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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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적 삶을 살고 있는가. 선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는가.
선교란 무엇인가의 질문 2차례, 선교지로 가기 전, 선교지에서
믿음의 3대, 믿음으로 인한 갈등, 그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던 것은 과정과정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 방향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그 기도가 쌓여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낫는지, 3대 가운데 가장 연약한 나를 주의 종으로 부르시기까지, 고난은 계속되었고 그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19살 가정의 이혼, 가정의 빚을 갚기위한 몸부림. 힘든 중에도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굶어본 형제들은 알아보고, 집 앞까지 찾아와 종량제에 먹을 것을 챙겨넣어. 그들의 행실은 질문을 남겼다. 왜? 왜 이렇게 살지? 그리고 그들의 행실 가운데 그들의 발걸음이 교회를 향했다. 공통점 말씀을 읽고, 기도를 했다.
질문이 생겨났고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행실을 따라한다. 말씀,기도. 그리고 이 땅에 복이 되기 위해서,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보냄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기적적인 것도 아니고 체험적인 것도 아닌 성경을 읽으면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다고 삶에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고민과 갈등이 끊이지 않던 때에 한 지체를 주목하게 하심(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그 기도 가운데 선교의 보여주신 환상, 그 답을 찾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들은 간증은 미적지근, 그래서 선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앞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 나아간다, 때로는 무릎으로, 때로는 눈물로 뜨겁게 주앞에 간구한다. 마음 가운데 확신 직접 가야겠다./ 이 시간, 오늘 말씀을 통하여 기도와 교제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과 그분의 선교를 함께 나눌 때, 우리에게 선교에 바른 이해를, 살아갈 힘 주실 것을 소망.
v4, [장차 오실 이와]
성경에 선교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선교는 교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선교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선교의 시작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분의 성품을 보고, 그분의 성실을 봐야 비로소 선교가 보인다. 사명을 주시고 인생을 허락하신 그 분이 어떤 분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몫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 선교의 시작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말씀은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v4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는 하나님께서 단 한번 본인을 소개하신 출애굽기에 말씀을 인용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셨다 하라.] 출3:14
ⓐ ‘스스로 있는 자’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소개가 필요하신가? 그렇다면 언급하신 이유가 있다.]
ⓑ 첫째, 스스로 계신자이신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시제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시간의 한순간, 역사의 한순간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과거에도 현존하시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현존하신다. [부모 말씀,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순종하면 이해가 된다. 하물며 하나님은?]
둘째, 하나님은 역사를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사도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를 기록할 때에, 문장 앞에 헬라어 전치사 ‘아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포’는 ‘말미암아’의 뜻을 가진 소유격 명사에 사용되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주격 명사와 함께 사용하면 틀린 문법임에도 사용한다. 본서에서 (8절, 4:8, 11:17, 16:5) 요한이 헬라어 문법 상 어긋나는 이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자 한 요한의 의도를 암시한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까지 강조하고자 했던 ‘장차 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 계획에 따라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를 재림시킴으로써 역사를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권력자들이 역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원수는 심판을 당하고 교회가 승리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지만 담대해야 할 것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이미 교회의 승리를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v8, [알파와 오메가]
ⓐ 하나님은 또한 사도 요한의 환상 가운데 임재하셔서 이렇게 본인을 소개하신다.
ⓑ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v8
하나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말씀하신다. 알파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글자이고, 오메가는 마지막 글자이다. 알파와 오메가라는것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글자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모든 역사의 주인 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에 인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처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끝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시작한 일은 본인이 책임지고 끝을 내신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끝내는 것은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예화, 어머니 다이어트]
1 John 4: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자세히 알아야 내 삶 전부를 걸 수 있을텐데, 하나님의 어떤 성품 때문인가?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을 한다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이곳에 사용된 theos agape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소개하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은 하나님 쪽에 초점이 있다. 무언가를 한다는 동적인 표현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양식이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랑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뉜다. 첫째, 무엇이든지 함께 하기를 원한다. 둘째, 무엇이든 해주고자 한다.
함께 하기를 원하는 사랑 속성은 한 [제빵사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그 도움이 필요해서인가? 그럼에도 함께하고자 한다는 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랑하는 내 성도들과, 또 피로 값주어 산 자녀들과 같이 하고 싶다는 부르심이고 초대이다.
v5, [우리를 사랑하사]
ⓐ 사랑하면 또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향해 같은 마음을 가지셨다.
