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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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진으로는 다윗의 혈통이 나셨고 성결의 영혼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로마서는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을 끝마칠 무렵인 주후 57년경에 기록되었다. 이 서신서는 아직 기독교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다. (2)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주어지며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에게 적용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신자는 끊임없이 죄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성령 안에서 새 생명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와그의 부활하심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는 육신적 혈통으로는 다윗 왕의 집안의 혈통으로 오셨다.
우리 말 성경 본문 중 일부를 그리스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육신에 관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을 통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롬 1:3-4)
그게 지금 얘기가 중요해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냐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세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근데 그게 육신에 관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을 통해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이런 의미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표현한 이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예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2)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건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그 가르침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고 다시 부활한다는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표준적인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가 오신다고 되어 있는데 그 메시아가 신이 아니에요. 사실은 약간 신에 가까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은 아니고 두 번째는 그 메시아가 죽고 다시 부활한다는 사상은 없어요.그렇기 때문에 이제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엄청나게 충격을 받으면서도 어쩔 줄 몰라 했던 이유가 바로 자기가 여태까지 배운 유대교의 그 프레임 가지고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설명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설교예요. 이거를요. 그냥 1년에 한 번씩 하세요. 그냥 똑같이 그 정도로 중요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그거냐 내가 그랬어요. 내가 내가 매년 부활절에 뭘 설교할까? 그렇게 당황하지 않고 이거를 갖다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교했어요.
A.십자가와 예수의 처형
A.십자가와 예수의 처형
유월절에 이루어진 예수의 체포와 심문과 처형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마련된 모든 교묘한 종교적 고안이 반영되어 있다.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중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들은 예수에게 사형 언도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유대인 군중들이 사형의 종류를 콕 집어서 십자가 형벌로 지명한 것이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받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받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15:13-14)
이제 빌라도도 이 상황에서는 좀 혼란스러웠던 거죠. 왜냐하면은 십자가의 형벌은 흔히 있는 형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 형벌의 잔혹성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당연히 이런 십자가의 형벌을 받지 않으면 로마 시민권을 안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민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살인을 하거나 그런 아주 반인륜적인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 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지는 않았거든요. 근데 자기는 예수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예수를 사형시켜달라고 말한 게 아니라 그냥 십자가에다 못 박아 달라고 이렇게 이제 거의 데모하다시피 하니까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황했던 것이죠. 굳이 예수를 그렇게까지 해야 될 이유가 뭐가 있나 이렇게 생각한 거죠.
유대인 군중들은 예수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예수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까지도 지정했으니 곧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거기에는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교묘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공작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떤 믿음에 결부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적인 믿음이란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주려는 것이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하)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가 의로운 선지자나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좋은 대비책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감추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릴 때를 위해서도 좋은 대비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니,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하게 하실 리가 없다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B. 예수 부활의 사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회심하기 전까지 사울은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로는 심리적 편견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다른 민족들은 지옥의 불을 지피는 땔감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신학적 편견이었는데, 그것은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그 청년이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표준적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인간이지만 거의 신적인 존재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도 바울이 보기에 나사렛의 젊은이는 목수에 불과하지 그렇게 신에 가까운 존재는 아니었다. 이제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일 수가 없다. 그런 편견을 아주 강력하게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파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당시 사울은 정통적 유대인으로서 엄격하고 보수적 유대교 주의자였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허망한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향했다(행 9:2).
그러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결코 예상하지도 못했던 충격적 경험이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윗에게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음에 소리가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내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재밌어. 왜냐하면은 예수님은 사울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리고 그랬는데 예수님이 아냐? 사울이 박해한 건 예수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한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나는 내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한 몸인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행한 박해는 곧 예수 자신을 향한 박해의 다음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 신학적인 연결고리가 있어요. 그다음 사람
이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사울은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대립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울은 잠시 커다란 신학적 혼란을 겪었다.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1)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 (2) 그가 부활하신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승을 따라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이는 모세가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구약 성경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선지자 에녹이나 선지자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창 5:24, 왕하 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이야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인물들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는 나사렛의 청년 예수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울이 느낀 신학적 혼란이 이것이었다. 만약 예수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면 그분이 그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다시 살리실 의로운 인물이었다면 결코 그를 저주하여 죽이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울의 생각에는 동일한 인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동시에 악인이라고 저주하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울이 보기에 두 가지 사실들은 모두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다.
