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_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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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경험하라_6장 십자가와 거룩한 삶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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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네. >> 네. >> 제 6장 십자가와 거룩한 삶.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왜 사십니까?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운전 기사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기사님 왜 사십니까? 제가 건네주는 껌 한 개를 까서 씹으면서 그는 대답 대신 긴 한 숨을 먼저 내뿜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생각하다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00:50) 자식 새끼들 때문에 살지요. 왜 사약은 묻지요? 나무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에 나오는 한 소절입니다. 시인이 왜 사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냥 웃겠다고 대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자신도 모르니까 웃음으로 제 탑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철학적인 달의 결과가 아닙니다. 살면서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인생의 참 모습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하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해야 할 답을 얻지 못하면 미쳐 죽어 버릴 것 같은 질문이 이제는 금기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01:51) 누구도 감히 서로를 향하여 이렇게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와. >> 그리고 그것은 철학자들끼리나 주고받은 이야기들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고백. 사도는 갈라디아서 2장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잊혀질 수 없는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우리는 먼저이 부의 아름다운 고백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실리게 되었는지 문맥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식사하는 곳으로 다가왔습니다.
(02:36) 그러자 베드로는 흠 놀라면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은 것처럼 외식하였습니다.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걸려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유대주의 규례에 젖어서 무신코한 베드로의 행동이 베드로를 바라보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적인 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또다른 율법을 해야 한다는 암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이 이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03:33) 이러한 생각은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서 다루고 있는 이단들의 주장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느냐고 다시금 묻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그들로 하여금이 문제 있어서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반문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서 2장 17절. 그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의가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못박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04:38) 없느니라 갈라데서 2장 15절 16절 사도의 아름다움 고백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들이 그 십자가와 어떤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장에서는이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왜 구원하셨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그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 은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또한 기쁨이 되셨되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향벌이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토대 위에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용서해 하도록 작정하셨습니다.
(05:35)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토대 위에 우리를 사해 주시려 작하셨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이 이 시간에 우리가 생애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노예 있는 그리스도의 삶이 어떠한 성경의 것인지를 깨달아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가이 아름다운 고백을 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못박혔나? 실제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06:33) 사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바뀌다고 주장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따도가 말하 나는이 세상 율법의 요구를조차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보려고 애쓰던 자를 가르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못박혀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그가 율법에 의로는 흠이 흠이 없고 열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핍박하는 열정으로 유대교주의자가 된 것도 바로 그 길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바울과 같이 율법 아래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서 구원을 어 얻으려고 애쓰는 삶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07:35) 그러나 그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모를 때에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혹은 어떤 사건이 때로는 어떤 환경이 자기를 불행하게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거는 일을 서치 않았던 사실들입니다. 물론 좀 더 생각이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먹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고통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사상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철학을 구하기도 하고 종교에 귀인하기도 합니다.
(08:28)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복잡한 문제를 아예 매면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세상적인 일에 몰두하거나 쾌락적인 일에 자신을 내어던지기도 합니다.이 모든 인생의 문부림은 자신을 어떻게 하면 죄로 말미암아 허무하게 되어버린 인생의 문제들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영혼의 문 어 영혼의 몸부림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자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해결을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깨닫고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 이러한 자신의 노력이 아무 쓸모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왜곡된 방법으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예쓰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영혼의 문제를 도피해 보려고 하던 그릇된 생각들을 그만두게 됩니다.
