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의 진짜 성경적인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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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오늘 본문 말씀은 다루지 않고 그냥 건너뛰려고 했던 구절들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그렇게 새로운 내용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여태까지 다뤘던 내용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지금 몇 주 동안 우리는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메인 주제 뭐죠? 누가 진짜인지 누가 진짜 신자인지, 이걸 계속 다루고 있었습니다. 지난 2주 동안도 누가 진짜 자녀인가 이걸 다뤘죠. 죄를 이기는 자가 진짜 자녀고, 또 지난주에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진짜 자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태까지 다뤘던 그 내용의 결론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이 그냥 한 번 더 반복되면서 거룩하게 살아야 된다고 형제자매 사랑해야 된다고 그 계명을 지켜야 된다고 그렇게만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계획이 오늘 말씀은 건너뛰고 4장으로 이제 넘어가려고 했었습니다. 근데 이제 문제의 구절이 이제 하나 발견이 되었습니다. [00:59] 3장 20절, 이 한 구절 때문에 주석을 몇 날 며칠 동안 읽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아무리 답을 찾아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너무나도 난해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문단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까 연구하면 할수록 이 안에 엄청난 난해구가 지금 하나 숨어 있다는 것이 이제 보여지게 됐는데요. 요한일서 3장 20절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20) 여러분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도무지 저는 이거를 그냥 한글만 읽을 때는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한다고 나옵니다. 일단 이것부터가 무슨 뜻일까요? 마음이 우리를 책망한다는 게 뭐죠? 그다음에 이제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을 하는데 하나님은 갑자기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것은 이상한 발언이 아니지만 우리 마음보다 더 크시다는 게 그게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는 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는 것과는 또 무슨 상관일까요? 그리고 이게 이제 앞 절,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고 뒷구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과 이게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어떤 학자들이 요한일서에 이 단락이 앞뒤가, 그냥 짬뽕된 아무런 그냥 두서없는 그냥 그런 우왕좌왕한 그런 말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여기도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되게 난해한 부분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난해한 구절이냐면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또 이 구절의 뜻에 대한 견해들이 정확히 반으로 갈립니다. 제가 지금까지 찾은 학자들의 반은 한 해석을 지지하고요. 또 나머지 반은 다른 해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두 해석이 완전히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똑같은 한글에서 똑같은 헬라어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견해가 나올 수 있는지 진짜 이게 놀랄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는 위로의 말이라고 해석을 하고요. 하나는 경고의 말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 보면 해석이 이렇게 갈리는 경우는 늘 있는 일이지만 이 정도로 상반되게 나누어지고 학자들도 이렇게까지 합의를 보지 못하는 난해구라고 하는 것은 저도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이 구절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연구를 해보면서 알게 된 것은 이 구절과 또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요한일서 5장 13절 이 주절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흐름은 여전히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전하는 메시지는 똑같지만 사도 요한이 지금 이 3장 마지막 부분 이 결론 부분에서 지금 무엇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난해구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또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떤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우리가 이 시간 함께 이 난해구를 통해서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충격에 아직도 빠지지 빠져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은데요. [04:03] 오늘 설교도 조금 신학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네 이실직고, 먼저 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학적으로 엄청 복잡한 게 맞거든요. 문법도 굉장히 많은 것을 따지고 비교하고 이렇게 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맞지만 제가 그 부분을 과감히 다 뺐습니다. 한 10장 넘는 분량의 페이지를 그냥 다 과감히 빼고 여기에 필요한 딱 그 학구적인 연구 자료만 여기에 넣고 여기서 증명되는 원리들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또 우리의 기도 생활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라서 여러분도 다소 복잡하더라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잘 따라와 주시면 큰 은혜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첫 번째 대지, 다 같이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켜야 한다.’
19 이로써 우리가 2)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 3:19)
첫 번째 구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참 특이한 표현이 나오죠.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마음을 굳세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이 ‘굳세게 하다’라는 이 헬라어 동사는 ‘페이스’라는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설득하다’, 이런 뜻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라고 써 있는 것이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라는 것이 아니라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설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설득하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부분을 굉장히 잘 해석했습니다. 학자들이 싸우는 것은 이제 다음 구절입니다. 문제의 구절은 20절이고요. 19절까지는 그래도 학자들이 아직 사이가 좋습니다. 다 일치하고 있어요. ‘우리 마음을 설득시키라’, 이 표현은 지금 우리의 마음을 안정시키라는 것입니다. ‘안심시킨다’, ‘더 구체적으로 확신을 갖게 한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모든 학자들이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 번역본들을 보시면 여기서 ‘reassure’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켜라’, 지금 그런 뜻입니다. 한글 번역본들 중에서도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켜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그렇게 번역하는 번역본들도 있습니다.