예수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부활하신 것은 지금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그분을 직접 만남으로써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III. 죽음과 부활의 새로운 의미를 경험함
III. 죽음과 부활의 새로운 의미를 경험함
그런 생각 사이를 오가는 혼란 속에서 사울은 어느 한 순간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경험했다.
여기서 사울은 예수 죽음의 이유가 이제 그 자신이 유대교에서 배워 온 것처럼 그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구원받을 우리를 위한 대신적이고 속죄적인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서로 양립할 수 없이 서로 대립되던 두 명제는 양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 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당한 저주라면, 예수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두 가지 신학적 사실 사이의 모순은 해소되었다. 그 순간 그의 두 가지 편견 곧 심리적이고 신학적 편견이 깨졌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 둘째로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다.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때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예수가 우리를 의롭게 하려고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구원이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묘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us.)
여기서 우리를 위함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첫째로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라는 의미이다. 둘째로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라는 의미이다. 셋째로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라는 의미다.
즉 예수의 죽음은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를 그분께서 대신 받으신 대속적 죽음이었다.
그 죽음 안에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받을 저주는 예수가 홀로 받으시고, 구원의 이익은 우리가 받게 되었다.
그분은 혼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구원받을 인간들 모두를 대표하셔서 당한 죽음이었기에 그분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던 율법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커다란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사울은 이 사건을 통하여 나사렛의 청년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그가 온 인류와 세상, 만물의 통치주가 되심을 알게 되었다.
“그의 능력이 ...다시 살리시고... 이 세상뿐 아니라 온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태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에베소서 1장 2-22).
이 깨달음은 영혼의 캄캄한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 섬광이었다. 이로써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것들을 전혀 다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껏 자기가 알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음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그는 종교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 없이 차가운 율법과 그에 대한 복종뿐이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그분을 믿은 후 사울은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었으며, 일찍이 맛본 적 없는 새로운 종류의 하늘 자원이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쏟아졌다.
진리와 함께 풍성한 은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었다.
지구의 생물들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식물의 화학적 화학 에너지로 바뀌고, 이것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이 인간 육체의 생명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를 받으므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영혼의 생명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단지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더욱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
우리 모두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영적 생명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IV. 적용과 결론
IV. 적용과 결론
인간의 고통이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은 지상과 천상 자원의 부족 때문이다.
지상의 자원은 육체를 위해 꼭 필요하지만 천상의 자원은 영혼을 살게 한다.
불신자들이나 성령을 따라 살지 않는 신자들은 그들을 신자들은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그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아무리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죄 가운데 살면 그는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한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십자가로 구원 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으라.
십자가의 의미와 예수 부활의 생명에 붙잡혀 살라.
참석자 1 19:11
이제 처음으로 다시 넘어가게 되면은
참석자 1 19:22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한 그 이유가 뭐라고 그랬죠?
참석자 8 19:34
저주받은
참석자 1 19:36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정함으로써 그래서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는 거죠.
근데 그다음에 기억해야 될 것은 이제 사울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편견인데 하나는 심리적 편견하고 하나는 신학적 편견인데 심리적 편견은 선민사상과 관련이 있고 신학적 편견은 기독론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심리적 편견은 뭐냐 하면요. 유대인만 천국에 갈 수 있고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이제 찌끄러기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주 고넬료같이 그렇게 뛰어나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천국에서 유대인들의 종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신학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나머지는 그냥 다 지옥을 빼는 지옥의 불 때는 땔감 정도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지.
참석자 1 21:05
또 하나는 이제 기독론과 관련된 건데 그것은 뭐냐 하면 나사의 청년 예수는 결코 메시아일 수가 없다.
왜 신적인 존재도 아니고 또 만약에 메시아였다면 메시아였다면 유대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죽어서는 안 돼요.
죽지 말아야 됐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그리고 있는 메시아의 개념은 다분히 정치적인 메시아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그때에 사도행전 1장에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묻잖아요.
그게 어디로 회복되는 거냐 하면은 다윗 왕국으로 회복되는 거예요.
