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나귀

주일오전(2026)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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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여러분 혹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는 전래동화를 아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도 읽었던 동화책에도 등장하는 동화인데요,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옛날옛날에 어느 한 나라에 임금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임금님은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고군분투 하고 있었는데요, 어느날 임금님이 거울을 보는데, 거울에 비친 자기 귀가 전 날보다 길쭉해져 있는 겁니다. 임금님은 너무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지고, 누가 알아볼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그날 부터 신하들이 알아볼까봐 노심초사하면서 길어진 귀를 모자속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이 귀는 계속해서 길쭉해지기만 한 것입니다. “내 귀가 당나귀 귀 처럼 길쭉하니, 모자로도 잘 가려지지 않는구나. 이를 어쩌면 좋을꼬”하면서 자나깨나 길어진 귀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결국에 임금님은 모자를 만드는 장인을 몰래 불러서 길쭉해진 귀를 잘 가릴 수 있는 모자를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말아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모자 장인은 임금님에게 귀를 가릴 수 있는 모자를 바쳤지만 자꾸 입이 근질근질해졌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하면 목숨을 잃을 것 같고, 그렇다고 말을 안하고 살자니 입이 근질거려서 몸살도 나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 이 모자장인은 사람들이 없는 대나무 숲으로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나무 숲 안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 사람이 외친 말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그 대나무 숲 주변을 걷던 사람들에게 들리고 맙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숲에서 계속해서 그런 말이 들리니까 결국엔 온 백성에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는 소문이 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온 나라에 소문이 퍼졌다는 것을 알게된 임금님은 너무나도 근심걱정이 가득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랏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신하가 왕에게 말하기를 “임금님의 귀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것인데, 어찌 귀가 길어진 것이 흉한 것이겠습니까”라고 진언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은 임금님은 길어진 귀 때문에 가지고 있던 창피함과 근심을 내려놓고 당당하게 귀를 보이고 살아갔다,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는 전래동화입니다.

종려주일

이 동화는 진실은 결국 감출 수 없다 라고 하는 교훈과, 지도자는 백성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라고 하는 교훈을 전해주는 동화입니다. 삼국유사에도 쓰여질 정도로 꽤나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동화인만큼 아는 사람도 많은 동화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 동화에는 숨겨진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제목에서도 드러나는데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는 말은 결국에 임금님 귀가 우스꽝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임금님, 곧 왕이라고 하는 존재가 당나귀라고 하는 동물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또 당나귀라고 하는 동물이 왕같은 귀한 신분과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우스꽝 스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임금님 귀는 토끼 귀! 라고 했으면 어떨까요? 우스꽝스럽다기 보다는 좀 귀엽게 들렸을 것 같아요. 그만큼 왕과 나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임금님 귀는 웃기게 생겼어! 라는 말로 저희는 알아듣게 됩니다.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했던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다는 말씀이 성경을 많이 읽는 분들에게는 하도 익숙해서 놓치기 쉬운데요, 나귀를 타는 왕의 모습 역시 생각해보면 굉장히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함께 살펴볼까요? 본문말씀의 1-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큰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 근처로 다가오셨습니다. 거기서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자, 저기 맞은편에 보이는 마을로 가서, 다 큰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매여있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매여있는 것을 풀어서 이리로 끌고 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아마 제자들이 속으로 “아니 매여있으면 주인도 있을 것인데 그냥 가져오면 그거 훔쳐오는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누가 와서 너희에게 뭐라고 하거든 주님께서 쓰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라. 그렇게 하면 바로 그 나귀들을 보내줄 것이다.”

