건
출애굽기 17장 은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길이 기억되는 중요한 한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마사 혹 무리바의 사건입니다. 모세가 지팡에 반석을 쳐서 생수를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시게 하는 이적적인 사건이 그곳에 일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고 두고이 사건을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이 사건의 교훈과 의미를 여러 차례 방복에서 전해 주었습니다.
(00:57) 16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초대적인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나타납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라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법입니다.이 놀라운 일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리시는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날 때 그들이 양시에 준비할 길이 떠나왔습니다.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끌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나온 먹을 것은 정확하게 두 달 보름만에 동이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더 이상 먹을 것을 공급할 수 없었습니다. 약 250만 내지 300만에이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 새끼를 먹을 문제라 말로 다급한 문제인 동시에 엄청한 문제였습니다.
(01:49) >> 하늘의 양식
광야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논과 밭을 지나거나 열매가 가득한과 사이를 지나서 행진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마른 땅과 모래와 정갈과 뱀과 끝없는 원수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의 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그들이 양식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 그 긴 세월 동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엄청나게 좋았든지 혹은 생각이 모자랐던지 둘 중 하나였던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마련해온 양식만으로도 가나안에 이을 때까지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02:37) 산술적으로는 그런 계산이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먼저 모든 양식이 떨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자신의 능력으로 그 광야에서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이 만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이 먹는 양식 말고 또 다른 신령한 음식으로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는이 사실을 수시로 상기시켰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줄이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내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내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내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3절.
(03:33) 그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엄청난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광야 사면을 돌아보아도 내일 먹을 양식이 공급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나의 기적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아갔을 때 그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신비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 같은 들판이 그들 눈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모아보니 훌륭한 곡식이 되었습니다. 양질의 가류였습니다. 떡도 굽고 반죽도 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양식을 아무런 노동의 대가 없이 하늘로부터 매일 공급받는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04:21) 그들이 그 들판에서 경의로운 눈빛으로 감탄하며 만나가 하얗게 내린 그 들판을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입맛과 변심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맛 있었던 만나와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만나를 모아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만나를 모아담는 경험도 잠깐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이 신령한 양식이 지겹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옛날 입맛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령한 방법으로 내려 주시는 만나에 감사하는 대신 이전에 애굽에서 노예 사리를 할 때 즐겨 먹던 음식들이 생각났습니다. 정력에 좋은 마늘, 부추, 외 같은 것들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05:12)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들은 한때 감탄했던 이 신령하고 귀한 양식을 싫어하고 광야에서 도무지 구할 수 없는 그런 양식들을 바라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입맛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영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모합니다. 함께 식사를 걸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을 마다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벌써 예배에 참여하는 눈빛부터 다릅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에 설교자를 쳐다보는 눈빛부터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진리로 말미암아 변화되고 싶어 하는 갈망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의 얼굴과 인격 얼굴과 인격 가득히 배워서 설교자의 가슴에 다가옵니다.
(06:07) 그러나 어느 날 그 눈빛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이 공허해지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예배 시간이 지리하게 느껴지는 때가 옵니다. 그의 입맛이 변해가고 있다는 쓴거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던 영적인 삶을 잃어버리고 옛사람의 입맛을 따라 살아가고 싶어 살아가고 싶어 하는 변화받기 이전에 옛사람의 습관과 기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붙들려 영혼의 묵은 직거기를 털어내고 건강하고 강력한 영적인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06:54) 항상 신령한 것에 대한 거룩하고 은혜로운 정서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세속적인 입맛을 죽여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감안을 받으며 사는 중요한 방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야말로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온초적인 본능입니다.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당연히 마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육신을 위하여 염려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시며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07:45) 마태복음 6장 25절 말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은 바로 마신물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팔레스타인 지방은 물이 귀한 지방입니다.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온다고 할지라도 대부분 마실 수 없는 쓴물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음료수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나오는 우물은 몇백년씩 두고 두고 그 족속의 재산이 됩니다. >>
해갈시키는 방법.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원망을 하게 되었으며 또 그 원망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결과가 무엇이었는지와 같은 물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문제는이 백성들에게 물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08:36) 왜냐면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하여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와 유사한 위기에 자였을 때 늘 하던 습관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를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이 같은 상황에서 잘 사용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말이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외국 땅에서 인도하여 이루로 끌어내어 우리로 하여금 죽게 하는도다. 그들이 형통할 수 없을 한 번도 모세에 대한이 같은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인도한 사람은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건져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그들을 건져내어 광야로 들어오게 하셨고 그 광야에서 그들의 갈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09: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에 처 있을 때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그들을 이끌어내는 도구로 사용됐던 모세만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히리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반문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온초적인 필요이다. 따라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쫓아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섰다. 그런데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도를 받으면서 우리가 이러한 온처적인 문제로 문 말미암아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결핍될 상황에 두시는 것일까? 하나님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하시랍니까?
