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_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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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5장_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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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재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6절.
대속의 계획자 하나님.
이사야 53장 1절부터 5절까지의 본문이 대속 재물이 되실 메시아가 받을 고난과 메시아의 결백함에 관한 일반적인 예언이라면 6절은 보다 입체적인 관점에서 대속을 조망합니다. 대속을 계획한 주체가 누구인지 대속해야 할 죄의 실체는 누구인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재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 6절.이 이 구절은 이사야 53장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입니다.
(01:03)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중간에 등장하는 여호와께서는입니다. 대속을 계획하신 주체가 여호와이시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제속의 교리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께서는 처벌에 연연하시는 분으로 성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사랑의 사로잡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하고자 예쓰시는 분으로 잘못 가르쳐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접하면 사람들은 처발하시려는 성부 하나님과 용서하시려는 성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심에 있어서 모든 영광은 성자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입니다.
(02:02) 본문의 말씀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을 메시아에게 담당시키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형벌은 그분에게 담당하게 하시고 용서와 은혜는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즐거워하셨던 것입니다. 그하여 우리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당하신 메시아의 속은일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실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을까요?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계획하시며 친히 우리 리의 악을 메시아에게 담당시키셨을까요?은 대답은 이것입니다.
(02:51) 누구도 하나님께 그런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성품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에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는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지키시려고 대속의 길을 주도적으로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신실하신 성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함으로만 다시 인간과의 화목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나아와야 인간을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다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03:37) 첫 범죄 이후 인류의 죄악은 점점 더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메시아를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그분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서 징벌을 받게 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대속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범죄를이기는 하나님의 은총을 은총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사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언약의 신실하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범죄할 능력만 있을뿐 그 죄 결과를 감당할 능력은 없다는데 있습니다.
(04:2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상을 가진 인들이 범죄함으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것을 아버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의 결과를 책임질 다른 방법을 하셨습니다. 우린 무리의 죄악을 메시아에게 옮기시는 대속의 지혜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대속의 원리에서 찾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대속의 교리를 안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대속의 교리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05:15) >> 대속의 이유: 우리의 죄악
그런데 이사 선지자는 메시아가 대속했던 것이 우리 모두의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흥미롭게도 우리 모두는 복수형의 명사인데 죄악은 단수형 명사입니다. 이것은 죄악의 집합쳐인 의미의 명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 죄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모양의 죄를 짓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의 뿌리로 다 있습니다. 모양은 여러 가지나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그 하나의 뿌리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입니다. 일과 범양 각색의 아 악들은 그 본질적인 죄로부터 맺는 수많은 열매들입니다. 그런 점에서이 죄악이라는 표현은 죄의 이런 본질적인 뿌리와 열매를 동시에 지적하는 절한 단어입니다. 메시아가 대속해던 것은
(06:19) 우리 모두의 죄악이었습니다. 집마다 나무 한 구루가 있다.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나무를 그 자리에 두고 함께 살아가고자 할 때 그 나무가 맺는 열매를 피우는 꽃이 중요한 어 고려상이 됩니다. 그러나 그 나무를 뻗어버리기를 결정하고 나면 그 나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뿌리 문제는 뿌리입니다. 열매를 하나 남김없이 따서 없애는 일은 뿌리째에 파 어 파내 버리기도 한 이상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지만 뿌리는 완벽하게 제거하지 않으면 다시 그 자리에 나무를 자라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 내면에 스며된 죄의 문제가 마찬가지입니다.
(07:08) 열매일뿐만 아니라 악체를 제거한 것보다 중요한 일이 바로 그 뿌리를 도말한 일입니다. 그 뿌리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에 싫어한 것이므로 그분을 복종 어하고 섬기며 그분을 사랑하는 대신 그분을 거스리고 적극적으로 대책하려는 생향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 깊이 깊은 곳에 뿌리를 받고 우리의 삶의 악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대서운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 뿌리를 받고 우리의 생각과 사상을 물른 행동과 상까지도 철저히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적대 간물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지혜로 도말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는 단지 우리의 죄의 심판을 멸하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08:04) >> 우리 안에 죄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돌려내고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심으셨는데 그것이 거듭난 본성입니다. 로마서 8장 2절. >>
대속할 죄악: 하나님을 떠남.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그 땅에 내려오셔야만 했던 그리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제악을 대속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셔야 할 우리의 제약을 이사야 53장 6절 상반절에 양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향하여 각게 죄가 결로 가는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의 소견에 오는 대로 그냥 살아갈 것입니다.