그 다윗 왕 시대를 가장 이상적인 하나님의 통치 시기라고 보고 메시아의 역할은 그 황금기를 다시 되돌려놓는 것 그것이었어요.
그런 기독론 자체가 이미 유대교회에서 편만하게 펼치고 있었는데 그것이 이제 실제 우리가 믿어야 할 기독론하고는 너무나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참석자 1 22:39
그다음에 이제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게 그다음 페이지에 나오는데 왜냐하면 이제 사울은 굉장히 논리적인 사람이었어요.
근데 이제 두 가지 모순된 사실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이 대립하고 있는 거를 경험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어쨌든 예수가 죽으신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은 거다.
추워도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충격적으로 다미에 가는 길에서 예수께서 나타나신 거예요.
부활하신 몸으로서 나타나셔서 내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협박하느냐 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죠.
참석자 1 23:38
그 당시에는 이제 부활을 안 믿는 사람 유대인들도 있었는데 이제 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어쨌든지 간에 구약 전체를 놓고 보면은 죽음을 보지 않거나 죽음을 피하여 간 사람들이 있어요.
혹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신 사람이 있어요.
그들이 가장 대표적인 게 모세라고 보았죠.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은 모세는 죽었지만 성령이 분명히 죽었다고 나옵니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서 승천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왜경에 보면 모세의 승천기라고 하는 외경도 아니죠.
위경이죠. 위경에 모세의 승천기라는 성경책이 있을 정도예요.
책이 있을 정도예요. 그랬고 그다음에 또 예녹 같은 사람은 65세에 무드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인 하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돼 있거든요.
참석자 1 25:03
그다음에 엘리야 같은 사람은 아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지 죽음을 보지 않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런데 예수가 부활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빼도 박지 못하는 건 뭐냐 하면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거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거예요.
근데 그러면 모순이 생기잖아요. 뭐가 무슨 모순이 생겨요 나무에 그렇게 인정하실 사람이면 하나님이 저주하시지 말았어야 되잖아요.
근데 저주를 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사울의 눈에 비늘이 벗겨지면서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된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만약에 예수의 죽음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하고 보니까 두 개가 이제 모순이 안 되고 딱 떨어져 맞는 거예요.
딱 딱 맞아떨어지는 거야.
참석자 1 26:36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대신해서 그거를 이제 좀 신학적인 용어로 내포적 대신이라고 불러요.
내포적 대신 이게 인클리우스 브 서브스티튜티라고 그래요.
인클리우스를 끌어안는 거예요. 그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구원받을 모든 인류를 당신의 품에 끌어안고 그들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시고 죄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신 거예요.
근데 그거는 예수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받은 저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포적 대신으로 끌어안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받은 십자가의 죽음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딱 맞아떨어지는 거죠. 뭐냐 하면은 예수의 그 죽음이 대속적인 죽음이었구나 대리적인 죽음이었고 속재적인 죽음이었구나 깨달으니까 어떻게 했냐면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위해서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게 되잖아요.
참석자 1 28:07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를 당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이제 등식이 성립을 하는 거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에요.
그래서 이제 한순간에 눈이 떠지면서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예수는 구원받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 그걸 하나님이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구나 그것을 이제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깨달았을 때 사도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 같은 거죠.
그러니까 완전히 새로운 인생과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으로 거듭나게 되는 거죠.
참석자 1 29:23
그러면서 이제 자신 속에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은 오직 육적 이스라엘뿐이었는데 사실 그 육적 이스라엘은 껍질에 불구하고 진정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러면서 이제 유대인을 지옥의 땔감 정도로 생각하던 사람을 들어서 최초의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쓰시는 거예요.
놀랍죠.
참석자 1 30:12
이게 이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걸 이제 신학적 회심이라고 얘기하는데 근데 이제 애석한 건 뭐냐 하면 이런 거를 이렇게 아주 조리 있게 정리해가지고 성도들에게 설교를 잘 하지를 않고 부활절에 여인들이 예수님께 뭘 향품을 바친 이야기나 계속하고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부활의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잘 전달을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듣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1년에 한 번 정도씩은 꼭 이거를 설교를 해서 사람들에게 아주 가슴에 깊이 못을 박는 그런 마음으로 이 진리를 쏟아넣어야 돼요.
