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22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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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25:1–13 NKRV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당시 유대 혼인 풍습을 잠깐 보겠습니다. 유대 결혼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가 에루신, 정혼 단계입니다. 우리로 치면 약혼인데, 법적 효력은 결혼과 동일합니다. 둘째가 닛수인, 실제 혼인 완성 단계입니다. 에루신 이후 보통 수개월에서 1년 정도가 지난 뒤에,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행렬을 하고 잔치를 엽니다. 이 행렬은 종종 밤에 이루어졌는데, 동네 처녀들이 횃불을 들고 이 행렬에 함께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이 열 명 모두 신랑을 맞으러 나간 사람들입니다. 1절이 분명히 말합니다. 열 명 모두 등을 들었습니다. 열 명 모두 신랑을 기다렸습니다. 열 명 모두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걸 오늘 우리 상황으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열 명 모두 교회에 나옵니다. 열 명 모두 예배를 드립니다. 열 명 모두 찬양을 합니다. 열 명 모두 "예수님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여러분 사이에, 눈에 보이는 차이는 없습니다.
이 비유가 향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비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신랑을 맞으러 나온 사람들, 등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2. 신랑이 늦어집니다
5절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잠들었더니."
"더디 오므로"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χρονίζοντος(크로니존토스)입니다. χρόνος(크로노스)에서 나온 말인데, 크로노스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시간이 흘러가는데 안 온다"는 느낌입니다. 약속한 것 같은데 안 오고, 곧 올 것 같은데 안 오고, 기다리는데 계속 안 온다. 그래서 열 명 모두 졸다가 잠이 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잠든 게 문제 아닌가?" 13절에 "깨어 있으라"라고 하셨으니까, 잠든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슬기로운 처녀도 잠들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만 잔 게 아닙니다. 열 명 전부 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이 비유에서 차이를 만든 것은 "잠을 잤느냐 안 잤느냐"가 아닙니다. 피곤해서 쉬는 건 괜찮습니다. 힘들어서 잠깐 주저앉는 것,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 아니었느냐. 차이는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지치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는 때가 있고, 말씀이 안 읽히는 때가 있고, 예배가 감동 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나는 왜 이러지, 나는 믿음이 없나 봐." 그런데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졸 수 있습니다. 잠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3.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
6절입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한밤중에 외침이 터집니다. 갑작스럽습니다. 예고 없이 옵니다. "신랑이 왔다, 나와라!" 열 명 모두 벌떡 일어납니다. 열 명 모두 등을 꺼내 듭니다. 여기까지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7절 후반부터 8절. 미련한 처녀들의 등이 꺼져갑니다. 원문을 보면 σβέννυνται(스벤뉜타이), "꺼져가고 있다"는 현재 시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 꺼지고 있는 중입니다. 횃불에 감긴 천의 기름이 다 탔는데 보충할 기름이 없으니까, 불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정확히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차이가 이 순간에 생긴 게 아닙니다. 차이가 이 순간에 드러난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그 순간에 급하게 기름을 만들어 낸 게 아닙니다. 이미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가 그 순간에 기름을 잃어버린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이 차이가 안 보였습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기름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한꺼번에 드러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믿음을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믿음을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믿음이 생기겠지." "좀 더 지나면 나아지겠지." "고난을 겪으면 성숙해지겠지." 물론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지금 당신 안에 무엇이 있느냐.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드러날 것이 있느냐 없느냐. 기다림이라는 시간은 없는 것을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드러내 줄 뿐입니다.
4. 기름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나옵니다. 기름이 대체 뭐냐.
많은 분들이 "기름은 성령이다"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이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니까, 여기서도 기름은 성령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특정 의미에 대입하는 알레고리가 아닙니다. 기름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규정하려고 하면, 비유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성령을 받으면 안전하고 못 받으면 탈락인가?" 이런 질문으로 빠지게 됩니다. 본문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름이 가리키는 것은, 넓게 말하면 준비된 상태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실제 신앙의 상태입니다.
이걸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횃불이 타려면 기름이 필요합니다. 기름이 없으면 불은 잠깐 타다가 꺼집니다. 기름은 불꽃 그 자체가 아니라, 불꽃을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출석, 봉사, 헌금, 소그룹 — 이런 것들은 불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불꽃을 유지시키는 기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실제 관계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기도입니다. 혼자 있을 때 펼치는 말씀입니다. 삶의 결정 앞에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습관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겉으로는 불이 타고 있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꺼집니다.
여러분, 나의 신앙에 기름이 있습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 안에 있는 것이 있습니까. 불꽃이 아니라 기름을 물어보는 겁니다.
5. 빌릴 수 없는 것
8절에서 미련한 처녀들이 말합니다.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누어 달라."