(09:27)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자신의 추구와 노력들이 한낮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박힌 사건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때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을 깊이 체험하며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10:13)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도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기를 구원해 버려는 모든 시도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것들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열심을 품고 행하던 옛날에 그 일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자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일들을 하며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뿐만 아니라 예전에 자랑하던 육체에 속한 수많은 자랑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오직 그를 구원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11:0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게 되자 그가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이 시체에 발라 놓은 화장품 같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위해 살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런 것과는 관계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도 일어난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영적인 삶이 풍성해지는 비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성자들과 방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도가 과연 그러한지를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의 수많은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11:57)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려고 들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지를 되새겨 보려고 예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군인이라고 할지라도 어둠 속에서 자기의 전투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탄은 스스로 수시로 우리를 영적인 어둠과 무지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 십자가와 영적 삶. 둘째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한 말은 변화된 영적인 삶의 본질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하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그런 삶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하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2:49) 죄사함과 함께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사함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와 사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비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경험을 갖자마자 곧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 혼자만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혼자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제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장하고 움직이는 원동력이 지금까지는 자신이었으나 이제는 자기는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행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3:34) 십자가는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단지 죄용소만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덧입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만 하면 안에 성이 오십니다. 에 계심으로써 영적인 본성을 거듭나게 하시고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당신이 느끼시는 바를 우리도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내 영혼이 그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내 삶이 또한 기쁨과 확신에 넘칠 수 있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생각하거나 행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탄식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14:27) 내 영혼이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상심함과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삶의 진정한 기쁨과 확신이 사라지고 침체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가 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얼마나 커다란 영적인 비밀을 창출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우리의 죄를 한번 용서해 주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받게 해 주었을뿐 아니라 나아가서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살아계시는 신비한 연합의 영적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5:16) 이것이 바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진지하게 상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공급하는 십자가 그리스도 시작하는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나 잃어버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뿐만 아니라 실제로 죄는 세상에서 그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힘들을 공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예수의 습관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을 죄악된 성격을 띄고 있고 이러한 삶은 비련적으로 그리스도를 사로잡힌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생유하고 번성하며 온 땅을 정복하고 다스도 권세를 주셨습니다.
(16:12) 첫 아담은 실패하였으나 우리의 구속 위에 자신을 버리신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이전에 아담이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다스려 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세상은 자기 욕심을 따라 타락하였으나 우리가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분이 충분히 살아 계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들릴 때 우리는 세상의 지배를 받는 대신 그리스도 예수의 달리심을 받는 사람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이 사람을 지배하였던 사람 옛주인에게 복정하신 대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돌 들어와 계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17:06) 거기 기쁨을 느끼고 거기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삶의 비밀을 개척 정신을 가지고 배워 나아갑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감춰진 비밀들을 체험함을 통해 알게 됩니다. 전에는 희미한 것들이 이제는 깨닫고 경험함으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게 됩니다. 종식된 지배력.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도 유혹을 받습니다. 마귀의 도전도 맞추하게 됩니다. 때로는 범죄할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나면 더 이상 사탄의 세력은 나의 삶의 지배적인 세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17:54) 죄 가운데 있는 동안에도 성령이 성령의 슬퍼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갈등을 고통으로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탄의 세력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인의 삶에 영향을 주지만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지배이 세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있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해진 복음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아 그 모든 사람들을 거대한 지체가 되어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되어 가기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8:45)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지셨던 그 창조의 목적으로이 세상이 하나님의 아 우리의 인생이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사자를 불러 사람들을 물지 않고 고분고분 걸어다니는 걸어다니 고분고 걸어나와 친구가 되는 일은 제현되지 않지만 호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십자가의 그늘 아래 회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나나라의 시련은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그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땅을 정복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19:40) 삶의 목적을 회복시키는 십자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이 세상은 여전히 타락한 가운데 있지만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세상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의 연합된 삶을 살아감으로써만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인생의 진정한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기쁨이고 우리에게도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한 진정한 발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명히 알고 또 무엇을 소화하면서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20:34)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고백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고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베드로전서 3장 13절에서 15절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 왜 사는지 답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21:29) 이 평범한 질문에 대한 의미없는 대답들의 역사가 바로 인간의 사상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헌무합니까? 교만한 지식도 죽음의 위협 앞에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에 자랑하던 그 뛰어난 사색도 사람들 앞에서 진정한 생의 의미를 따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다시 살아나게 되자 사도는 진정 사도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 목표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아담과 하와 안에서 주신 목표의 회복이었습니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들을 향해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시겠습니까?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노라.
(22:30) 우리가 비록 그러한 답변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정직해지기만 한다면 그렇게 대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의 장난기 섞인 대답을 어떻게 거침없이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답하면서 단지 양심의 가책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단지 나의 영혼으로 하여금 지옥의 심판을 피하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을 상계한다면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십자가에서 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존재인지를게 될 것입니다.
