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29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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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겟세마네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태복음 26:47-56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그날의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 장면만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 같습니다. 환호하고, 길을 닦아드리고, 왕처럼 맞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습니다.
불과 며칠 뒤, 같은 도시 예루살렘에서,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호산나를 외치던 입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기까지, 겨우 닷새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 사람들이 갑자기 나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대한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강한 왕을 기대했습니다. 다윗처럼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 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셨고, 성전에서 상을 뒤엎으셨고,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원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대가 무너지니까, 환호도 무너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그 기대가 완전히 깨지는 순간입니다. 종려주일에 이 본문을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환호했던 군중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제자들까지 떠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47절입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지금은 밤입니다. 장소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이 방금 기도를 마치신 직후입니다. 그때 유다가 무리를 이끌고 옵니다.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체포입니다.
48-49절을 보면, 유다가 미리 신호를 정해 두었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그리고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춥니다. 입맞춤은 당시 유대 문화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과 친밀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친밀함의 언어를 배신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매우 아픈 장면이지만, 오늘 우리가 집중할 곳은 이 뒤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50절에서 예수님은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그리고 무리가 예수님을 잡습니다.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으십니다. 도망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이 모습은 제자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완전히 다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정도 능력이면 로마도 이기실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칼과 몽둥이를 든 무리 앞에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한 사람이 움직입니다.
51절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귀를 베어버린지라."
마태복음은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요한복음 18장 10절은 이 사람이 베드로라고 기록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베드로는 칼을 뽑습니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립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 마태복음 26장 3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리고 지금, 그 말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을 드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무장한 무리 앞에서 칼을 빼는 것은 자기도 죽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 이 상황을 막아야 한다. 이 마음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52절입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충성을 거부하십니다. 칭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단호하게 제지하십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칼을 막으신 이유는 베드로의 마음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지만, 자기 방식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내 힘으로 상황을 바꾸겠다, 내 방법으로 예수님을 지키겠다. 이것이 베드로의 칼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칼을 거두라고 하신 뒤,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53절입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이라도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한 군단은 로마 군대의 기본 단위로 약 6,000명입니다. 열두 군단이면 72,000명이 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잡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지금이라도 천사의 군대가 옵니다. 나는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체포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체포당하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자발적 순종입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바로 다음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54절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이 말씀은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천사를 불러서 힘으로 이길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이미 고난받는 종을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하나님의 구원은 칼로 이기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으로, 심판이 아니라 자기 희생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칼로 예수님을 지키려 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로 베드로를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방향이 정반대였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 이 상황은 위기였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상황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에 익숙합니다.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을 보십니다. 어쩌면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내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가 먼저입니다.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조금 위험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잘 생각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지적하든, 권면하든,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이 기본으로 깔려 있지 않으면서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첫째 아이를 혼낼 때가 있습니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정말 엄하게 혼냅니다. 그런데 때로는 내 감정이 올라와서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 혼내고 나서 사과합니다. 아빠가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잘못된 부분은 정확히 짚어줍니다. 제가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이 기본으로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하나되는 것을 깨가며, 그것이 깨어지면서까지 어떠한 일을 이루는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지금 이 상황을 이겨낼 수많은 방법이 있었다. 능력이 있으셨다. 예수님이 뭘 못하시겠는가? 그런데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신다.
그래서 본문 56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다 된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 한 절 안에 두 문장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이 두 문장의 대비를 잘 봐야 합니다.
첫 번째 문장.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지금 이 상황은 혼란이 아니다,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루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체포당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서 계십니다.
두 번째 문장.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지금 이루고 계신다"라고 선언하신 바로 그 직후에, 제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떠납니다.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시선입니다.
예수님에게 이 체포는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이었고,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끝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방금 전까지 칼을 든 사람이었습니다. 겁만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도망합니다. 단순히 무서워서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예수님의 모습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강한 메시아를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 천사를 부를 수 있다면서 부르지 않으십니다. 승리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잡히십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품어온 기대가 이 순간 완전히 무너집니다. 기대가 무너지니까 믿음이 흔들립니다. 믿음이 흔들리니까 두려움이 들어옵니다. 두려움이 들어오니까 떠납니다.
"다" 도망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한두 명이 아닙니다. 전부입니다. 충성을 맹세했던 베드로도, 가장 가까운 세 제자도, 모두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를 놓치면 안 됩니다. 같은 상황 앞에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고, 제자들은 무너졌습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본문 바로 앞에 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6-46절,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이것이 쉬운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십자가가 두려우셨습니다. 그 잔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 자신의 원함을 아버지의 뜻에 맞추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과하셨기 때문에, 체포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시간을 놓쳤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이나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세 번 다 잠들었습니다. 기도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기도로 준비되어 있었느냐의 차이입니다. 기도는 상황을 바꿔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내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방법 앞에서 떠나지 않고 설 수 있습니다.
청년 여러분, 이 이야기는 2,000년 전의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기대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기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이만큼 기도했으면 응답이 와야 하지 않나. 성실하게 살았으니 그에 맞는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나.
졸업을 앞두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원하는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맡겨진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관계를 위해 기도했는데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 손해를 보는 자리에 놓입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조용히 무언가가 올라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인도하고 계신 건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뿐입니다.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예배에 나오지만 마음은 이미 멀어져 있습니다. 기도를 하지만 형식만 남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지만 속으로는 떠나 있습니다.
그 모습이 제자들의 도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쁘다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시니까 떠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싫어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내 기대와 다를 때,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조금씩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떠난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루고 계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판단이 맞았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맞았습니다.
체포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방법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도망친 그 어둠의 밤 뒤에 십자가가 있었고,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이 떠난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그 방법이 제자들의 기대와 달랐을 뿐입니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그 시간에,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내 기대와 다를 뿐입니다. 내 눈에는 실패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계획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길이, 하나님이 이루고 계신 길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순간에 내가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방법은 내 기대와 다를 수 있습니다. 내 계획과 어긋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제자들은 떠났고, 예수님은 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에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내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방법 앞에서 떠나지 않고 따를 수 있습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에게는 각자의 겟세마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 내 기대와 다른 현실 앞에 서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그때, 나는 떠나겠습니까. 따르겠습니까.
제자들은 떠났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도망친 그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약해서 떠나는 순간이 있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먼저 결단할 수 있습니다.
내 기대와 다를 때에도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겠다고, 떠나지 않고 따르겠다고, 그 기도를 오늘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