아멘 그리고 이거는 어렵지도 않아요. 그리고 설교 구성도 매우 간단하고 해서 쫙 외워가지고 그렇게 해서 이제
참석자 1 31:44
설교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참석자 1 31:51
하재길 목사님이
참석자 9 31:55
네폴트 대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들의 죄 고운 모든 사람들의 사람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리고 머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이 정확한 이해와 깨달음 속에서 전달을 해야 되는데 이 부분을 마치 이렇게 문자적으로 교리적으로 그 부분을 전달하다 보니까 사람 듣는 사람들에게 생명력이 없고 그리고 저 자신도 그 부분에 대한 그 풍성함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마치 복음이 이렇게 태양이 빛이 비춰지는데 눈을 가리고 어둡다고 그렇게 생각하였던 그런 무지한 것들이 저로 말미암아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이 부분을 잘 준비하겠습니다.
참석자 10 33:03
굉장히 감동과 파워풀한 설교
참석자 1 33:09
이거는 이제 신학적인 소리야. 본문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기다 대지 소시 나눠서 이런 내용은 안 써.
참석자 10 33:16
그래서 굉장히 논리정연하게 된 설교라 사실 저는 좀 부끄러웠던 거는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회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를 핍박했던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는 그 사랑에 초점을 맞췄었었는데 이게 완전 잘못된
참석자 1 33:35
굉장히 인도주의적인 설교지.
참석자 10 33:37
그런데 제가 항상 그걸 고민하고 사실 새벽 기도 때도 그 설교를 하려다가 조금 더 묵상해 보자고 그 부분을 생략하고 고민하고 있었었는데 그게 완벽하게 그 신학적으로 정
참석자 1 33:53
그러니까 어느 한순간에 완전히 커다란 충격으로 쾅 하고 와닿으면서 완전히 새 세계가 펼쳐지는 거야.
근데 이런 똑같은 일을 어디서 어디에 나타나냐 하면은 중국이 공산화될 때 중국 땅이 그때 이제 이제 장제스가 이제 국민연금을 세워 오다가 그다음에 이제 태풍이 일어나가지고 이제 공산당 운동을 하잖아 펼치잖아.
근데 이제 그때 사람들이 이제 소위 얘기하는 개심이라는 걸 하는 거지.
근데 마오쩌둥은 거의 철학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래서 서구 지도자들이 태동을 만나고 다 받은 느낌이 저 사람 철학자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쫙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쫙 모택동이 쫙 설교를 하면은 연설을 하면 사람들이 확 얻어맞으면서 새로운 세계가 보이는 거야.
그러면 이제 그러면 이제서부터 공산주의 이 더러운 자본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로 살 사람은 한번 손 들어보라.
구원 초청 같은 그러면은 한 사람씩 나와서 간증을 하는 거예요.
참석자 1 35:30
나는 이러이러한 면에서 자본주의적인 삶을 살았고 정말 말하자면요.
인민을 배신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래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공산주의자로 회신하는 거예요.
부음이네요. 부분이죠. 종교적인 형상이었죠.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헌신을 하는 거야.
왜냐하면 순식간에 그냥 그 인형이 중국 대륙 전체를 삼키고 그 누구야 이시오프 이시오프 스탈린도 신학교 다니던 학생이었어요.
스타일 내가 신학교에 가서 뭘 보냐면은 그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보 그러면서 하나님 없는 세계 창조가 가능하구나.
그걸 보면서 이제 남아 있던 희망까지도 다 버려요.
어머니는 굉장히 경건한 신자였어요. 늘 그래요.
김일성도 그 어머니 강만석 씨가 독실한 신자였잖아요.
참석자 1 37:02
그러니까 인형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걸 보여주는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해놓고 이제 설교를 하면 답이 안 나오는 거지 찾아오셔서 감동을 주셔서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 캄캄한 지성을 찍고 찬란한 빛이 내리쬐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 예수가 예수가 딱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딱 밝혀지는 순간에 구약으로 빛이 확 들어오고 신약으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구약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구약의 그런 제사와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온 것이구나 그래서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아직도 모르거든요.