(23:27) 은혜로져주어졌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은 위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위대한 목적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가지 아니한다면 평탄한 길을 걸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행복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자신을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혜의 구원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을 갈등없이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는 삶으로서 자신의 회심이 참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셨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24:19) 어 아 사셨으니 우리를 위하여 사셨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때 우리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삶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이 고백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인생을 모두 마치는 마지막에 여러분의 비밀을 어떻게 써 달라고 요구하시겠습니까? 비록 실패도 있었고 자도도 있었으며 고통 가운데 방화한 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 이렇게 요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해 살고 싶어 하는 사람 여기에 잠들다.
(25:13)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에 관한 분명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단지이 세상에 소망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인생의 지평을 영혼의 세계로 향하여서까지 열어줍니다.이 이 세상이 영혼과 영혼 틈박근니 사이에 있는 잠시 동안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소망은이 세상에 없습니다.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영원한 것과 관계를 갖고 있는 한에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이것이 영혼을 향하여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 이러한 모든 수고와 인생의 행적들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26:14) 깊은 소식.이 이 세상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압니다. 우리는이 죄많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렇게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그리고 완전한 목적로 우리와 세상을 돌려놓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교회에게 있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서 믿기만 하면 거기로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의 삶은 필론적으로 자신의 삶과 온 삶으로이 기쁜 소식을 전하 전파하여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나라로 회복시키는 일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27:11) 이 일을 위하여 살아 있고 또이 일을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이에는 누구도 인생이 참된 의미를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천박하고 독특한 인생에 대한 견해는 모두 각자에 알맞는 황각제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 가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현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울과 같이 살고 싶은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의 깊이가 동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과 같은 수준의 십자가 체험이 아니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려운 것입니다.
(28:01)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험의 깊이와 정도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거듭남을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받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도 여전히 영혼의 가치보다는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을 더욱 사랑합니다. 여전히 무지 가운데 있으며 무엇이 옳은지 올바른 것인지 알지 못하고 또한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아갈 결심을 하지 못합니다. 결심해서 실천에 옮길 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28:48) 그리스이 되고 나면 의심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의심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랑의 유혹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임을 성경은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으로서 믿음과 실제적인 삶의 괴리가 메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저는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 그러면서도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29:41) 저는이 문제를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지속적인 체험의 문제이고 둘째는 성화된 성화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체험과 지식. 먼저이 문제는 십자가 사건 단지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이 아니라 다시 사신 부활까지 포함하는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이 말씀을 오해를 무릎으며 제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록 십자가의 진리라고 할지라도 체험에 대한 잘못된 강조는 신앙 자체를 오도할 위험이 있으며 또한 그 체험을 누리고 있는 것 자체가 성경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30:31) 실제로 부흥을 조작하려는 시도들이 유행하던 시기마다 어떤 인간의 방법이나 수단에 의하여 회심을 유도해 보려는 인위적인 조작들이 판을쳤습니다. 눈물 흘리는 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나 울며 기도하는 것에 대한 화도한 가치 부여 혹은 열광적 찬양에 대한 지나친 기대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경우 체험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체험 때문에 자신들이 진리 한가운데 있거나 참된 신앙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죄에 대해 각성하며 법민하는 것 자체에 과도하게 가치를 부여하여 그것이 곧 거듭남의 표증인 것처럼 오해함으로 사실상의 불신자를 성찬에 참석하게 하는 일들도 바로 이러한 잘못된 체험 중심 중시 신앙에서 초되었던 것입니다.
(31:27)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위험 때문에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 성경의 많은 증거들을 하찮게 다루는 오류에서도 벗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와 사도행전을 세밀하게 살펴볼 때 우리가 부인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안에서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감격입니다. 더욱이이 같은 사실은 다른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과 부활의 사실을 기록할 때 현재완료 동사를 즐겨 사용하였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십자가에 못박히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스타오로타이는 나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 다시 살아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계게르타이나 모두 현재완료 시제입니다.
