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생명 나타나는 길

예수의 죽음과 부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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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예수 생명 나타나는 길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10)
성경 구절을 한번 잘 읽어보세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만 예전 개혁 성경에는 뭐라고 그랬냐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그랬거든 그건 좀 번역이 좀 그래 이게 이게 이게 잘 된 번역이에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거기에서 예수의 죽음에 동그라미를 치고 몸에 짊어진 동그라미 치고, 그다음에 예수의 생명의 동그라미를 치고 그다음에 우리 몸에 나타나게 거기에 동그라미 치고 4개를 쳐놓고 한번 잘 봐요.
예수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은 죽음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몸에 짊어진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렇게 몸에 짊어질 때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느냐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난다. 그럼 여기서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이라는 건 뭐냐?
우리의 설교의 약점이 뭐냐 하면은 그냥 지식이 없으니까 뭔가를 철저히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뭘 말해도 뭉뚱그려서 말을 하는 거야. 참석자 1 02:16 이렇게 대충 버무려서 그러니까 틀린 건 아닌데 맞는 것도 아니야. 근데 항상 빙빙 돌기는 해요. 말을 계속하니까 근데 한 번도 핵심을 찌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은 맹수하고 싸운다고 할 것 같으면 난 내가 들고 있는 거는 말하자면 창이야. 창으로 머리 사이를 찔러서 머리를 깨고 들어가든지 아니면 심장 있는 데를 찔러서 꿰뚫고 나오든지 해야지만 이게 맹수가 죽을 텐데 빙빙 돌면서 툭툭툭툭 건드리는 거야. 그러니까 상채기는 많이 냈는데 이제 안 죽고 살아 있어. 핵심을 찌르지 못하니까 그런 거라 이거지.
근데 이제 이게 굉장히 굉장히 이 신비스러운 거고, 이것은 사도바울이 아마 다메섹에서 금방 깨달은 거는 아니고 이런 정도의 지식은 이제 좀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이제 비로소 이제 발견하게 된 더 상세한 지식이었다. 이렇게 봐요. 시작하면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세속화를 꾸짖으며 AD 55년경에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다.
그 약 1년 후에 고린도후서를 쓴다. 자신을 책망하는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는 소식을 들은 듯하다. 고린도후서 2장 2절
많은 눈물과 기도 속에서 쓴 이 편지 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영적 생명의 비밀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준다.

II.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

사도 바울은 그 영적 생명을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묘사한다.
당시 질그릇은 가장 값싸고 서민적인 그릇이다. 또한 쉽게 깨진다는 점에서 연약함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질그릇”이란 표현은 우리의 육체가 덧없고 연약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비록 신자 일지라도 우리의 육체는 연약하다.
물질인 몸이기에 필멸하는 그런 존재로서 쉽게 병들고 다치는 연약한 존재다.
그런데 그 하찮은 것과 같은 육체 안에 보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보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인 신자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이니 곧 예수의 생명이었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영혼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영적 생명 때문에 모든 시련과 역경과 박해를 이겨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방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장 8-9절).
그러면 질그릇같이 연약한 신자 안에서 이 예수의 생명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주는가?
사도 바울은 그것이 작용하는 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A.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

첫 번째 비결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또한 여기서 예수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이미 약 2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죽으셨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지금 어떻게 짊어진단 말인가?
첫째로 ‘예수의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죽음이며, 우리의 속죄를 위한 죽음이었다.
죽음이란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산 사람이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육체의 생명이 끊어진 것을 가리킨다.
둘째로 ‘죽음을 짊어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짊어짐’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 “페리 페론테스”인데, 이는 “운반하다. 지니고 다니다. 매달고 다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페리페로”의 분사형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간적으로 이미 끝나버린 예수의 죽음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다시 짊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 안에 현재적으로 다시 실제화되는 예수 죽음의 경험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이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짊어지다”라는 것은 짐을 지는 자와 짐 자체가 하나 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을 늘 지녀서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일부처럼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미 2천년 전에 있었던 예수 죽음의 사건이 우리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다시 경험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예수 죽음의 경험 때문에 육적 자아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록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약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하고 영적인 경험이다. 신비하기에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영적이기에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옛 본성은 죽고 새 본성으로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더욱 하나 된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로는 심판하시는 진노의 경험이다. 즉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던 때에 그분이 몸소 받으셨던 하나님의 진노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이때 우리는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된다.