누군지 근데 이제 많은 사람들이 바울 이외에 그런 거를 쓸 만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 설교 준비하면서 왜 이사야 53장 읽다가 회심많은 유대인들 이야기들 많이 들었잖아요.
그 사람들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문제거든요.
참석자 1 38: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럴 때 그라는 말을 이게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우리라고 읽는다고 우리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상함은 우리의 고난을 위하 명백한 성경이 명백하게 그렇게 얘기를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를 혼자 읽다가 혼자 있다가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유대인들이 많다 그랬지 또 우리 박 목사님
참석자 9 39:16
예 저는 바울이 예전에 사울일 때 왜 그토록 열심을 품고서 정말 최고의 교육을 받고 어렸을 때부터 말씀을 깊이 묵상한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예수를 이렇게까지 핍박을 했을까 박해했을까 하는 그것이 완전히 이렇게 표현을 한다 그랬는데 그 이유가 어떤 것인지 이렇게 좀 뻥 뚫리는 그런 느낌이었고요.
그리고 바울이 여기서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이 바울이 얼마나 황홀했을까 그것을 좀 바울의 마음 기분의 마음을 한번 생각 또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부분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인물들을 볼 때 이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성적을 가진 사람들이라 이런 마음으로 좀 위안을 삼을 때가 있었는데 이게 이 말씀이 그 말씀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지금 바울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는 분명히 다른 것이 있구나 우리 개인적으로 저에게도 이런 빛이 우리 목사님들에게도 이런 빛이 한 줄기 섬광이 꼭 비춰지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참석자 8 40:59
저도 절기 설교가 참 어려운 설교 중에 하나인데요.
작년에 제가 그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건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는데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살리셨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근데 오늘 목사님 강의를 이렇게 들으면서 신학적 회심, 이 부분에서 뭔가 꽉 머리를 맞은 것 같고요.
사울에게서는 다윗에게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고 나무에 달려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 이 충돌이 이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되어지는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죽으셨다.
이것이라면 이제 이 사울에게 있었던 궁극적인 모든 해결들이 다 풀어지는 이런 등식이 성립하는 것 오늘 이런 것들을 이제 우리 성도들한테 가르쳐야겠구나 이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 너무 참 부끄럽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너무 귀한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석자 7 42:12
네 저는 그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 가 아까 목사님도 말씀해 주셨듯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윗 시대처럼 찬란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강력한 그런 메시아를 꿈꾸고 있었다는 건 알겠는데 또 반면에 구약 성경에 이사야 53장에 고난받은 종의 모습으로 오시는 이 메시아 관이 있는데 왜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고 배척했을까 그런 의문이 있었는데 오늘 유대교 메시아 사상이 바로 신과 비슷한 존재고 메시아가 죽고 부활한다는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청년 예수를 메시아로 바라볼 수 없었는데 이런 유대교의 어떤 메시아 사상가를 좀 더 깊이 이해를 해서 사울이 왜 예수님을 이렇게 배척했는가를 한번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석자 1 43:28
뭔가 이렇게 이렇게 싹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느낌 아니고 이게 예수님의 구속사 전체가 싹 머릿속으로 들어와야 된단 말이야.
또
참석자 6 43:42
예 저도 이 설교를 통해서 이제 부활의 핵심과 그 중요성을 중요성에 대해서 이제 정리가 되고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고요.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이제 정리가 되었고 그래서 이것을 잘 소화해 가지고 이 부활절 때 잘 전해야겠다라는 그런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석자 1 44:05
그래서 설교 설교문을 다시 작성을 하시는데 이거를 기초로 해서 크게 흔들지 말고 좀 상세하게 잘 작성을 해서 미리 프린트를 이렇게 해놔요.
해놓고 설교가 끝난 다음에 그날 그걸로 설교 나눔을 좀 해야 시켜요.
다시 읽으면서 그래서 이제 딱 여기 안에서 딱 정리가 되게끔
참석자 5 44:39
네 저도 누구나 말할 수도 있지만 굉장히 잘 정리해 주신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묘사 이것이 저에게는 굉장히 크게 다가왔는데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리해 주시는 대목이 좋았고요.
