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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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날 동안 머무르라.
많은 날 동안 머무르라.
지난 시간 잠깐 살펴보면 2:14절에 ‘내가 그를 타일러’ 였습니다.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말슴을 드렸습니다. 변화된 삶으로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은 자녀들의 이름이 바뀌는 삶이고 17절 다시는 그녀를 붙잡는 이방신의 이름을 기억하며 부르는 일이 없는 진정한 회복이었습니다. 20절에 그런 하나님을 ‘네가 알것이다’는 말슴이었습니다. 이런 길을 19절에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이라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3장의 짧은 구절은 그렇지 못한 고멜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회복을 말하는데 회복의 방식이 좀 이상합니다. 오늘은 그 부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사실 사랑할 수 없는 상태의 여인 고멜에게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하심이 어떠하신지를 이해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할 때 ‘이게 말이 돼’라고 하는 표현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방식이 말이 안된다 입니다. 마치 히브리서는 호세아서와 짝이 맞는 것처럼 백성을 자녀로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예수님의 형제됨까지 말합니다. 반응이 ‘그게 말이 돼’합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에 이해를 통해서 ‘정말 말이 되는구나’로 가는 믿음의 과정이고, 또 하나가 말이 안된다고 믿는 고멜의 삶입니다.
호세아서는 고멜은 등장하지만 하나님과 호세아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떤 자녀가 ‘왜 내 이야기를 나 빼고 해’라고 한다면 언뜻보면 맞는 말이죠. 그런게 아닙니다. 창세기 26:34–35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처럼 에서가 사십이나 먹고서도 한 행동이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을 일으켰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17:25 “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죠. 고멜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는 자유라고 착각하고 만끽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근심시키는 그녀의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흘러 간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길을 판단할 능력이 사라진 상태 그래서 내 생각만이 올바른 기준이라고 믿게 된다면 고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결국 떠내려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어서 라고 했습니다.
본문 1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로 시작합니다. 앞서 자녀의 행동을 보고 근심에 쌓여 부모가 대화를 나누고 그래서 불러 말씀하시는 순간처럼 읽힙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대화하십니다. 옳은 길을 떠나면 성령 하나님은 깊은 탄식으로 근심하시고 근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우리를 찌릅니다. 그리고 부모를 통해서 주변의 지인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권면 합니다. 히브리서는 ‘서로 돌아보아 피자 권면하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음녀가 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 명령하십니다. 호세아, 고멜 과연 누가 움직일 힘이 있을까요? 이부분을 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근 이혼숙려 캠프에 특이한 부부가 출연을 했는데 바람을 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 예전으로 돌이키기 위해 출연한 경우 였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바람을 핀 아내가’ 하는 말이 그때가 좋았다는 회상이었습니다. 이유가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줬다는 말이었습니다. 순간 놀란 패널들이 지금도 잊지 못한거냐 하니까 ‘아니 그때에 그렇게 느꼈다’는 말인데 늬앙스는 아직도 못 잊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죠.