둘째로는 용서하시는 사랑의 경험이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면서까지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때 정욕과 욕심을 사랑하는 자기를 미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과 죄에 대한 사랑, 곧 자기 사랑을 내려놓게 된다. 이런 경험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4절.
이것이 바로 지금은 우리가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경험이다(갈 2:20).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다(롬 6:8).

B. 예수의 생명이 나타남

십자가 예수의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와 함께 죽을 때 바로 그 순간 또한 예수의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첫째로, 예수의 생명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이 그분의 진리 때문에 다시 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죄 때문에, 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생명은 단지 그런 원리적인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죽은 예수의 육체를 다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생명의 본질을 5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1) 세포 (2) 신진 대사 (3) 항상성, (4) 성장과 발달, (5) 재생산.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여줄 뿐, 생명 자체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예수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하는 생명은 “인간의 영혼을 참된 영혼으로 살아 있게 하는 근원적 속성”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죽은 예수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으로 보여주셨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인 동시에 또한 예수의 생명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생명의 능력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그 생명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신다.
둘째로 생명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생명은 우리에게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육체를 다시 부활하게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나타난다.
이미 죽어서 마른 뼈와 같이 된 영혼의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
그런 생명의 역사가 우리 영혼에 대해 일어난다. 이때 은혜에서 멀어져 죄 때문에 죽은 자처럼 되어버렸던 우리 영혼을 다시 충만한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신다.
이때 마음은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영적 부활의 경험이 바로 예수의 생명에 나타남이라 말한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런 영혼의 생명 없이 살려고 하기에 힘든 것이다.
내 인생의 무게는 세상의 무게가 아니라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사랑의 무게다.
그것은 죽은 옛 본성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무게이며, 하나님 없이 자기 사랑의 없는 자기 사랑의 무게다.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셨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을 그의 생명으로 살리신다.
그 거룩한 은혜의 생명으로 살라.
참석자 10 12:53
아멘
참석자 1 12:57
질문이 많을 텐데 질문 해 보세요.
참석자 10 13:10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산다는 것도 대체할 수 있으니까 나의 끝에서도 사는 것이
참석자 1 13:24
그게 이제 이런 문제들을 할 때 이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철학적 지식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말일수록 우리는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사용을 해요.
생명이 무엇인가 참 생명에 대해서는 정의를 내리기가 굉장히 어려워 생명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데 생명의 본질이 무엇이냐 할 때 굉장히 어려운 거죠.
사랑이 또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의 교통을 그 교통의 본질을 변화된 에드워드는 생명으로 보았고, 어거스틴 같은 경우는 사랑으로 본 거야.
근데 사랑과 생명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두 개가 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생명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 생명이라면 사랑은 관계적인 거야.
관계적인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과 관계를 맺게 만드는 힘이 사랑이야.
참석자 1 14:50
사랑이 만약에 없어져 버리면은 사랑이 없어져 버리면은 사람이 더 이상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고 교제를 나누고 싶지도 않고 그와 함께 말을 섞기도 싫은 거야.
그래서 결국은 충만한 생명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충만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겠죠. 하나 혼자 있어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겠죠.
근데 이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충만한 생명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그런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은혜란 말이에요.
은혜 은혜가 결국 사랑의 강화잖아요. 이게 지금 설교문 읽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참석자 1 16:03
또 질문해 보세요. 설명하는
참석자 3 16:11
여기 여기 서 예수의 생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말하려는 생명은 인간의 영혼 영혼을 참된 영혼으로 살아가게 하는 근원적 속성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결국 인간 내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라는 바로 이 전제 속에서 성립되어지는 편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요한복음 17장 3절에도 영생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유일하신 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라고 이제 흔히들 영생을 설명할 때 이 한 문장으로 퉁 치고 지나가는데
참석자 1 16:50
라고 안 그러고 안
참석자 3 16:51
아는 것이다는 것 아는 것이다라고 이 한 문장을 쿵 치고 지나가는데 그거보다도 이 문장 속에 담겨 있고 그리고 영생이라고 말할 때 그건 곧 하나님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부터 온 생명인데 그거를 더 풍부하게 좀 설명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항상 그 부분이 사실 저는
참석자 1 17:22
그러면 첫 번째 질문을 내가 할게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잠겨진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거 보고하지 말고 자기 본인의 말로 얘기해 줘요.
