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피어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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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6편
한 드라마에서 할아버지가 졸업 못한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졸업이 끝내려고 하는 거였어? 아니지... 시작하려고 하는 거였지!"
우리는 늘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만 되면 행복할 거야."
여기 계신 이민자 여러분,
PR카드만 받으면 참 좋겠는데 라고 생각 한 적 있으시죠?
하지만 PR카드를 받은 날, 그 기쁨은 얼마나 갔습니까?
(잠시 멈춤)
곧 새로운 현실이 시작됩니다.
영어는 더 잘해야 할 것 같고, 일자리는 더 안정적이어야 하는 고민이 늘어갑니다.
왜 그럴까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구절이 적혀 있는 전도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누린 후 깨달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얼핏 보면 우리의 인생의 노력은 참 부질 없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우리의 인생의 공허함을 말하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허무하지 않은 것을 반드시 붙잡으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어떤 성취로도 완전히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설계하신 창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갈망을 잘못된 곳에서 채우려 할 때입니다.
그래서 PR카드를 받아도, 집을 사도, 승진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공허함이 옵니다.
그 공허함은 우리는 환경이 바뀌면 만족할 거라고 착각할 때입니다.
하나님보다 환경을 더 의지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피하지 말고 자신에게 해야할 질문은 무엇이 되야겠습니까?
"이 삶은 언제쯤 나아질까?" 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 환경인가, 하나님인가?"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6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처럼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70년 기간 동안,
태어난 2-3세대에게 예루살렘은 직접 본 '기억'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전설'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에게 무너지고,
새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심지어 주변 이방 민족들까지도 이 일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라고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예루살렘은 폐허였습니다.
성전은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있었고, 성벽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집들은 폐허가 되었고, 70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땅에는 가시덤불만 무성했습니다.
우물은 바닥을 드러냈고, 들리는 소리라곤 짐승들의 울음소리뿐이었습니다.
더욱 힘든 것은 주변 민족들의 잔인한 조롱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 감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태도를 바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왜 이 꼴이냐?
너희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다면 왜 이렇게 비참하냐?"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당하는 것을 보며
그들이 느낀 수치심은 자신들의 고통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이 시편을 자세히 보면,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과거의 아련했던 기억입니다. 1-3절에서 그들은
"그때는 좋았지. 입에 웃음이 가득했지.
심지어 이방인들도 우리 하나님을 인정했지."라고 눈을 감으며 회상합니다.
눈을 떠서는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돌려보내다'의 히브리어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닙니다.
'완전히 회복하다', '온전하게 되돌리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폐허가 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던 예루살렘입니다.
조롱받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던 시온입니다.
지금 그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땅은 황폐하고, 성전은 무너졌고, 주변 민족들은 조롱합니다.
"폐허 앞에서 그들은 "아직도 우리는 포로나 다름없다"고 절망했습니다.
포로에게는 자유가 없고, 미래가 없으며,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같은 현실은
오늘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처한 현실입니다.
우리도 그렇죠.
구원받았지만, 완전하지 않습니다.
자유롭지만, 제약이 있습니다.
기쁨 속에,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는 이 현실에서 시인은 무엇을 기도했을까요?
4절의 '남방 시내들', 히브리어로 '네게브'라는 단어에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숨겨져 있습니다.
네게브는 메마른 땅입니다.
돌과 모래뿐인 계곡,
가시덤불과 전갈만 사는 황무지입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어 비가 내리면, 메마른 계곡이 갑자기 물로 넘쳐납니다.
물을 따라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 사막이 녹색 초원으로 변합니다.
단 하루 만에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면, 그 척박한 땅도 옥토로 변합니다.
시인은 그런 네게브를 보며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네게브처럼 단번에 바꿔주세요!
우기의 비처럼 순식간에 우리를 회복시켜 주세요!"
이것은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PR카드 받았으니 이제 단번에 안정시켜 주세요.
예수 믿으니까 지긋지긋한 현실을 단번에 바꿔주세요."
하나님의 답은 우리 기대와 달랐습니다.
이사야 55장 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둘 중 하나"를 넘어섭니다.
