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Jews who were given the word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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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VcWYTqYx3pA
로마서는 말씀을 모르는 이들을 대상이 아닌, 사도행전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보면 각 지역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에 기록되길 “로마에서 온 나그네들과” 그들이 거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로마에가서 로마의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많은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로마에 이미 교회가 있었고 로마 교회는 복음이 전해졌음도 불구하고 1장 15절에 바울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너희에게 뭘 전하기를 원한다고요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복음이 있었고 이미 교회가 있었어요 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을까요 이 로마 교회 에는요 처음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AD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이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게 돼요 그러니까이 로마 교회에 있던 유대인들이 어떻게 되겠어요 로마에서 추방되이 로마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누구로 바뀌냐 이 로 되는 거예요. 그러다가 이 클라우디오스 황제가 죽습니다. 그리고 다시 유대인들이 들어와요. 그리고 딱 보니까 화가 날 만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러분 보세요, 이 복음이 어디서부터 흘러왔습니까? 유대로부터 흘러왔어요. 유대인들로부터 흘러왔다 해요. 예루살렘으로부터 흘러왔습니다.
그러면 초창기에 있었던 로마 교회 안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그 로마 교 다수를 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유대인들이에요. 그런 들이 쫓겨 갔다 돌아오니까 지금 누가 다수를 차지하고 누가 교회 주도권을 쥐고 있겠어요? 이방인들이 쥐고 있는 겁니다. 이때부터 갈등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때부터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 바울이 쓴 편지가 로마서라는 편지예요.
이런 배경이 뭘 말해 주겠어요? 서로 복음은 들었지만 여전히 복음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그들에게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쓰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격하게 말하면, 이미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었고 복음이 있었지만, 그들이 알고 있었던 복음은 왜곡된 복음이었고, 조금 더 격하게 표현하면 가짜 복음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얘기하는 거예요. 1장에 문안 인사를 하고 나서 뭐라 그럽니까? 이방인들, 너네들 죄인이야 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펴본 이 말씀에서 계속해서 바울이 그다음 유대인들에게 하는 얘기가, 그럼 남을 판단하는 유대인들, 아 너네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라고 이렇게 편지를 이어가는, 그런 편지가 로마서이고 오늘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이 편지를 이해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때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이 이제 바울에게 던져지는 질문들이 있어요. 그 질문들에 대한 몇 가지 답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먼저 1절 한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묻는 거예요. 야 그러면 유대인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 아무 가치가 없는 거 아니냐, 쓸모없는 거 아니냐, 할례는 왜 받았냐, 그걸 묻는 겁니다.
그때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2절입니다. “범사의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아멘.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있다는 거예요. 할례의 유익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율법을 맡았다는 겁니다. 여기 ‘맡았다’는 이 말은 위임을 받다, 신뢰를 받다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맡겨 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뢰를 받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지금 바울이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 사실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이들에게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오늘날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은 우리에게도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책임이 우리 가운데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 교회 와서 은혜를 받으면 “아 하나님 좋습니다, 예수님 좋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조금 조금씩 알아가면서 지켜야 될 것들이 갑자기 많아지는 거죠. 그러면서 “말씀을 지켜야 되는데,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담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넘어지고, 그래서 좌절하고, 그런 게 우리의 삶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무거운 책임을 이들에게 주었는가, 말씀을 맡은 유익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먼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 주셨다는 것에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아주 큰 유익이 있어요. 우리 이미 로마서 1, 2, 3장에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보다 훨씬 더 주어지는 그 큰 유익 중에 하나는 뭐냐면, 여러분 보세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압니다. 그래서 바울이 분명하게 얘기해요. 이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사인이 들어 있다, 하나님 마크가 들어 있기 때문에 너희 핑계치 못한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죠,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말씀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을 알되 직접 알 수 있는 그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게 은혜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그 부담감, 그 책임, 어떤 선민 의식,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고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는 그 특권, 그것이 주어진 것이 바로 이들에게 있어서의 유익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하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위임하셨다 얘기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얘기하잖아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그 주님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끊임없이 얘기해요. “하나님이 주님을 통하여서 세상과 하나님을, 그리고 세상의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시키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에게도 화해의 직분을 맡기셨다.” 