그리고 특별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사건이 그의 인생을 인생관을 달라지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었음을 보면서 또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이 메시지를 듣고 새로워지는 그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참석자 4 45:29
저는 이제 지금처럼 자료가 범람하는 시대에 이제 그 설교의 구성도 너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아 저는 부활 주일 설교를 이런 구성으로 어떻게 보면 뭐 정반합 그런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제 저주받은 건데 죽음은 부활은 인정받은 거 이게 대립되면서 그거를 마지막에 이제 대속이라는 개념으로 하니까 그 듣는 청중들도 이제 끄덕여지면서 이제 깨달아지면서 은혜가 임하는 것 같고 저도 이제 그런 것들을 이제 느끼게 되었고요.
또 더 저는 이제 목사님이 어떻게 이거를 처음에 어떤 인사이트를 받으셔서 구성하셨을까라는 그 이제 의문이 드는 게 이게 단순히 교리적인 내용뿐 아니라 바울의 개인사 같은 고민 같은 것들이 녹아가니까 이게 스토리가 되니까 더 강력한 것 같거든요.
참석자 4 46:37
그래서 이제 이런 단순한 교리뿐 아니라 우리 성도들 한 명 한 명의 그런 개인적인 스토리로 이렇게 이렇게 꽂힐 때 이 파급되는 영적인 영향력은 대단할 것 같다라는 마음이 들었고 또 한 가지는 참 하나님 섭리가 되게 오묘하신 게 가정에 대한 아픔이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가정 사역을 하듯이 철저한 선민 의식으로 그 이방인을 개처럼 여겼던 그게 너무나도 강했던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니까 반작용으로 이제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것을 보면서 이제 각자의 부르심의 자리들이 있는데 그거는 철저한 또 저의 부르심의 자리도 하나님의 그 강력한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들을 깨닫게 되어서 또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참석자 1 47:42
그러니까 이제 사도 바울은 지금 이걸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쌈빡하게 딱 이렇게 뭔가 이렇게 딱 머리에 떠오르게 됐냐 이렇게 묻는데 그게 아니라 이게 오랜 신학 공부의 결정
참석자 10 47:57
목사님 그러면 사실 이 다메섹 도상의 이 사도 바울의 심경적이나 논리적인 변화는 어디도 나와 있지 않은데 목사님 그럼 그게 어느 한순간 딱 그 인사이트가 있어서 이렇게 발견하시는 건지 아니
참석자 1 48:16
아니 수많은 신학 공부의 열매라니까 그렇지 이거 배우지 않으면 혼자서 안 해.
수십 권의 신학책들을 읽음으로써 이거를 이제 파괴하는 그러니까 이제 사울의 사도바울이 이제 사울이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잖아.
근데 그거를 그렇게 터닝 포인트가 다메섹 체험이야.
그래서 다메섹 체험이 핵심이 되어 가지고 거기에서 뭘 느끼냐 하면은 신적인 강제력을 느끼는 거야.
그 강제력이 뭐냐 하면은 언제 예수님이 너 가서 이방인에게 복음 안 전하면 내가 너를 크게 혼내주겠다.
예수님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거든요. 근데 뭐라 그러냐면 내가 부득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은 화가 있을 것이다.
내게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게 뭐냐 하면은 그게 사랑의 강제력이에요.
사랑의 강제력 그런 강제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잘 봐요.
여기 봐요. 여기 보세요. 이렇게 하나의 원이 만들어져요.
그게 이제 이제 넓은 호수에 큰 돌멩이를 풍덩 하고 던진 거야.
참석자 1 49:49
근데 그 돌멩이가 첫 번째 딱 부딪히면서 파문이 일어난 그것이 다메섹의 체험이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것들이 점점점점 물결이 크게 만들어지면서 바깥으로 번져 나가는 게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과 자기의 신학의 발전이야.
그게 그거를 이 주제로 논문을 쓴 사람이 박사 논문을 쓴 사람이 김세윤 교수란 말이야.
그래서 궁금하면은 김세현 교수의 박사 논문 바울 복음의 기원이라는 책을 이거 한 600페이지 정도 될 거야.
근데 그게 이제 핵심이에요. 핵심 그러고 나면은 이제 다 풀리는 거야.
예술을 사형시켜 주십시오. 사형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될 텐데 참수도 안 되고 목 졸라 죽이는 것도 안 되고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으라는 거야.
