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_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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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4장_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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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제 4장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제니라 증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
사람들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뜨겁고 떨리는 일인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형성을 따라 지은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불화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혼자 그렇게 살고 있을 때에는 알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인간으로 사는 일은 식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없다는 신앙의 고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기 모순을 즉시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00:59)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은혜의 집배 아래가 아니라 주의 집배 아래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영혼에 대하여 인식하고 자기의 영혼의 상태와 운명의 관해 눈들 때 그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생겨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가운데 살 수 있을까? 인생의 많은 문제는 죽음으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작가 헤르만 햇세는 자신의 책 황야의 이리에서 자산은 인간의 절망인 순간에 택할 수 있는 이상라고 말했습니다. 악성 채무에 시달리던 사람들도 죽어버리면 누구에게도 독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01:54) 커다란 죄를 저지르고 먼 나라로 도망다니던 사람도 죽으면 숨어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따라다니깐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도 죽고 나면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문제는 그 죽음이라는 문을 열고 도망쳐도 끝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외면하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대속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 방법.
이 대목을 묵상할 때 우리는 메시아만이 우리 인생의 문제의 유일한 해답이 되심을 알게 합니다.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결심이나 어떤 의지로도 우리 영혼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02:47)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찾아갈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이렇게 자기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이 이 대속의 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경험해야 하는 것은이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가 번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완전히 성취되기까지는 실로 긴 세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 기나긴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도를 주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잊지 않게 하셨습니다. 제사제도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인 대속의 개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도구였습니다.
(03:44) 구약의 제사제 제도를 이해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사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왜이 땅에 오셨고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유익을 얻게 되었는지를 인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물로 받쳐져 죽임 당하는 짐승을 보며 두 가지 사실을 함께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죄의 심각성과 대속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서 피뿌리며 비참하게 죽어간 짐승들의 피범벅된 모습 속에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불러오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죄는 자신들이 지었는데 그 죄값은 짐승들이 대신 치료고 죽어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대속의 은혜를 배웠습니다.
(04:36) 무엇보다 그들이 제사 제도를 통해 가슴에 새긴 것은 메시아가 오셔서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셔야 할 필요가 필요였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그 죄사의 현장에서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죄속의 은혜를 베푸실 하나님의 처분만을 바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인간들을 향해 직접 쏟아 부어졌다면이 세상은 핀 묻은 돌멩이와 시체만 즐을 것입니다. 아 아담과 하와가 전능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가를 따먹은 사건은 단순한 절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왕권의 정면으로 도전한 인간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보 보흥은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05:2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어와 마땅한 인간들을 그대로 영원한 죽음에 떨어뜨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들에게 다시 창조시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고 그 공로를 의지하여 그분을 믿는 자의 죄와 허물을 간과하시는 것입니다. 바로이 일을 위하여 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이 세상에서 받으신 것은 환영과 감사가 아니라 멸시와 천대였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대한 인간들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조금도 낙심하거나 상처받지 않으셨습니다.
(06:29)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아의 희망은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곧 때문에 하나님과 절망적으로 불화하게 된 인간들을 위하여 대속의 재물로 자기를 드리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짧은 과거 시제로 된이 예언 속에서 우리는 날카롭게 대주되는 두 그림을 봅니다. 고난당하고 죽으신 메시아와 그분이 대속하셔야 했던 많은 사람의 죄와 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07:29)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깊은 소식이 되기까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한 메시아의 슬픈 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시련은 독생자를내어 주실지언정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하나님의 가슴이는 사랑에서 비롯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슬픈 예언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라는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 지배와 범죄함으로 말미암는 비참함으로부터 실제로 구출받는 것입니다.
(08:17) 메시아는 대속 죽음으로 우리를에서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다시 복하시고를 거치셨습니다. 그러므로이 모든 일에 있어서 찬송받으실 분은 오직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누가 대속하셨나? :메시아.
이사야 선지자는 찔림을 받은 사람을 그라는 단수로 지칭합니다. 고난당하신 분은 메시아 오직 한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와 각성을 위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족들의 역사를 보십시오.
