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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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설교 제목: 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네

본문: 요한복음 17장

서론 (2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가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줄 때 큰 위로를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단순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나는 당신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라는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7장은 아주 특별한 장입니다. 우리는 이 장을 흔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아버지께 올려드린 기도입니다 . 여기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가장 깊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는가, 무엇을 간절히 구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흐릅니다.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십니다(1–5절). 그다음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6–19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차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 곧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20–26절).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게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옆에 분에게 말해줍시다. 예수님이 지금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세요.
*지금부터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1) 성경 해석

1-5절을 보면,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가 결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의 전제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었습니다'(4절)라는 선재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 누가 하나님 앞에 서서 '제게 주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매일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의 선언입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슈베르트는 죽기 전에 '미완성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그 곡은 아름답지만, 듣는 내내 어딘가 끝나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미완성 교향곡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완성된 악보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음표를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 6절 이후로 읽어 보면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특별히 6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또 9절에서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서는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라고 기도하십니다. 15절에서는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단순히 ‘사역의 동역자’로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십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곧 예수님이 붙잡히시면 제자들은 흔들릴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인할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도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실패를 예상하시면서도 그들을 정죄하는 기도가 아니라 붙들어 달라는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기도는 내 힘으로 상대를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드실 수 있음을 믿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는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그를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쓰고, 하나님 앞에 이름을 올려드린다는 것은 “당신은 내게 중요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의 고통이 크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자기 사람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사랑이고, 이것이 바로 구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2) 증명

이 예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13장 1절과 연결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말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기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사랑하셨고, 기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 이야기를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고, 목자가 목원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가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사랑의 행위입니다.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는 사랑을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적게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합니다”라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아직 얕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이 서툴러도, 표현이 부족해도, 한 사람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깊은 사랑입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내가 품고 기도하는 이름이 있습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요즘 너무 약해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힘도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네가 누구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느냐”보다 예수님이 너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도, 지칠 때도, 믿음이 흔들릴 때도 주님은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2.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의 하나 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합니다

1) 성경 해석

요한복음 17장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 됨입니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21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22절과 23절에서는 그 기도가 더 강조됩니다.
특히 23절을 보십시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은 성격이 비슷해서, 취향이 같아서, 갈등이 없어서 이루어지는 하나됨이 아닙니다. 이 하나 됨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닮은 연합입니다.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이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와 형성하는 연합입니다.
예수님은 왜 하나 됨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셨습니까? 본문에 답이 나옵니다.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화려함보다 그 교회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성도들의 관계를 봅니다. 정말 예수님이 보내심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신지, 정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지를 어디서 보느냐? 교회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되는 모습에서 봅니다.

2) 증명

이 진리는 요한복음 13장 34–35절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은 “너희가 논리적으로 완벽하면”, “너희가 큰 건물을 가지면”, “너희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면” 내 제자인 줄 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세상에 큰 충격을 준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가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알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끼리끼리 모이는데, 교회는 그 장벽을 넘었습니다. 그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보여 주는 증거였습니다.

3) 적용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분열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미움과 비교, 서운함과 판단, 파벌과 냉소는 단지 인간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에 역행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연합을 말할 때 종종 오해합니다. 하나 되려면 갈등이 아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 됨은 갈등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갈등보다 더 큰 복음 안에 함께 머문다는 뜻입니다.
혹시 내 안에 아직 풀지 못한 미움이 있습니까? 오해한 채 멀어진 지체가 있습니까? 같은 교회 안에서도 “저 사람은 나랑 안 맞아” 하며 마음의 선을 그어 놓고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역행하는 생각입니다. 교회의 연합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먼저 손 내미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옳음을 조금 내려놓는 십자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 되어 갈 때 세상은 보게 됩니다. “아, 저 공동체 안에는 정말 다른 힘이 있구나.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시는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1) 성경 해석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죄 많은 백성 대신 하나님 앞에 서서 속죄와 중보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대제사장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지 제사를 드리는 분이 아니라 제물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 직전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곧 자신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특히 19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로 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자원하여 가십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중보가 십자가 직전 그 밤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 이전의 기도이지만, 그 내용은 부활 이후에도 이어지는 사역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만 해 놓고 떠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끝까지 보존되도록 지금도 간구하시는 분입니다.

2) 증명

히브리서 7장 25절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로마서 8장 34절도 말합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에만 달려 있다면 우리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결심만으로 유지된다면 우리는 이미 넘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붙드는 더 큰 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베드로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크게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누가복음 22장 32절에서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붙드신 그 기도가 오늘 우리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3) 적용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너무 자주 넘어집니다.” “나는 신앙이 너무 약합니다.” “나는 기도도 잘 못하고, 말씀도 자주 놓치고, 다시 또 흔들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약합니다. 하지만 구원의 최종적인 기초는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입니다. 물론 이것이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지금도 주님이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수록 우리는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대충 살 수 없게 됩니다. 값싼 은혜로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실천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면, 우리도 서로를 위해 중보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평가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짐을 지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정죄하기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은 저럴까?”라고 말하기보다 “주님, 저 사람을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마지막 밤의 기도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를 향한 현재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신 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의 하나 됨을 향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될 때,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셋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 버티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의 중보 안에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두 가지 응답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까? 기도가 메말랐습니까? 내 신앙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집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지금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또 하나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면, 나도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신다면, 나도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지금도 중보하신다면, 나도 누군가의 이름을 품고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의 마지막 마음은 자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십시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 사실이 오늘 우리를 일으키고, 묶인 관계를 풀고, 다시 기도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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