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네(2)

요한복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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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스스로 하나 되고 거룩해지려 애쓰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 안에 이미 붙들린 공동체다.
본문: 요한복음 17장
서론: 왜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가
교회 역사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이 어울릴까요?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분열'이라는 단어가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끊임없이 나뉘어 왔습니다. 교리로, 지역으로, 민족으로, 때로는 담임목사의 스타일로.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을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이 드린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 기도의 클라이맥스는 이것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예수님이 이 기도를 드리신 지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교회의 현실은 이 기도가 응답된 모습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가장 사랑해야 할 곳에서 가장 쓴 배신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한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 기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을 통해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서 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말씀을 받기를 바랍니다.

본문 읽기: 세 겹의 기도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드리십니다. 이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자신을 위한 기도 (1–5절): 구원의 완성 선언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요 17:1)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우리가 결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의 전제는, '내가 주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4절)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중 누가 하나님 앞에 서서 '제게 주신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매일 실패하고, 매일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것은 모범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의 선언입니다.
📖 예화: 완성된 악보
클래식 작곡가 슈베르트는 죽기 전에 '미완성 교향곡'을 남겼습니다. 그 곡은 아름답지만, 듣는 내내 어딘가 끝나지 않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은 미완성 교향곡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외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은 완성된 악보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음표를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제자들을 위한 기도 (6–19절): 거룩함의 주어는 하나님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예수님은 제자들의 보호와 거룩함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 안에 중요한 문법적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룩해지도록 노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하게 하옵소서' — 거룩함의 주어가 하나님이십니다. 종교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더 거룩해지려면 더 노력하라.' 그러나 복음은 반대 방향에서 옵니다. '거룩함은 너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행하시는 일이다.'
📖 예화: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조각
조각가에게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사자 조각을 만드냐고 물었습니다. 그 조각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사자처럼 보이지 않는 돌을 다 걷어낼 뿐입니다.'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형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것들을 걷어내십니다. 거룩함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3. 미래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20–26절): 우리도 그 기도 안에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 17:20)
예수님은 그 밤 기도하시면서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를 보고 계셨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수천 년 뒤에 살 사람들을 위해 이미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 그 기도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중보는 우리의 신앙 여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2부. 인간의 딜레마: 우리는 스스로 이룰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의 가장 불편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간절하게. 하나 되게 해달라고. 거룩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교회는 2000년 동안 분열되어 왔습니다. 이 긴장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은 이렇습니다. '더 노력하자. 더 사랑하자. 프로그램을 만들자. 캠페인을 하자.' 많은 교회들이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일치 운동, 화해 프로그램, 공동체 훈련. 그런데 왜 여전히 교회는 분열됩니까? 왜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상처 줍니까?
📖 예화: 비틀즈의 해체
1970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 비틀즈가 해체를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낸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불화가 있었습니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각자 천재적이었지만 각자 자신이 중심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던 사람들이 가장 추한 방식으로 서로를 법정에서 만났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재능과 선의만으로는 자기중심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안으로 굽어진 마음(cor incurvatum in se)'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진 마음. 이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 모여서 스스로 하나 되려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는 공통의 적을 만들어서 뭉칩니다. 그러나 그 적이 사라지면, 이내 서로가 적이 됩니다. 이것은 교회의 실패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하나 됨을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 그 출발점부터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그 응답을 찾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중심: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다.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된 방향에서 그 응답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2)
놀라운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주겠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주었다'고 하십니다. 과거형입니다. 우리가 얻어내야 할 무언가가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그 영광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받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의 자리로 초대받았습니다. 이것이 신학에서 '위대한 교환(great exchange)'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예화: 아버지의 신용카드
한 부유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화해의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신용카드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내 계좌에 있는 것은 이제 네 것이기도 하다.' 아들이 그 신용카드를 받아 쓸 때, 그것은 아버지의 신용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신용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의(義)로 서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의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됨의 근거가 바뀐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 됨에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는 보통 공통점으로 하나가 되려 합니다. 같은 신학, 같은 문화, 같은 정치적 입장, 같은 예배 스타일. 그런데 팀 켈러는 이것을 '조건부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조건이 달라지는 순간 연합은 깨집니다. 복음이 만드는 하나 됨은 다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의 공통점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은혜로만 구원받은 죄인이다.' 이것이 하나 됨의 기초입니다.
"복음을 깊이 이해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오직 은혜로만 서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팀 켈러
예수님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까? 네, 응답되었습니다. 다만 그 응답은 우리가 더 노력해서 하나 됨을 이루는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실제가 될 때, 하나 됨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4부. 복음 적용: 기도 안에 붙들린 삶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 가지로 나누어 나누겠습니다.
첫째, 정체성의 전환: '이루는 자'에서 '받은 자'로
교회에서 지쳐있는 분이 계십니까? 오랫동안 충성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써왔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아마 당신은 오랫동안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온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공동체의 인정을 받으려고, 더 거룩한 사람이 되려고.
요한복음 17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믿음의 첫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이미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셨습니다.
📖 예화: 어머니의 기도 일기
한 목사님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방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 일기는 자녀들을 위한 기도 일기였습니다. 페이지마다 자녀들의 이름이 있었고, 그 이름 옆에는 날짜와 기도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가장 방황하던 20대,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던 그 시절에도 어머니는 매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일기를 보며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구나.' 요한복음 17장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을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롬 8:34)
둘째, 공동체를 보는 눈의 전환: 불편한 이웃이 '기도받은 자'로
옆에 앉은 성도가 나와 다르고,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취향이 다르고, 신학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이 다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20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이 기도하신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 안에,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 사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예화: 넬슨 만델라의 화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27년간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석방되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자신을 감옥에 가뒀던 백인 정권의 인사들을 처벌하는 대신 화해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감옥 문을 나서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 안에 증오를 품고 나간다면, 나는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이다.' 화해는 상대방이 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델라 자신이 무언가 더 큰 것에 붙들렸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이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은혜로 용납받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셋째, 중보기도의 동기 전환: 의무에서 감사의 흘러넘침으로
중보기도를 부담스럽게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더 기도해야 하는데'라는 죄책감을 가진 분이 계십니까? 중보기도는 의무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중보를 경험한 사람이 흘러넘쳐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이 됩니까? 감사한 마음,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습니까?
기도는 훈련 이전에 감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우리 안에 실제가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결론: 이미 기도 안에 있는 당신에게

오늘 이 자리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오신 분들이 계십니다. 교회에 지친 분, 오랫동안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은 분, 신앙이 의무처럼 느껴지는 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지 의심스러운 분. 요한복음 17장은 바로 당신을 향해 쓰였습니다.
📖 예화: 감옥에서 쓴 편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코리 텐 붐은 극도의 절망 속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떤 깊이까지 떨어지더라도, 하나님의 팔은 그보다 더 깊이 뻗쳐 있다.' 그녀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믿음이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붙들고 있는 분이 강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믿기도 전에, 당신의 이름을 알기도 전에, 이미 당신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7장 25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 7:25) 예수님의 중보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완벽한 공동체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 안에 붙들린 사람들이, 그 은혜의 무게로 서로를 붙드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의 기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 안에 여러분이 있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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