(09:09) 그들은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 속에서 그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 불꽃 같은 헌신과 타오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는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 역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 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했는데 왜 그들의 희생은 대속재물이 될 수 없고 유독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대속재물이 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이 질문의 답을 구약의 제사제도에 빠져 받쳐질 재물에 대한 흠없는이라는 조건을 달았던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10:00) 다음 날에는 흠없는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 재물로 삼아들여서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로 정결하게함과 같이 하고 에스겔 43장 22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범죄의 속죄 재물이 되어 하나님께 올리는 영원한 효력을 가진 속죄입니다. 서 히브리서는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서 정결하게 할 필요가 없으나 하늘에 있는 규칙들은 이런 것들로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재물로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찬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사장이 해마다 드린 것에 피로서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셨고
(11:06) 아니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부터 자주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재물로 들여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 많은 사람의 죄를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들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니라. 미 19장 23절에서 28절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잉태되어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가운데에서는 흠없는 재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11:59)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사람이나 죄는 없으신 상태로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엄없으시니라. 히브리 4장 15절 허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을 행실에서 깨어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 9장 14절 오직 그리스도만이 흠 없으신 그로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메시아가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분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도 구속받은 우리가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어야 하는 것도
(13:02)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죄로 말미암아 절망적인 상태가 된 인간들을 구원해 주실 유일한 그 이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대속하셨나? :반역과 죄
메시아가 찔리시고 상하셔야 했던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장 5절.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찔림이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허물보다 더 정확한 번 번역은 반역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넘보는 도전이자 하나님의 질서보다 자신의 질세를 앞세운 반역이었습니다.
(13:58) 반역의 결과 인간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죽음은 하나님께 범죄한 인간이 지불할 수 있는 최종적인 책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았다면 메시아는이 세상에 오셔서 찔리고 상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낮고 천한이 세상에 내려와 고난 받으실 필요 없이 하늘 보좌에서 손와 영광을 세세토록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는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이사야 42장 8절 48장 11절 당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열망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이 크고 격렬합니다.
(14:54) 하나님께서 도말되어야 마땅할 인간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이신 당신 자신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못 받게 죽게 하신 것도 단지 우리에게 감동은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창조 세계에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증신 증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66장 19절이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상함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악은 언어 언어적으로 볼 때 구약 성경에서 매우 깊은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국가적, 사회적인 범법 행위를 통틀어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범법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그러한 범법들을 행하게 하는 내면의 죄성까지 아울러 가르킵니다.
(15:54)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는 인간의 모든 사악한 범법 행위는 모두 그들 내면에 있는 죄악의 강력한 영향력으로부터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인간들 안에서 그 죄악을 죄하여 버리시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그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소서. 시편 25편 11절. 나의 죄악을 말각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편 51편 2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우리의 죄악을 우리 안에서 도말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6:43) 여기서 상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를 지격하면 부서뜨려지다입니다. 이것은 큰 쇠덩어리 사이에 무 무엇 무엇인가 깨어지는 물체를 넣으면 큰 쇠덩어리의 강한 압력에 의해 사이에 끼인 것이스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듯이 부부서지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 위에서 어떻게 부서졌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그분의 몸을 파고 들어간은 그분의 살을 찢고 뼈를 상하게 했고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는 그분의 몸을 상처로 얼룩지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평화를 기다리지도 않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분은 자신의 을분의 몸은 처참하게 부서졌습니다.
(17:38) 그분이 치르신 고난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봅니다. 대속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비참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구원 방법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로운 성품과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성품이 만난 곳입니다. 시편 85편 10절.
대속의 결과 1: 하나님과의 평화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은 분명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메시아 자신의 허물과 죄악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우리의 허물과 죄악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으심으로써 받으므로 대속을 성취하셨기에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죄와 사망의 법에 풀려나 자유와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8:42)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분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로마서 5장 17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은혜로운 결과를 즉각적으로 가져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에서 귀인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재를 상실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채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반역의 경향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을 생명처럼 받아들였던 인간들에게 이제 그 죄의 멍예를 벗고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길을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19:46) 하나님과 기 더러운 죄인 사이에 새로운 교재 통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과의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평화의 십자가라 부르는 것은 일과 그토록 그리워했던 하나님과의 평화과 평화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이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서 1장 20절.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궁극적으로 기대하였던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평안을 돌려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20:38) 그 평화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평화이었지만 동시에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은 단지 이례적으로 하나님과의 평안을 누리고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지속적으로 그분과의 평화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상하며 허물과 죄악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날마다 믿음과 회개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하나님과 완전한 평화 속에 살아 살 수 있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21:26)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 속에 살아 살고 있다면이 그것은 변명할 여지 없이 자신의 잘못입니다. 아무리 구원의 은혜를 강력하게 누렸어도 현재적으로 그 은혜를 유지하고자 끊임없이 분투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부패한 본성과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매 순간 진실한 회개로 자신의 부패성을 죽이고 하나님과의 평안을 회복해야 합니다. 날마다 새롭게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해야 하고 그분이 보여주신 성품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아의 대속이 이미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대속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22:17) 예.
