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냐, 잔이냐
Notes
Transcript
제목: 칼이냐, 잔이냐
본문: 요18:1-11
주제: "내 힘의 칼을 내려놓고 사명의 잔을 들 때,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진짜 당당함이 시작된다."
[서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갈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무엇일까요?
역설적이게도 가까이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팔 다리를 힘껏 휘두릅니다.
이렇게 힘을 잔뜩 주고 있을때 가까이 가면 그 사람도 함께 위험해 집니다.
그래서 힘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구해주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운동에서도 힘을 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탁구, 야구, 골프…
어떤 운동이든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비결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빼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내 인생의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빠지고, 온전히 주님께 나를 맡기는 과정입니다.
때로 주님이 우리 삶에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고난만큼 우리의 힘을 빼는데 특효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위기의 순간 전혀 다른 두가지 반응이 등장합니다.
두가지 반응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본론1]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시는 긴박한 장면입니다.
제자 유다는 로마 군인들과 성전 경비병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이닥칩니다.
유다는 그곳이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자주 기도하던 곳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기이한 장면을 하나 보게 됩니다.
로마 군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등불과 횃불, 그리고 무기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잡기 위해 인간이 만든 인공 불빛을 들고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어둠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입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수 없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불빛이 빛을 삼킬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할때 그들의 힘과 위협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 참 빛이신 분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가짜 빛들일 뿐입니다.
또한 그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한 병력입니다.
본문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당시 투입된 군대는 로마 정규군으로서 200-600명 사이로 짐작됩니다.
거기에 성전 경비병들까지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예수님 한분을 잡으려고 대군이 움직인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유월절 민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예수님의 능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두려울수록 더 큰 무기를 준비하고 더 많은 숫자를 모읍니다.
그것이 세상이 힘을 증명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놀랍도록 당당하십니다.
4절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보통은 잡으러 온 사람이 “네가 나사렛 사람 예수냐?”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먼저 나서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은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지만, 비겁하게 숨거나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십니다.
마치 자신이 이 상황을 미리 아시고 모두 주도하고 계신듯한 모습입니다.
제가 예전에 독일에 있을때, 공항 앞에서 사복경찰 두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를 부르는데 온 몸이 굳어서 말도 잘 안나오더라구요.
그러니까 더 북한 사람처럼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무시무시한 무기를 든 수백명의 군사들 앞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당하게 그들에게 자신을 밝히십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가야할 길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
예수님이 다시 한번 더 내가 그 사람이라고 자신을 밝히니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뒤로 물러나 땅에 엎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칼과 방패, 무시무시한 갑옷을 입은 수백명의 로마 군인들입니다.
그들이 무장하지도 않은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것입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의 신적 권위 때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표현은 출애굽기에 나온 표현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때 사용하신 명칭입니다.
오늘 말씀에 3번이나 등장합니다.
진짜 강한 자가 누구인지, 진짜 권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당시 핍박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까요?
우리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나도 당당하게 맞서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낼때 세상은 놀라고 움츠려 듭니다.
그럼 우리는 얼마나 세상앞에서 어떤 모습일까요?
그들의 거대함과 강한 힘 앞에 작아지고 초라해질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처럼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단지 세상의 강함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누구인지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그 정체성을 붙들고 세상에 당당히 맞설때 오히려 세상은 움츠려 들 것입니다.
내 힘을 빼고,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본론2]
하지만 우리가 가진 신앙의 당당함에는 반드시 경계해야할 지점이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다.
예수님의 위엄 앞에 수많은 군인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베드로는 고무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래, 우리 주님이 저렇게 강하시니 나도 가만 있을수 없지”하며 칼을 빼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베드로는 진심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목숨걸고 휘두른 칼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수백명의 중무장한 군인들 앞에서 칼 한자루 휘두르는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국 베드로의 최선은 고작 종의 귀 하나 베어낸 것 뿐입니다.
주님을 지키지도 못했고, 오히려 대제사장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려든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란군의 이미지만 더 확실히 보여주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말고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는 단지 종으로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럴 때가 참 많습니다.
내 열심, 내 올바름, 내 고집때문에 칼을 휘두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칼이 애먼 사람을 잡고 맙니다.
우리가 휘두르는 정의의 칼이 그럴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수 있습니다.
전도의 문을 막아버릴수 있습니다.
내 힘이 잔뜩 들어간 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1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어찌 마시지 않겠느냐?”
주님은 칼을 휘두른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주님이 힘이 없으셔서 체포되신 것일까요?
주님은 말씀 한마디로 로마군인들을 쓰러뜨리신 분입니다.
천군천사들을 불러 싹 쓸어버리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시기에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칼을 들어 세상을 굴복시키는 길 대신, 잔을 들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진짜 당당함은 힘을 과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힘을 뺄수 있는 용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자신감이, 당당함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수 있습니다.
이때 승리주의라는 괴물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힘과 세를 과시하게 됩니다.
정치적, 사회적 힘을 동원해 세상을 위협하려고 합니다.
얼마전 차별금지법 제정을 막기 위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광장에 모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집회에 나가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을까요?
“음,,,역시 옳은 일을 하려고 기독교인들이 나섰구만.”
“이제부터 나도 교회를 가봐야겠다.”
이랬을까요?
기독교인들만 만족했지,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교통체증에 눈살을 찌푸리고, 교회의 독선에 비웃음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칼을 높이 들수록 세상은 예수님의 향기가 아닌 종교적 권력의 냄새만 맡게 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으며 낮아질 대로 낮아졌던 시절, 기독교는 가장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사랑, 인내에 감동하여 교회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국교가 되어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쥐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힘을 얻었지만 아름다운 빛과 향기는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할 부분입니다.
우리의 자신감과 당당함은 결코 승리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칼이 아닌 잔을 들때 완성됩니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남의 귀를 베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명을 위해 나를 희생하며 낮아지는 자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을까요?
내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을까요?
세상을 향해 휘두르는 칼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주신 순종의 잔일까요?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인생의 거대한 위기 앞에 선 두가지 ‘당당함’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드러내며 당당히 맞서신 예수님의 모습,
또다른 한가지는 그 당당함을 착각하여 오히려 자기 힘으로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내 열심과 내 방법으로 칼을 휘두르면 하나님이 일하실 틈이 없습니다.
내 힘을 빼야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어떠한 칼을 품에 숨기고 살아왔습니까?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숫자를 모아 세를 과시하면 세상이 굴복하리라 믿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휘두른 칼은 종의 귀 하나를 베었을 뿐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힘을 가질때 우리를 두려워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코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에게 진짜 놀라고 감동할때는 칼을 휘두를 때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희생의 잔을 들때입니다.
나의 권리를 주장할수 있지만 주님을 위해 포기할때 입니다.
나에게 상처준 사람을 칼로 베는 대신 그를 위해 기도하며 낮아질때입니다.
그때에 세상은 비로서 우리 뒤에 계신 진짜 빛이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고난과 위기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며 초라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힘을 빼고 그 분을 바라볼때 그 능력이 시작됩니다.
내 칼을 버리고 주님의 잔을 들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번 한주간도 그렇게 당당하게 칼이 아닌 잔을 드는 우리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