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요일 3:19. 표준새번역)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일 3:19. 공동번역) [06:41] 여러분 어떠십니까? 이 부분은 별로 논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서 안심시킬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주님 앞에’라는 이 표현도 굉장히 중요한데요. 이것은 심판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동사도 미래 시제인 것을 보면 이게 나중에 있을 일, 지금 일이 아니라 나중에 있을 일이라는 게 매우 확실하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서,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그때 담대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교리입니다. 그들이 말하길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은 신자로서 우리의 구원을 의심할 게 아니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확신을 가져라. 너는 구원받은 자다.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라.’ 구원의 확신을 칼빈주의 교리와 교묘히 섞어서 굉장히 은혜스러운 성도들이 받기 쉬운 그런 달콤한 말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 많이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장로교에서는 이런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하죠. “우리는 구원받는 신자로서 확신할 수 있다. 심판대 앞에서 막 두려워하면서 숨는 게 아니라 담대히 주님 앞에 갈 수 있다.” 이게 장로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구원의 확신은 이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은 분명히 지금 하나님 앞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걸 부정하는 것 또한 비성경적인 것인 줄로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말씀 19절에 분명히 지금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5장 13절에도 이게 잘 나와 있습니다.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3)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즉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구원을 받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영생을 얻게 될 것을 알 수 있다고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5장 13절은 분명히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을 다루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이고요. 오늘 본문도 ‘주 앞에서’라는 말이 있었죠. 또 미래 시제를 사용하는 것을 봤을 때 이것도 지금 동일하게 나중에 있을 그 구원에 대한 어느 정도 확신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성경에 분명히 과거의 구원, 즉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받는 이미의 구원에 대해서만 확신을 갖는 게 아니라 아직의 구원도요. 즉 궁극적인 구원에 관해서도 분명히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아무리 우리가 믿는 그런 것과 좀 상충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교회에서 늘 설교하는 것처럼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그 말씀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여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그냥 무시하거나 버릴 수 있는 교리가 아닌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여러분 우리도 이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패배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승리자의 모습이 바로 기독교의 모습인 줄로 여러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번 구원받은 자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 진리가 맞다면. 이게 맞죠? 우리가 믿는 것이 이거잖아요. 근데 이게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일어날 때마다 ‘나는 오늘 지옥에 갈까?’ 이걸 고민하면서 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막 두려워 떨면서 사는 게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0:26] 물론 우리는 궁극적인 구원을 향해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를 두려워하고 우리는 경각심을 놓쳐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신앙생활은 두려움 가운데서 하는 게 아니에요. 벌벌 떨면서 묶임 가운데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이지, 패배의 종교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된 것이지, 벌벌 떨면서 묶여 있는 존재들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자유는 죄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갖고 있을 수 있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평강과 희락이 있다는 것 또한 성경적인 원리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한 번 구원받은 자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여전히 믿으면서도, 이거는 여전히 성경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이걸 붙잡으면서도 하나님을 여전히 경외하고 여전히 죄를 미워하고 조심스럽게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고, 또 지옥 형벌에 대한 것은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담대한 크리스천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게 어려운 질문이지 않습니까? 이게 저와 여러분이 고민해야 될 문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원리를 우리는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보니까 그냥 지나칠 본문이 아니라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교리는 칼빈주의와 더 잘 어울리는 교리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고 믿으면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게 참 쉽잖아요. 이게 너무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근데 구원받은 자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게 훨씬 더 어려운 숙제처럼 느낄 수도 있어요.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자세한 것은 이제 2대지에서 더 설명드리겠지만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확신에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어떤 사전 조건이 충족되면 그럴 시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요.
또 지금은 그 조건을 충족시킬 수는 있지만 미래에도 꼭 그럴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키가 될 것입니다. 즉 조건에 의한 확신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게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구원의 확신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은 추후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확신의 중요성입니다. 여러분 19절에서는 우리가 주님 앞에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다고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이 가르침을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또 빠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적인 균형, 하나님의 말씀이 잡아주는 그 올바른 밸런스를 찾는 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늘 두려움 가운데 패배자처럼 그렇게 떨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에요. 즉 ‘너의 마음을 설득시켜라’, 이것입니다. ‘너의 마음을 확신을 가져라.’ ‘마음의 확신을 가져라.’ 마지막 3대지에서 더 다루겠지만 뒤에 21절하고 22절에 보시면 담대함으로 기도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거기서 막 두려워하면서 의심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담대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 주님께 구하는 것, 마땅히 요구할 것을 요구하는 것 지금 그걸 말하고 있는데요. 저와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이런 담대함이 있어야 되는 줄로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일서의 주제가 뭐죠? 진짜와 가짜입니다. 누가 진짜인가 지금 그걸 계속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근데 여태까지는 나는 진짜인가? 이걸 점검하고 있었다면, 우리가 여태까지 말씀을 통해서 이걸 점검했었다면 요한은 이제 우리 보고 ‘너는 진짜다.’ 이걸 말하면서 우리 보고 확신을 가지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여태까지 점검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며칠 동안 계속 다뤘던 게 이 진짜의 성경적인 기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기준대로 살고 있는 나는 이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진짜 자녀다.’ 내가 이 고백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에요. 몇 년 전에 담임 목사님께서도 이런 균형을 잡아주는 설교를 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우리 사랑하는 교회에서는 회개를 강조하는 말씀을 하도 많이 전해서 그런지 때로는 너무 치우칠 때도 있다는 굉장히 솔직한 지적을 강대성에서 하셨어요. 거룩한 삶을 잘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가짜다.’ ‘나는 주님이 보시기에 가짜야.’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안에 죄가 발견된다면 그건 회개해야 되는 것이 맞고, 또 우리는 습관적인 죄에 빠졌다면 그건 우리가 가짜라는 뜻이 맞기 때문에 속히 회개하고 다시 거듭난 자의 길로 돌아와야 되는 것도 맞습니다. 또 우리는 더 거룩해지고 더 경건해지기 위해서 끝없이 그 노력을 해야 되는 것 또한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나의 작은 실수 하나 때문에 매시간 나는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건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마귀의 참소에 넘어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참소입니다. 마귀의 이름에 그게 잘 나타나 있거든요. ‘사탄’,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참소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계속 참소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마귀가 하는 일 자체가 이런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부터 그는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를 죄로 이끌면서 죄인이 되게 한 다음에 그들이 회복되지 못하게 계속 죄에 묶여 있도록 참수하며 공격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여전히 그가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떻게 됐죠?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자유케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귀와 죄의 속박에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이 바로 복음 진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여전히 이 자유케 된 자들을 참소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들이 여전히 속박에 묶여 있는 것처럼 거짓말로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참소 공략이라고 우리가 볼 수 있는데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거듭나신 우리 성도님들은 이 참소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에 넘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우리는 첫째로 구원받은 참 신자라면 중요한 조건이죠. 회개하고 하나님을 임금과 구주로 제대로 예수님을 영접한 참 신자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에서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흔들릴 필요가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신분에 혼란이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자녀라는 정체성에는 이제 두 가지가 내재되어 있는데 하나는 그들이 회개하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 당연한 것이에요. 또 하나는 그들이 이 신분대로 계속하면 궁극적인 구원을 받을 자라는 것. 그래서 통합적으로 그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구원받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신을 이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인데요. [17:23] 제가 이제 미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근데 그 형제님은 자격지심이 굉장히 심했어요. 굉장히 쉽게 낙심에 빠지는 그런 형제였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자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 말을 자주 하는 것이에요. 어쨌든 이 친구도 이제 칼빈주의를 반대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겠죠. 구원론의 결이 저랑 비슷해 보여서 빨리 친해질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늘 이제 거기에 묶여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이 친구에게 하나님이란 너무나도 무서운 심판장이었고, 자기가 행하는 모든 그냥 사소한 움직임마저도 다 심판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애가 하루 종일 떨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유함이 없고 희락이 없고 기쁨과 평강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지금 이 친구 때문에 되게 좀 의아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제 신앙과 내가 믿는 것이 맞나?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예전에 그때 가진 적이 있습니다. 아니, 이론적으로는 다 맞는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심판장이신 것도 맞고, 우리의 행동이 중요한 것도 맞고, 언행심사가 심판의 대상인 것도 이것도 다 이론적으로 다 맞는데, 그렇다면 이 친구처럼 이렇게 벌벌 떨면서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근데 이건 아무리 봐도 아닌 것이에요. 또 성경에 있는 다른 구절, 믿는 자를 표현하는 다른 구절과 이게 너무 또 상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가 문제인지 여러분 보이십니까? 그 친구는 행위구원대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여러분 행위심판하고 행위구원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에요. 이 둘을 구분 못하는 장로교 목회자와 신자들은 진짜 너무너무 위험하고 안타까운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친구는요. 입으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그가 실제로 믿고 있었던 것은 실수 안 하고 제대로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자기가 그렇게 선행으로, 올바른 신앙생활로 자기가 구원받는다는 그런 근본적인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행위 구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야 구원받는다.’ ‘내가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살아야만 천국에 간다.’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니까 늘 압박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에요. 자기의 행함 하나하나가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고 늘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똑같이 거룩과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추구했던 저로서는 그런 압박 가운데 살고 있지 않았거든요. 여전히 그게 그런 행함도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렇게 거룩하게 사는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걸 추구하고 있는 저로서도 그 친구처럼 묶여 있지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를 생각을 해보니까 저는 행위심판에 대한 올바른 담임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지만 진짜 자녀는 올바른 행실을 보인다는 그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즉 내가 거룩해야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셨으니 나는 자녀답게 살아야 되기 때문에 거룩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차이점이 보이십니까? 하나는 복음을 믿고 하나는 안 믿는 것이에요. 이게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이래서 행위구원은 그냥 약간 탈선한 게 아니라 완전히 잘못된 이단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행위구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인데 예수님의 보혈이 나를 씻은 것인데 그걸 안 믿는 것이에요. 그 피가 아니라 나의 행실이 나를 깨끗하게 한다고 궁극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행실에 그래서 목숨을 거는 것이에요.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하고 이탈하는 것에 메어서 사는 것입니다. [21:27]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우선적으로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노력과 나의 행함으로 되는 게 절대로 아닌 것이에요. 여러분 이 구원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줄로 여러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나의 죗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구원받은 줄로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진짜 신자라면 여러분이 이것을 진짜로 믿고 진짜로 이대로 따른다면 여러분 그러면 이제는 우리의 구원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받은 그 구원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죄가 용서받은 게 맞을까? 내가 진짜 신자가 맞을까? 여러분 이런 차원에서는 이걸 의심하는 것이 절대로 겸손이 아닙니다. 그거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에요. 구원을 의심하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런 모습을 예수님의 피가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피는 능하긴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구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 행실에 그래서 내 행실에 내가 너무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함과 기쁨과 평강 가운데서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묶임 속에서 내가 끝까지 노력을 하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적인 구원론은 이런 구원마저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물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엄청난 일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 죄 가운데로 돌아가면 그 엄청난 구원, 예수님께서 이루어 주신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이걸 더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이죠. 