대속의 결과 2: 질병의 치유.
둘째로 절망적인 질벽으로부터의 치유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기서 나음을 받았도다라는 말은 절망적인 질병으로부터 완케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는 의사가 질병을 고치는 치료 행위를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구약 시대에 가장 절망적인 질병은 아마도 나병일 것입니다.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귀와 코가 문들어지고 입술이 뒤틀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절망적인 상태는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병환자는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23:23) 치유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우리의 처지가 바로 그런 나병 환자와 같았습니다.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고통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우리를 그 절망적인 질병 상태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공생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 잘하신 곳 나사렛을 찾아 설교하신 본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24:28)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장 17절에서 19절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로서 당신이 감당하실 사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치료함으로써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메시아라 오신 예예수님께서 공생의 기간 동안 하실 일이 목자일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의 비참한 상태를 어려 어로워 만져 주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픈 몸을 고쳐 주는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도래한 은혜의 시대를 알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의 기간 동안 보여주신 수많은 치유의 기적은 사실
(25:33) 대속 이후에 펼쳐질 큰 은혜의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의 절망적인 질병을 고치는 메시아의 치료 행위를 바라보며 마땅히 육신보다 더 비참한 질병 상태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의 영혼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반역과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악으로 인하여 병든 영혼을 거쳐 주실 치유를 기대하여야 했던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신 궁극적인 이유는 망가진 영혼들을 고쳐서 변화된 내면의 세계를 갖게 하고 그리하여 이정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메시아에 대속하시는 은혜를 입기 전 우리의 영혼은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였으며 낳을 수 있는 그 어떤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6:25) 그리스도를 모른 채 대속의 은혜와 상관없이 살던 때의 우리의 영혼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번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 말씀. 그런데 그런 우리의 절망적인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대속재물로 바치심으로 말입니다.
(27:15) 그분이 채찍에 맞으 우리는 굽던 손을 다시 펴서 하나님을 향해 들 수 있게 되었고 굳어 있던 혀와 입술을 움직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 모든 일은 메시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어디서 대속하셨나? :십자가
공의와 사랑이 어느 한쪽도 이그러지지 않은 가운데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매우 공정한 판사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나 사랑한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아들이 심각한 죄를 짓고 판사 앞에 섰습니다. 정의롭게 법대로 구영하면 아들에게 사양을 언도해야 할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실수하였다고 한 번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나쁜 길에 빠져 빠지지 않고 착하게 살아겠다고 예언합니다.
(28:06) 아들 야 사람은 아들을 한 번 더 믿어보자 믿어보고자 하여 하고서의 정의감은 아들에게 사용을 언두하라고 합니다. 아들에게 용서의 기회를 주면 사랑으로 완성되지만 정의는 훼손되고 아들에게 사용을 언도하면 정의는 완성되지만 사랑은 훼손됩니다. 할 때 어떻게 해야 상도 정도 훼손되지 않는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느도 훼손되지 않는 채 완벽하게 드러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이 지혜는이 시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고린절서 2장 8절속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가운데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29:02) 인간은 이 일에 아무것도 공무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오직 우리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회개에서 난 것이 아니니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 그래서 십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혜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인인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이 감격하여 그분이 어르신 피를 따르는 것입니다.