솔직히 그냥 뭐가 편집증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이상하잖아요.
근데 그 뒤에 그런 종교적인 복선들이 쫙 깔려 있어.
참석자 8 51:10
목사님 그럼 다메섹에서 바로 이렇게 사울이 이 모든 신학적인 회심이 다 정리가 된 건가요?
아니면은
참석자 1 51:20
아 중요한 거는 다 정리가 된 거지. 그 당시에 한순간에 왜냐하면 그 사람이 구약을 전혀 모르고 있었더라면 정리가 안 됐을 거야.
근데 그 사람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 그다음에 문화적으로는 헬라주의,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에게 세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에요.
근데 학식도 충분히 공부를 했고 하니까 한순간에 빛이 확 들어오니까 불약이 그냥 구약이 확 하고 열리면서 보이는 거예요.
구약이 그 속에서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
그래 내가 잘 드는 비유가 있는데 여러분 혹시 그런 경험이 있어요?
220 220 마트짜리 전기를 220볼트짜리 전기를 10에다가 꽂아본 경험 없어 여러분 대부분 이제 220으로 바뀐 다음에 태어났거나 살았습니다.
본 적 있습니다. 본 적 있죠? 네 그럼 어떻게 돼요?
터져버리죠 꺼져 버리는 게 아니라 터져버리는 거 아니 터지는 게 아니야.
참석자 1 52:42
내가 잘못 알아들었는데 전구가 220볼트 용인데 전기는 100이 들어와 하는 거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깜빡하지도 않아.
그냥 필라멘트만 달고 소름하게 오렌지 빛이 나는 걸로 들어오는 거야.
그러니까 그거는 모아트도 안 돼. 그 밝기가. 근데 갑자기 이쪽에서 승합기를 써가지고 아니 지금도 실험해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강압기가 있거든 2 도란수 요만한 거 하나 사면은 220에다가 내리면은 110이 돼.
110에다가 전구를 한번 꽂아봐. 근데 발구수로만 빛이 들어오는데 그러다가 다시 탁 해가지고 승납을 해가지고 220억 올리잖아요.
그러면 100와트가 되는 거예요. 천란하게 빛나는 거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냥 한 예배당이 있었는데 예배당에 100와트 100와트짜리가 천 개가 있다고 쳐.
그러면은 천 개가 있는데 5와트밖에 안 들어와. 그럼 5천 와트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러면은 쉽게 얘기하면은 100볼트짜리 50개 켜놓은 거 밟기밖에 안 되는 거야.
참석자 1 54:12
근데 어느 한 순간에 승합이 돼 가지고 220와트로 탁 올라가 그러면 10만 초강이야.
10만 초강 눈이 부실 정도로 차단한 빛이 들어오거.
사도 바울은 그걸 경험해요. 그러니까 중요한 신학적인 뼈대는 다메의 거기에서 다 완성이 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좀 더 이제 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이 점점 깊어지죠.
그 신학의 깊이가 절정에 올랐을 때가 언제였냐 하면은 죽기 직전이었어요.
그게 에베소서하고 골로새서 쓸 때 특히 골로새서 신학적으로 가장 깊이가 있는 책이에요.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 정도는 사도 벌이 다 다메섹에서 거의 다 깨달았다고 봐야 돼요.
그다음에 또 누구 하나 말아어.
참석자 3 55:12
이게 저도 오늘 말씀을 좀 보면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이제 학문적으로도 그렇고 유대주의에 아주 입각해서 신념과 자기의 신앙관이 명확한 사람이고 이렇게 확신에 찬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한순간에 지금 예수를 만남으로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모두 바꾸는 그런 엄청난 변화를 경험했는데 이제 부활절이 이제 열내 행사처럼 1년에 한 번씩 있다 보니까 이제 설교도 하고 기독교에서 가장 큰 행사고 또 사람이 이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거 이게 가능한 일이냐 이러면서 이제 이런 부분에 이제 소개를 많이 했는데 결국은 이 부활의 임팩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참석자 3 56:01
그러니까 기존에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관이나 입장을 완벽하게 다 무너뜨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만한 파괴력이 있다는 거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게 됐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기가 고수했던 내용이 예수의 부활로 완전히 다 흔들리는 장면 속에서 이게 내가 생각하는 거가 다가 아니구나 그러면서 이거를 또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도 이 부활의 신앙을 믿는 신앙인으로 이게 그냥 잘 지내면서 부활도 하셨네 이 정도가 아니라 참 이게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돼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좀 깨닫게 됐습니다.