이 큰 구원에 매일 감사해 하면서 여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뿐이지, 내가 이 귀한 것을 잃지 않도록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제 살아야 된다는 것뿐이지,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님이 날 받아준다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학대받은 아이가 입양되고 나서 부모에게 또 버림받을까 봐 맨날 막 벌벌 떨고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막 맞을까 봐 계속 눈치 보고 떨고 실수 안 하려고 자기의 행실을 조심히 하는 그런 모습 여러분 그 안타까운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게 행위 구원이에요. 내가 잘해야만 부모에게 사랑 받는다고 생각하는 그 착각, 그게 행위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영접하셨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의심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건 여러분의 어떤 행위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 즉 은혜로 된 것이기에 이런 못난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내가 죄인이었을 때 나를 먼저 사랑해 주시고 그 아들의 핏값으로 나를 용서해 주신 그 주님께 매일 감사드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과 은혜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난 구원받았나, 여러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귀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녀답게 의롭게 사는 것은 너무 좋지만 그분이 행하신 일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구원의 길에서 탈선하면 그건 의심해야 되는 게 맞아요. 근데 그런 설교는 자주 했기 때문에 지금 반대쪽을 지금 말씀 균형을 잡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의 참소가 그것이에요. ‘이 봐라.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 너 같은 인간이 구원받은 게 맞겠어? 너처럼 연약한 사람이 구원받는 게 맞겠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같은 연약한 존재를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 맞습니다. 우리 같은 부족한 죄인을 먼저 손 내밀어 주시고 사랑하시고 건져내 주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 맞습니다. 여러분 그분의 사랑을 절대로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5:17] 그분이 치르신 대가를 절대로 의심하지 마시고 내가 정말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 구원 속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피로 받은 은혜와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요한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 담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다룬 것은 이제 과거의 구원이었죠. 과거의 구원에 있어서는 여러분 절대로 이제는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는 더더욱 그렇고 이것은 또 예수님께서 나중에 이루신 이미의 구원뿐만이 아니라 아직의 구원, 궁극적인 구원에서도 이게 또 해당이 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것은 인지해야 되는 것은 맞지만 항상 정신 차리고 경계해야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구원의 좁은 길을 잘 걷고 있는데 그 결과 또한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어느 정도 확신도 가질 수 있다고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요. 이제 여기서 중요한 것. 무엇을 근거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게 이제 두 번째 대지입니다. 다 같이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는가?’
여러분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다른 말로, 무엇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 확신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많은 학자들은 그 근거를 본문 말씀 20절에 두고 있습니다.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20)
브루스라는 유명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저주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보다 크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앞에서 확신한다.
사단의 비난보다 크신 하나님의 크심은 범죄를 제거하는 용서와 명령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말만 들으면 엄청 위로가 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 마음의 책망, 이런 거 걱정하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에요. 먼저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수 있다고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우리의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브루스도 그렇게 방금 얘기했고요. 또 WBC 주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걸 히브리적 사고로 보자면, 마음과 양심을 유대인들은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마음이 우리를 책망한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의 가책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또 앞 구절의 문맥에 비춰볼 때 우리는 ‘마음을 굳게 해야 된다’, 즉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인데 그 확신을 무너뜨리는 그런 마음의 책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28:04] 그런데 여기서 20절 후반부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학자들이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마음의 책망은 확신과 반대되는 의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마귀의 참소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에요.그래서 조금 전에 읽은 브루스도 이걸 사단의 비난이라고 좀 전에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런 참소, 사단의 비난, 사단의 참소를 이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도 크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말리라는 학자도 또 이렇게 썼습니다. 이 부분에서 요한의 주된 목적은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신자들이 그들의 단점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깨닫게 될 때, 성부의 사랑과 긍휼이 그들의 책망받는 양심을 치유하기 위해 주어진다는 것을 굳건히 세워주는 것이다. 여러분 물론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여기서 그 능력이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으니 하나님이 이걸 행하실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입니다. 다른 말로 ‘너는 마음의 찔림 때문에 고통받고 있느냐? 괜찮다.’ 이 말입니다. 1대지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구원의 확신을 우리는 가져야 된다고. 지금 그걸 그대로 이어서 이렇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 나의 실수와 부족함과 나의 그런 어떤 모습 때문에 내 마음이 나를 계속 책망하고 있다면 거기에 개의치 말아라. 그 책망 소리를 듣지 말아라.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봐라.’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의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다음에 마지막 부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즉, 하나님은 너의 모든 것을 아시니 걱정하지 말아라. 너의 작은 실수들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너의 속마음을 아시고 너의 노력을 아시고 너의 상황을 아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신자냐? 너는 교회 다니느냐? 너의 마음, 너의 감정보다 더 큰 하나님을 믿어라.’ 여러분 어떻습니까? 방금 좀 은혜받은 분들, 혹시 계십니까? 이걸 듣고 엄청 위로가 된다. 은혜 받는 분들 혹시 계십니까? 아마 1대지에서 말한 그 형제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엄청 큰 위로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 글을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이 해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아마 벌써 다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로이드 존즈가 그 문제에 대해서 이런 바른 지적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위로의 내용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주 위험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함으로써 양심의 소리와 마음의 소리를 침묵시켜버리게 한다. 우리는 그와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모든 것이 잘될 것이야’라고 말함으로써 죄책감을 피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같은 마음가짐은 아주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런 주장이 반율법주의로 직접 이끌어들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반율법주의를 위한 논쟁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덮어주시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용서를 받았으니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으며 행동은 대충 해도 된다는 말이다.