(08:54) 죄라고 하면 사람들은 살인과 간음 사귀와 절도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각게 제가 간 것이 바로 메시아가 대속하져야 할 죄악의 정체로 규정합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놀다가 그냥시면 시소를가 시소로 가고 시소가 실해지면 미큰로 가고 하고 그 그마저도 재미가 없어지면 집으로가 버립니다. 마음 느끼는 대로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놀에서 마땅히 완수해야 할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투에 나선 주의 공격 명령을 내리다가 상황 힘들다고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린 전투 지의할 기분이 아니니 오늘 전투 지의할 기분이 아니니 부하들에게 알아서 싸우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지위와 책임과 의무에 중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응무의 처벌을 다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09:5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단지이 세상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피도물처럼 살아 있게 하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을 인간과 교재하고 그 교재를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에 의해 피조 세계 전체가 날마다 더욱 아름다워져 가는 것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지위와 증과 의무를 내팽게 치고 자기 좋은 대로 살기로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수많은 인간들 중에 착한 사람도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선행으로 가득차건 악으로 점철되었던 것건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대속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10:42) 왜냐면 그들의 삶은 모두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
양의 비유
모든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범했고 그러한 삶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들의 삶은 하나님과의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그냥 살아 있으니 살아가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참한 처지에 인간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며 그들을 인도해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11:28)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양떼를 돌보는 목자를 연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범죄한 인간들을 양떼의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그런데이 비율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사야 선지자가이 예언을 기록하던 당시의 문화에서 양이 어떠한 동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양은 순하고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다른 가축들과 다툴 줄 모르는 착한 짐승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푸른 풀밭에서 한가에 뛰놓는 양을 그림으로만 보았기에 갖게 된 상입니다. 정작 양을 많이 기르는 중동 지방 사람들의 양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12:16) 이란과 이라크 같은 중동지방에서 통영되는 가장 상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뜻밖에도 양 같은 놈이라는 말입니다. 양이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선견일 따름입니다. 덩치가 큰 양은 대단히 힘이 세서 고집을 부리며 아빠를 뻗어버티고 있으면 좀처럼 끌고 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을 가까이 지켜본 사람들은 양을 자기를 지킬 능력도 없으면서 고집만 센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양은 시력이 매우 나쁩니다. 성경에서 양을 길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의 대명사로 걸어나는 것도 양의 이런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양은 강력한 이빨이나 날카로운 뿔, 빠른 발 같은 효과적인 방어용 모기를 가진 동물도 아닙니다.
(13:09) 이러한 양의 특성을 종합하면 우리가 얻게 되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양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즉 누군가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 돌봄의 그늘 아래에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양과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이 비유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넉넉히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자만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한 우리의 악입니다.
(13:53) 우리는 다 양같이 어리석고만습니다. 그래서 그릇하였고 그릇하면서도 그릇된을 습니다. 하나님께서에게 말씀하시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생을 더 믿었고 홀로 잘살아 수 있는 아무도 없는 주제에 홀로 잘 수 있으리라믿었습니다. 이러한 무지가 죄를 죄로 알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이 왜 십자가를 시야 했는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하여 도무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무지 위에 악한 고집을 더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길을 가면서도 그 길이 잘못된 길임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4:45) 성경의 무수한 경고와 가르침을 짓밟으면서도 그것을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무지와 고집으로 빚진 반역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 단지 >> 우리의 소견에 옳은 대로 무지와 완고함 속에서 걸어간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였는지를 깨닫습니다.
대속하시는 사랑
한 사람의 삶은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것에 자우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만큼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15:38)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장 16절. 그릇된 길로 간 양과 같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대속하시 주시는 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계약하셨습니다. 즉 인류를 위한 대속의 계획은 인간들 여호와께서 구원하 어 구원을 호소하고 용서를 비물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주도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이 가치 없는 인간들을 대속해 주야 할 이유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신 사랑 밖에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대속의 길을 여실 의무가 하나님께는 없었습니다.
(16: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상조의 목에 떠나 비참하게 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어 사랑의 대소의 길을 여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0절.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어미로우시고 거룩한 성품을 봅니다. 또한 가치 없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도 함께 만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만났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아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바뀌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 존귀하신 분이 미쳐난 우리의 죄를지며 줘야 했습니까? 완전한 사랑의 교재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분이 아버지께
(17:33) 버림받은 일은 왜 일어나야 했습니까?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기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악한 고집이 우리의 눈을 가려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연약한 존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한 교회의 신앙적인 성숙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가치한지를 깨닫는 정도와 비례합니다.이 이 세상의 모임과 단체는 각기 자기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교회는 자기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쓸모 없는 곳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자신 하나님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18:22) 인간은 자신의 무가지함을 인식하는만큼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대속의 교리가 그리스도의 인으로 하여금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붙들어 주는 것은이 교리만큼 우리 자신의 부가치함을 잘 보여주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 때문에 같이게 된 것이지 본래 우리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속이 그를 여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아니하였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는 날 동안 다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19:05) 우리는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주시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것은 단지 우리를 정죄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갖고 교회에 다니는 이유를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함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연스러운 결과지 신의 목표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해주신 이유는 다음을 위해서 아닙니다. 살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19:52) 내가 없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15절 죄의 용서는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갑자기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우리의 영적 생활에 투된 결과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하나님 때문에 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누리며 영적 친교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이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합니다.
(20:48) 우리가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열어주신 하나님과의 화목의 삶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모든 그 십자가를 붙들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나에게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는 놀라운 회복은 그렇게 고백하며 나오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대속을 성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경험하는 결핍의 삶을 끝내는 것입니다.
(21:35) 속을 통한 평화로 말미암아 공급되는 생명과 사랑을 풍성하게 누리는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이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대속의 교를 증거하시는 하는 제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저처럼 쓸모없는 인생은 이렇게 살아 있는 있게 하는 것은 아직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 사람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확실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쓸모없고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입니다.
(22:26) 어찌 이것이 저만의 고백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메시아이심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일 고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족하지만 언제나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빛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갑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아서
주 앞에 옳다 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예수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삶이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어둡고 추 추운지를 경험했으며이 세상을 한 마리의 길 이잃은 양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습니다.
(23:22) 우리의 속인대로 각기 재길로 간 결과가 얼마나 기대와 다른지도 았고 우리가 받은 대속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있는 날 동안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를 자랑하며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아멘.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