뭐야 무슨 뜻이야
참석자 9 17:38
조사님 저 이 예수의 죽음을 내 몸에 심으신다는 이 말씀이 갈라디아 6장 17절에 그 이후로 나를 더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혹시 그 본문과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 해서
참석자 1 17:56
제일 쉬울 수 있죠. 똑같지는 않지만
참석자 9 17:59
그러면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동일하게
참석자 1 18:07
예수의 흔적 흔적에 대해서 육체설과 형상설이 있어요.
육체설은 뭐냐 하면 진짜로 흔적이라는 거야. 이게 매 맞고 두들겨 맞고 돌에 맞은 그런 상처를 이야기하는 거라고 그렇게 주장하는데 나는 그 견해에 대해서 좀 반대해요.
그리고 문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을 염려하면서 비판하다가 그 얘기가 나오는데 특히 할례자라고 해서 자랑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나는 여기에 이렇게 돌에 맞은 흔적이 있고 채찍에 맞은 흔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랑했을까 그거는 심리적으로도 잘 납득이 안 가는 점인데 그래서 오히려 형성설로 보는 거죠.
그래서 이제 그 스티그마가 결국은 시그마 2 크리스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이라고 그랬는데 단수가 아니라 복수예요.
이게 그게 이제 말하자면은 노예들에게 이렇게 등이나 이마에다 찍던 그 표예요.
참석자 1 19:29
표식인데 근데 그걸 보고 이제 도망쳐도 누구 집의 노예구나라는 거를 이제 알 수 있게끔 찍어놓은 건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그런 소명의 인치심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서 나는 육체설보다는 형상설을 더 선호할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참석자 2 20:04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참석자 1 20:0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 그거 얘기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 그걸 얘기하라는 게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내가 짊어진다라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참석자 10 20:21
근데 제 생각에는 이제
참석자 4 20:23
예수의 죽음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그러니까 일정 부분 나타날 수 있도록 그러니까 저는 그걸 자기 부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참석자 1 20:38
좀 비스무리하긴 한데
참석자 3 20:40
교회에 남겨진 고난을 짊어지
참석자 1 20:46
그것도 비스무리하긴 한데 정확한 대답은
참석자 8 20:50
주님을 주님을 믿고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하는 어떤 핍박과 고난과 환란 보이지 않을까
참석자 1 21:03
비슷하긴 해요. 근데 꼭 그것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고 그러면 쉽게 얘기하면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수가 없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복음 전하지 못하고 병상에서 누워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수가 있는 거.
참석자 5 21:24
예수 십자가 사건의 현재적 체험 뭐 이런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은 오늘 우리 나눈 것도 십자가 두 가지 진리 그러니까 내 죄가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항상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큰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그것이 이제 현재적으로도 늘 이 신앙생활의 동인이 되는 그런 부분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 5 22:02
참석자 1 22:04
더 보탤 얘기 없어요.
참석자 10 22:05
주님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건이 현재적으로 날마다 체험되기 위해서 문자적으로 만약에 그걸 해석한다면 “오늘도 그 십자가로 나는 죽는다”라는 매일매일 연속적 고백이 아니라
참석자 1 22:20
그 트 이그잭트리 정확하게 맞췄어요. 바로 그거예요.
그리고 아까 전부 다 다 약간 가장 자리를 본다고 얘기했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차례 테레 서두르지 말고 항상 차례차례 봐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죽음의 소유격이 누구냐 하면 예수의 죽음이야.
나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야.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이 뭐예요?
아니 우선 예수의 죽음이 어디서 이루어졌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거잖아.
그러니까 예수님 예수의 죽음을 나와 관계 있게 만들어 주려면은 결국은 그 예수를 어디서 만나야 된다는 거야.
십자가에서 만나야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그 사이에 십자가가 연결고리가 되는 거란 말이야.
십자가가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예수의 죽음이라는 건 이제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죽음이잖아.
이것이 무슨 속죄적인 죽음이다 그런 거 생각하면 안 돼.
그런 게 핵심이 아니라 중요한 건 예수님이 숨이 끊어지시는 걸 얘기하는 거라는 그러면은 잘 들으세요.
참석자 1 23:52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죽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근데 내가 십자가를 경험해 내가 십자가의 십자가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확 밀려들어와 그때 좋은 게 먼저 밀려들어오는 게 아니라 아픔이 먼저 밀려들어오는 거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할 때 그때에 마치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안에서 액추얼라이제이션 실제화되는 거야.
