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에서 만난 사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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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에서 만난 사람 1
제목: 고린도에서 만난 사람 1
본문: 사도행전 18장 1-4절
본문: 사도행전 18장 1-4절
찬송: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찬송: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말씀의 문을 열며
말씀의 문을 열며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바울이 그리스 철학의 심장부인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던 기록(행 17:16-34)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덴의 회당과 시장, 그리고 지성인들의 집합소인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바울은 열정적으로 주님을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다소 미미해 보였습니다. 아레오바고의 관리였던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성을 포함해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의 전도를 실패로 규정하고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덴을 떠나 약 60km 떨어진 고린도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왜 하필 고린도로 향했는지 그 영적 배경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만 보면 바울이 고린도로 향한 것은 단순한 이동처럼 보이지만, 고린도전서 16장 15절 을 보면 우리는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을 가리켜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불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즉,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자리에 우연히 고린도 사람 스데바나가 있었고, 그가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스데바나로부터 고린도의 타락상과 영적 갈급함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성서 학자들을 추정합니다. 결국 바울이 고린도로 향한 것은 우연한 선택이 아니라, 스데바나라는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온전히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타락의 도시에 심겨진 하나님의 계획
타락의 도시에 심겨진 하나님의 계획
바울이 도착한 고린도는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였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는 극심한 타락과 음란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은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의 위쪽 본토와 아래쪽의 커다란 덩어리 땅을 연결하는 아주 좁은 육지의 다리와 같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도로 보면 마치 모래시계의 잘록한 허리 부분처럼 생긴 이 좁은 길목은 동쪽과 서쪽 바다를 잇는 무역의 핵심 요충지였습니다. 뱃사람들은 위험한 바다를 돌아가는 대신 이 좁은 지협을 통해 물류를 이동시켰고, 자연스럽게 모든 물자와 부가 이 길목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인구 60만 명이 넘는 이 대도시는 로마 제국의 4대 도시에 속할 만큼 번영했으나, 그 풍요는 영적인 공허와 지독한 부패를 불러왔습니다.
그 타락의 정점에는 고린도에서 가장 높은 바위산인 아크로고린도 정상에 위치한 아프로디테 신전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성애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즉 우리에 익숙한 비너스라고 불리는 이 여신의 신전에는 무려 1천 명의 여사제들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을 섬긴다는 명목 아래 합법적으로 매음하는 매춘부들이었습니다.
항구에 도착한 상인들과 선원들은 풍요를 기원한다는 미명 하에 신전으로 올라가 음행을 저질렀고, 이것은 종교의 탈을 쓴 추악한 쾌락의 탐닉이었습니다. 이러한 음란한 문화는 신전 담벼락을 넘어 도시 전체를 성적 문란의 늪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오죽하면 헬라 사회에서 '고린도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이 '음행하다'는 의미로, '고린도 아가씨'는 '매춘부'라는 뜻의 대명사로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이 거대한 타락의 장벽 앞에 선 바울의 모습은 마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종이 무의미한 일에 자신을 허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의 그 어둠이 깊을수록 복음의 빛이 더 강력하게 필요함을 아셨고, 바울이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그를 도울 동역자들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거대하고 음란한 도시를 향해 발걸음을 뗐을 때, 그것은 인간 바울의 결단이기 이전에 어둠 속에 갇힌 영혼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한 행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이 아무리 어둡고 타락했을지라도, 그곳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부패를 한탄하며 주저앉아 있기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 어두운 자리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복음의 등불을 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아무리 소망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당신의 계획을 심어두셨음을 믿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거대한 역사를 움직여 이루시는 개인의 만남
거대한 역사를 움직여 이루시는 개인의 만남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아굴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시기 위해 세계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정교하게 움직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는 경이로운 장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아굴라는 본도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으나 로마 제국의 심장인 로마에서 정착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 먼 길을 돌아 고린도까지 와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주후 49년경 모든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국의 수도 로마 내 유대교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간의 종교적 다툼으로 인해 내려진 이 칙령은, 아굴라 부부에게는 하루아침에 모든 삶의 기반을 잃고 쫓겨나야 하는 청천벽력과 같은 불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재난이었던 이 사건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과 아굴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시기 위한 섭리의 이행이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지만, 만약 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혹은 바울이 아덴에서 조금 더 머물렀다면 이 위대한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울과 그 부부의 생업이 '천막을 만드는 일'로 일치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천막의 주재료인 염소 털 피륙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다소가 속한 길리기아 지방에서 생산된 염소 털 직물은 그 품질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아예 지역 이름을 따서 '길리기아 천(시리슘)'이라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 길리기아 천이 바로 천막을 만드는 주 재료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랍비들은 학문뿐만 아니라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하나씩 익혀야 했는데, 바울은 어린 시절 랍비 교육을 받으며 생계를 위한 기술로 이 천막 제조술을 익혔습니다. 수십 년 전 다소에서 배운 그 기술과, 로마 황제의 정치적 결단이 '고린도'라는 낯선 땅의 작은 작업장에서 세 사람이 만나 복음 전파의 전초기지를 형성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만남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장엄한 섭리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인한 유대인의 흩어짐, 로마 제국의 지중해 제패, 그리고 황제 글라우디오의 칙령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친 제국의 흥망성쇠가 오직 바울과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기 위해 동원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를 흥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시며, 때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역사의 격변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그 모든 목적은 단 하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만남과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안경으로 바라보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인생이 낯선 곳으로 내몰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곳이 곧 하나님이 일하시는 선교지임을 믿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함없이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부여하신 삶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만남을 통해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실 것입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말씀의 문을 닫으며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른 바울과, 그곳에서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했습니다. 이 만남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 아굴라 부부를 예비하셨고, 아굴라 부부를 위해 바울을 보내셨습니다. 이를 위해 제국의 역사를 움직이셨고 황제의 마음을 사용하셨습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참으로 혼란스럽고 불안합니다. 저 멀리 중동 땅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이란과 벌이고 있는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으며, 그 여파로 온 세계가 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농촌의 현실 또한 녹록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황제나 권력자가 아니라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바울과 아굴라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심으로 새로운 역사를 이루셨듯이, 오늘의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를 반드시 완성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하기보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를 의연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기에, 어떤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눈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누군가를 예비하고 계시며, 우리를 통해 누군가에게 복음의 위로가 되게 하십니다. 하루빨리 저 중동의 전쟁이 종식되어 무고한 생명이 보호받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더불어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며, 주님의 거룩한 통로로 쓰임 받는 우리 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걸음걸음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어두운 도시에 홀로 섰을 때 주님께서 이미 아굴라 부부를 예비해 두셨던 것처럼, 우리 삶의 척박한 현장에도 주님의 선하신 예비하심이 있음을 믿습니다.
특별히 전쟁과 경제적 위기 속에 신음하는 이 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중동의 전쟁이 속히 종식되게 하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의로운 뜻이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우리 성도들이 어떤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키게 하시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만남을 통해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