(32:28) 마이클리는이 문제에 관련하여 이러한 판단을 합니다. 그들이 이런 표현을 즐긴 것은 과거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실이 그들 삶에 실제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이 같은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의적으로도 타당하거니와 우리의 신앙 경험이 이것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이 같은 사실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절망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 과정에서 보여준 지속적인 유지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감격은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분명히 사역의 와중에서 소망이 끊어지고 마음의 사선 성거를 받을 때에도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33:24) 고린도후서 1장 8절.뿐만 뿐만 아니라 뼈자린 후회와 결심 속에서 아덴 전도의 실패를 되시며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고백할 때도 있었습니다. 고전 2장 2절. 그러므로 저의 판단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의미와 그분의 부활을 깊이 깨닫는 결정적인 체험이 있었지만 그 한 번의 체험이 그를 바울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결정적인 체험은 어 그 의미와 복과 넓을 다하여 계속 깊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적인 삶 속에서 더욱더 순수하고 강도 높도로 지속적으로 실제적인 사건으로 경험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의 말련에 고백하고 있는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더욱 경고하고 간격적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신념을
(34:29) 더욱 굳게 하고 있습니다. 믿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를 입은 가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음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서 종귀와 영광이 영원토록 어 영혼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디모데전서 1장 15절. 그가 말련에 다다를수록 더욱 자신에 대한 견비한 존재 인식을 가졌던 것도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체험과 깊이를 더해가는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5:30) 십자가가 살아 있게 하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우리의 영적인 삶 속에서 체험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바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자신의 영적인 삶 속에 지속적으로 다시 체험되는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던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의 증거는 다 한번 단 한 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야 한다. 그렇습니다.
(36:16)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장 증거하기 좋아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증거가 단지 한 번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사실의 사실의 한 증거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체험한 경험이 결정적으로 있었지만 그러나 그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감격은 순교의 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반복해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체험하고 자신의 정서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느끼는 가운데 그러한 정신에 붙들려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체험이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처절한 숙명의 메이에 대해 하였던 것입니다.
(37:12)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 아래에 있던 소명의 요체였습니다. 그 풍부한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넘치는 헌신 그리고 거룩한 선교적인 열정 갈목한 말한 갈목할 만한 초인적인 사역과 희생 그리고 거룩한 인격 그 모든 총체 한가운데에는 바로 이와 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 한가운데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의 삶 속에서 수시로 제언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십자가 체험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늦게 할 진리 언젠가 설교를 하고 강단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한 지체가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건냈습니다.
(38:05) 전에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는데 이제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로 인해서 옛날에는 많이 울었는데 요즘은 십자가 사건 자체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식의 생각을 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이전의 체험이 잘못된 증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지금 예전에 체험했던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이 반복되지 못하고 있는데 따라서 이것은 십자가의 도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일들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38:54) 여러분들은 모두 한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 흘리기도 하였고 그 사건이 정말 놀라운 사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책을 읽으시면서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다시 체험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계속적으로 자신의 영적인 삶 안에서 경험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믿지 않거나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이것은 결국 영적인 삶의 결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9:38) 그렇다면 왜 이러한 영적인 삶의 결함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전과 동일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동 후각기. 성경에 나타난 모든 진리들, 특별히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모든 지식들은 우리의 죄로 가득찬 인성으로는 깊이 체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무감각해져 있는 영적 상태로 인하여 이러한 진들이 깊이 체험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 알았던 지식은 유지될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근 영국에서 발견된 새로운 기계가 많은 사람들의 눈길를 끌었습니다.
(40:27) 그것은 바로 자동 후각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냄새를 맡아서 그 냄새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 정도를 디지털로 표시해 주는 편리한 기계였습니다. 인간이 맡을 수 있는 냄새보다 훨씬 더 많은 2천여종의 다양한 냄새를 아주 미세한 정도 정도도 포착할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한 기계의 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이 기계가 발명되고 나서 가장 심각하게 생계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공인 위스키 간사들입니다. 그들은 코를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냄새로서 그 위스키의 질을 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이 위스키 간사들이 얼마나 자신의 코를 소중하게 관리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자기의 코를 보험에 듭니다.