당연히 우리가 간구하는 네게브의 기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상황을 바꾸실 때가 있습니다.
막혔던 문이 열리고,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해결되죠.
여러분들도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마감 시간에 기적적으로 해결된 문제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을 네게브에 빗대어 찬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씨뿌림입니다.
5-6절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네게브는 하루 만에 변하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번이 아니죠. 날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긴 과정입니다.
몇 달이 걸리고 그 사이에 폭풍이나 가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기쁨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것이 먼저이고 기쁨은 나중입니다.
우리는 네게브의 기적을 사모합니다.
"하나님, 단번에 바꿔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씨를 뿌려라. 눈물로라도 뿌려라.
내가 반드시 추수를 주겠다."
열정도 아닌 왜 눈물일까요?
현실이 너무 척박하기 때문입니다.
돌짝밭 같은 땅에 씨를 뿌리려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확신 역시 전혀 서지 않습니다.
이런 땅에서 과연 싹이 날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거기에 주변 사람들의 조롱까지 더해집니다.
"저 사람 바보 아냐? 저런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해?"
그럼에도 씨를 뿌리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 바울은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낙심한 갈라디아 교회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야고보는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같이
너희도 길이 참으라." (약 5:7) 라고 격려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모두 다 시편 126편과 같은 삶의 노래를 부릅니다:
"눈물로 뿌려라. 인내하며 기다려라. 반드시 추수가 온다."
(잠시멈춤)
우리 앞에 있는 믿음의 선배들은 우리에게 방향을 보여줍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인생의 허무함이 아니라,
허무하지 않은 유일한 대상,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잠시 멈춤)
혹시, 좀 더 쉽게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왜 붙들고 가시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원하는 믿음은 이런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루 만에 사막을 초원으로 바꾸고,
그 다음엔?
하나님은 뒤로 하고 그 초원에만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의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우리와 동행하며 살아내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다 깨닫지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씨를 뿌려 추수하는 과정으로 우리를 내몹니다.
씨를 뿌리고, 기다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또 기다립니다. 몇 달이 걸립니다.
그러면 자연히 나오는 것은 터져나오는 아우성입니다.
"도대체 싹이 날까?" "열매가 맺힐까?"
이런 질문을 안고 눈을 뜨게 되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마주한 현실이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쳤고, 일은 산더미같았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결과는 실망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현실 앞에서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이게 끝이 아니었어? 언제까지 이래야 해?"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여정이 너무 힘겹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가 인생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진희 목사님은 "광야를 읽다"라는 책에서
이런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산은 정상이 보인다. 그러나 광야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은 '산'이었습니다.
귀환이라는 목표, 정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의 재건은 '광야'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고, 길도 없는 광야였습니다.
매일 돌을 옮기고, 성벽을 쌓고,
땅을 일구지만 "과연 언제 끝날까?" 알 수 없는 여정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큰 사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졸업, 결혼, 취업, PR카드... 이것들은 모두 '산'입니다.
올라가면 정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광야'입니다.
졸업식은 산의 정상이지만, 직장생활은 광야입니다.
결혼식은 산의 정상이지만, 결혼생활은 광야입니다.
PR카드는 산의 정상이지만, 그 이후의 정착은 광야입니다.
산은 정상에 오르면 성취감이 있지만, 곧 허무함이 옵니다.
다른 산을 찾거나 공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광야는 다릅니다.
광야는 끝이 보이지 않지만, 그 길 자체가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편은 바로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그 광야에서 우리는 눈물로 씨를 뿌립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고생을 하려고 여기 왔나?" 비명을 질렀습니다.
(잠시 멈춤)
이것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여기 계신 이민 1세대 여러분도 똑같은 비명을 질렀을 겁니다.
"PR카드를 받으려고 이 고생을 하나?" "이민 와서 더 힘든데?"
그때의 고생을 이겨내고,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느끼십니까?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입니다.
광야는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광야를 걷는 방법이 바뀝니다.
(잠시 멈춤)
"눈물로 씨 뿌리면 기쁨으로 거둔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 약속을 누가 성취 해봤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씨를 뿌렸지만 완전한 추수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잠시 멈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어디서 누가 완성할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깊은 눈물의 씨를 뿌렸을 때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을 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고통을 짊어지시며 죽으셨습니다.
