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71 views

부활이 빠진 헛된 믿음(12-19절)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부활이 빠진 헛된 믿음(12-19절)
일단 비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이고 복음적인 사실로 확증한
후, 이에 근거해 미래 부활의 당위성을 논한다. 논증은 여섯 개의 ‘만일’ 로
구성된다 12 절의 첫 번째 ‘만일’ 은 뒤따르는 논증들을 위한 표제다. 그리
스도께서 다시 사셨다고 선포되는 마당에, 어떻게 어떤 사람들이 부활을
부인하는개 12절)? 물론 그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 부활의 한 특수한 경우인
그리스도의 부활도 있을 수 없다.(13절) .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모
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사도들의 전파도 ‘헛될’ 것이고
그 부활을 믿은 성도들의 믿음도 ‘헛될’ 것이대14절). 또 사도들은 하
나님에 관한 거짓 증인이 된다. 하나님의 실제 모습과 다르거f 그가 그리스
도를 일으키셨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일
으키시지 않은 것이다. 정말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말이다.
16~18절의 세 ‘만일’ 은 앞서 13~15 절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한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다(16절)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
지 않았다면 성도들의 믿음은 허망한 엉터리’ 에 불과하다 물론 그분의
부활을 전제하는 죄로부터 해방도 한낱 환상일 뿐이며(비교 )8 따라서
성도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17절).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서 잠자는 자들’ 곧 부활의 소망을 안고 죽은 자들도 실상 망한 것이다.부
활이 없으니 그들의 유일한 삶이 끝나버린 것이다(18절). ‘부활 없음’ 의 파
장은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활의 소망으로 지금 고난의 길을 가는
성도들{32절; ; 벌 3:1O- 11 . 21)의 삶 자체를 더 없이 불쌍한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Ü9절). 잘못된 부활 교리가 퍼뜨리는 실제적인 목회의 해악이바로여기에있다.
몸의 부활과 겸손
성경말씀 ;
기도 주여,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보이심으로 특별히 전능하심을 나타내시나이다. 구하오니, 거룩한 은총을 풍성히 베푸사, 우리가 주의 명하신 길로 행하여 주의 약속하신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한 하나님으로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나이다. 아멘.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몸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몸이 부활하지 못한다면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헬라인들은 몸이 죽는다 해도 영혼은 그냥 사는 줄로 알았습니다. 헬라 사상이나 불교 사상, 그리고 고대 인도 및 유럽인들의 사상으로는 영혼은 몸과 관계없이 따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몸을 떠나면 다른 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들은 몸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귀신에게는 해당될 수 있지만 사람의 영이나 혼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혼은 반드시 몸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죽으면 영혼도 죽습니다. 영혼이 영원토록 살기 위해서는 몸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이 없으면 소망이 없고, 영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부활이라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간단한 비유를 들자면, 종이에다 삼각형을 그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혹은 나무나 쇠로 무언가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일단 만들려면 반드시 물질을 재료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에만 머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나무 토막 세 개로 삼각형을 만들었다가 불로 태워 버린다거나 종이에다 삼각형을 그렸다가 종이를 불살라 버리면 그 삼각형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 삼각형에 대한 생각은 있을 수 있지만 삼각형 그 자체는 없어진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만 중요하고 물질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물질적인 세상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세상에 속합니다. 한 번만 아니고 일곱 번이나 좋았다고 하셨으며,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상관없고 원래 나쁜 것이며, 영만 거룩하고 중요하다는 생각은 좋지 않습니다. 영만 거룩하다는 사상은 성경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과 반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몸의 부활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은 없으며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이 있다고 이론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확신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일찍부터 부활이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에도 부활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구절이 부활에 대한 말씀이라고 확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완전히 죽으신 후에,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무덤에 묻히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5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한 번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40일 동안 여러 번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물질적인 육체를 가지고 계셨지만, 그 몸은 이미 변화된 몸이었습니다. 그 변화는 모양의 변화도 포함하고 있어서 예수님을 알던 사람들도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보았습니다. 그분의 상처 자국(외상)을 보고 그분의 음성과 가르침을 듣고서야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차원적인 몸이 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고, 문 닫은 방 안에 갑자기 나타날 수도,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러한 몸으로 변화될 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변화된 부활의 몸은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사귈 수 있는 깨끗한 영, 깨끗한 몸이 될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과 영원토록 사귈 수 있고, 서로 조금의 유감도 없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사귀는 상태를 말합니다.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는 이러한 특권, 이 소망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교만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갈 것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며 자기를 높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몇 가지 좋은 일을 하고 몇 가지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자기가 의인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사랑과 자비가 전혀 없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따로 기도했다’는 것은 영어로 ‘prayed about himself’인데, ‘스스로 기도했다’는 뜻으로, 자기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화하였다는 것이지요.
따로 있다고 하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따로인 것과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으려고 따로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너무나 지나치게 따로 있기만 해서 자기 자신 외에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세리는 죄가 많음을 깨달아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그저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에 대해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원래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하여 얼마나 교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을 멸시하고 심히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달았습니다. 교만보다 더 큰 죄가 없는데 자기가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빙자해 죄가 많을수록 큰 죄를 용서받기 때문에 자신에게 더 큰 은혜가 있다고 자기 죄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선원이 죽음에 임박해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자기가 지은 많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님이 고백을 중지시켰습니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당신은 지금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보기에는 자랑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되 자랑삼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참된 고백이 아닙니다.
교만은 어떤 모양이든 큰 적이며 죄를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교만한 태도로 자랑하듯이 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도 죄입니다. 자기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 되고,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도, 모든 성도보다 심지어는 교회의 기초로 크게 쓰임을 받은 베드로보다도 더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그것이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자기를 택하시고 쓰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은혜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는 복종하는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 쓰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다고, 무슨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격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할 때에도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임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용서하셔서 없애 주시고,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줄 알게 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를 써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성삼 후 제12주일
대천덕. (2006). 교회력에 따른 대천덕 절기 설교 (초판, pp. 425–431). 121-885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377-9: 주식회사 홍성사.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