결핍 속에서 들리는 음성.
(10:29) 그들의 눈에는 모세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차가운 물질적인 이해 관계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생스러운 광야 생활이 바로 모세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모세가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당신이 살아계신 증거를 보이셨고 모세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하며 태산이라도 삼킬 듯이 애굽을 뛰쳐나온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모세를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모세가 잘하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11:07)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어찌하여야 합니까?이 백성들은 모두 연구상들이 없나이다. 먹이시는 하나님이 어찌 물을 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백성들이 나를 원망하고 죽이려 하나이다. 하나님 어떻게 해 주시옵소서? 결핍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찾았지만 당연히 물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결핍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심으로써 하나님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찾으셨습니다.
(11:50)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결핍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방식으로 결핍을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핍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좌충우돌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동물과 같은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안중이 없고 자기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치다가 그것도 안 되면 사람을 원망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방법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결핍을 해결하는 영적인 태도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때부터 늘 모세를 따라다니던 물건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팡이였습니다.
(12:35) 그 지팡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영적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행사할 적다 그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애굽의 나일강을 피로 만들 때도 그러하였고 그 이전에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해 보이던 때에도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면 뭔가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피, 개구리, 이,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등등의 모든 재앙이 모세의 지도력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지질학자가 웃을 이야기.
하나님께서는이 같은 결핍의 상황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너의 지팡이를 손에고 가라.
(13:31)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너의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출록기 17장 5절 6절 말씀. 그러나이 대목은 지질락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혀를 참며 웃을 노르십니다. 왜냐하면 물은 상곡대에서 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은 계곡 아래 습기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땅을 파야 나는 법입니다. 높은 곳에서 내린 물이 지표 아래로 흐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하셔야 했습니다. 모세야 습기가 많고 우묵한 골짜기에 웅덩이를 팔아 그리하면 거기 물이 있느니라.
(14: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 반석을 치도록 명하셨습니다. 거기서는 물이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모세에게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물을 내시겠다고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반석과 그리스도 여기서 우리가 하나 생각하고 넘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호흡산에서 일어난이 반석이 터지고 생수가 나오는이 적적인 사건은 그리스도의 관과 직접적인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일어난 사건을 함부로 그리스도의 예표로 사건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제자들에 이러한 권난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성령의 기록자이기 때문입니다.
(15:06) 그러므로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예표 사건이라는 것은 구약에 계시된 그리스도에 대하여 누구보다 기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도 바울에 의해 확증되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와 세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음을 마셨으니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성은 곧 그리스도이시라 고린도전서 10장 1-4절
터진 바위 깨진 옥체
그러므로 여기서 이루어진 반석이 터지는 사건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권난의 사건을 가르키는 예였습니다.
(15:59) 반석은 그리스도였고 그 반석이 터진 것은 그리스도의 권이었으며 거기서 수단 생수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가 된 것은 먼훗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어 성도들이 누르게 될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버리신 세상을 생명을 주시려고 하신 방법이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을 주겠노라고 말하면서 반석으로 올라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행동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16:57) 많이 배운 사람이 그것도 모르시오. 어려움을 많이 만나더니 노망이 들었소. 산에서 무슨 물이 난단 말이요? 그리고 단단하고 커다한 바이 위해서 어떻게 우리의 마실 물을 예배하신단 말이요? 돌멩이와 물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요?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광경입니까? 하나님께서이 광경을 통해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1500년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잘못 이해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반석을 보며 무의 관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광야의 백성들처럼 과연 그들의 후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읽어낼 수 없었습니다. 베드레의 마간에 태어나시고 선한 것이 나지 않기를 알려진 나사렛에서 유년과 청년과 작년의 세월을 보낸 평범하고 시골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세상이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18:03) 구원의 계획을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하였습니다. >>
불신하는 세상.