멍에 메는 짐승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의 4-5절 말씀에는 왜 굳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특히 5절 말씀은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요, 한번 함께 오늘 본문말씀 5절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볼까요?
Matthew 21:5 NKRV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시온의 딸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인데요, 이 이스라엘에게 한 왕이 임하게 되는데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의 새끼를 탔도다, 라고 하는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예언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5절 말씀에 그 나귀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되어 있나요? 멍에를 매는 짐승 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을 태우는 짐승이 아니라, 특히나 왕을 태우는 짐승이 아니라, 멍에를 메는 짐승, 또 헬라어 원문을 보면 짐을 지는 짐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흔히 공주님을 구해주는 왕자님 같은 동화 속 이야기들을 보면 꼭 백마를 타고 멋있게 등장하는 왕자님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멋드러진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백마탄 왕자 같은 모습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나귀가 지는 멍에, 혹은 마치 짐짝과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회개하라!”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서 한 말이 있습니다.
John 1:29b NKRV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왕,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쟁을 멋드러지게 승리하여 개선하거나 공주님을 구하러 오는 백마탄 왕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서 마치 짐짝과 같이, 멍에와 같이 나귀에 매여오시는 왕이십니다. 그 몸 안에 우리의 죄를 욱여넣은 짐 보따리 처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달리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왕, 곧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바로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인 줄 믿으며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호산나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6절부터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하신대로 해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그 위에 얹어서 안장으로 만드니까 예수님께서 나귀에 올라 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문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예수님을 따라왔던 무리들이 겉옷을 벗어서 마치 레드카펫처럼 쫙 깔고, 그 위에 나뭇가지고 길에 펴서 장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는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는데요 본문말씀 9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Matthew 21:9 NKRV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서 호산나! 라고 하는 말은 직역하면 “지금 구하소서!” 다른 말로는 “부디 도와주소서!”라고 하는 말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외치는 호산나! 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사람에게 붙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진 왕이라고 한들 결국에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당시의 로마의 황제가 자기 자신을 신의 아들로 여기면서 황제를 숭배하게끔 했음에도 결국에 로마 황제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호산나! 라고 외칠 때에는 예수님이 단순히 사람이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시편 118편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Psalm 118:25 NKRV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기서 등장하는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호산나 입니다. 그것을 지금 누구에게 구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 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실, 교회에서 하도 구원, 구원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다보니까 가끔씩 이 구원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의 뜻을 좁게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뜻이냐면요, 예를 들어 왕이라고 한다면 백성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생각해보세요. 왜적의 침입에 맞서 싸움을 통해서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의사들을 생각해보세요. 약을 처방하고 수술을 하는 등 치료행위를 통해서 질병으로부터 환자를 구원하지 않나요? 이처럼 어느정도는, 어느 의미에서는 사람도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백성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구원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외칠 때에 백성들이 구하는 구원은 사람에게서 날 수 있는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Romans 3:23–24 NKRV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해있지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 죄인들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는 것, 이것은 사람이 하는 구원이 아니라,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 라고 외치며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에, 예수님을 통하여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여러분과 제가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 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갈릴리 나사렛

다시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10절 말씀부터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외치면서 들어오니까 온 성이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서로 “이보시오, 저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이 난리인거요?”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오던 무리가 거기에 대답하는데요 본문말씀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Matthew 21:11 NKRV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누구냐고 물었더니 뜬금없이 예수님의 고향 지명을 이야기합니다. 이건 단순히 출생지나 아니면 예수님이 무슨 시골 출신이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불과 5키로정도 떨어진 곳에는 세포리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었는데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시기에 이 도시에서 로마와 헤롯 대왕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 병정들은 이야기를 잘 들어보거나 달래려고 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이 도시를 완전히 불태우고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반란에 동참한 유대인 2000명을 다 십자가 형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5년 뒤에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의 통치자가 되면서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이 세포리스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는데요, 아주 큰 도시를 세우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가정이 목수 집안인 것은 아시죠? 아마도 요셉이 이 세포리스 건설에 투입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두고서 예수님보고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붙이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건 시골 출신이라고 낮잡아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치 반란군의 수장으로 알고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영웅으로만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되셨나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마자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고 따랐던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져버렸습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을 베푸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로마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용사를 바랐던 사람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때에 영생이라는 것이 있구나!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고 제자들이 먼저 바뀌고, 그 후에 많은 이들에게 전함으로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치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로마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생각했던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을 자기 뜻대로, 자기 입맛대로 믿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구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맛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기억해야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고상하고 고고한 왕이 아니라 마치 나귀위에 지어진 멍에와 짐짝처럼,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처럼 세상에서는 손가락질 받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지언정, 나귀를 타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진정한 왕이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 주일마다, 또한 삶의 순간 순간마다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 라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영웅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입맛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맞이했던 백성들처럼,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왕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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