[31:14] 여러분 양심의 소리를 침묵시켜버리며 마음 편히 죄 짓게 만드는 반율법주의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너무 정확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당연히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무분별한 위로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여러분도 읽으면서 들으면서 아마 느끼셨을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주석을 읽으면서 이런 견해를 처음부터 경계했습니다. ‘이건 아닐 거야.’ ‘이거는 올바른 해석일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제 다른 해석을 계속 찾았습니다. 이건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 보였고 특히 제일 거슬렸던 것이 바로 심판을 위로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단은 분명히 지금 심판에 대한 것이 맞거든요. 스말리 같은 학자들도 그걸 그것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심판에 대한 것이 맞다.’ 그러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위로의 메시지라고 지금 말하고 있는 학자들이 이게 너무 안 맞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람들이 ‘주님이 다 아십니다’라는 이 말을 위로로 삼는 것을 저는 솔직히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분들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 말이 잘 공감이 안 가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날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날 아신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알아주지 못하도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나를 알아준다.’ 뭐 이제 그런 뜻이죠.
물론 맞는 말이고 위로가 될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숨겨진 죄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저는 솔직히 이 말이 너무 무섭게 들리더라고요. ‘주님이 다 아신다.’ 이걸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또 다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셔’, 이거랑 ‘하나님이 다 아셔’, 완전히 다르죠. 저는 후자로 들리는 거예요. 주님이 다 아십니다. 여러분 이것만큼 무서운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시고 그 마음을 심판하시는 분이신데, 내가 완벽한 존재이지 않는 이상 나의 마음으로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다 보실 수 있다는 건데, 여러분 우리는 어찌 이런 전지하신 하나님을 근거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하나님이 다 보시고 다 아신다는 이 말이 너무 두렵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주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좋은 것이죠. 진리 앞에서 떨고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죠. 그런 회개하고 그런 마음이 들죠. 절대로 이걸로 저는 위로받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20절 후반부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이, 이게 진리이고 중요한 말이 확실하지만 위로의 말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주석을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학자들이 이 글을 위로로 보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실력 없는 학자들이 아니라 실력 있는 학자들이요. 아이 하워드 마샬, WBC 주석, 이를 비롯해서 평소에 제가 잘 참고하는 실력 있는 학자들이 전부 다 이걸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조금 조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이제 반대파, 즉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대로 이게 위로가 아니라 경고라고 보는 학자들 중 한 명이 칼빈이에요. 이것 때문에 좀 시험 들었습니다. 되게 아이러니하죠. 여러분 칼빈이 이걸 위로로 볼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루턴은 이걸 위로로 보고 칼빈은 이걸 경고로 봅니다. 되게 희한하지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내가 틀린 걸 수도 있겠다.’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내가 틀렸나? 내가 너무 우리 교회 진리의 렌즈로 바라봐서 이것도 어떻게 보면 교리적인 시선으로 내가 이걸 바라봐서 성경이 진짜로 뭐라고 말하는지를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열린 마음으로 학자들의 글을 다시 한 번 보기 시작했습니다.
[35:00] 그중에서 제일 설득력 있는 주장이 바로 19절과 20절의 그 연결에 대한 그런 해석이었는데요. 지금 20절이 ‘왜냐하면’이라는 ‘호티’로 시작하는데 그래서 이거를 19절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도 여러 가지 문법의 문제도 많습니다. 이게 “‘호티’가 ‘왜냐하면’인 ‘호티’가 아니라 ‘호’라는 단어하고 ‘티’라는 단어가 사실 합해진 것이다.” 이렇게 이거 다 건너뛰겠습니다. 어쨌든 ‘호티’가 있든 없든 20절은 19절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확신을 가지라고 나와 있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게 1대지였잖아요. 그런데 그 내용은 20절에서 우리에게 그 확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위로를 준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19절과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는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연결되는 것을 보자면 20절을 위로로 보는 게 더 맞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원고를 쓰다가 몇 번을 견해를 뒤엎었습니다. 오랜만에 이제 전 부치기를 한 거예요. 뒤집고 또 뒤집고 견해를 한 번 뒤집고 ‘호티’ 때문에 또 한 번 다시 또 뒤집고 또 다른 논쟁 때문에 또다시 뒤집고 이러다가 결국 이제 학자들의 편을 들게 되었습니다. ‘20절 혼자만 보면 이게 경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교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게 분명히 경고처럼 보이지만 이걸 19절과 같이 봐야 되는구나. 이걸 같이 볼 때는 이거는 위로의 글이 맞겠다.’ 이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절은 앞에 1대지에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우리 보고 확신을 가지라고 말하는 게 맞기 때문입니다. 그건 분명하거든요.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게 맞고, 또 구원의 근원은 은혜가 맞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큰 것도 또 사실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것도 사실이고, 또 진짜로 회개한 자들에게는 우리의 감정과 상관없이 이런 마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의 확신을 가지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다. 물론 여기서 회개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다루고 있지 않을 뿐이지, 그게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니 우리 회개한 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견해를 바꿨습니다. 근데 여전히 너무 찜찜한 거예요. 그래서 20절을 계속 다시 읽으면서 이 단락이 위로가 될 수 없다는 아주 작지만 중요한 증거를 하나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작은 증거가 실마리가 되어서 더 결정적인 근거들을 줄줄이 이제 풀어내주고 있더라고요.