오늘날 세상을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안에 인생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2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있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원을 향하여 사는 길임을 신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이 이 세상 사람 누구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믿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이 세상의 구원이고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세상에 보여줄 불신은 여러 차례에 예고되었습니다.
(18:51)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는 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신앙의 가능성을 버린 불신앙적인 편견의 소산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이 세상의 구원자로 믿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런 분에게서 생명과 구원을 읽어낸다는 사실이 하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세상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에게 온 세상의 구원과 생명이 달려 있다는 성경의 진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매인 종교.
많은 종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19:37) 어느 종교도 한 사람이 있 경에 철저히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석가모니 즉 부처가 불교를 만들었지만 불교 신자들은 역사적인 색가모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없는 불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공자가 유교의 시조이지만 유교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자 인격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자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얼마든지 유교적인 방식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그런 사고로 자신의 인생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는 이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들조차도 이단의 비조들이 받았다는 계시나 혹은 그들이 행한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그 비조들 자체가 자체에 매어 있지는 않습니다.
(20:28) 그들이 비록 자신들의 비조들을 숭상한다고 할지라도 그 비조들이 없는 자신들의 주의와 주장은 얼마든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그가 행하신 일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역사적 역사적인 실존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행하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까지도 기독교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분이 거기 계셔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의 죄를 계속하시기 계속하시지 아니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졸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받아들이는 일을 싫어합니다.
(21:2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세상의 편견들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이 세상 신들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 그들의 영적인 분별력을 흐리게 하여 그리스도를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
예고된 불신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불신거 외에는 이미 우리 전에 고되었습니다.이 선은 말합니다. 우리가 자는 것은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2:1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거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그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 1절에서 3절. 그리스도 예수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일한 소망은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일 이래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재를 잃어버렸습니다. 죄의지를 받으며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말미암아 고통을 받으며 어두운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23:0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 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 알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근원적인 고통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보십시오. 그의 후손들 가운데는 제법 똑똑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벨를 살인하고 여호와 앞을 떠났던 가인은 에덴동편 노땅에 거하며 성을 쌓았습니다. 많은 자손을 낳았고 화려한 문명을 잃고 나갔습니다. 그 이후로 그렇게 하나님 곁을 떠난 이 세상 백성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커다란 나라와 발달한 문명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전쟁을 통해서 자신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3:51) 수많은 문화와 명멸하는 사상과 인생의 갈길을 알려 주겠노라고 나선 수많은 사세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화려한 철학들도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속에 내제하고 있는 근본적인 비극의 원인들을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발단한 문명 개화된 도시로도 그 비극의 원인을 밝힐 수 없었고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한 때는 미개한 문명과 부족한 물질이 범죄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핍이 피할 수 없는 사회학들을 가져온다고 믿었던 때가 있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결핍된 시대보다 더욱더 눈에 띄는 잔악한 범죄와 비극적인 죄악들이 오늘날 풍요로운이 세상 한복판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24:43) 무엇 때문입니까? 왜 사람들은 이렇게 잘못 생각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비극이 인간 세상 안에 내제하는 결핍과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세상이 되면 좋은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궁극적인 비극은 하나님과의 망가진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의 원인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핵심을 비겨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직면하지 아니하고는 한 사람 메시아 앞에 직면하지 아니하고는 올바른 역사를 볼 수도 없고 인간의 비극의 궁극적인 원인을 진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25:32) 2천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그리스도 예수가 오늘 우리의 삶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마치 반석으로 올라가는 모세를 보며 그 반석이 자신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생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의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반석이 바로 목말라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궁극적인 해결 방안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진리는 여전합니다. 한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인류의 모든 역사와 인생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기라상 같은 영웅들이 역사 위의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휘장 뒤로 사라져 갔지만 그 수많은 인류의 역사는 오직 한 분을 향해 달려왔던 것입니다.
(26:19)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타는 소은 바로 이것입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날 수 없다 하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평범한 고정 관념과 평견을 버리고 능히 그 반석에서 생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은 어리석은 것이었으며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치는 영원한 의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이유입니다.
(27:11) >> 넘쳐난 샘물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호르산을 찾을 때 물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사람들에게 해결할 수 있느냐? 금의 양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민수기서에서는이 장면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해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폐역한 너희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 손에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민수기 20장 10-11절
적어도 250만 내지 300만의 명의 사람이 먹고 또한 그들의 짐승까지 마시 어 마시어 해가라고 하였으니 물이 수산한 정도가 아니라 그 물이 어 작은 겨울을 만드며 흐를만큼 엄청난 양이었을 것입니다.