(29:53) 십자가를 통하여 대속하신 메시아를 민족적으로 만나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주는 대속의 의미의 인격적으로 감안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그 감화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원동료로 삼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대속의 교리를 안다는 것이며 십자가를 경험한다고 말하는 말은 곧 하나님의 대속하시는 사랑에 압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제약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안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30:47) 그러나 메시아의 도래와 그로 인해 펼쳐질 놀라운 은혜의 시대를 알리는이 감격스러운 예언은 그 시대 백성들의 마음에 전혀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이 위대한 예언을 기록한 이사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핍박을 받아 톱으로을 혐을 당해 두동강난채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죄는 비밀입니다. 아무리 분명하게 외쳐도 믿지 못하는 자는 끝까지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자는 끝까지 믿지 못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을 죽으심을 눈앞에 보고 있기라도 한듯이 선명하게 예언하였지만이 시대의 백성은 그 백성은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31:43) 그러므로 십자가의 대속도 말할 수 없는 은혜이지만 더욱 놀라운 은혜는 이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대속이 우리에게 믿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왜 대속하셨나? :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쓴 자니 쓴자니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잡히시기 전날 밤 감남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장 42절. 그러면 대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원치 않는 십자가 고난을 기꺼이 받으셨을까요?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옥체를
(32:47) 깨뜨려 재물로 드릴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 외에는 우리의 반역과 제약을 해결할 길이 없으셨기에 그분은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범죄는 우리가 하였는데 고난은 메시아가 당하시고 용서는 다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장 8절 말씀. 우리가 십자가 앞에 설 때마다 마음에 찔림을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을 날마다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세상에 속한 욕심과 자랑을 헛된 줄 알고 버립니까?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3:54)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여서 사랑하신 거라면 이렇게 십자가 앞에서 고개를 떨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악뿐인 상태의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비참한 질병 상태에 놓여 아무 희망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던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보내셨고 그분에게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아의 형상을 때마다 우리는 그 찔림과 상함이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은 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내려오시고 우리가 거기 그렇게 달려야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 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35:00)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며 눈물만 풀리네.
대속에 대한 반응 :은혜와 감격
우리의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대속 교리를 깊이 묵상하려 하지 않습니다. 교리 자체를 별로 중요하지 않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가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태소의 교리는 성경 66권의 뼈대이며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믿는 바를 최대한 요약한다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바로 대속의 교리일 것입니다. 이처럼 대속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적인 중요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36:0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성도는 모두이 대속의 교리를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자는 결코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없고 그래서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를 이루셨음을 자신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시로 여겼던 것입니다. 속의 교리로 대한 분명한 이해는 우리의 자신은 단지 용서받은 죄일 뿐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따라서 대속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36:58) 대속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결코 대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십자가에 대한 간격을 누려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일뿐 현재의 냉락한 마음으로 예배에 출사하기만 극급한 교회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대사 대사수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까? 한때는 놀라운 태속의 은혜에 감격했지만 왜 이제는 마치 함께 어 살기 싫지만 자식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처럼 하나님의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한 채 살고 있을까요? 이것은 십자가의 진리 지속에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8:02) 성경에 읽고 있으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대속의 진리와 그 진리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를 대한 어 답을 언급 내 마음 급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덤이 없는 자기의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교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경를 눈에 뜨게 되므로 신앙의 토대를 세우는 진리를 사랑하는 구도자의 자세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있는 성도들을 중개하게 보시는 것은 그들의 대속의 은혜의 속죄함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의 아들의 생명값을 어 값을 주고 사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8:57)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는 거져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죽게 하셔서 이룬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대서의 간격을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배운 망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도 바로이 때문입니다. 그분이 찔리고 상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얻었는데 어떻게 우리의 대속하신 하나님과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대속의 은혜를 압도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쓸데없는 죄인들의 구원하신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간격이 우리의 삶의 정신을 다스리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를 허물고 주님을 세우는 삶이 우리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39:50) 오늘날 영적으로 만락갱이와 같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한 신앙 한복판에는 대속하신 하나님의 어 사랑에 대한 간격을 잃어버린 냉랭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간격은 우리 우선 교회 안에 가득해야 하고 먼저 하나님의 자녀들이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간격이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은 그렇게 강한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가진로서 이성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분을 기뻐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받은 사람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를 의로우신 행위로 하지 아니하시고 메시아를 보내어 대속하시는 구원을 고난으로 우리를 고치셨습니다.
(40:46) 그러므로 이렇게 나음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 삶을 우리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거룩하신과 우리의 믿음을 주신 성령에 대한 찬송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