가장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죽음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네게브의 기적을 바랐을 제자들은
얼마나 좌절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한 기쁨의 추수를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바로 그 추수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시편 126편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그 완성된 구원 안에서 살아가갑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너머에 있는 기쁨을 보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쁨이었습니다.
시편 126편처럼 말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시고, 기쁨으로 우리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의 눈물과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씨를 뿌리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죄와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유를 잃은 포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더 이상 포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변화는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관점의 변화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루살렘의 폐허는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얻을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무엇을 이루실까?"로 말입니다.
이것이 자유인의 관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과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씨를 뿌리는 그 과정에서 이미 함께하고 계십니다.
광야 40년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옷과 신발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광야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은 세밀하게 도우시고 계십니다.
힘들고 절망적이었던 순간,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길이 막막했던 그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우연처럼 보였지만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이라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십니다.
지금의 어려움은 끝이 아닙니다. 더 큰 일을 준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대로 믿음으로 씨를 뿌리며 살아내는 것이
못미더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세상에서 누가 호언장담할 때,
안심보다는 불안이 먼저 옵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원문은 6절을 극도로 강하게 표현합니다.
'가고 가면서...돌아오고 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가능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을
한 단어로 줄인다면
"반드시" 입니다.
흠 없고 온전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척박한 삶의 자리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눈물과 아우성 없이는 살아낼 수 없는 이 현실을 압니다.
그래서 "반드시 기쁨으로 거둔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번 주, 우리의 메마른 땅은 어디입니까?
직장입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일터에서,
이번 주는 불평하고 싶은 그 순간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입을 다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대신 동료 한 명에게 '수고하세요'라는 짧은 말 한 마디를 건네보십시오.
작아 보이지만, 이것이 씨뿌림입니다.
가정입니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배우자에게,
이번 주는 한 번만 먼저 사과해보십시오.
이것도 씨뿌림입니다.
자녀입니까?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루 5분이라도 대화를 시도해보십시오.
이 또한 씨뿌림입니다.
이웃입니까?
힘들어하는 동료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이 씨뿌림입니다.
당장 변화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셨던 예수님의 땀과 눈물을 기억하십시오.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지신 그 희생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흘리는 땀,
가정에서 참는 인내,
이웃을 위해 내미는 손,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귀한 씨앗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뿌리는 그 씨앗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번 주에 주님을 신뢰하며 씨 하나만 뿌리십시오.
일터에서 한 가지, 가정에서 한 가지, 이웃에게 한 가지
작아도 괜찮습니다. 단지 충실하게, 자신의 믿음의 실력대로 뿌리십시오.
그리고 다음 주일에,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서로에게 물어봅시다.
"이번 주에 어떤 씨를 뿌렸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이 광야를 지나갈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눈물의 광야에서 씨를 뿌리며,
기쁨으로 거둘 그 날을 함께 기대합시다.
일터와 가정, 이웃이라는 이 자리에서 주를 찬양하며 고백합시다:
저 바다보다도 더 넓고
저 산과 하늘보다 더 높은
주님의 은혜가 이곳에 가득해
살아계신 주 나의 하나님
언제나 넘치는 주의 사랑으로
내 안에 가득히 넘쳐 흐르네
내게 강같은 평화 내게 강같은 평화
내게 강같은 평화가 넘치네
내게 바다 같은 사랑 내게 바다 같은 사랑
내게 바다 같은 사랑이 넘치네
내게 샘 솟는 기쁨 내게 샘 솟는 기쁨
내게 샘 솟는 기쁨이 넘치네
(느리게 한 후에 이어서)
부르신 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어떤 상황에도 나는 예배하네
내가 걸어갈 때 길이되고 살아갈 때 삶이되는 그곳에서 나는 예배하네
마침 기도
마침 기도
우리를 붙들고 가시는 하나님,
포로 같던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폐허 같던 우리 인생에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광야에서도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임을 믿게 하소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믿음을 주시고,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것을 확신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그 길을 먼저 가셨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메마른 땅에 주님의 은혜를 내려주소서.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