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_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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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2장_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kbxuHfKZCFA
Transcript:
(00:01) 읽겠습니다.
제2장 고난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런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린 바았으며 경고를 많이 지켰으며 즐거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비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 3절 말씀.
배척받는 예수.
본문 말씀은 메시아가이 세상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광고를 많이 겪었으며 줄걸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를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같이 우리도 그를 귀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 3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멸실를 퍼붓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01:02)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면 외면하고 믿지 않는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적극적으로 미워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이 찢어지는듯한 고통으로이 본문을 적어 내려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이 예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방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이스라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보셨으나 정작 그 백성들로부터 멸시와 배척을 받으실 것으로 가슴 아팠을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멕시아가 오셨을 때에는 알아보지 못할 것이었음므로 미통했을 것입니다.
(01:59) 부당하게 대접받는 예수.
그렇다면 대체 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 단순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왜 싫어하고 미워하며 부당하게 되져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들이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자신을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한 모든 고통이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절망할뿐 메시아 안에 있는 희망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을 멸시하고 박해하였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02:54) 첫째로 그분이 메시아임을 몰랐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분의 가르침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악하게 살아가던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둠인 자신들을 정지하는 빛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메시아를 멸시하고 박해하였던 것은 하나님 없이 어둠 가운데서 살고자 하는 악한 고집의 산물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 안에는 여전히 이러한 악한 고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와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무관심할뿐 아니라 심각한 적대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내면 깊은 곳에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망하는 목말음이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이거 그것이 무엇을 향한 목말음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03:42)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이 비통한 에고 속에서 한 가지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먼저 메시아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세상을 향해 그분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메시아에 대하여 당신 스스로가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지 먼저 안 우리를 통하여 증언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아쉬운 것 없이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이유가 죄인인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들어도 그들은 아란곳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자기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 사상에 더 환호하며 자기 좋을 때로 살아갑니다.
(04:3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자신 만만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메시아로 오신 그분을 부당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고상하고 아름다운 의무는 창조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시편 5장 11절.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주받은 피조물이라는 아름다운 지위에 어울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도 곧 불린 망아지처럼 하나님을 떠나 더 멀리 도망갑니다. 여기까지 읽겠습니다. >> 네. 어 소일 목사님 53쪽 >>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은 이들을 구원하여 새로운 삶을 허락하시고자이 땅에 오셨습니다.
(05:31)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정작 자신을 아무 아낌도 받지 못하신 채 십자가에 달려만 했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메시아를 향한 멸시와 천대는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메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모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구원받은 무리들은 연합의 교회 속에서도 말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공기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인하는 싫어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적인 구원의 간격이 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메시아에 대한 모욕입니다.
(06:21) 우리가 그분의 참 어 사랑을 알았더라면 단지 그분을 멸시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쓰레기같이 더럽고 쓸모없는 존재였던 우리가 먼저 찾아와 선레밀어 주신 그분을 어찌 열렬히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도 메시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어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모욕함으로써 하나님께 창조하신 세상을 더럽히는 것이 어찌 두고만 볼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의 대속의 공로로 간격할 줄 모르는 신앙 생활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속에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많해 많해져 있습니다.
(07:16) 메시아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악한 권세에 대한 영원한 승리를 확증하였음에도이 세상이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박해하는 것은 교회가 먼저 메시아의 대속에 대한 간격이 잃어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삶의 기반은 그리스도에게 두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두고 온 지파게 같은 것들을 교회 안에서 여전히 자랑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 그리스도이 이제껏 자기가 살아온 성김의 삶을 잡아오면 느끼고 안량한 도덕적인 생활의 긍지를 어 갖는 것은 서픈 일입니다.
(08:13) 그리스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에 빠져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거룩한 삶의 그리스도인의 낯선 개념이 된 것을 따지고 보면 우리를 위하여 세상의 몇시를 당하고 죽으신 메시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그리스도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아는 예수
이어서 성경은 그는 고를 많이 겪었으며 즐거를 아는 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간고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뜻은 아픔들, 고통들입니다. 그리고 즐거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뜻은 질병, 연약함입니다.
