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강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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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말씀
말씀
(서론: 역사적 사실과 우리의 오늘이 만나는 지점)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나훔서라는, 성경에서도 잘 열리지 않는 책을 펼칩니다. 그런데 왜 지금, 이 말씀입니까? 오늘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불의한 권력이 무고한 사람들의 눈물을 먹고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나훔 선지자가 살던 시대도 꼭 그랬습니다.
성경은 결코 죽은 문자가 기록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만나는 살아있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나훔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과거 앗수르 제국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봅니다. 동시에 그 말씀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오늘 나는 영적으로 어느 곳에 서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세상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이라고 믿었습니다. 티그리스 강을 끼고 3중 성벽을 두른 그 도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전 612년, 유례없는 대홍수가 티그리스 강을 범람시켰고, 허물어진 성벽 틈으로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이 쏟아져 들어와 니느웨는 하룻밤 사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나훔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본론 1: 악을 도려내시는 완전한 공의)
나훔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철저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무서운 진노를 쏟아내십니까? 하나님은 철저히 거룩하시기에 악과 공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세상의 재판관이 흉악한 범죄자를 법정에 세워놓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다 덮어주겠다"며 형벌 없이 풀어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각한 불의이며, 피해자에게 가하는 2차 가해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 법정에서 무죄로 풀려나는 자가 혹시 나는 아닌가?'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과 억압을 보고도 그냥 넘어가신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병들게 방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갉아먹는 '죄'라는 암세포를 철저히 도려내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 그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완전한 공의입니다.
(본론 2: 환난 날의 산성에 숨는 '남은 자들')
그런데 놀랍게도, 바위를 깨뜨리는 그 무서운 심판의 선언 한가운데에 오늘 본문 7절의 위대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세상을 향해서는 범람하는 홍수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품으로 피하는 자들에게는 세상 어떤 무기도 뚫지 못하는 완벽한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예언서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인 '남은 자(Remnant) 신학'입니다.
여기서 잠깐, 7절의 히브리어 한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에서 '아신다'는 히브리어로 '야다(יָדַע)'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야다는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것, 부모가 자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오랜 세월 함께 걸어온 벗이 벗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채는 것. 그 깊은 관계적 앎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품에 피하는 자들을 그렇게, 아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온 세상이 죄악으로 홍수 심판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방주라는 산성에 피했던 노아의 가족이 남은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바알에게 무릎 꿇었을 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켰던 칠천 명의 사람들이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라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눈물로 기도했던 소수의 백성들이 바로 그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죄악 앞에서는 불처럼 진노하시지만, 그 시대의 죄를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산성으로 피하는 소수의 남은 자들. 그들의 눈물을 뼛속 깊이 '야다'하시고 품어주시는 선하신 하나님. 이것이 공의의 하나님이자 동시에 은혜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진짜 얼굴입니다.
(본론 3: 심판주를 기억하는 청지기의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유일한 산성으로 두고 살아갑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그분이, 우리를 품어주시는 은혜의 산성이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영적 현실이 있습니다. 나훔서의 예언이 역사 속에서 범람하는 물로 성취되었듯이, 십자가에서 은혜를 베푸신 그 사랑의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오시겠습니까? 끝까지 십자가의 은혜를 거부하고 교만 속에 머무는 자들을 향해서는, 앗수르를 부수셨던 무시무시한 심판의 주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우리가 왜 이 심판의 주님을 매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까? 두려움에 떨기 위함이 아닙니다. 심판의 주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내가 원래 저 무서운 진노의 홍수에 휩쓸려 죽어야 마땅했던 죄인'이었음을 뼛속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운 심판에서 나를 건지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기억할 때, 영적인 교만이 꺾이고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은혜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언젠가 만물을 심판하고 결산하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남은 삶을 '청지기의 삶'으로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떠나며 종들에게 각각 재능을 맡기고, 반드시 돌아와 결산한다고. 주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종은 결코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재물, 건강, 직분은 내 것이 아닙니다. 심판주이신 주님께서 잠시 맡겨두신 것입니다. 그 결산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의 우상에 쉽게 한눈팔지 않습니다.
(결론 및 적용: 나의 삶의 자리를 점검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역사와 말씀이 만나는 이 거룩한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중 많은 분이 이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이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나는 산성 안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산성 안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성벽 안에 들어와 앉아, 주인의 것을 내 것처럼 쓰며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나에게 맡기신 시간, 재물, 관계, 사명을 '청지기'가 아닌 '주인'처럼 움켜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헛된 우상이었던 니느웨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주님께 피하는 남은 자는, 범람하는 물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다시 오셔서 결산하실 그날을 기억하며 정결한 청지기로 살아가십시오. 끝까지 은혜의 하나님 편에 서서, 심판의 날에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거룩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