(28:19) 있는 회중의 수가 엄청났으니 먼저 마시는 사람도 있었고 뒤늦게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반성에서 터진 샘물은 앞에 선 사람들이 마셔 버리자 뒤에 온 사람들은 마실 수 없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든지 모두 가란 목축을 어 가란 목을 축일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물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실컷 마실 수 있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심지어 짐승까지는 실컷 마시고 죽음과 같은 물 목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이 같은 생수의 역사는 반석이 터지는 것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본문은 반석을 쳤다고 되어 있고 반석이 갈라지고 터졌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29:16) 그러나 상식 생각해 볼 때 터지지 않는 생바위에서 샘물이 수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바위 밑에서 물이 나올 수도 있어 있습니다.
깨어진 반석과 고난
그러나 원문 성경에는 바위 밑에서 나왔다고 되어 있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솟아올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이 바위는 모세가 지팡이로 쳤을 때 깨뜨려졌음에 틀림 없습니다. 잠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반석을 친이 사건이 그리스도의 권한을 예표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살이 찢끼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이 바위 역시 깨뜨려짐과 함께 생수가 솟았다고 어 보는 것이 성경의 문맥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30:07) 신약 성경에서는이 사건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이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바울은 구약의이 반석 사건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관지어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이 사건은 신령한 양식과 함께 신령한 음료를 공급해 주신 사건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장 4절. 그러므로 모세가이 반석을 쳐서 생수가 쏟아져 나오게 한 사건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듭니다.
(30:48) 이 반석이 생수를 낸 사건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구속의 능력과 연관을 짓는다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사도가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았다면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 해석의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가르쳐서 우화적인 해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신약의 기자들은 그렇게 해석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감동시키셔서 그렇게 해석하게 하셨다면 구약의 그 역사는 바로 신약에서 해석한 그 사건을 바라보고 기록된 것입니다.
(31:28)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사도들이 그렇게 해석한 한도 내에서 그 사건을 신약의 실체와 연관 짓는 것입니다. 반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쳤습니다. 그러자 반석은 터지고 물은 솟아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짐승들이 먹고 마시고 해가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 추억으로 간직되어 왔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의 역사 속에 이토록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셨다는 신앙의 추억이 연연히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32:13)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초적인 결핍의 문제인 물문제로 고통받을 때 한번 기적을 베푸신 이적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이 이 사건은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치자 반석이 터지며 생수가 솟아난 것 같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권난을 받으시고 깨뜨려진 옥체를 통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의 샘물을 마시게 하실 것임을 예표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 임마누엘의 샘에서 자기의 죄를 씻고 죄사함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건,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구원 역사의 예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수를 내신 방법.
문제는 이것입니다.
(32:5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실 것을 위해서 생수를 내신 방법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백성들 앞에 앞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한 사람 모세 행동을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죄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이 어떻게 그들에게 나타납니까? 불라했던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담을 허물고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요?이 이 문제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가 하신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으며 왜 그분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 동일한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33:54) 손에 지팡를 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목을 받으며 그 앞을 지나가는 모세를 생각해보십시오. 물을 내기 위해 물과는 아무 상관없는 호렙산 위에 반석을 오르고 있는 노지도자를 노지도자 모세를 기억해 보십시오. 백성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그러한 모습을 통해서 자신들의 결핍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모세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물 문제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때에 하늘의 먹구름이 모였다면 그들은 즉시 모세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의 결핍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34:41)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나 아마도 그날 하늘은 비한 방울 오지 않는 명한 날씨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마음을 인간이 생각하는 평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려고 계획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미련한 방법으로 인간의 상식에 배치되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백성들의 목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
아, 하나님의 지혜로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전혀 얘기치 못한 방식으로 생수를 내셨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합니다.