(09:04) 이 구절이 보여주듯 메시아의 지상생에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셨지만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을 받아들이셨습니다.뿐만 뿐만 아니라 당신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을 이해하며 품어주기 위하여과 고난을 스스로 당하시며 인간의 슬픔과 아픔에 자신을 복속시키셨습니다. 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은 이렇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인간들이 당하는 질병과 고통으로 하십니다. 죄의 고통과 가난의 슬픔도 아십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님에게로 나아오는 무리 가운데 병자들과 죄인들이 많은 것은 그분이 병자들과 죄인들 곁에 계셔 주셨기 때문입니다.
(09:5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셨으며 우리의 즐거를 아셨고 우리가 육체 가운데 있는 동안에 당하는 질병과 고통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 짓눌려 종노릇하며 살아가야 하는 비참함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위에 계신 분이지만 단지 하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7절 8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죄인들이 그분의 인격 안에서을 누리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즐거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고통 가운데 쉬는 말 때 눈과 공감만 해주어도 마음이 물같이 높니다. 신방을 받으면서 혹은 상담을 하면서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다가 상대는 어 나보다 더 큰 고충을 지고서 살아왔음을 깨달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우리가 깨닫는 사실이 바로
(11:00) 이것입니다. 가난의 고통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좌절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픈 신을 그분은 모두 아십니다. 그리고 고를 많이 겪고 즐거를 아는 그 경험으로 그분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대속재물로 바치신 것은 이러한 간고와 즐거의 궁극적인 원인을 제거하사 인간을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멸시를 당하는 예수.
그러나 이어지는 이사야의 예언은 더욱 참담합니다. 이사야 선진한 메시아가이 땅에 받게 될 대우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 머리를 가리우는 것 같이 멸치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뒤지 아니하였도다.
(11:53) 죄가 없으신 그분이 질고를 아시게 된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멸시했습니다.이 예험 앞부분의 히브리어 원부분은 원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쳐다보지 않으려고 우리의 얼굴을 가리는 취급을 그 그에게 멸시를 주었다. 지급하여 그에게 멸시를 주었다. 다시 한번 읽게요. 우리는 쳐다보지 않으려고 우리의 얼굴을 가리는 취 취급하여 그에게 멸시를 주었다. 우리의 눈은 가려져 있습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참된 구속의 비밀은 감춰져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으셨던 말구유를 만져보고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누으셨던 아리마데 요셉의 무덤을
(12:56) 들여다 보거나 골고다운 덕을 걸어 올라가 보는 것으로는 그 놀라운 구속의 신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의 누르로만 파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누르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볼 때 비로써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분이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우리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을 우리의 육신의 누리로는 볼 수가 없었고 느낄 수 없었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합니다. 그분이 거룩한 인격을 경험하고 그분이 왜 영광을 버리고 멸시를 받아 받는 생일을 사셨는지 알게 될 때 우리는 겪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위험을 보고 즐거를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13:48)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좁게는 선지자 자신을 포함한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니라. 이러한 표현은 성견 성경 문학상 예언적 과거라는 것으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표현함으로써 영원의 현실감을 더하는 수사법입니다. 쉽게 말해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잠시 하나님의 시각으로 돌아가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나 현재 미래가 없이 모든 사물을 한 번에 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 없이 이상할 것 없 이상할 것이 없는 표현입니다.
(14:45) 앞서 연급된 멸시와 천대 즐거에 비하면 귀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닐 일 같습니다. 그러나 오히려이 예언이 더 우리의 마음에 아프게 다가옵니다. 멸시와 천대 즐고를 주는 주체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아니하였도다라는 구절의 추세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먼저 메시아를 알아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에게 무관심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는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받은 이러한 무관심이 육체의 고난보다 더 아프셨을 것입니다. >>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그리스도.
