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을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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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네 이름을 부르신다!
본문: 요한복음 20:1-18 | 고린도전서 15장 |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7~58문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 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 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제목: 네 이름을 부르신다!
1."이별이 끝이 아니라면"
1."이별이 끝이 아니라면"
여러분, 살면서 이런 순간 있으셨나요?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장례식장 앞에 서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울기만 했던 그 순간. 아무리 위로의 말을 들어도 텅 빈 것 같은 그 느낌.
어른들은 아시잖아요. 그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청소년, 청년 여러분도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가까운 누군가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을 거예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묻게 됩니다. "이게 끝이야? 정말 끝인 거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복음 20장에는 바로 이 질문 앞에 선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다음 날 새벽, 그녀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갔어요. 그녀에게도 죽음은 끝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함께 보게 될 거예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2.빈 무덤 앞에 선 사람들 (요 20:1~10)
2.빈 무덤 앞에 선 사람들 (요 20:1~10)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1)
새벽에 무덤으로 간다는 것, 얼마나 무거운 발걸음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선생님을 잃은 슬픔, 이제 시신에 향품이라도 바르러 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마음. 정말 무거운 마음이었을 거에요.
그런데 도착해 보니 돌이 옮겨져 있어요. 마리아는 달려가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려요.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갑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해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가 놓여 있어요. 베드로가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만약… 도굴범이 시신을 훔쳐 갔다면 수건을 개켜놓고 갔을까요? 시신을 싼 세마포를 잘 정리해 두고 갔을까요? 아니에요. 이건 누군가 급하게 도망간 흔적이 아니에요. 질서 있고, 조용하고, 의도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죽음의 결박을 푸시고 스스로 질서 있게 일어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해요.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 20:8)
빈 무덤이 요한에게 믿음을 줬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한 성경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요 20:9)고 해요.
이게 우리 모습이기도 해요. 눈앞에 증거가 있는데도, 성경 말씀이 뼛속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오기를 소망합니다.
3.마리아야 (요 20:11~18)
3.마리아야 (요 20:11~18)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어요.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 20:11)
흰 옷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고, 천사가 물어요.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해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고 뒤를 돌이켰을 때, 거기 예수님이 서 계셨어요.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 20:16)
여기서 아주 중요한 장면이 나와요.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마리아가 알아봤어요.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며."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요. 부활하신 예수님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의 이름을 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요 20:17)
이 말씀이 처음에는 차갑게 들릴 수 있어요. 겨우 다시 만났는데 붙들지 말라니. 그런데 이건 거절이 아니에요. 이건 방향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마리아야, 이제 관계의 방식이 바뀌었어. 전에는 눈에 보이는 몸으로 함께했지만,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더 깊이, 더 넓게 함께하게 될 거야. 그러니 나를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만 붙들려 하지 말고, 가서 전해."
그래서 마리아가 뭘 해요?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외쳐요. "내가 주를 보았다!"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여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첫 번째 증인이 된 거예요.
이 본문 전체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이기신 분이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4.부활의 몸은 어떤 몸인가 (고전 15장)
4.부활의 몸은 어떤 몸인가 (고전 15장)
자, 그러면 이제 질문이 생겨요.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하면 어떤 몸이 되는 걸까요?
고린도전서 15장이 이걸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바울은 씨앗의 비유를 써요. 씨앗을 땅에 심으면, 씨앗 그 자체가 그대로 올라오지 않아요. 껍질은 썩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인 꽃이나 나무가 나오죠. 그런데 심은 씨앗과 나온 식물은 연결되어 있어요. 같은 것인데 다른 형태예요.
부활의 몸도 그래요.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
지금 우리 몸은 피곤하고, 아프고, 늙어가요. 그런데 부활의 몸은 그 한계를 완전히 넘어선 몸이에요.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마리아가 알아봤고, 만질 수 있었어요. 연속성이 있어요. 그런데 동시에 닫힌 방에 나타나시고, 자연의 제한을 받지 않아요.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7문이 이것을 이렇게 정리해요.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나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부활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도 구원하십니다. 기독교는 몸을 하찮게 여기지 않아요. 하나님이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 몸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고, 예수님도 몸을 입고 오셨고, 몸으로 부활하셨어요.