ⓑ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v5
이 말씀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구속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늘 5절의 말씀을 예로 답변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값을 완납하셨다. 그 의미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 “다 이루었다.”,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는 헬라 시대에 상인들이 거래를 하면서 용서를 구할때 쓰는 언어였다. “이것은 다 지불이 되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얼마의 값어치를 완납하시고 지불하신 것인가. 아들을 값으로 지불하신 것이다. 그리고 값으로 거래한, 산 존재가 누구인가. 우리이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값으로 매기자면 얼마 짜리입니까. 예수님과 동일한 값어치를 가진다. 지불한만큼 그 값어치가 매겨진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값으로 지불하시고 완납하신 것이다.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으사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완납하셨다는 말은 ‘한가지를 뜻한다’. 우리가 구원의 완성까지를 내다보는 긴 구원의 여정을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것이다. 그것이 시간이라는 틀에서 펼쳐 나가고 있다. 십자가 구속 사건은 구원의 시작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는 그 완성된 시간이라는 과정 속에, 미래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다’. 사명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하나님은 ‘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보내다라는 헬라어는 ‘Misso’, ‘Mission’. 즉 선교는, 교회의 프로그램이 아니다. 부흥의 전략도 아니다. 보내시는 하나님의 본질이다.
타락한 피조세계 구석구석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대하고 확장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미션, 임무이다. 아들은 오셔서 주어진 미션에 순종하신다. 보냄받으신 예수는 임무를 완성하신 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 속으로 보낸다], 요17:18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어’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신다. 그리고 그 아들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보낸다라는 선교의 어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 출처가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v6,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 말씀은 선교의 시작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비추신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선교를 해야하는지. 선교를 가르쳐주신다.
ⓑ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v6
왜 성경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묘사하였을까.‘나라'라는 말은 한 개인이 누구의 통치 밑에 있는가 하는 개념이다. 또 성경에서 ‘왕같은 제사장이 되라' 라는 명령이 빈번히 나온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왕노릇을 하게 되어있다. 간혹 “그리스도가 왕이니까 우리는 나중에 그의 나라에 가서 시민, 성도 정도의 위치로 살아낼 것이다.” 이런 결론을 도출하여 묵상하는 사람을 자주 보곤한다. 하지만 절대로 틀린 말이다.
Rev 22:5, [세세토록 왕 노릇]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계 22:5
우리가 왕 밑에 있다고 있다고 합니까? 왕 노릇 한다고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할 것이다.
왕으로써 회복이 되려면 왕의 자리가 중요한가? 왕 다운 자격이 중요한가? 왕 다운 자격을 겸비한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워간다는 것이다. 왕 중의 왕이신 주님은 어떤 자격을 우리에게 보이셨는가?
섬기는 자로써,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자로써, 양보하는 자로써, 아름다운 말을 하는 자로써,
이 섬김이 왕의 자격을 가진 이가 나타내는 본래 우리의 모습이다. 왕의 품격을 보면 그 나라를 볼 수 있다. 예수가 보이신 왕의 그 자격과 모습을 내 삶에서 비추어갈 때 다른 이들도 그 나라에 살기를 원하게 된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속한 자들입니다. 이 땅에 죄와 거짓으로 지어진 왕권의 가치와 문화가 극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써 땅의 문화/민족에게 하늘소망을 선포하는 선교사로서 이 땅에서 살아간다. 예수가 보이신 왕의 모습, 가장 위대한 선교사의 모습을 닮아가며 그분을 따라 왕으로써, 선교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선교지에서의 일, 살려달라는 기도, 요나서 말씀, 기도의 변화, 빌리 그레이험 전도집회와 같은 변화가 있나?
되려 세달 뒤 의자에서 낙상, 선교의 바른 이해가 일상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
우리가 선교를 하고, 선교사로 산다는 것은 모두 선교지로 가는 걸 말하지 않는다. 선교는 내 죄를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사 우리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 속으로 보낸다’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선교는 내 중심을 보시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향기로운 삶으로 나타난다. 그 모든 예배와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되며 그 삶이 예배가 된다.
선교는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예배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그 첫 발자국부터 선교이다. 예배는 한 주의 마무리가 아니다. 예배는 이곳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모든 영광 올리고, 채움을 받아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배로 일상이라는 세상에 파송받는 것이다. 선교는 영원하지 않다. 예배는 영원하다. 선교는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예배를 통하여 내 의를 비워내고, 채움받은 은혜로 우리의 일상과 삶의 모든 현장이 선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위대한 선교사 되심과 같이/ 선교사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왕의 자격을 가진 자로써, 왕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소망을 가진 우리가 마땅히 갖춰야할 모습이다.
가난한자, 겸손한자,,,etc.
그런데 그런 삶을 살아내면 살아낼 수록, 선교사로서 살아낼 수록/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미련한 자와 같다고 말할 것이다. 때로는 교회에서도 바보와 같다. 그런데 이 얼마나 거룩한 부르심인가. 삶에 한결이라도 그분을 닮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분의 나라와 그 뜻이 이 땅에 이르기까지 거룩을 힘쓰고 예수가 걸어가신 좁은 길에 내딛는 순종의 걸음마다 평안이 깃들고, 그 평안이 여러분을 가득채워 범람함으로 거하는 모든 곳에 예수믿는 기쁨이 전파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