여러분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바르게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 확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삶과 신앙 가운데 그 무엇과도 대체할
(15:51) 수 없는 소중한 분인이십니까? 여러분에게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세상에 있는 사랑과 자랑들의 헛됨을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에 아무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는 보게 합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과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시아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자들의 마음의 눈에 눈을 밝히사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분의 인격과 삶이 자신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직접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16:46) 우리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듣는 이에게 구원얻은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 믿음의 눈은 연한 순과 같고 많은 땅에서 나오는 뿌리 같아서 고모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메시아를 구세로 고백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유일한 소망이 바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영접하는 자들만이 잘라는 영광으로 빛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따라 살며 불순종과 반항의 삶을 계속하는 이유는 십자가의 영광의 빛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영적 생활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7:40)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세상에 대한 자도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면서도 넘치도록 그분의 사랑이 부어졌어도 단해적으로 경험만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구원을 받은 순간 단 한 번이면 족할 일이 아닙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십자가의 감격을 누리고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바로 보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일이 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간격이 간격에 힘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였던 우리의 죄와 불신을 미워하며 살 수 있습니다.
(18:38)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눈을 가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무관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의 자신은 주인님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소망임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 인생에 대해서 권해하지만 메시아를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그 권해는 고뇌로 그칠뿐 자신의 인생을 고쳐 주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면 불행한 삶을 순명처럼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고 그리하여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싶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더욱 거룩해져 가는 것이 바로 믿음에 사는 삶입니다.
(19:30) 홀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홀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회를 보면 그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스스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십자가가 있고 그 십자가는 오롯이 자기가 져야 합니다. 멸시를 받고 버림받으시면서도 당신이 감당하셔야 했던 즐거와 고를 홀로 감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우리 홀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십자가를지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을 악망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0:17)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으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위해 울기 전에 먼저 교회를 위해 울어야 하고 세상이 변한 것 때문에 놀라기 전에 먼저 교회가 변한 것 때문에 놀라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자신의 번영과 행복이 우상이 되고 자아의 시련이 최고의 가치가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이 행복하도록 돕는 한도 안에서만 하나님도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인간 중심의 기독교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12)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바르게 알고 있습니까?과거에 과거에 알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왜이 땅에 오셨는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가슴게 깨닫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감격하며 흘리는 눈물이 신자의 눈에서 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진채 세상을 향하여 달려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 어 죄송한데 다음 분이 좀 읽어 주시겠어요?
예수를 안 사람으로 살자.
예수를 안 사람으로 살자. 아무리 그럴 듯 보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도 아무리 오래 교회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도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헌신적인 삶을 신앙의 자랑으로 삼아도 신앙을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는 한 그의 존재는 입만 무성할뿐 열매는 열매는 없는 가지와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22:10) 그러한 형식뿐인 삶으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복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매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없이 그 누가 그분에게 메었다고 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중심에 메시아 메시아에 대한 경험이 자리하고 있지 않다면 신앙생활의 그 어떤 덕성도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 다가게 이끌니다. 십자가의 경험 없이도 도덕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귀결은 자기 애에 자기 의에 빠지는 것뿐입니다. 그러한 위선의 삶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공고히 싸운 자기 의를 허물기가 어려워 더 그리스도를 만날기 힘들게 됩니다.
(22:59) 그리스도가 아닌 것 아닌 다른 것으로 스스로 만족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심령의 가난함을 잃어버려 결국은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으십니까? 훌륭한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행이나 도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먼 그저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그리스도 때문에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23:40) 여러분의 마음을 그 말씀 속에 적게 하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어 주사 그 말씀 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뵐 수 있게 되기를 구하십시오. 이제껏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없이 이어온 신앙생활의 화함을 인정하고 더 이상 그러한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결단하십시오. 정직하게 복음 앞에 서서 지금껏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진지함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우십시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가득차 있지만 모든 사람이 성경을 통해 그분을 깊이 만나지는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말씀 앞에서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24:24)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망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진심으로 깨달아 거기에 거기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권고함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얼핏 비관적으로 보이는 선지자의 고백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 탄식은 역설적으로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큼은 존귀하게 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임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무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그릇 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외모로 판단하며 멸시할 수 있습니다.
(25:08)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적어도 그분이 구속하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는 세세토록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이유가 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이 세상에서 받으신 것과 유사한 대접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길을 그 길을 가실 작정이 서셨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이 세상에서 진리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쯤은 개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행 사도행전 20장 24절. 이것은 자신의 인생을 하찮게 여기거나 포기해서가 아닙니다.
(25:55) 세상에서 대접받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에 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일평생 메시아로 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고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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