1절은 그 여인의 처한 상태가 예전보다 더 안좋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우리 성경은 그런 분위기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직역을 하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다시 가라. 한 여인을 사랑하라’ 명령이 이어지고 이어지는 말씀이 ‘(그녀는 현재) 다른 남자에게 사랑을 받으며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입니다. 여기에 사랑 받고 있는 것은 내가 그 길로 가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에 의한 의지가 드러난 표현입니다. 특히 간음으로 번역되는 ‘우메나아페트’ 는 ‘피엘형’이라고 하는데 강조형 능동 분사로 표기되었습니다. 자주 사용하는 눅15장의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처음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은 ‘자기의 의지’이죠. 그러나 재산을 잃고 돼지를 키우는 농장의 삶은 흔히들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말처럼 ‘타인의 의지’에 의해 이끌려 다니고 더 한 것은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얻고자 해도 돼지가 먹을 것보다 가치가 없는 상태로 전락한 것을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생각과 몸도 지배를 받는 상태로 흔히들 ‘나락에 빠진’ 현실입니다. 흘러 떠내려가는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은 호세아에게 하나님께서 ‘마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바로 말이 안되는 상황에 부딪히는 지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 역시 ‘나를 사랑하셨다’는 곳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스스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말이 안되는 것은 큰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죽으심까지 이르는 사랑입니다. 로마서 5: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멜과 같이 말이 안된다고 하면다서 다른 신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신명기 31:18 “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레위기 19:4 “4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인 단순히 호기심으로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그들에게 참여한다는 적극적 의미이고 상호 작용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돌이킨다는 표현이 ‘파나 - 엘’인데 그렇게 돌아서니까 결국 누군가에게는 파나 민 - 즉 등을 돌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죠. 흔히들 ‘배신’이라고 할 때 하는 말로 등에다 칼을 꽂는다 하죠.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의 1. 2계명과 직결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3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는 말씀이 호세아 3:1 “그들이 다른 신에게 돌아서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번역은 ‘비록 그들이(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신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으며 건포도 과자를 사랑하고 있을지라도’ 인데요. 그 여인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의 ‘건포도 과자’ 어찌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돌아서려고 하면 그들에게는 큰 이유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흔히들 우리 교회는 교제가 없어서, 말씀이 너무 길어서 그런 이유들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겨 떠내려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내려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너는 다시 가서… 그 여인을 사랑하여라’는 말씀 밖에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듭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티비 프로그램이야기를 하면 다른 남자의 따뜻한 말은 추억하면서도 여전히 곁에서 사랑한다는 남편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프로그램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18일에 방송된 ‘개와 늑대의 시간 시즌2’ 10회를 시청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개에 대해서 훈련사는 사람과 같이 살 수 없는 냉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상은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개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무는 행동이 감정없는 본능에만 충실해서 훈련 조차 의미없는 결코 사람이 사는 곳에 공존할 수 없는 개였습니다. 정해진 답은 보호자가 개를 안락사시켜야 하는 방향으로 흘러 갔습니다. 하지만 보호자는 한 생명을 그렇게 버릴 수 없다며 소중한 가족보다 그 개를 평생 돌보겠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으로 이야기는 현재도 진행중입니다.
사랑은 이런 곳에서 꽃을 피웁니다. 호세아에게 ‘나 주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똑같이’ 호세아에게 ‘너도’입니다. 우리는사랑할 수 없는 수만가지 이유를 갖고 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내가 사랑한 것같이’, ‘너도’입니다. 마태복음 5:46–47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요한복음 13:34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풀어 쓰면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달게 받은 것처럼 십자가를 지라입니다.마침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이번 주 깊이 생각해볼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3절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까지 요구합니다.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입니다. 우리는 섣부르게 ‘돈’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은 열다섯 세겔, 보리 한 호멜’에 집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빚을 갚아 준 상태, 대신 치뤄 준 상태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그 행동에는 나의 손해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안하죠. 사실 대가는 누가 치뤄야 합니까? 고멜이 치뤄야 할 몫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치뤄야 할 몫인데 그걸 대신 치루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미 구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3절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많은 날을 나와 함께 살면서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고 나도 네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직역하면 ‘너는 많은 날 동안 나를 위하여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1. 음행하지 말고, 다른 남자의 소유가 되지 말고 그런 날들이 된다면 ‘나 또한 네게 그리하리라’는 신실한 맹세를 선언합니다.
