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통과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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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종려주일)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종려주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환영했던 날이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승리하게 해주실 것이다.” “이제 강해질 것이다, 잘 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말한다. 그 길이 바로 우리가 따라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길을 정말 따라갈 수 있는지 오늘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 있는가? 학교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걸 말하면 더 일이 커질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넘어간 적 있는가? 친구가 나를 기분 나쁘게 했는데 참으면 내가 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말하면 관계가 깨질 것 같고 그 사이에서 고민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한다. “왜 내가 참아야 하지?” “왜 내가 손해 봐야 하지?” 그런데 오늘 말씀은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손해 보는 길처럼 보이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길을 실제로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2장은 옛날 사회에서 “종” 또는 “노예”로 살던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심부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에 속해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에는 이런 종들 중에서도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거의 자유가 없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큰 농장에서 일하던 종들은 주인에게 많이 억눌려서 힘들게 살았고, 어떤 종들은 광산 같은 곳에서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아주 힘들게 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가장 심하게 고통받는 종들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가정 안에서 일하던 종들을 향해 주어진 말씀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베드로는 노예 제도를 없애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노예 제도를 없애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억지로 바꾸려고 하면 큰 싸움과 피 흘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을 따로 저축할 수 있었던 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종은 자유를 얻을 수 없었다. 많은 가정에서 종과 주인은 가족의 일원으로 대해 주었다. 그러나 법의 기준으로 종은 사람이면서 재산으로 보았다. 심지어 어떤 주인은 종을 재산으로 취급하고 학대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주인은 종을 사회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했다.
그러나 1세기의 시대처럼 현대에 종과 노예로 불리는 일은 없지만,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장과 아르바이트 또는 회사에 상사와 부하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처럼 학생인 경우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를 떠올리면 된다. 오늘 베드로는 사회적으로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좋은 선생님이나 좋은 사장님을 만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마음이 삐뚤고 심술궃고 사악한 선생님이나 사장님, 직장 상사를 만날 수도 있다. 좋은 사람들이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까다로움은 어쩌면 정신적으로나 불합리하고 과도하게 일을 시켜 신체적으로 학대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월급이나 성적도 제대로 주지 않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은 환경을 주거나 말도 안되는 일들을 시킬 수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여러 면에 있어서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에서 나쁜 선생님이나 사장님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조차도 순종하는 이유가 “주를 위하여” 그곳에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선생님이나 사장님들이 죄를 짓도록 명령하는 경우에는 복종해서는 안 된다. 주일에 예배를 빠지고 일을 시키거나 공부를 시키는 선생님의 명령은 과감하게 거부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타락 속에서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들 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권위들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죄를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왜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베드로 사도가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대로,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기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고통을 참는 사람이다. 베드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당한 고난을 통해 다가오는 다양한 종류의 정신적 고통이나 슬픔들을 인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당한 고난과 함께 찾아오는 슬픔을 단순히 참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사람이 하나님을 의식하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는 주변에 모든 방해로부터 이겨내라는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서 스스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오래참는 끈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심과 그분의 영원한 돌보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베드로의 가르침은 철학자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고난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사장님이 아무리 부당하게 일을 시키시더라도 그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반항하거나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연민을 갖거나 절망감 없이 악독한 사장에 말에 복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근거하기 때문인가? 바로 하나님이 결국 언젠가 반드시 그 모든 악행들을 바로 잡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저 바보처럼 참으라고 던져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쁜 사장님이라도 그에게 복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고난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고난을 통해 어떤 종류이든 상관없는 인내가 아니라 부당한 고난을 감내하는 인내이다. 죄가 있어서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처벌받아 마땅한 죄값에 대해 받는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을 훌륭하지도 특히나 칭찬할만하지도 않다. 많은 범법자들도 그들이 받을만한 형벌을 받고 있음을 알기에 불평 없이 그 처벌을 견딘다.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잘못해서 혼나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했는데도 힘든 일을 겪는 경우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꼭 어떤 특정한 행동 때문에만 고난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 우리가 선하게 살려고 할 때 전반적으로 겪게 되는 어려움까지 포함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왜 내가 당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고, 상대에게 화를 내거나 되갚아주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그 순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반응은 힘든 일을 당할 때 화내거나 되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참음은 그냥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끝까지 견디는 인내이다. 즉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억울하게 당한 일도 다 알고 계시고, 결국 바르게 판단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태도는 쉽지 않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과도 반대되는 선택이다. 우리는 보통 억울하면 화내고 싶고, 되갚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을 믿고 참고 견디는 모습이 진짜 믿음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기쁘게 여겨지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인데, 그 부르심에는 때로 억울한 고난을 겪는 삶도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당시 종들뿐만 아니라, 학교, 가정, 인간관계,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 아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뿐만 아니라,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바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또한 우리는 일부러 고난을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고난이 올 때에는 하나님이 그 상황 속에서 우리를 더 가까이 이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편한 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이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며, 말로도 거짓이나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으신 완전히 깨끗한 분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으셨지만, 욕을 들으셔도 되받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셔도 위협하지 않으신 분이다. 보통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화를 내거나 되갚아주고 싶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셨던 분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번 참고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께 자신과 상황을 맡기며 신뢰하는 삶이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결국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감정을 억지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할 수 있으며,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의 모습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은 복음의 핵심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구약 성경 이사야 53장에서 우리의 구원자인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이러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예언했던 말씀을 베드로가 인용한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어야 할 죄의 책임과 벌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넘기셨고, 예수님이 그것을 대신 감당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받아야 할 심판 대신 용서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죄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것은 몸의 병이 아니라,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원래 우리는 길을 잃은 양처럼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아가던 존재였지만, 이제는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꿈사땅 여러분, 예수를 따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은 우리에게 그저 손해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임마누엘이라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어마어마한 축복이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은 편재(어디에나 계심)하시고, 영원(어느 때나 계심)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 있다고 느껴지는 그 곳에서도 누가 함께하시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곳이 심지어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공포스러운 순간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어디를 가든지 나의 모든 상황과 나의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함 속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억울한 모든 상황을 경찰이나 CCTV가 보지 못하더라도 누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신가? 바로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기에 우리는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복수를 누가 해주시기 때문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억울한 상황이 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이 친구가 예수를 알았으면 이러한 행동을 했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이 친구가 예수님 끝까지 안 믿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텐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드리길 소망한다. 결국 살아있는 동안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담당하신 죄값을 믿기만 하면 사해질텐데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본인이 스스로 영원히 죄값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면 참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를 따르고 믿는 사람들도 반드시 자신의 행동에 하나님께서 그에 따른 징계와 벌을 내리신다. 언제 동안인가? 감사하게도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이 나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여러분 또한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일은 반드시 그에 따른 댓가를 살아있는 동안 다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죄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길 소망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내리신다.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은 그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에게 성장을 주기 위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억울하게 당한 고난이든지,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난이든지 모든 상황 속에서 성경 말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올려드리는 여기 모인 꿈사땅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