이런 말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게 뭡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어요.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넘어질 때가 있다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다가 “아 오늘은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어, 역시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가 보다” 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래서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 힘들어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들이 그래서 말씀을 읽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성경 통독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자, 두 번째로 또 뭐라고 묻느냐 하면 3절입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패하겠느냐?” 이거예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해지되겠지, 그렇게 또 이런 말들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4절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유대인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 주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걸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지는 거예요? 자,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저에게 어떤 직분을 맡기셨어요,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기를 원하세요. 그런데 제가 게을렀어요. 그리고 제가 조금 하나님을 믿지 않은 거예요. 제가 그 사명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패해지겠다는 거예요? 아니요, 패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예수님이 올라가시면서 뭐라 그래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실 때 그때 제자들이 땅끝까지 흩어져야 하는 게 정상이었는데, 그들이 흩어지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지 않았어요? 아니요. 그들이 멈칫했을 때 주님은 누구를 준비하셨어요? 오늘 우리가 읽는 편지를 쓴 바울을 준비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쭉 펴서 어떻게 합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고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아요. 변하면 그건 진리가 아니죠. 기호에 따라 변하는 건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구원으로 약속하시고 예정하신 그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 말씀으로 약속하셨으면, 여러분 그 약속의 말씀 붙들고 끝까지 신뢰하십시오, 끝까지 걸어가십시오. 왜요? 하나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게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시편 145편 17절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아멘이지 않습니까? 예, 하나님 그렇게 일하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제가 이 로마서를 읽을 때마다 저에게 참 위로가 되는데요, 특히 3장을 읽을 때는 더 위로가 됩니다. 왜 위로가 되냐면, 사실 제가 그 오전 예배 때 몇 번 말씀드렸지만, 저 눈을 뜨면 “어떻게 하면 죄를 지을까” 고민하는 죄의 제조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아침에도 나올 때 “어떻게 하면 제철 타고 가면, 어떻게 하면 앉아갈 수 있을까.” 앞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아요. 어르신들, 때로는 피곤하면 보이지도 않아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아, 이런 죄를 짓는 죄의 제조기 같은 죄, 얼마나 악한지 몰라요.
그런 저의 모습을 보면서 이 로마서에 나와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죄인 중에 죄인이고 괴수 중에 괴수인 저의 모습과 너무나도 동일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동질 의식을 느끼는 거죠. 그러면서 참 많은 위로를 얻고 마음을 얻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한번 보실래요?
자 5절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대로 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이게 뭐냐면,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니까, 우리가 악하면 악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불의를 이용해서 선함을 드러내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랬더니 바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6절입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리라. 만일 그리하면 하나님이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바울이 딱 끊어서 얘기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불의하다면 어떻게 그 불의한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겠느냐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냐면, 그다음에 7절에 또 이렇게 묻습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게 뭡니까? 하나님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다면, 이방인들이 무언가 받는다면, 그런 구원하는 계기가 되니까 오히려 이 유대인들이 잘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얼마나 악한지 몰라요.
그랬더니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8절입니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이 딱 끊어서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정죄 받을 거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볼 수 있는 게 뭐예요? 참 죄를 짓는 죄인의 특성이 나타나요. 뭐예요? 자기 합리화의 천재들입니다. 그지 않습니까? 변명과 핑계 대왕들입니다. 왜 그래요? 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죄인의 특성이고 인간의 본질 아니겠어요?
에덴 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요, 가끔 그런 생각해요. 아담이 하나님이 찾을 때 “하나님, 잘못했어요. 하나님,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와 잘못 없어요. 제 갈비뼈를 취한 저보다 훨씬 나은 존재 아닙니까? 제가 말리지 못해서 제 실수였어요”라고 이야기했다면 인류 역사가 이렇게 힘들어지지 않았을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해보는 거죠. 근데 아담 뭐라 그럽니까? 핑계 대잖아요. 변명하잖아요. 자기 합리화하잖아요. “하나님,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라 저 옆에 있는, 당신이 내 갈비뼈 빼서 만든 저 여자가 나를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뭐라 그래요? “뱀이 먹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핑계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고 죄의 특성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숨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알 수 있는 죄의 한 가지 특성이 뭔지 아세요? 죄는 나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를 주목하기 시작하는 데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하루를 살다가 다른 사람들은 바라보지 않고 나만 보이고, 내 상황만 보이고, 내 것만 생각한다면 여러분 딱 바로 그때 정신 차리셔야 됩니다. “아, 내가 죄를 지으려 하고 있구나” 생각을 하셔야 돼요. 왜냐면 끊임없이 나를 보도록 하는 게 사탄의 속임수, 그게 시작이기 때문에요.