(35:38) 하나님께서 당신을 홀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인간의 평한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후일 그리스도 예수께서이 세상에 오셔서이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생하게 하시기 위함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전혀치 않는 방법으로 목마음을 해결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한 사람 예수의 고난을 통해 온 인류의 영원한 목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위하여 반석이 오는 모세를 보고 의했던 것처럼 오늘날 성경에 그토록 말 그토록 밝히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한 분을 대하면서 그분 안에 인류의 모든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36:43) 하신 이러한 구속의 역사에 대한 무지는 이미 얘기한견된 것이었습니다.이 이 세상의 죄와 그리고이 세상에 인정받는 권력자들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이 지혜는이 세상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거니와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먹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배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를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한과 같으리라. 고린도전서 2장 8-9절 말씀. 모세가 오래선을 반수를 샀습니다. 생수가 그 반석에서 쏟아져서 나오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모세는 그 모세는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내리쳤고 반석이 터졌습니다.
(37:41) 선에 있어 누게도 맛본 적이 없고 깨뜨 적이 없는 반석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한가의 등선물을 쓰고 단장을 짓고 등선하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시대이니 그 반석이 그 반석이 그처럼 지팡에 맞아 보기는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심판의 지팡이
지팡이가 반석을 때렸고 두 번 두드렸을 때 반석은 터지고 생수가 솟아 나왔습니다.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이 이 반석은 바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옥체였습니다. 이제 곧 모세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는 이적의 지팡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기 전에 모세가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였던 열 가지 재앙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서곡이었습니다.
(38:36) 그것은 애굽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준 사건이었습니다. 애굽 백성들이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를 볼 때마다 무엇을 생각하였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있어서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재앙의 물건에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애굽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러하였습니다. 지팡이가 움직이는 것. 모세가 그것을 붙잡고 손을 뻗치는 순간 거기에는 피인데 나는 산륙과 재앙이 뒤따라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가고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와 개구리와 이와 파리와 악질과 독종 우박과 뚜기와 어둠을 인하여 죽어 갔고 고통받았습니다.
(39:19) 급기하는 애굽에 태어난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의 장자로부터 시작하여 가축에 처음 난 것까지 모두 시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합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고통으로 울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사 그들을 억압하는 애굽 백성들을 징계하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손에 들린 그 지팡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을 불러오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로 심판하심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받은 죄악의 나라 애굽을 치던 그 지팡이가 반석을 내리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을 깨뜨린 것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는 사건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0:11)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사단의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마귀가 그 일을 주도하 주모하였지만 그 뒤에는 더 훌륭한 지혜자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육체를 깨뜨려 심판하심으로 온 백성들을 그 보혈로 구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받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명백한 구원 계획 앞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지팡에 깃들려 있던 하나님의 메시지는 진노였습니다. 내 백성을 내놓으라.
(40:55) 내 백성으로 나를 섬기도록 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심판하리라.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쏘아 쏟아 부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진노를 품고 계셨고 우리와는 어찌하든지 그 공의로운 진노를 드러내 보이고 푸셔야 했습니다. 그러나이 세상에 있는 죄인된 우리들을 향하여는 참아 그 진도를 쏟아붙지 못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의 아들을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의 심판을 홀로 탐당하게 하셨습니다.
(41:46) 자신의 진노를 사랑하는 아들 위에 낭김없이 쏟아부으며 그 아들의 희생 위해서 우리와 더불어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한 번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는 대우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죽음과 양립하실 수 없는 분이고 본성상 죽으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지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육체의 복음 죽음에 복종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가 죽는 것이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알았기에 기꺼이 자기의 옥체를 깨뜨려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반석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지팡이를 맞으셨습니다.
(42:35) 그리고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육체를 하나님의 진노의 지팡이가 때리자 사람들은 곧 그리스도의 고난의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찢고 피가 흐리게 하고 가시간을 씌우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에게 합당한 온갖 멸시와 수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깨어진 육체 사이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가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을 이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지팡에 두드른 반석과 생소를 대기 위한 터지바이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반석을 치자 하늘에서 물이 쏟아진 것이 아닙니다. 바위는 터지고 쪼개진 그 사이로 생명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강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43: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르지 않는 생물명의 물을 주시는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라지 않는 영혼의 생수를 공급해 주셔서 어두운 세상에 이기며 살아가게 하시는 신령한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어디든 설교 부탁을 받고 가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설교할 때면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는 영혼들은 어디서나 있고 영원한 생수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줄 때마다 감격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권난과 그 권난 앞에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놀라운 감격을 다시금 체험하며 슬퍼하고 또한 기뻐하는 많은 영혼들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44:27) 삶의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고 공고하며 마음이 어두울 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그 넓은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묵상할 때 우리의 가슴속에 스며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 저릴 때가 없습니까? 목매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게 되는 때가 없습니까?
