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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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되기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되기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사랑합니다! 여러분 꿈사땅 예배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혹시 이런 경험 있는가? 학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무리가 나뉘지 않는가? 친한 친구들끼리만 밥 먹고, 같이 다니고, 이야기한다. 교회에서도 보면 친한 친구들끼리 앉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끔 보면, 그 안에 끼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다. 새로 온 친구, 어색한 친구, 혹은 혼자 있는 친구다. 우리는 왜 이렇게 “우리끼리” 모이게 될까?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습을 어떻게 보실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를 하신다. “너희를 좋아하는 사람만 부르지 말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관계 방식과 완전히 반대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놀라운 말을 한다. “너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오늘 함께 읽은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니까 바울은 ‘우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엇이 되었다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종말이 시작하셔서 새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이 성취되고 있으며, 믿음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끝난다는 것을 바울이 강조하는 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3:27)라는 것은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고,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과 개종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아브라함의 약속들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사람마다 가진 민족적인 배경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할례를 받았든지, 할례를 받지 않았든지 사람이 가진 사회적 계층으로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또는 사람의 성별로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것들 모두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남자와 여자는 성경에서 각자마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서로 해야할 일들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일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들도 차별성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다시 말해, 이 구절에서 말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높고 낮음이 없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마다 가진 민족적 배경을 무시하지 않는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있지만,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라고 해서 또는 어떤 사람이 남자라고 해서 구원을 얻을만한 자격을 특별하게 가진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고 연합된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우리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그가 받은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음으로 읽었던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비유로 설명하신 이야기다. 누가복음 14장 12-14절을 다시 읽어보기 원한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이 단락에서는 잔치를 초대하는 사람을 예로 들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본문은 식사와 관련된 당시 가치관을 보여 준다. 우리가 여기서 두 가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첫째로, 사람의 명예는 그 사람이 상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식사에 초대에 응하여 가겠다는 사람이 높은 신분이면 초대한 사람의 명예도 높아졌다. 둘째로, 호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런 관계는 요즘 말로 Give & Take의 형식과 유사하다. 식사에 초대받았으면 다음 식사에 초대자를 초청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와 관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은 초대자에게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돈 많은 부자를 초대하지 않도록 하신다. 친구나 가족이나 친척은 초대에 대한 보답으로 초대한 사람을 초대할 것이다. 돈이 많은 부잣집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초대로 보답할 것이다. 부잣집에 초대받게 되면 바리새인 지도자의 지위와 명예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잔치를 마련할 때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다리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가르치신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손해를 끼칠 사람들을 초대하라는 뜻이다. 소득과 자산과 사회적 계급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람들은 답례로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지시는 당시의 윤리와 문화와 관례를 거스르는 말씀을 하신다. 부자나 높은 지위의 사람이 궁핍한 사람들을 초대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과 수치였다. 사회적 약자를 초대하면 그런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이유로 초대한 사람의 명예가 떨어지고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초대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많은 손해와 손실을 입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초대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평가한다. 그들이 호의를 갚을 수는 없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 호의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살면서 보상받지 못하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베푼 사람은 ‘갚음’ 또는 ‘보상을 돌려받는다’는 ‘상호성의 원리’가 작동한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갚지 못하는 것을 누가 갚아주시는가? 바로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보답을 받으려면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환대하고 잔치에 가장 먼저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인들의 부활은 당시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던 바리새인들도 가지고 있는 신앙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의인이기에 당연히 종말의 만찬에 참여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인은 희생적인 헌신으로 가난하고 낮은 자들을 섬기는 사람들이지 혈통과 조상에 근거로 말하는 유대인들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가치를 차별하는 문화에 도전하고 이런 문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기득권의 사람들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전도사님도 누군가에게 대접하고 밥을 사주는 일에 대해서 처음에 굉장히 힘들어 했었다. 