실제화 현실화되는 거야. 현실화 동 능동적으로 현실화되는 거야.
현실태가 되는 거란 말이야.
참석자 1 24:52
근데 예수의 죽으심의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어요 나의 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 현재적으로 체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안에서 예수가 저렇게 죽으신 것이 저 남아프리카나 북아메리카에 있는 사람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현재화 이 말이야.
현재화 현재적 체험이란 말이에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그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그 죽음의 기운이 우리 속에 스며드는 거예요.
그때에 예수의 그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예수의 죽음과 함께 나의 죄가 아 나의 죄 죄에 대한 욕망이 함께 죽는 거야.
참석자 3 26:17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하라고 할 때 그 경험은 바로 이
참석자 1 26:21
그렇지 그렇지 그렇게 해서 이제 죽는 거예요.
참석자 1 26:28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거예요. 내가 내가
참석자 8 26:34
그것으로 출발해서 우리가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 과거에 우리의 어떤 구습들이 옛 사람이 죽어지고 세 사람으로 그렇죠
참석자 1 26:46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예수의 죽음을 그렇게 해서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서 현재화될 때 내가 내 안에서 죄가 죽고 죄에 대한 나의 욕심이 함께 죽는 거예요.
근데 그 그 과정은 당연히 죽으니까 고통을 동반하는 거야.
고통을 동반하는데 그거는 뭐냐면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란 말이야.
왜냐하면 그 고통을 겪고 나면 그다음에 뭐가 일어나냐면은 예수의 부활이 2천년 전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2천년 후를 살고 있는 지금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 부활의 생명이 역사하는 거야.
그래서 죄 때문에 죽은 것 같았던 나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앞에 있는 죄가 죽는 것을 모티피케이션이라고 이야기하고 모티피케이션이 mor tifica tiion 올티피케이션
참석자 8 28:03
목사님 여기서 말하는 이 예수의 생명의 부활이 정신적 부활은 아니죠.
참석자 1 28:08
아니지 어차피 예수의 죽음이나 예수의 부활이나 전부 다 다 우리의 육체와 육체와도 간접적으로 관련이 되지만은 모두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잖아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년에 죽으신 그 체험이 지금 나에게 실제화된다고 그럴 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게 아니잖아.
그 죽음의 의미가 내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와서 야 봐라.
니가 지은 죄 때문에 니가 지으려고 하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냐 그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그러면서 나와 함께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받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이제 옛 본성의 죽음이고 그렇게 죽고 나면 즉시 예수의 생명이 죽은 것만큼 예수의 생명이 스며 들어와서 다시 내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참석자 1 29:31
그게 뭐냐 하면 나만을 놓고 보면 생명의 충만함이고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놓고 보면은 그거는 까리따스의 사랑을 알게 돼 사랑 사랑이 충만하게 솟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참석자 8 29:51
아니 제가 이해가 됩니다. 충분히 왜냐하면 우리 복음주의 보수 신학을 했던 사람들은 진저리 치는 게 기장측이나 한신 쪽에서는 항상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부활보다는 항상 정신적인 부활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잘 쓰는 게 재해석 현재와 재해석 쓰는데 처음에 이제 저는 목사님이 현재와 실제화를 쓸 때 이제 그거를 좀 생각해서 이렇게 분명히 아닐 건데 그게 분명히
참석자 1 30:21
역사적인 부활은 역사적인 부활로 믿고 그 그것은 이제 역사적인 부활이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참석자 8 30:30
네네네 이해가 됐습니다.
참석자 1 30:32
부활이고 그 부활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죠.
참석자 1 30:40
그래서 이제 이제 예를 들어보자 이거예요. 가장 좋은 경우는 내가 복음을 전해 목사로서 복음을 전하는데 핍박을 받아 마음이 너무 괴로워 진짜 빨리 죽어서 하나님 곁에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까지 생기는 거야.
그때 엎드려서 기도를 해요. 그때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기도할 때 당연히 누구를 생각해요?
그렇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손과 발을 못 박혀서 죽으셨는데 나는 이 조그마한 핍박 하나 가지고 이렇게 괴로워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이것도 결국은 내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일어나는 현상이구나 하는 거를 깨달으면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내가 지금 예수와 똑같이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면서 그 광경이 실제화되는 거예요.