그 실마리가 뭐냐면, 이걸 위로로 보는 학자들이 19절과 20절에 나오는 ‘마음’이라는 이 단어를 일관성 있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9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38:00]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 3:19)
여기서 우리의 양심을 말한다는 게 확실하다고 말씀을 드렸죠. 확신을 가지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양심의 가책 없이 주님 앞에 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또 뒤에 나오는 21절이 이걸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 3:21)
그런데 이제 20절에 나오는 ‘마음’은 지금 이 두 가지 ‘마음’과 좀 다릅니다.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20) 지금 20절의 ‘마음’이 이제 두 번 나오죠. 근데 첫 번째 ‘마음’은 양심이긴 하지만 그 양심이 올바르게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책망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그다음 두 번째 ‘마음’에서는 그냥 완전히 미혹된 감정에 불과한 것으로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즉 우리는 책망받을 필요가 없는데 지금 이 ‘마음’이라는 것이 감정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있고 그걸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다. 이렇게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는 것이잖아요. 이걸 20절을 위로로 본다면 이렇게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근데 자세히 보시면 이건 지금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이 ‘마음’으로 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지금 이 첫 번째 ‘마음’은 올바른 것으로 나와 있죠. 근데 20절 끝부분에 나오는 ‘마음’은 잘못된 것처럼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근데 19절부터 21절까지 이 ‘마음’이라는 단어가 네 번 나오는데 계속 이 ‘마음’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여기서는 그냥 이 ‘마음’은 그냥 사람의 양심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누구죠? 18절에 요한이 한 번 더 얘기했습니다. ‘자녀들아’. 지금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즉 누가 진정한 자녀인지, 요한은 지금 그 자녀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19절에서도 그 자녀들 보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도 사실 그것입니다. 이거는 지금 믿는 자의 참된 신자의 마음이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참된 자녀들이 진짜 양심이 살아 있는 거라고 우리가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야말로 그 안에 성령님이 거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야말로 죄를 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까? 법을 어길 때 그 법을 아는 자라야 범법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세상 살면서 어떤 사람이 ‘참 양심불량이다’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 참된 신자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범죄할 때에는 우리 안에 성경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또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찌를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이에요. 참된 신자는 양심이 살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 죄 의식을 주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그것이 축복이고 그것이 신자의 특징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간 관계상 여기에 관련된 구절을 읽지 않겠습니다. [41:03] 여러분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 없이 죄 짓는 것은 불신자잖아요. 그게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막 거짓말하고 죄책감 없이 막 물건 훔쳐버리고 그렇게 막 음란하게 살고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신자는 양심이 살아있는 존재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수는 할 수는 있어도 우발적인 죄를 지을 수는 있어도 그때마다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고요.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우리의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 이것이 진짜 자녀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이 렌즈로 20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 3:20) 여기서 우리 믿는 자, 거듭난 자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고 있다면, 즉 하나님의 자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 그것은 마귀의 참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마땅한 죄 의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말이 되죠.
그런데 이제 이게 캐치가 되니까 갑자기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20절 후반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 여러분 이 부분도 단순히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인 마음보다 더 크신 분이라고 막연하게 하게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우리의 어떤 감정보다 더 크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뭘 느끼든지 상관이 없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신자다.’ 이런 위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20절의 문맥 안에서 봐야 하는 것이에요. 전반전에서는 마음이 하는 게 뭐였죠?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양심,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양심이 하는 게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마음과 지금 비교되고 있는 하나님께서 더 크다고 말하고 있죠. 그럼 여기서 하나님이 더 크다는 것은 어떤 영역에서 더 크다는 것일까요? 당연히 우리를 책망하는 영역이지 않겠습니까? 이게 20절의 문맥인 것입니다. 여러분 즉 20절이 지금 두 가지를 따로따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책망하고 하나님은 크시다.’ 이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 크게 책망하시겠느냐?’ 이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게 이제 맞나 싶어서 다시 학자들의 글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게 어려웠어요. 왜냐하면 제가 주로 읽는 학자들 대부분은 이 글을 위로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가 바로 칼빈이었기 때문에 너무 찜찜했어요. 제가 칼빈과 동의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찾다 보니까 이렇게 보는 학자들도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수로 치자면 반반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독일 학자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독일 학자들이 많으니까 제가 독일어를 모르니까 독일 주석을 안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인용하는 학자들의 글을 보니까 독일 학자들이 이쪽으로 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요.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단서, 초대교회 교부들이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이 글을 위로가 아니라 경고로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증거가 되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력 있는 로이드 존즈도 이렇게 보고 있었고 그의 마지막 설명이 최종적으로 이 해석이 맞다는 확신을 제게 주었습니다. [44:22] 나는 이 구절을 위로의 구절로 해석하는 것은 문장 전체의 목적에 위배된다고 본다. 전체 문장은 지금 경고하고 있으며 권면하고 있다.