마르지 않는 물.
교회당을 들어설 때에는 갑하게 느껴지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던 마음이었지만 예배를 드리고 그 속에서 함께 하나님을 경비하는 형제를 보고 자매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마음은 다시금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실제로 그런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45:15) 그런 은혜를 예배를 통해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놀라운 능력의 근원을 잇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심령이 가라고 고통받을 때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어디서 체험하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목마른 우리를 해갈시켜 주는 영생의 샘물은 결코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한 번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이렇게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구속의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고 이기며 살기를 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목마르고 결핍한 가운데 힘없이이 어두운 세상을 지날 때가 많습니다.
(45:59)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자신의 육체를 깨뜨려 생명수 같은 생명수를 강같이 흘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샘물을 우리의 삶의 근원으로 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 샘을 귀 여기지 아니하고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먹고 마시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반석을 터뜨려 써두신 그물이 이스라엘 온 백성들 가운데 흘러갔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를 깨뜨리사 흘러나오게 하신 임마누엘의 샘물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다. 빈부나 귀천이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오라. 이곳에 좋은 샘 흐르도다.
(46:43) 힘쓰고 예이 없을지라도이 샘에 오면 다 마시겠네.이 샘에서 마실 때마다 목이 다시 가라는 일이 없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 생수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결핍으로 가득찬이 세상을 신령한 은혜로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생명의 근원이 바로 그 터진 반석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승리의 원동력.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사 고난 받으신 모습을 볼 때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주께서 매달리사 고난받으신 그 육체를 볼 때마다 우리는 단지 우리를 위해 희생당하신 한 사람의 죽음 그 이상의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일들을 가져왔습니다.
(47:33)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 위해 자신이 먼저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의 권세를 깨 깨뜨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알래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불 분 불리하게 하는 법 조문으로선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로새서 2장 13-15절 말씀.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분명히 제사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48:1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셨을뿐 아니라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죄악을 이기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금 거듭난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들 속에는 죄악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의 신앙과 삶의 모든 능력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으며 승리하는 승리를 기도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이 일은 너무나 크고 유대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얼핏 보아서 모든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49:05) 갈급했던 사람들
모세가 반석을 쳐서 생수가 솟아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가람을 적 수 있는 생수가 강같이 터져 솟아 나올 때 그들은 어떠한 표정이었을까요? 꿈에다 그리던 맑은 물을 마실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흥 물이 나오는 구멍 이렇게 말하며 힐껏 쳐다보고 말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쏟아오는 물을 바라보며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서 쏟아지는 생 곁에 모였을 것입니다. 손에 손을 맞잡고 기뻐하며 이렇게 소리 쳤을 것입니다. 물이다. 물 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물을 내셨도다.
(50:03) 반석에서 물이 쏟아지는다니 감격하며 귀여한 환호성이 그들에게 그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십자가에 이루신 그 일이 앞에 이렇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이 위기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인 우리의 인생이 벼한 끝에서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기뻐하고 환없이 즐거워하며 그 물을 먹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뛰며 즐거워하고 환우성을 지르던 관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기쁨의 근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의 부요로 인하여 기뻐하며 이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00)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는 곳에는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신앙 고백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대한 감격이 없는 곳에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거룩한 슬픔이 없습니다. 따라서 복음 전도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우리였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에게는 우리의이 기쁨을 위하여 어떤 일들을이 일어났습니까? 오랜만에 마음껏 마시는 물에 몸과 마음을 풀고 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모세의 지팡이를 막고 깨뜨려진 반석이 있었습니다. 깨뜨려지기 전까지는 솟아지 않던 그 물이 깨어지자 비로서 생수를 쏟아내기 시작하였습니다.
(51:48) 만세 반석 열리니
이와 같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했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육체는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 것 된 좋은 모든 좋은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나쁜 것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을 공로 없이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끌어오르는 진노는 십자가에 다 부어지고 이제 하나님을 떠나 목자 이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여기 여기시는 사랑이 역사하기 역사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52:35)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앙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가 침체 상태에 빠질 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이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축복으로부터 멀어진 가운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불만족과 결핍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경험하게 됩니다. 만세 반성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의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53:22) 십자가 찬송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부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임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해 줍니다. 천천히 가사를 묵상하며 그 내용이 우리의 가슴에 적어 적 우리의 가슴에 적어 젖어오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만이 제 삶의 이유이고 목표이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제 인생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새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침체 가운데서 속히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는 순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처럼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입니다.