절대로 다른 사람 보지 않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뭐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핑계요, 변명이요, 자기 합리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내가 오니까요. 그러니까 자기 이기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지옥이 멀리 있습니까? 절대 멀리 있지 않아요.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지옥입니다. 가 보십시오. 절대 누구를 배려하지도 않아요. 얼마나 마음이 불편한지 몰라요.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몰라요. 이 땅에서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시대입니까, 아니면 나의 성공과 나의 만족과 나의 유익을 위해서 달려가는 시대입니까? 예, 죄송하지만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여전히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만 돌아보고 내 가족만 돌보고 나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니겠어요. 그럼 오늘 우리의 모습은요, 우리의 시대는 죄의 때라고 우리는 정의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때 누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겠어요? 이때 누가 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맡은,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은 우리들이 나아가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굴 봅니까? 옆에 있는 지체들을 돌보고,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살아갈 때입니다. 뭐 전할 것도 없어요. 그냥 “주님,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그들을 품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결단하고 살아갈 때, 그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내일 더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얘기하는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나누게 될 텐데요, 오늘 하루 살면서 우리가 한 가지만 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이 자리에 계시다면, 이미 여러분들을 부르셨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맡겨 주셨다는 거예요. 근데 아직 내가 그걸 못 깨달을 때가 있어요. 내가 모를 때가 있어요. 나를 삶의 전도자로 세우셨는데 못 깨달을 때가 있어요.
아니,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을 주님이 이 시간 콜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와 함께 걸어가지 않을래? 내 말씀을 좀 맡아 주지 않을래? 세상에 나가서 저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내 사랑의 마음을 좀 전해 주지 않을래?” 콜링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죄 가운데 변명하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아 내가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겠습니까” 핑계하며, 여전히 죄 가운데 내 자신을 합리화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있다면, 여러분 이 시간 좀 조용히 주님 앞에 그 마음을 내려놓으시고, “예 주님, 이제 정말 바람이 부는 대로 갈대가 흔들리듯이, 주님의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내가 거기에 흔들려서 나아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고백하는 이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나누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 가운데 말씀을 맡겨 주시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치유하라,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달려 나아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만, 하나님 여전히 나는 내 자신만을 바라보고 내 것만을 바라보고 내 상황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하나님 나의 완악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 나만 바라보는 이 모습 때문에 끊임없이 주님 앞에 변명하고 핑계하며, 하나님 내 자신을 합리화하며 나아가는 나의 연약한 모습을 이 시간 내려놓습니다.
주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신 그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받아 주시고, 이제부터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정말 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그렇게 살아가는 저희들 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끊임없이 변명하고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저희들의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 그 모든 핑계와 변명과 그 모든 것들 내려놓고, 십자가에서 묵묵히 죽어 주셨던 주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주님, 우리가 정말 그런 주님의 제자로, 그런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한 분 한 분, 정말 오늘 말씀을 맡겨 주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세상을 향하여 보내시는, 우리를 파송하시는 그 주님 모습 앞에 늘 변명하며 핑계하며, 내 자신의 상황이 이렇다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저희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그 행복한 잔치로 초청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이제부터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 변명하고 핑계하며 합리화시키며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늘 함께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폴워셔 롬 12:1]
2 요한 1:8 "너희 자신을 삼가 우리가 너희 안에서 이룬 것을 잃지 말고 온전한 상을 받으라."