참석자 1 32:01
그때에 이제 나의 자만심과 나의 편안함에 대한 사랑 이런 것들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러면서 이제 내가 작은 핍박에도 불평했던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내려놓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은 즉시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부활의 생명이 이 죄에 대해서 죽은 것만큼 생명의 역사에서 새 성품이 확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의 소명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다시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하게 다시 살아나니까 넉넉히 그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거예요.
사랑하니까 사랑이 충만하며 예수 있는 그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은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십자가가 있고 상대적인 십자가가 있어요.
절대적인 십자가는 진짜 예수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에요.
상대적인 십자가는 뭐냐 하면은 인생을 살면서 겪는 모든 괴로움이에요.
예를 들어 봅시다. 내가 지금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려서 괴로워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해 그랬는데 기도를 하는 거야.
참석자 1 33:54
예수님도 머리 둘 곳 없으셨던 분이로구나 줄이시고 목마르신 분이었구나라는 걸 생각하면서 나의 고난을 가지고 잘 들으세요.
나의 고난을 가지고 예수의 고난에 투사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둘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때 생겨난 괴로움과 고통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든 심지어 나의 죄 때문에 생겨난 것이든 다 똑같이 그거를 예수의 죽음에 투사시키는 거예요.
예수의 고난에 그래서 내가 나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그것을 그 고통을 예수의 죽으심에 투영시키는 거예요.
예수는 죄 없이 고난을 당하셨지만 나는 죄 이씨 고난을 당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고난을 당한다는 점에서는 예수와 똑같은 거예요.
투 투영시켜요. 투영시키면서 그러면은 이제 예수의 2천년 전에 죽은 십자가의 죽음이 그게 내 속으로 실제화되면서 내 안에서 재현되는 거야.
다시 다시 현실화되는 거예요.
참석자 1 35:21
그러면 아까 얘기한 거하고 똑같이 죄를 미워하고 죄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받고 그다음에 예수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는 거라고 그러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예전에 죄짓게 되었던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되는 동시에 그 동시에 똑같이 죽음 만큼 죽음의 크기만큼 똑같은 크기의 생명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도저히 내가 이 현실을 못 이길 것 같아. 근데 이 생명이 부러우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저 사람하고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아. 이혼을 해야 될 것 같아.
근데 갑자기 그렇게 기도하고 나니까 저 사람을 내가 용납할 수 있다라는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 생명이 생겨나거든요.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이에요.
그래서 그 부활을 생명이라고 불러요. 지금 설명을 다 듣고 다시 성경 구절을 보세요.
다시 우리가 뭐라 그러냐면 항상 이라고 그랬어. 항상.
그러니까 이게는 가끔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항상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해야 된다.
참석자 1 36:49
그러면서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몸에 짊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제 설명을 들었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 얘기예요.
뭐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기 위해서 그래서 이게 예수의 죽음이고 예수의 생명은 예수가 죽으신 예수가 어떻게 살아나셨어요?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아나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은 결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시는 거 용기가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신 것이 니가 그런 것들이 이제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의 진수예요.
진수
참석자 1 37:54
그래서 이제 이제 이런 예화를 들어줘 보세요.
참석자 1 38:06
이제
참석자 1 38:13
집 안에서 많은 문제들이 생겨요. 경제적으로도 막 쪼들려서 남편이 돈도 못 벌어오고 그다음에 사춘기 아이는 계속 문제를 일으켜서 학교에서 학부모 호출이 오고 또 자기 자신도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까 이게 몸까지도 병이 나서 골골 하는 거예요.
이런 상황 속에서
참석자 1 38:53
이런 상황 속에서
참석자 1 39:01
너무 괴로워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그냥 죽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드는 거예요.
근데 그래도 마음을 추스리고 교회를 가요. 그래서 예배를 드려요.
처음 예배드릴 때는 이런 근심과 시름이 많아서 은혜를 받기가 힘들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말씀의 은혜를 흠뻑 받았어요. 그러고 나니까 그다음에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체험이 되는 거야.
현재적으로 체험이 되는 거야. 거기서 나의 내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사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나는 나의 이 많은 고통 때문에 또한 죽는다라는 생각을 근데 깨닫고 나 보니까 결국은 나의 죄야.