형제 사랑에 대한 이 문장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은 전반전 목적이 우리를 감찰하고 우리 자신을 점검하며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거스르게 하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은 경고하고 있다. 저는 문맥을 봐야 되기 때문에 이 난해구 20절이 19절과 연결이 되려면 이걸 위로로 봐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학자들의 그 말에 제가 이제 속은 것이에요.
그런데 로이드 존재는 19절과의 문맥이 아니라 더 큰 문맥을 봐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만이 아니라 그 앞에 나와 있는 3장 전체와의 조화를 지금 보고 있는데 여러분 3장 전체는 전부 다 지금 뭐예요? 권면인 것입니다. 진짜 자녀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로 직전에는 형제 사랑에 대해서 강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위로가 아니라 권면이었습니다. ‘너희가 잘하고 있다.’ 이게 아니라 ‘말로만 형제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실제로 너의 행동을 옮겨야 된다. 형제가 도움이 필요한 것을 보고만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이 말을 하다가 그다음에 19절로 이어간 것이에요. 여러분 19절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 3:19)
’이로써‘로 시작합니다. ’이로써‘. 너무 중요한 단어예요.
여러분 지난 주일 설교 기억나십니까? 거기서도 이 ’이로써‘가 나왔잖아요. 베드로후서 1장 4절도 이로서도 시작했고, 이 말의 선행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를 담임 목사님께서 다뤄주셨습니다. 여기도 똑같은 문제예요. 19절의 ’이로써의 선행사가 무엇인가 여기에 모든 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즉 무엇으로서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죠. 여기서 이제 중요한 것은 ‘이로써’가 뒤를 가리키냐 앞을 가리키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로써’ 뒤에 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게 맞다면 20절을 가리킨다고 보는 게 맞는 것이에요. 즉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여러분 그게 아니라 앞에 나와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면 우리가 지난 몇 주 동안 다뤘던 것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사는 것과 형제 사랑하는 것이 근거가 된다는 것이에요. 여기서 진짜 웃긴 게 뭐냐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여기서 ‘이로써’는 앞에 있는 구절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즉 이것은 형제 사랑을 가리킨다라고 대부분 다 인정합니다. 근데 그러면서 20절이 경고가 아니라 위로를 뜻한다고 이제 말을 하는 것이에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해석은 겉은 그럴싸해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의로운 삶과 형제 사랑이라는 것이에요. [47:26] 이로써 이런 행함이 우리의 삶에 발견되면 이로써 우리는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마음을 굳세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또 24절에 다시 한 번 또 등장하는데요. 거기도 ‘이로써’가 또 나오거든요.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로써)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4)
‘이로써’라는 말을 제가 넣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그냥 ‘말미암아’라고만 되어 있는데 원어에 보시면 거기에 똑같은 ‘이로써’가 나옵니다. 즉 24절 앞에 있는 것을 근거로 24절 후반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즉 우리가 진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24절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전반절이 뭐였죠? 근거가 뭐였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런데 그 계명이 뭔지 바로 전 구절 23절에 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요일 3:23)
올바른 믿음과 형제 사랑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그냥 입으로만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장 말씀처럼 내 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 앞부분에 다뤘듯이 습관적인 죄를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지금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계명은 뭐죠? 형제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의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의롭게 사는 것, 그리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보이십니까? 그러니까 20절은 그냥 막연한 위로가 아닌 것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가 맞습니다. ‘너의 양심이 지금 뭐라고 말하느냐? 양심이 중요하다. 살아 있는 진짜 신자들은 양심이 살아 있을 것이다. 믿는 자는 양심이 있는데 너희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삶을 지금 살고 있느냐? 너희가 법을 지키지 않고 형제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음으로써 너희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느냐? 그거는 문제다.’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너의 양심도 이렇게 너를 책망하고 있는데 그보다 더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더하겠느냐? 하나님은 양심보다도 더 크신데, 더 거룩하신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어찌 형벌을 피하려고 하느냐?’ 이게 20절입니다. 그다음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게 21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49:47]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 3:21) 지금 20절에서는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이렇게 조건절로 시작하고요. 21절은 ‘만일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다면’, 이런 조건절로 시작합니다. 서로 상반되지만 두 가지 다른 조건절로 평행하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21절의 귀결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20절의 귀결이 뭐죠? ‘하나님이 더 크시다.’ 이것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의 반대는 심판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20절은 경고이지 절대로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전체 문맥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좀 복잡했지만 잘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게 너무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에요. 20절은 경고인 줄로 우리는 꼭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19절에서 말한 확신과 이게 너무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20절을 위로로 보는 학자들이 제일 앞세웠던 주장이 이것이었잖아요. ‘이걸 위로로 봐야 19절과 잘 연결이 된다.’ 그것이었습니다. ‘20절이 19절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이게 주장이었는데 방금 저희가 그거를 지금 깨뜨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19절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방금 설명드린 ‘이로써’가 바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확신의 근거는 3장 앞부분에 있는 우리의 행함인 것이에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이로써 우리가 마음을 굳게 하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잘 들으셔야 됩니다. 우리의 행함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게 아닙니다. 장로교회에서는 행위구원과 행위심판을 구분을 못해서 이걸 문제를 삼는 것이에요. ‘우리의 행위가 구원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건 맞아요. 그렇기 때문에 20절을 우리의 마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근거해서, 20절에 근거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다라고 그래서 장로교회에서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게 칼빈주의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원의 확신은 성경적이지만 그 근거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구원의 근거와 확신의 근거를 우리는 구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은혜가 맞습니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맞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입니다. 여러분 그분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만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확신의 근거는 다릅니다. 