영원한 상급이 있다. full reward를 강조한다. 그 뜻은 partial reward senerio와 no reward senerio가 있다. 요한이 partial, no를 명시하지 않고 full reward만을 명시한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full reward를 받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단 한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 앞에서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도바울은 신자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아는가? 미신자가 육체를 잃으면 그들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혹한 것이 아닌 사실이다. 예수님은 정죄하러 오신분이 아니시다. 이미 정죄당하였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갈라디아서 1:8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설교는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이다. 설교는 그저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촉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애원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진리를 받아 그 진리에 따라 살도록 말이다. 설교는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다. 설교자에게 위험한 이유는 만약 그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는 정죄 받은 상태로 서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12-13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약 그가 덜 한죄, 즉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죄를 저지른다면, 그가 그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쌓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심판의 날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불에 타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설교자에게 위험한 것이다.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지만 또한 청취자에게 또한 위험한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체의 진리, 그 진리에 대해 우리는 책임이 있다. 그것을 그저 사람들 앞에 펼쳐 놓고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만 말하지 말라. 오히려 사도이지만 여기서 선지자와 목회자의 마음을 보여주는 사도 바울처럼 되십시오. 그는 그들에게 촉구한다. 그들에게 애원한다. 그들에게 간청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그들에게 진리는 말할 때 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머리속에 있는 진리의 양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삶으로 살아낸 진리의 양으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목소리 안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촉구를 받아야 한다. 웅변가들과 농담꾼들이나 별난 성격의 사람들이 만연하고, 그 소수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뵌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는 진리와 성경의 중대한 문제들을 보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들이 사람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은 그가 사람들 앞에 서 있기 이전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설교자는 누군가에게 진리나 무엇을 해야할 지 말해줄 때, 그들에게 간청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과 생명의 더 중대한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너무나 피상적인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 고 있다. 따라서 진리로 그들에게 나아가 설교할 때 그들이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은 진지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설교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될 것이다. 전하는 자는 코미디언, 내래이터, 또는 그저 이야기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라고 애원해야 한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롬12)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촉구하노니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는 차를 내주고, 끼니를 내주고, 그 모든 것은 몸 밖에 있다.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우리 마음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서도 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도록 경건함을 기르는 목적 중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함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자라가면서 우리의 주된 일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더욱 더 내어드리는 것이다. 나는 그분께서 모든 곳에 머무실 자유를 가지셔서 그분이 제 것이 되고, 제가 그분의 것이 될 수 있기를 내 마음이 전적으로 그분께 속하기를 원한다. 만약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그러하다면 다른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열왕기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교회에서 수없이, 설교자도 수없이, 너무도 스스로에게 관대해져서 하나님보다 사람들과 그들의 기분에 더 우선권을 주게 된 것 같다. 우리는 두 견해 사이에서 절뚝거리고 있다. 하나님은 종처럼 사람을 따라다니는 어떤 하찮은 신이 아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전적으로 우리의 모든 부분을 요구하시고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고, 회중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그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서 일하신다. 그분 자신을 위해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언제든지 설교자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기보다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 때, 바로 그들을 통해 그분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 교회는 경고받아야 한다. 사람은 경고받아야 한다. 우리의 활동은 단지 우리의 체면에만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신에도 반영이 된다. 그러니 만약 세상 안에 있다면, 그만하시오. 회개와 믿음으로 그분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드리십시오.
신명기 6:5, 마태복음 22:37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성경의 요점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소유하신다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몸을 또한 소유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시라는 말씀에는 인간의 정신을 나누시려고 하신 말씀이 아니시다. 이것은 하나의 용어를 다른 용어 위에 쌓아올리는 히브리식 사고이다. 네 존재의 모든 것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위해. 구약 성경에서 그분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경고할 때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출애굽기 20:5, 34:14, 신명기 4:24, 5:9, 6:15, 여호수아 24:19, 나훔 1:2) 그분은 질투의 마음으로 우리를 갈망하신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분께 속해있다. 더 이상 우리의 생명이 아니다.우리의 호흡이 아닌, 귀가 아닌, 입술이 아닌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다.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나타난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갈망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빌립보서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1)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오늘날 너무나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귀를 뚫고 목에 문신을 하고 온 세상에 어찌되었건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한다. 그런 어리석은 외적인 것은 치워야 한다. 그분 안에서 기뻐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것, 주변 모든이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무엇의 노예인지를 말해준다. 그분에 뜻에 복종하는 행위가 우리가 노예임을 알려준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마음에 속에 들어있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보다 여러분이 복음화 될 수 있는 곳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릴만큼 그분께 매혹될 기회가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그리스도께 우리의 생명을 바칠 정도로 그분께 매혹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얻는 것이다.우리 자신을 그분께 제물로 바치자.