그러면 왜 믿는 사람이 죽으면, 지금 당장 몸이 구원받지 않고(무덤에서 썩음, 화장으로 태워짐), 영혼과 몸 사이에 시간적 차이가 생긴 걸까요? 그건 죄 때문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 자체가 죄의 결과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의 구원을 포기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미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첫 열매가 있으면 나머지 수확도 옵니다. 예수님이 먼저 부활하셨으니, 우리의 부활도 반드시 옵니다.
5.영원한 생명, 이미 시작되었다
5.영원한 생명, 이미 시작되었다
부활 이후의 삶, 즉 영원한 생명은 어떤 것일까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8문이 이것을 두 가지로 설명해요. 아주 지혜롭게요.
첫째, 영원한 생명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교리문답이 이렇게 말해요. "내가 이미 지금 영원한 즐거움을 마음으로 누리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경험할 때, 그게 바로 영원한 생명의 맛보기예요.
치킨을 주문했어요. 배달이 오기 전에 튀김 옷 부스러기 하나 먹어봤어요. 전체 치킨 맛을 다 알 순 없지만, "아, 맛있겠다"는 건 알 수 있잖아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진짜 기쁨, 진짜 평안이 바로 그거예요. 본 치킨은 상상도 못할 만큼 더 좋아요.
로마서 14장 17절이 말하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는 이미 그 나라를 조금씩 맛보며 살고 있어요.
둘째,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교리문답이 이어서 말해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완전한 복락을 얻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우리의 감각은 제한되어 있어요.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은 조각이에요. 마지막 날, 주님과 얼굴을 대면할 때 비로소 완전히 알게 될 거예요. 그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지금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다 담을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면, 마리아가 딱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 그건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맛보기였어요.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은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직 더 큰 것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성령이 오시고, 완전한 재결합이 이루어지는 그날이요.
6.그래서 지금 우리는
6.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지금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인내할 힘이 생깁니다.
지금 이 몸이 힘들고, 삶이 버겁고, 미래가 불안해도, 이건 끝이 아니에요. 씨앗 상태예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도, 몸도, 전부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셨어요. 베드로전서 1장 17절이 말해요.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예요. 고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 버틸 수 있어요.
둘째, 슬픔의 성격이 바뀝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서 바울이 말해요. "우리는 소망 없는 다른 이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마리아도 울었어요. 예수님도 나사로 무덤 앞에서 우셨어요. 슬픔은 있어요. 그런데 그 슬픔의 성격이 달라요. 공항에서의 이별처럼요.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 우는 눈물은, 영영 끝인 줄 알고 우는 눈물과 달라요. 부활 신앙이 이별을 끝이 아닌 재결합의 시작으로 바꿔줍니다.
셋째, 그리스도만을 최종 소망으로 삼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고향으로 가는 여행자가 여행 중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되어 고향으로 가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요. 이 세상은 "사용"하는 것이지 "향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향유는 그것만으로 내 마음이 완전히 만족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종적인 안식처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예를들어, 고향 집으로 가는 길에 탄 '멋진 자동차'는 사용의 대상이지 향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동차가 너무 좋아서 차 안에서만 살려고 하고 고향 집에 가기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수단을 목적으로 착각한 것이죠.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성적, 좋은 집, 좋은 차…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되면, 거기 도착했을 때 반드시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진짜 목적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7."마리아야"
7."마리아야"
오늘 본문의 가장 강렬한 순간은 딱 한 단어예요.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마리아야." 이름을 부르셨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 삶이 힘드신 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여전히 아프신 분,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힘드신 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가 자기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우리가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외우는 말이 아닙니다. 이 무덤 앞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이 첫 열매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 그 영원한 생명을 이미 조금씩 맛보고 있으며, 그 완성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산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바울이 외쳤습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4~57)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죽음이 삼켜졌습니다. 이미 역전이 일어났어요. 이 승리가 오늘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