나의 죄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거예요. 그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경제적으로 좀 어렵다든지 무슨 아이들 때문에 힘들다든지 하는 것은 그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참석자 1 40:34
하나님의 아들인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를 하기 시작해요. 기도를 하는데 예수 죽으심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현재적으로 내 마음에 재연이 되면서 커다란 슬픔과 고통, 그리고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예수께 용서를 빌어요. 내가 이런 죄인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당신이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고난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할 때에 예수의 죽음이 현실화되면서 현재화되면서 내 속에 있는 죄도 함께 죽는 거예요.
거기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게 생명이라는 이거야.
생명 기도가 다 끝나고 나니까 그래 맞아 경제적으로 쪼들리지만 우리 부부가 건강하고 남편도 저렇게 잘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까 별거 아니야.
참석자 1 41:58
아이가 말썽을 부리지만 그러나 모든 집 아이들이 대부분 다 그렇듯이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건데 내가 넉넉히 감당할 수 있어 하는 희망이 생겨나는 거죠.
그게 이제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에 나타나는 거야.
참석자 1 42:26
실제적으로 실제적으로 내 마음속에서 이게 여기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과 육체와 정신으로 나눴을 때 육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소마인데 정신과 육체를 통틀은 우리의 존재를 얘기하는 거야.
그러면서 이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 큰 연단과 시련 속에서 어떻게 내가 살아왔지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었던 거죠.
하나님의 은혜 어떤 은혜 생명의 은혜 생명과 사랑을 주신 은혜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그래서 교회 올 때는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왔는데 돌아갈 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넉넉히 내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이게 목회자에게는 항상 밖으로 흘러넘쳐야 되는 거 아니에요 예수의 생명이 흘러넘치는 거 그때 교인들을 향해 아주 친절하고 요새 또 누가 또 부교 업자들한테 하도 욕을 많이 해가지고 뭐 나 이제 매스컴에서 시끄러우면 내가 이게 이제 예수의 생명이 부족하면 그런 부작용이 생기는 거야.
참석자 1 44:01
예수의 생명이 충만하면 그렇게 욕까지 해야 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목사 목회자가 그냥 잘하라 그러고 따뜻하게 해주고 그러면 좋은데요.
그렇구나. 역시 생명이 나타나고 지금 내가 예화 든 것처럼 그런 예화를 목사님이 목회하면서 수없이 많이 경험했을 거예요.
나 목회도 그만두고 이제는 죽었으면 좋겠다 그랬을 텐데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경험을 다 했을 거예요.
설교를 듣거나 그 때 그런 경험을 아주 쉽게 설교 마지막 부분에 가서 잘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유로운 가운데 절대 어렵게 설교하려고 그러지 말고
참석자 9 44:57
목사님 이것을 아는 우리 성도들은 눈물을 흘릴 것이고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의미를 모르니까 냉랭할 수밖에 없는데요.
참석자 1 45:07
근데 그렇지 않은 하시면 누구든지 다 모르는 때가 있었던 사람들이야.
그러니까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첫 번째로 아는 것이냐 두 번째로 아는 것이냐 세 번째로 아는 것이냐가 문제지 언젠가는 우리도 몰랐던 사람들이니까 교인들이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그거를 최대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진리를 손상시키지 말고 그대로 가르쳐야 되는 그리고 깨달을 마음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며 소위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이 일룸이나 치요 스피리투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이 들어온다 이거예요.
그렇게 하고 보니까 이제 뭐냐 하면 나를 나를 매일 나를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것도 이제 설계 속에서 다룰 거예요.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못 박혔나니는 결국은 죽음을 가리키는 거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부활을 가리키는 거야.
그러니까 앞에 게 죽음을 가리키고 뒤에 건 생명을 나타내는 거란 말이지.
참석자 1 46:33
그래서 그런 위치를 가지고 이제 그런 지금 이야기한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한 5번 정도 끌어가려고 해요.
이렇게 그러면서 이제 여러분들이 필독 도서가 있어.
그래서
참석자 1 46:58
이 책 읽는 사람 없는 사람 없는 사람만 써놨어. 하나씩 합시다.
참석자 1 47:09
없는 사람만 받아라고
참석자 1 47:18
책 받으신 분들은 책값의 70%만 저기 어디야 gsi 계좌로 집어넣으세요.
잊어버리시면 안 돼요. 외상 있으신 분들은 다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이제 이 책을 내가 주는 이유는 그냥 휙 읽어보라고 주는 게 아니라 이 책을 이 시리즈 끝날 때까지 숙독을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독을 해. 그리고 교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은 구역 공으로 써요.