(54:12) 언제든지 상하기 쉽고 굳어지기 쉬운 마음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신앙의 간격들을 회복하고 새로운 기쁨과 은혜를 회복하는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렇게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깨어 있다는 의미.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단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에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 하신 일은 수치를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늘 체험하며 살아가는 일이 다름이 아닐 것이며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잘 알 수 있고 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존재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55:06) 우리는 그럴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범죄하고 죄의 낙을 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영적인 본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 가운데 공고하고 심령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가 공고한 심령으로 우리의 죄사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 앞에 생각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가를 통해서 깊이 죄사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제 확신이 우리의 영혼 속에 밀려올 때 우리는 분명히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55:58) 어두었던 그림자와 사단의 사슬을 풀어 풀어지고 그리하여 기뻐 찬양하게 되는 영적인 부여함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 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라.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까? 이적을 행함으로서도 아니고 기적을 베음으로서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말로서이 일을 성취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지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서 죽게 함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자기를 깨뜨려 사의 길을 여시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끔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기뿌려 이루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여셨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56:49)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와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지불하셨던 대가를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환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9절 10절.이 이 모든 구원에 복된 일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반석과 같이 깨뜨려짐으로써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옥체가 깨뜨려지고 나서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샘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57:30) 지팡이를 맞아 터진 반석처럼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 위에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며 깨뜨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분의 고난을 통해 쏟아져 나온 은혜의 샘물이 우리를 깨뜨려야 할 자리입니다. 깨뜨려진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흐르는 그 보혈를 통해 우리는 그분을 그렇게 고난당하게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 앞에 깨뜨려지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
나를 깨뜨려
그러므로 이런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깨뜨려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 화목 재물을 삼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의로운 행실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58:15) 오직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이 이미 받으신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자들에게이 모든 일들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 진노로 깨뜨려짐으로써 흘리신 그 십자가의 보혈에 우리의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은 진노의 능력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 피해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삶의 능력의 근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에 우리의 영적인 삶에 뿌리를 대고 살아가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59:09) 십자가는 이와 같이 우리의 교만을 파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제 힘과 제주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직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자신의 몸을 깨뜨려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이제는 그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그 뜨거운 교에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이 녹아질 차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렇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깨뜨려져야 합니다.
(59:54) 우리의 교만한 사가 터진 반석처럼 쪼개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의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보혈의 능력은 우리 속에 은밀하게 자라온 염려의 가시나무 떨기들을 불살라 버리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죄악으로부터 정결케하고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차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이 이 부유한 생명의 샘물을 그리스도께서 주셨습니다. >>
세상을 사랑하라.
그러한 놀라운 은혜의 생물이 그리스도의 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영생수 등 위에 뒤로 한 채는 태양 벽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원망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목을 지어 뜯으며 매많은 불판을이를 악물며 쓰러질 듯 지나갑니다.
(1:00:51) 하나님께서 이러한 처지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인생에 부여함을 한없이 즐거워하며 기뻐합니다. 모세가 반석을 타뜨려서게 하는 생물 생물을 강물이 되어 흘렀으나 그것은 다시 목마르게 되었고 똑같은 결핍이 침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 옥체를 깨뜨려 이루신이 영적인 은혜의 세물을 영원히 마르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이 돈 없는 자도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갑옷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어 들을지어다 그리하여 너희가 좋은
(1:01:57)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사야 55장 1-2절 말씀.
생명 샘물로 나아오라.
그리스도께서는이 샘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그분을 못박는 망치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해야 할까요? 주님이 그토록 자신의 고귀한 육체를 깨뜨려 이루신 그 샘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까요? 무엇을 가지고 그 샘에 나아가야 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갑없이 은혜로 너희에게이 샘물을 주노니 누구든지 와서이 샘에서 마시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버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02:51)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석에서 쏟아지는 물을 위하여 무엇을 포태웠습니까? 깨뜨려진 바위는 물을 쏟았고 그들은 단지 마셨을 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십자가의 샘에서 마셔야 합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거기서 나기 때문입니다. >> 아멘.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