참석자 2 56:45
저는 사도바울의 경험한 신약적 헌신 작지만 제게도 이 내용은 저한테 신학적인 회신과도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이렇게 우리의 설교 가운데 사람들을 회심하지 않는 이유는 신학적인 회심이 일어난 설교자의 설교가 부족하니 이 사람들의 회심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참석자 2 57:11
그리고 또 하나 여기서 저도 새롭게 좀 더 알게 된 것은 나무에 매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함을 받은 자다라는 이 표현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그 저주를 나타낸다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게 함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를 삼고 싶었다는 게 저한테 되게 충격 이게 다가왔는데 아 그렇구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못하고 죽으신 것이 저주거리가 보이겠으나 하나님의 지혜는 오히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서 그분의 그 십자가 지심이 우리의 죄를 위한 계속의 사건과 또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인정하신 이 이것이 복음의 폭발적인 하나님의 지혜였구나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참 놀랍다. 하나님의 지혜가 정말 이래서 하나님의 지혜구나 하는 생각들을 좀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석자 2 58:14
그래서 제가 이제 준비한 거랑 이렇게 다시 한 번 비교해 보면서 이 신학적 회심이 속히 날마다 일어나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게 되었습니다.
참석자 4 58:27
어쨌든 수고해. 근데 목사님 그 수십 년의 신학 연구의 결과물이다.
그러면 좌절 좌절 근데 목사님도 이렇게 개요를 좀 구성의 개요를 좀 짜십니까?
이게 그냥 스르륵 나오는 거
참석자 1 58:45
잘 때 당연히 짜지 그러니까 그 짜고 그다음에 이제 성명 이경자 쫙쫙쫙쫙쫙 이렇게 구도를 짜는데 그걸 짤 때 짤 때 이제 여태까지 배운 모든 신학이 총동원돼서 그걸 짜는 거야.
그리고 가는 거야. 그래서 뭐냐 하면은 두 가지인데 배움에 있어서는 두 가지인데 참된 것 참된 것을 배워야 한다.
그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많이 배워야 된다. 하나는 질에 관한 이야기고 하나는 양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참된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게 양이 적으면 별 쓸 데가 없어요.
근데 또 반대로 만약에 거짓된 지식이면 그건 양이 많을수록 문제가 되는 거야.
그거는 그러니까는 참기름 참기름이 담겨졌던 병은 계속 털면 한 방울이라도 나와 근데 뭐가 나오겠어요?
참기름이 나와 참기름이 담겼던 병에서는 참기름이 나온다고 들기름이나 콩기름이 나오질 않고 그러니까 두 가지 참된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 양적으로 많아야 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래야 되잖아.
참석자 1 1:00:29
이러한 한 3주 동안 아주 죽어라고 고생해 가지고 지금 논문 다 맞춰서 지금 이제 그 번역까지 끝내서 지금 이제 인쇄하고 있는데 a4 용지 45매인가 그러면은 그게 a4 용지가 보통 몽고지 10.8매거든요.
10.8매 그리고 보통 책이 되게 그냥 한 원고지 4매가 한 페이지 정도 돼요.
한 5매로 하면 좀 빡빡하고 그러면 어떻게 돼? 거의 한 100페이지가량 되는 책을 쓴 거야.
3주 동안에 근데 되게 힘들었지만 보람 됐어요. 그래서 내가 미국 갔다 와서 날짜를 잡아가지고 그날 여러분들에게 제네바 레베이유 운동에 대한 거를 한번 맛을 보여줄게요.
한 3시간 강의하면은 아마 흠뻑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돼요.
짧으면 한 2시간 정도 그렇게 해가지고 한번 공부를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의 세계가 끝이 없어요. 그래서 책을 두꺼운 신학 책들을 좋은 책들을 꾸준히 읽어봐야 그다음 이제 마지막 설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이게 이제 예수의 죽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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