(41:18) 그리고 남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스킨과 로션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후각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 사람들처럼 영적인 후각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도를 현재적으로 체험하여 그 감격을 유지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이 비밀을 알았던 청교도들은 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중시되었습니다. 침묵하면서 복음 진리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며 거기에 잠기는 것입니다. 신령한 삶에 깃든 장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인 생각으로 인하여 긴장 되어 있는 데서 해방되어 진리의 말씀을 듣거나 잊거나 묵상할 때 우리의 정신이 거기에 침잔되어 있는 일이 필요합니다.
(42:19) 우리가 이런 영적인 감각을 회복하고 우리의 정서가 하나님의 사랑에 충분히 달궈질 수 있을 때 이전에 당연하게 느껴졌던 그래서 무강하게 지나쳤던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감각하게 되고 지식에 머물러 하나님의 성품에 영혼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체험의 제언은 바로 그러한 경험 중에 하나입니다. 철교의 경험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해 주곤 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친다 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정서로 가득차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43:08) 그러나 하나님의 방편들을 사용하십니다. 말씀과 설교자의 말씀을 전하는 태도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면서 보여주는 말씀과 합일된 청서 같은 것들이 도구가 됩니다. 모든 진리는 경험을 요구함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대한 반복적인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적인 체험은 모든 성경 진리에 대하여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은 단 한 번 느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시종일간 거룩한 삶을 살아갈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반복적으로 경험돼야 합니다.
(44:00) 그리고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부합 하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정서의 움직임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 자리는 반드시 정서가 있습니다. 지식이 없는 정서도 위험하지만 정서가 없는 지식도 동일하게 위험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결단하고 행동에 옮길 때 그것은 지식과 정서의 연합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하여는 복음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그 복음을 현재적으로 체험하는 일들이 반반복되어야 합니다. 또한이 십자가 체험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한 생활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각들이 감격들이 지향하여야 할 삶에 대한 진식과 성령의 욕구에 대하여 눈뜨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44:56) 오늘날 저국 교회에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생활을 보십시오. 구원받은 다음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처음 구원을 경험하였을 때에는 감격이라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리면서 영적인 삶은 각박해지고 그러한 십자가의 체험과 구원의 사건을 다시 느낄 수 없을 때 그들은 더욱더 불신자와 다름없는 삶을 살면서 그의 생활을 이어갑니다. 세상을 변시킬 도전은 고기한채 예배용 가면과 세상 사례용 가면을 번거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세상 교회와 세상 사이로 오고 가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못한 이해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을 베푸셨지만 거져 주신 그 구원 안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도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45:55)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삶과 동떨어진 개인의 영적 체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역사와 단절된 교회의 영성도 거짓입니다. 그러한 모든 오류는 복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이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볼 때가 되었습니다. 육체 가운데이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나는 진공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46:43) 나는 육체 가운데 살아갑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육체는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매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그 육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죄없는 육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육신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에서이 육신은 끊임없이 죄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죄와 떨어질 수 없고 세상의 영향과 단절질 수 없는 죄된 육체를 가르치는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모신 그리스도인들은이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계적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습니다.
(47:31)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여전히 세상과 죄를 향하여 반응하려고 하는 성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담배 이야기. 저는 세례를 받고도 몇 해 동안 담배를 끊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실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루에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를 끊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건강도 좋아지고 은혜 생활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저 자신에게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좌석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앞좌석에서 한 승객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뒤에 앉은 저에게까지 날아왔습니다. 저는 의식할 사이도 없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습니다.
(48:19) 그때는 담배를 끄는지 무려 3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육입니다. 이렇게 옛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 앞에서 감격하며 자유를 누리다가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면 되면서 아직은이라는 긴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전하게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한편으로는 완성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과 몸에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질 나를 대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일을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9:14) 몸부림으로 구원을 마치 구원을 잡으려고 몸부르치는 것처럼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함을 삶을 향하여 마음과 삶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거룩한 갈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연약한 육체를 둘러싸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오늘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길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 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50:00)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늦칠 수 없습니다. 육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야합하며 살려는 육체의 욕심과 더불어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지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구원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분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 때로 실패를 경험하지만 그때마다 오리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 삶의 모든 자원을 제발근하며 살아가야 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삶에 위한 동기가 새롭게 정화되어는 것도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반복함으로 써입니다.