이게 문제집도 아마 잘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여기 그렇게 해가지고 문제집까지 복사해가지고 아니면 본인이 문제를 내도 좋고 그러면 더 좋고 그렇게 해가지고 이제 성도들에게 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잖아요. 어렸을 때에는 미음도 먹고 야채죽도 먹지만 좀 성장했으면 갈비찜도 먹고 불고기도 먹고 그래야 되잖아요.
좀 이렇게 어려운 말씀들을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성도들이 길러가야 돼요.
참석자 10 48:43
국장님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사도 바울이 나는 이것을 자랑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죽노라 했을 때 그 죽노라고
참석자 1 48:52
이거 여기서 여기서 나오는 거예요.
참석자 10 48:54
근데 그걸 실질적으로 죽음의 현장에 있습니다라고 번역하는 그 구절도 있어서 그게 스스로 십자가의 자기 깨어짐을 얘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참석자 1 49:08
나는 날마다 죽으라 할 때도 이렇게 핍박을 받아서 죽는다는 게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면서 이거 다 나와요.
이게 결국 마지막에 한마디로 얘기하면 그거 자체가 자기 게임이란 말이야.
우리가 깨어진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그게 뭔지는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
이건 이제 한국적 신학으로 그걸 자기가 깨진다는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일어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풀어낸다는
참석자 5 49:42
목사님 이 두 번째 돼지에서 첫째는 예수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두 번째 예수 생명에 나타남이다 했는데 그거를 구분하신 것은 예수 생명이 뭔지를 먼저 설명해 주시고 지금 마지막 예언과 같은
참석자 1 49:59
나타난다라고 하는 것은 짊어진다라는 것과 짝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은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생명이 짝을 이루고 몸에 짊어진다는 것과 몸에 나타나는 몸에 짊어짐과 몸에 나타나는 짝을 이룬다.
참석자 5 50:15
그리고 그 몸에 짊어졌다 그 죽음을 몸을 두 번이나 쓰잖아요.
근데 그전에는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 그것도 나오는데 그 영혼이 예 그래서 그 몸이라는 것이
참석자 1 50:34
총체적 인간
참석자 5 50:35
이라고 봐야 돼.
참석자 1 50:36
그럼 피상적이지 않고 전인 현재
참석자 5 50:39
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는 이런 의미는 아니
참석자 1 50:44
전인 전인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제 사르크스가 아니라 소마란 말이야.
소마 그래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 그 소망을 하는 거 그러니까 이제 전인을 이어가겠어요.
참석자 1 51:10
그러니까 이거는 누가 이기냐 하면은 묵상을 많이 한 사람이 이겨요.
이 설교는 그러니까 이렇게 휙 보고 이거 쉽네 하고 설교하면은 전혀 감동이 안 되고 곱씹고 곱씹고 곱씹으면서 자기가 어디서 어 자기가 깨어졌던 경험들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회상하면서 또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가 죽는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감동을 충분히 받은 다음에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 그다음에 이걸 전부 다 다 다시 쓰는 거야.
다시 다시 설계를 작성을 하고 그리고 이제 완전히 외운 가운데 설교를 하셔야 됩니다.
어쨌든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 번 해준다 그랬는데 두 개 해줬어요.
어쨌든
참석자 5 52:38
지금도 보면 어떤 승리주의나 강함을 통한 승리를 이렇게 번영주의나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약함을 통한 승리 그것과도 오늘 본문과도 큰 틀에서는 연결이 되는
참석자 1 52:55
그러니까 이제 뭐냐 하면은 어떤 면에서 하냐면은 하나의 사람들의 사기를 북돋고 그다음에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은 심리적으로 조작을 가해 가지고 말하자면 쇠매시키듯이 이렇게 너는 강해져야 된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그거 하고는 전혀 다른 거야. 그러니까 이제 사도 바울이 나는 연약한 것을 자랑한다.
근데 그게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정신까지 모두 포함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연약해지지 않고는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근데 왜 왜 연약한 걸 자랑하냐 하면은 그렇게 연약해질 때 거의 죽음에 도달하면서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느껴지기 때문에 진정한 강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거기서 체험하게 됩니다.
참석자 1 54:03
허가 아니라 이거는 진작에 그리스도님 시절에 깨달았어야 될 것들이야.
