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량? 그게 뭔가요?

가창교회 중고등부 설교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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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00에 대한 오해

(슬라이드1) 여러분, 144,000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신천지가 한국 교계에 준 폐해 중 하나는, 성경의 단어들을 편안하게 말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이 땅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예전에는 신천지라고 편하게 불렀는데, 이단이 득세한 이후로 굳이 풀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길게 불러야 하는 불편함이 생겨 버렸죠. 특히 대구 사람들은 말을 풀어서 길게 설명하는 거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맞죠?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부활 주일인데 왜 갑자기 계시록 말씀을 설교하느냐? 그것은 이 말씀이 예수와 함께 부활을 맛볼 우리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슬라이드2)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속량하셨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17번 등장하구요, 이중에 12번이 예수의 부활과 함께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 사역에 대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의 부활을 통한 속량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에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알아보면서, 다시금 우리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슬라이드3)
요한계시록 14:1 NKRV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계시록 말씀에서 어린 양은,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시온 산은 신천지, 그러니까 풀어서 설명하면, 마지막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 이 땅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어린 양과 함께 서있는,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144,000명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열두 사도들, 그리고 바울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아무 의미 없이 숫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슬라이드4)
마태복음 1:17 NKRV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이 말씀은 마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록한 글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세요? 사실 열왕기나 역대기를 통해서 확인하면, 아하시야나 요아스 등 5명의 왕이 생략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요. ‘역시 성경은 구라야.’ ‘성경은 역시 짜깁기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마태가 그것을 몰라서 열네 대씩 기록한 것이 아니에요. 일부러 몇 명을 생략해서 14라는 숫자가 나오도록 맞추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슬라이드5) 히브리어로 다윗을 דוד라고 씁니다. 히브리어는 각각의 알파벳을 숫자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거든요? 한글로 치면 ㄱ=1, ㄴ=2 같은 것입니다. ד의 알파벳 숫자는 4구요, ו의 알파벳 숫자는 6입니다. 그래서 דוד는 다윗이라는 의미와 숫자 14라는 의미가 함께 있는 것이죠.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1차 독자거든요? 그래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이런 뜻이 나오도록 한 겁니다.(슬라이드6)
마태복음 1:17 NKRV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이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다윗이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다윗이더라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합니다. (슬라이드7) 유대인들에게 12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사도를 12명을 선택하신 거죠. 그리고 신약의 사도 시대가 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12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넘어, 영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하는 숫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0,000을 굉장히 많은 것, 충만한 것으로 인지하지만, 유대인들은 1,000을 그런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천 대까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 ‘천 개의 산의 주인’ 등. ‘셀 수 없이 크고 많은’이라는 뜻이 1,000이라는 숫자에 있어요. 결론적으로 144,000은 12*12*1,000 셀 수 없이 크고 많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은 144,000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슬라이드8)
요한계시록 14:4 NKRV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속량과 순종

속량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등장합니다. 속량은 노예시장에서 사용된 용어입니다. 노예시장에 가면 노예들이 목에 자기의 몸값을 걸고 서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죠. 물건, 즉 말하는 도구입니다. (슬라이드8) 이들의 매매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일반 매매 다른 하나는 속량 매매입니다. 일반 매매는 말 그대로 내가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노예를 사는 거에요. 속량 매매는 ἀπολύτρωσις(아폴루트로시스)라고 하는데,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를 산 후에, 그 자리에서 자유민으로 풀어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죽음 피 값을 정당하게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이라는 악한 주인에게서 사신 다음, 곧바로 자유민으로 풀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민이 되었으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죠? 예수께서 값을 지불하셔서 노예에서 해방해주셨으니,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결정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자유민과 주후 1세기 로마 시대의 자유민은 다르기 때문이에요.
옵세퀴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해방된 노예가 값을 지불한 주인에게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공손한 순종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인이 나를 해방해서 자유민이 되었지만, 내가 만약 주인에게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사서 해방하셨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에 더하여서 속량함을 받은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의 은혜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반쪽짜리 구원론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해보겠습니다.(슬라이드9)
요한계시록 14:1 NKRV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이마에 이름을 썼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어린 양 예수, 하나님 아버지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슬라이드10)
요한계시록 14:3 NKRV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우리는 속량함을 받아서 새 노래로 어린 양을 찬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슬라이드11)
요한계시록 14:4 NKRV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계시록에서 여자는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사는 창녀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해서, 어린 양 예수께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14:5 NKRV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4절과 5절을 연결해서 설명하면, 세상으로부터 오는 가치, 돈, 섹스, 권력,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죠. 성경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우선순위로 두어라고 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삶을 살라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참여하는 것 = 순종하는 삶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활을 통해 속량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며 그분을 기뻐하는 것 정도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를 세상의 기준으로 내리지 않고, 예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는 것. 내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 예수께 기도하면서 진로를 준비하는 것. 이러한 순종의 삶이 바로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제가 강의를 나가거나, 기도를 부탁할 일이 있을 때 항상 기도제목으로 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라고 하신 곳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거기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할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십시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기도제목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여러분 예수께서 여러분을 값을 주고 해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해방은 내 마음대로 나의 삶을 꾸려가는 해방이 아니라, 선하신 주인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해방입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예수님, 오늘 말씀처럼 저는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결정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나의 삶을 맡기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예수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 마음을 결단하면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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