(50:53) 우리 앞에 때려는 고난도 있고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롭게 변화된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와 인생의 목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반복적인 체험 없이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삶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거듭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단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온대한 계획을 드러내며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야 할 절박성을 필요성을 느낍니다. 사에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그리스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51:43) 십자가의 중심성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삶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이 성경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과 관련하여 치명적 오해가 가능하게 만들었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이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고통에 빠져서 규중한 신앙생활의 세월을 낭비하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임스 패커는이 문제에 관련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났던 해 한 옥스포드 대학생이 고민 중에 있었다.
(52:33) 그런 기독교 협회의 활동 덕택에 회심하여 종교적 형식주의를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하기만 원하고 있었다. 주저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하였으며 또 노력은 열매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런 내적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데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보다 큰 경건을 추구함에 있어 빨리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였으며 그런 까닭에 법민했다. 그는 당과 같은 사실로 인하여 당황했다. 즉 그는 지속적으로 죄를이기는 상태에 대한 교사들의 묘사를 듣기도 하고 읽기도 했다. 평화와 능력의 상태로서 그러한 상태 속에 있는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은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전에는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묘사되었다.
(53:33) 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헌신하는 것이 규정된 방법이었으며 하나님께 맡기라라는 주제로 행해지는 열렬한 설교는 그것을 간단히 유학해 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이 교훈들을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경험은 약물 중독 상태의 환자가 담장 위를 걸어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같았다.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들로 하여금 이러한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입장료를 내지 않으려는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하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데 불이하여 자신을 성화시키며 자신의 축복을 방해하는 바도 굴복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자기 영혼의 내면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54:30) 그는 우연히 어떤 글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악몽이 사라지고 현실이 그에게 임했다. 불에 된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듯이 과열된 성화의 잔일하고 괴로움을 주는 비현실성에 대한 증오침은 오늘날까지 그의 마음에 남아 있다. 그 학생이 바로 나였다. 회심과는 다른 성화, 오늘날도 믿고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행동에 의하여 즉각적인 칭어와 해심을 얻듯이 즉각적으로 성화와 거룩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 받아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게 굴복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처럼 열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55:29) 그리고 그것은 도덕 폐기론으로 나와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러한 사상들은 신비적인 신앙과 연합하여 왜곡되며 종교적인 흥 상태 있는 열광주의자들로 하여금 행동은 자신이 하였지만 행위자는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굴복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정서 안에서 느껴지는 다양한 충돌들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내시는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위탁,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고 하는 것은 신비적인 피동성의 일이 아니라 확고하고 황구적인 순종 순종과 관련된 것입니다.
(56:27) 그 안에서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에 일하시면서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 안에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행동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 격렬한 적대감으로 싸우라. 결국 사도는 육체 가운데 산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여전히 우리는 거룩한 삶을 방해하는 죄의 요소들과 더불어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해는 거룩에 대한 아니라 견해는 인간 안에 항존하고 있는 죄의 영향력을 과소 평가한 때문이라고 못박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57:17) 죄와 더불어 싸울 때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격렬한 감정으로 투쟁하듯이 심한 적대감을 가지고 그것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만 우리의 영혼은 활기를 얻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십자가의 능력을 현재적으로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행실을 죽임으로써 살게 된다는 사도의 진술이 바로 이한 의미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셨다 할지라도 거룩한 삶을 우리의 육체로 살아가는 생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건전한 교리도 무익한 것이 되고 맙니다. 무익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혼란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생각함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8:15) 구원받은 이웃에 자신의 삶이 또다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삶을 살고 받으면서 다시 살 것이라는 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힘겨워질 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다시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자신이 만약 무가채 보이고 무력해 보일 때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는 우리의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 앞에서 나온 우리에게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온전히 쓸 수 있도록 능력을 공부해 주는 것입니다.
(59:14)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 한 번을 한 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십자가를 따른 영적 생활을 이어가고 죄와 더불어 피흘리게 싸우며서 살아감으로 삶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이 사실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자녀의 다운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속 이미 구속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하는 것입니다.
(1:00:09)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와 가치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세일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그 십자가로부터 주어지는 능력을 의지하며 그 계획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뒤에 이러한 축복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입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아멘. Yea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