참석자 10 54:10
아니 개인적으로 그 약함을 굉장히 두렵고 거부하는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덕목이기도 한데 현실에서 참 많이 이렇게 두려워하고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 1 54:26
어쨌든 자기 깨어짐을 묵상하면서 반복해서 이 시리즈 끝날 때까지 계속 읽으세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 설교가 풍성해질 겁니다. 또 다른 질문 있으면 하세요.
없으면은 오늘 수업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석자 8 54:46
죽음과 부활 설교 몇 번 더 나옵니까? 목사님 두 개 나왔는데 앞으로 몇 개를
참석자 1 54:54
5개까지는 나가지 않을까 생각
참석자 9 55:05
목사님 저기 현실적으로 저희 교회에 원래 목사께서 저희 교회에 출석을 하시거든요.
하시는데 제가 이런 목사님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을 못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늦게 울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울어야 된다.
이 설교를 100번을 계속 강조를 했거든요. 하니까 원로 목사께서 저에게 그런 말을 안 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그렇게 하지 말라 라고 얘기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점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지금
참석자 1 55:50
그러니까는 그냥 그냥 구호처럼 십자가에서 너의 죄를 회개하라는 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은 이제 도전이 될 수 있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 하나하나 이치적으로 풀어요.
이렇게 그러면 아무리 강한 이야기를 해도 그것이 논리적인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반발할 수가 없어.
그런데 어느 순간에 훅 치고 들어오면서 십자가 앞에서 너의 죄를 회개하라 그럴 때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이게 밑도 끝도 없이 들어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훅 치고 들어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발이 생겨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부활과 같은 것도 차근차근히 설명하는 거예요.
그게 핏대 올릴 필요도 없어요. 차근차근히 설명하는 거야.
그러면서 결국 마지막에 쾅 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을 그걸 사람들이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 그냥 흘려 들으세요. 그리고 평소에 좀 더 잘하세요.
참석자 1 57:10
인간적으로 그러니까 한 번은 찾아뵙고 두 번 찾아뵙고 사과 사드릴 거 소고기 사드리고 그다음에 빈손으로 가서 인사할 거 10만 원이라도 들고 가서 주머니에 넣어드리고 그렇게 하고 설교는 양보하지 말라고 그 대신 교인들을 볼 때 마치 이렇게 싸움을 벌려는 목사들이 있거든 마치 이 죄인 새끼들 이렇게 딱 갈라치기를 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한번 족쳐야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설교를 해서는 안 될 지 그렇게 해서 안 되고 깊이 페리페로 그들의 연약함도 내가 짊어지고 그렇게 설교를 해야지 그래서 이제 이런 설교를 하려면은 정말 기도를 많이 해야 돼.
진짜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하루에 2시간이 절대 많은 시간이 아니에요.
잠깐 기도하다가 눈 떠 보면 1시간이 지나가는 사람
참석자 1 58:32
그래서 목사님 내 교회 가서 내가 깜짝 놀란 게 목사님이 너무 사랑이 많으셔가지고 5분이라도 기도하라고 그래서 내가 뒤에서 내가 가만 5분 기도하면 가만두면 안 되지 내가 그랬어.
그 5분 기도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 수가 있느냐 불가능한 일이 최소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으로 표시할 수는 없긴 하지만 그러나 최소한 1시간은 기도를 해야 돼.
참석자 1 59:06
하루 전체에서는 그게 뭐 아침에 30분, 저녁에 30분 하든지 양보할 수 없도록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30분 이상은 기도를 해야지 30분도 기도를 안 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있겠어요 죄를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있겠으며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어디서 하겠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이제 안 되는 거니까 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을 제시하는 서 딸한테 이렇게 격려하고 설교에 은혜를 주고 그리고 막 교회에 가기만 하면 목사님 무릎 꿇고 있더라.
그러면 그 그 자체가 하나의 시위가 되는 거잖아요.
시위가
참석자 3 59:52
이번 주제 열심히 죽음과 부활에는 자기 깨짐이라고 하는 이 주제도 함께 타고 흘러가게 되는데요.
참석자 1 1:00:02
다 이제 그렇게 가게 되는 거야. 그렇게 가야 되는 거야 이 책의 분위기로 간다고 한 5편의 설교가 차례대로 이어지면서 그렇게 간다든가
참석자 1 1:00:17
자 오늘 기도하고 마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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