중요한 것이 호세아서는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거룩한 회복에는 실제로 시간이 필요합니다. 레위기 8:33 “33 위임식은 이레 동안 행하나니 위임식이 끝나는 날까지 이레 동안은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레위기 14:8–9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여러분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회복의 의미입니다. 오늘 회개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한국교회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주변 교회가 회개가 마치 딱지를 뒤집는 것처럼 순식간에 뒤짚어 놓는 것처럼 말하지만 거기에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구원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을 통과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살아가겠다는 하나님 편에서의 부르심이고 초청이지만 그 초청의 무대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다림을 통해서 자기를 바꾸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시 돌아온 고멜을 향해 요구되는 ‘테쉐비’ 즉 거주한다는 의미는 그동안 자신의 삶을 멈추고 조용히 머무르는 ‘근신’과 ‘대기’를 의미합니다. 이 관계야말로 진정한 회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접속사 ‘키’는 왜냐하면으로 이어지면서 마찬가지로 범죄한 이스라엘의 회복 역시 ‘많은 날 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어 ‘에인’은 ~이 없다는 상태에서 정체 체제에 속하는 왕과 지도자들, 공적인 종교인 제사와 주상 또한 사적인 종교인 에봇과 드라빔은 하나님과 연결된 왕, 제사, 에봇이 우상인 주상, 드라빔과 연결해 혼합된 모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지난 해 우리가 살펴 보았던 소선지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포로의 상태를 말합니다. 심판으로만 여기졌던 시간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시간의 필요성을 소선지서를 시작하면서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고멜이나 이스라엘은 오직 호세아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절대적 빈곤의 상태로 이끄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지난 시간에 ‘그를 꾀어서 빈 들로 데리고 가겠다’는 광야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절대적 빈곤은 죽음을 향하는 길이 아닙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율법 ‘미쉬나’에는 결혼을 요구한 날로부터 자신을 준비할 수 있도록 열두 달의 기한을 준다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당시 신랑에게 그 시간은 아버지를 떠나 경제적 여건과 기반을 마련하고 새 집을 짓는 시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8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결혼을 하기 전에 일정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죠.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정한 시간을 통해 나의 준비를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예가 아브라함에게 13년간 침묵하신 하나님의 경우입니다. 이 이야기는 창12장에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과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아도 자기 생각의 변화와 삶이 바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사건의 발단은 창16장에는 가나안에 10여년 거주한 내용이 나오는데 문제가 자녀가 없는 시간이 오래되자 사래는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출산하고 결국 일이 터집니다. 이 이야기는 하갈과 이스마엘은 좇겨나고서야 일이 끝납니다. 관계가 다 깨지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창17장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는데 무려 13년간의 하나님 침묵이 있었습니다. 16에서17장 넘어오는 시간만큼 걸린 것입니다.
어땠을까요? 그 시간 말입니다. 고멜에게 필요한 시간,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시간, 어떤 사람은 남 탓하고 지낼 수도, 어떤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 보며 다시 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을 것입니다. 5절에 ‘그런 다음에야’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으며, 그들은 왕 다윗을 찾을 것이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길을 따른 왕입니다. 그런데 앞에 왕과 지도자들은 결국 혼합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세상 방식을 버리고 다윗의 길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하나님 백성의 참 모습을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아간다는 미래적 약속을 선포합니다.
이제 한 주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사실 고난이라고 해도 우리가 받는 고난은 오늘 본문에 고멜이나 반역한 이스라엘 같지 않습니다. 고난을 묵상하자고 말은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핍박을 심하게 받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이라고 한다면 말씀을 들어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고역 아닐가요? 만일 고난 주간 매일이라도 30분 말씀을 듣겠다하면 그것이 고난일 것입니다? 2천년 전 주님이 고난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 그분이 떠나시는 날에 남겨진 이들을 향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그리고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는 말씀은 많은 날을 머물러야 한다는 본문과 잘 부합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다리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의 끝인 대학에 입학하는 시간을 두고, 대학을 끝내는 이들은 직장과 경제적인 삶을 위한 시간으로, 나이든 부모는 그런 자녀들을 보면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부모의 늙음과 앞으로 있을 죽음이라는 이별을 가까이 둔 채로 살아갑니다. 각자의 기다리는 시간은 다른 것 같지만 큰 틀에서는 우리는 이 시간의 흐름에 ‘많은 날 동안 머물’러야 하는 시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혜있는 자는 흘러가는 시간을 아는 자입니다. 시편 90:12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에베소서 5:15–16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여러분들도 고난 주간 적어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떤 의미가 있느니 조금은 떨어져 관망하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골방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