왜냐하면 내 돈 쓰는 것 너무나 아까웠고, 저 상대방 사람이 나에게 그만큼 안해주면 어떡할까하는 걱정에 열심히 더치페이하려고 했다. 또 나에게 그만큼 보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으면 애초에 식사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이러한 삶은 어떻게 보면 사람을 계속 의심하게 되고, 이렇게 인간관계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피곤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관계가 지쳐서 상담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 상담사 선생님께서 너무나 쉽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쓰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은 ‘아니 선생님이 밥 사는 돈을 내주지도 않으실거면서 쉽게 말씀하시네?’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려던 찰나, 잠언 말씀이 딱 스쳐 생각난 것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이 잠언의 말씀처럼 내가 풍족해지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 누군가를 섬겨야지 내가 풍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윤택하게 살려면 남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오늘 읽었던 누가복음 말씀이 누군가를 대접하고 섬기는 것에 손해라고 느끼는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를 섬기고 대접하는 것을 세상 끝날에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남을 섬기기 아까워하는 그 마음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시는 너무나 멋진 분이시라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남에게 돈쓰는거 아까워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멋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가난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 사람이 “저는 당신에게 이 돈을 갚을 수 없어요.”라고 말할 때, “그 돈은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이보다 멋진 이야기가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반대로 이런 짓은 하면 안 된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가서 얻어먹고, “제가 얻어 먹은거 하나님이 다 갚아주실거에요.”라는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는 하지 말자. 선생님께서 밥사주시면 “감사합니다. 저도 나중에 선생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될게요.” 이 한 마디로 충분하다. 그렇게 받았으면 누군가에게 사줄 수 있는 능력이 될 때, 바라지 않고 섬기는 멋진 사람이 되길 축복한다. 이러한 모습이 여러분 주변에 가득하다면 이 얼마나 천국이겠는가?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된 가족이다. 다음 주이면 유아세례를 받았던 친구들은 입교식을 하고, 여러 성도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세례를 받고 성찬식을 거행하는 성례주일로 보내진다. 세례와 성찬은 예수님과 하나됨, 연합됨을 눈으로 보여주는 예식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시작의 표이고,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계속의 표이다. 연합이라는 것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고, 한 몸이 되는 것을 가족 또는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신랑되신 예수님과 교회인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다. 결혼을 생각해보면, 시집과 장가라는 뜻이 무엇인가? 시집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신 그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장가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계신 그 집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은 두 집안의 연합하고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어떤 인종이든지, 어떤 문화에 있든지, 돈이 많고 적음을 초월한다. 그래서 복음 안에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누구나 들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우리가 그 한 몸된 연합 안에서 서로 섬기고 남을 대접하는 일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고 저는 자들,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족들의 친구가 아니라 세리와 창녀, 술꾼들, 병자들과 같은 사회적으로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기피 대상들의 친구셨다.
우리의 섬김은 물론 교회 안에서 섬김도 좋고 귀하다. 또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기있는 우리는 저 세상 바깥에도 예수를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기피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은 우리의 잔치(예배)로 초대해야 한다. 전도사님은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자주 갔던 곳이 장애인 복지센터였다. 그곳에는 지적장애인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들을 목욕을 시키고, 재밌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등등 이러한 일들을 하고 왔었다. 그때 힘듦과 수고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이 챙겨주시겠다는 생각으로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또 전도사님은 전도하러갈 때 무조건 가는 곳이 있다. 바로 흡연실이다. 그곳에서 가장 전도가 잘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당연하게 전혀 전도가 이뤄지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황하며 급하게 담배불을 끄고 이야기를 너무나 잘 들어준다.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브라함의 약속은 유대인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그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해서 자기들만이 구원받는 백성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복음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기쁨의 잔치로 초대하셨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 살고 있고, 그 사랑을 전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이곳에서 이루고,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Give and Take로 사람들과 서로 비지니스처럼 관계를 맺는 것이 않길 소망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보상해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과 감사로 살아가자. 그리하여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사회적으로 기피하는 사람들에게, 학교에서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아보이는 친구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베풀고 나누는 복된 인생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