이 장면이 좀 차갑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이기적인 것 아닌가. 나누어 주면 되지 않나.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의 대답을 보면, 9절,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나누어 줄 수가 없는 겁니다. 나누면 둘 다 못 갑니다. 이것은 이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신앙은 양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부모님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목사의 기도가 내 기도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옆에 앉은 친구의 신앙이 내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기름은 빌릴 수 없습니다. 나눌 수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자기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청년 여러분, 이게 때로는 무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 그런데 뒤집어 보면 이것은 동시에 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내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도 내 믿음을 빼앗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 안에 있으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만큼, 누가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6. 닫히는 문
10절입니다. "그들이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고 있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혀지니라."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뒤늦게라도 준비하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신랑이 도착했고, 준비된 사람들은 잔치에 들어갔고, 문이 닫혔습니다.
여러분, 이 비유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이 여기입니다. 문이 닫히는 장면. 기름을 사러 간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뒤늦게라도 준비하려 한 겁니다. 문제는,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언제든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하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준비의 시간에는 끝이 있고, 기회는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젊으니까." "나중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제대로 믿어야지." "지금은 바쁘니까, 좀 있다가." 그런데 본문은 말합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은 내가 정하지 않는다. 신랑이 언제 올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딱 하나, 지금 이 시간뿐이다.
7.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11절과 12절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 그런데 신랑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알지 못하노라"로 번역된 헬라어가 οὐκ οἶδα ὑμᾶς(우크 오이다 휘마스)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유대 전통에서 관계의 단절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말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에서 가장 무서운 말입니다. "너를 몰라서"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관계가 없다"는 선언. 미련한 처녀들도 신랑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도 알고, 잔치도 알고, 등을 들고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신랑 쪽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게 어떤 상태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시는 상태. 이것보다 무서운 상태가 있습니까. 교회에 다녔고, 예배를 드렸고, "주여 주여" 말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관계가 없는 상태. 이것이 이 비유가 경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도 예수님이 거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뭡니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같은 구조입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주님의 이름으로 활동까지 한 사람들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시는 것. 이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8. "깨어 있으라" — 이 말의 진짜 의미
13절, 이 비유의 결론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깨어 있으라"라는 말의 헬라어가 γρηγορεῖτε(그레고레이테)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잠들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슬기로운 처녀도 잠을 잤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으라"는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γρηγορέω라는 동사가 신약에서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이것은 경계하다, 방심하지 않다, 준비된 상태를 유지하다는 의미입니다. 마가복음 13장 37절에서도 "깨어 있으라"라는 같은 명령이 나오는데, 거기서도 포인트는 "잠을 자지 말라"가 아니라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라"입니다.
그러니까 "깨어 있으라"는 이런 뜻입니다. 어떤 상태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기름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 신랑이 내일 와도, 1년 뒤에 와도, 10년 뒤에 와도, 내 안에 기름이 있는 상태로 있으라. 피곤해서 쉴 수는 있다. 지쳐서 잠깐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기름을 버리지는 말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는 말라.
9. 우리는 지금 "지연의 시간" 안에 있습니다
청년 여러분, 이 비유를 오늘 우리 삶에 가져와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2000년이 지났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안 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삶이 기대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건 맞는 것 같은데, 때로는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에, 우리 안에서 여러 가지 목소리가 올라옵니다.
"왜 나만 이러지?"
"이렇게 믿어서 뭐가 달라졌지?"
"조금 쉬어도 되지 않을까? 이 정도면 됐잖아."
"나중에 다시 열심히 하면 되지."
여러분, 이 목소리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솔직한 것입니다. 기다림은 원래 힘든 겁니다. 열 명 모두 잠이 들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문제는 이 목소리가 올라올 때, 내 안에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에 기름이 있는 사람은, 흔들려도 돌아올 자리가 있습니다. 의심이 들어도, "그래도 주님은 선하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잠깐 지쳐서 멈추더라도, 다시 등을 들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기름이 없는 사람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입니다. 한동안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불이 꺼집니다. 그때 급하게 기름을 구하려 하지만, 이미 늦습니다.
10. 지금 이 순간이 기름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주님이 오셔도 괜찮습니까?
지금 이 상태로, 지금 이 믿음으로, 지금 이 삶으로 —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준비할 수 있었으면." 이런 마음이 드신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이 그 시간입니다. 지금이 기름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나중이 아닙니다.
기름을 준비한다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 5분이라도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등교길에 "주님, 오늘 하루도 함께해 주세요"라고 짧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삶의 작은 결정 앞에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 맞는 일인가"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기름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불을 유지시키는 것. 그것이 기름입니다.
11. 마무리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섭기만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경고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신랑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그 시간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믿음을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드러내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드러남 앞에서 우리가 다시 준비할 수 있는 오늘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기름을 준비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오늘 다시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앞에 저희를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등을 들고 있지만 기름이 없는 자는 아닌지,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주님과의 실제 관계는 비어 있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아직 문이 열려 있는 이 시간에, 저희가 다시 기름을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 "나는 너를 안다"는 음성을 듣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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