에스겔서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손실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제물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진정 그분과 동행한다면 큰 손실이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0:37-39, 16:24-25, 19:21, 마가복음 8:34-35), 누가복음 9:23-24, 14:33, 요한복음 12:25) 자신에 대해 죽음이 있을 것이다(로마서6:11). 우리의 삶에 위대한 것들, 숭고한 것들이 접목되기 위해서 잘라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은 신적 자극에 반응할 수 없던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셨고, 그 자리에 신적 자극에 반응할 수 있는 부드러움 마음을 주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분께서 저를 그 땅에서 인도해내시고 그분의 땅에 두셨다 (에스겔 36:24) 그리고 그분께서는 지난 수십년간 제 모든 우상과 더러운 것들로부터 저를 정결케하셨다 (에스겔 36:25) 이것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우리의 모든 삶을 그분께 바쳐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속해있는 것들을 더욱더 드러내실 때, 우리의 그것들을 언제나 기꺼이 그분께 넘기도록 그 태도를 함양하십시오.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런 것을 하기 위한 동기부여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진리의 획득은 그 진리를 살아내는 만큼 어렵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릴 급진적인, 희생적인 삶, 이런 삶을 살기 위한 동기부여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에 더 마음이 가도록 할 수 있는가? 진정으로 거듭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의 공로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에 대해 더 이해할수록 그들의 마음이 더 사랑으로 타오를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거듭나지 않은 영혼에게 제시하고 그들이 더 많은 듣게 될수록 그들은 하나님을 더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그들에게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고전12:3) 그야말로 천지 창조보다 훨신 더 뛰어나고 더 큰 능력을 보여주는 역사이다. 그분께서 사람을 회심시킬 때는, 썩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롬3:23-24, 고후5:17) 그 마음,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섭리의 역사가 보증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자녀가 더 알게 될수록, 그들의 마음에서 사랑이 더 많이 흘러나올 것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갈망이 타오를 것이다. 그 갈망이 그들의 의지에 영향을 미쳐서 그들의 기쁨으로 거룩함을 향해 달려가도록
롬1-11장은 온 힘을 다해 우리 마음이 타오르도록 로마 교회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오늘날 심지어 회심한 영혼조차도 이토록 무관심한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원칙 기반의, 윤리 기반의 기독교 유형이 되었다.설교자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뛰어나심과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선포하는 대신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해야 한다. 바울이 지금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바하심으로부터 단절된 사람이 어떠한지 이야기 한다. 부자에게 샌드위치를 준다고 기뻐하지 않는다. 가난한 곳에서 가서 주면 기뻐한다. 하나님의 성품, 인격,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일을 전적으로 감사히 여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전에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사53:6, 예17:9, 롬3:9-20, 23) 바울은 조직신학의 가장 가까운 것(로마서)의 16장 중 세 장에 걸쳐 힘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진가를 알아보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해서. 그런 다음 그는 4장과 5장을 거쳐 은혜와 믿음을 통한 구원의 놀라운 메세지를 전한다. 7장과 8장에 들어가며 어떻게 우리가 이 삶에서조차 승리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9-11장으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신실하심에 대해 얘기하고 우리 안에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그분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방금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토대로 이제 너희 삶을 산 제물로 바쳐라. 에배소서 4장도 동일하다. 에배소서 첫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깊은 신학이다. 4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너희 삶을 살아라. 이런 진리들이 그들에게 기독교 활동의 모든 세속적, 육신의 방식을 버리도록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교회를 세우고 교화시키는 일의 모든 세속적, 육신의 방식을 버리도록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에 대해 진정으로 더 알아갈수록 교회 성장과 교회 전략과 문신하는 것과 멋진 안경, 청바지 골프, 이 모든 어리석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더 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가 목사놀이나 하는 꼬마들의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명령하신 것들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을 위한 무기, 그것은 진리의 선포, 뼈가 흔들리는 중보기도, 희생적인 사랑이다.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군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마16:24, 막8:34, 눅9:23, 엡6:10-17)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여러분 모두 보다 약함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러분보다 더 절실함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침에 일어날 때 시계를 찾지 못하거나 양말을 잘 신지 못함에 하나님을 찬양한다. 약함은 문제가 아니다. 약함에 대한 인지가 부족한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그 약함을 발견할 때 마귀가 우리를 미혹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를 낙심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그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께 매달리십시오(고후 12:9)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은 은혜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이다. 이 말을 들을 때 자기 의지를 가지고, 강한 사람들, 비전을 발견한 굳건한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비전을 성취할 거야, 라고 착각할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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