이 구원을 우리가 받았다는 확신을 주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라는 것이에요. 행동으로 구원받아서가 아니라 행위심판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행실이자 우리의 삶이고,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고 있는지 아닌지, 이걸 보면서 우리의 구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바로 우리의 의로운 삶과 형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행위심판의 근본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받으신 그 구원. 첫째로 여러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그 값진 구원을 절대로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그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3:31]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우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첫 번째예요. 확신해야 되는 것이에요. 확신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확신은 그냥 은혜에 근거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번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에 근거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행실, 지금 나의 모습 안에서 확신을 얻으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게 너무나도 중요한 원리인 것이에요. 지금 나의 모습이, 지금 나의 행함이, 의롭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지금 나의 모습이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잘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고 습관적인 죄가 내 삶에 더 이상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내가 형제를 돕고 있고 사랑하고 있다. 지금 나의 행함이 변화된 예수님을 닮은 이런 거룩하고 의롭고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다. 여러분 그러면 그걸 근거로 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대지가 있는데 시간 관계상 통째로 넘어가겠습니다. 대지 제목만 읽어드릴게요. ‘안심된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며 기도하라’. 22절에 보시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우리는 그에게서 받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하면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리라’, 이런 잘못된 믿음처럼 보일 수도 있거든요. 근데 그게 아닙니다. 이 문맥 안에서 봐야 되는 것이에요. 구원의 확신의 문맥 안에서 봐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진짜 자녀들이 이런 하나님의 특징을 가지고. 특징이 뭐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계명을 지키는 자, 이런 모습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하는 기도들이 다 응답이 된다는 엄청난 약속인 것이거든요. 이 원리는 예전에도 몇 번 설명드린 적이 있고 너무 길기 때문에 통째로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자의 진짜 모습 중 하나가 기도 응답받는 것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하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을 받는 것이 자녀의 모습이자 자녀의 특권인 것이에요. 자녀가 아버지에게 솔직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그 자녀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구하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 원리를 다루고 있는 게 이제 이 3대지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에 응답을 받는, 진짜 자녀가 되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바로 결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반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행실이 왜 구원의 확신의 근거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방문하셨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우리의 행함을 보고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에요.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다녀가셨구나.’ 이게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게 너무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20절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우리가 확신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여러분 자취하는 청년분들은 공감이 되실 겁니다. 집에 왔는데 냉장고가 꽉 차 있어요. 무슨 뜻인가요? ‘엄마가 다녀가셨구나.’ 이 뜻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결과가 눈에 보이니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딱 하나 있죠. ‘능력 있는 누군가가 다녀가셨구나.’ ‘엄마가 다녀가셨구나.’
미국 플로리다에는 태풍이 굉장히 자주 붑니다. 그래서 거기 어떤 지역에는 막 나무가 뽑혀 있는 게 이상한 장면이 아닌 것이에요. 나무가 뽑혀 있고 막 차가 뒤집어져 있고 지붕이 막 통째로 다른 데 가 있고 이제 거기 주민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태풍이 또 왔다 갔나 보구나.’ 저절로 되지 않는 일이니까 그런 거잖아요. [57:20] 큰 나무가 혼자 뽑힐 수가 없고 차가 혼자 뒤집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보고 사람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엄청나게 센 태풍이 지나갔나 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성도의 삶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녀가셨나보다.’ 이게 증명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바뀌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그 눈에 보이는 가식적인 효과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의로운 삶과 형제 사랑인 것이에요. 나의 힘으로는 안 되는 영역이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난 원래 거룩한 사람이 아닌데 난 죄인인데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회개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니까 거룩하게 사는 것이에요. 그걸 보면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확신이요? ‘나에게도 하나님이 다녀가셨구나.’ 그래서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나도 구원받은 신자구나’ 여기서 확신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변화된 모습이,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구원의 확신의 증거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그 삶에 다녀가셨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또 ‘나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나는 원래 사람들을 잘 못 대하는데, 나는 상처 투성이고 고슴도치와 같은 나는 그런 존재인데, 형제들 대하는 게 나는 너무 어렵고 힘들고 잘 못하는데, 사랑 표현도 서툴고 여건도 되지 않고 난 솔직히 되게 자기중심적인 사랑인데,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인데 이랬던 내가 예수님 만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하고 있네. 손을 내가 먼저 내밀고 있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을 하고 있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게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다녀가셨다는 증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행함이 왜 확신으로 이어집니까? 복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에요. 구원의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변화된 삶으로 천국을 이미 누리고 있는 자라야 내세에서도 그 동일한 천국의 연장선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마비되어서 침대에 누워만 있던 자가 치유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치유의 확신을 언제 얻을 수 있습니까?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날 때 보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일어나서 걷고 뛸 때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의 믿음에 따른 행함이 확증이 되고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그냥 계속 누워만 있으면서 ‘나는 믿어. 나 하나님 믿어. 난 치유를 믿어.’ 여러분 이렇게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진짜 치유받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확신을 주는 것은 실제로 걷고 뛰는 것이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 행함이 주는 확신이 바로 그것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걷고 뛰시기 바랍니다. 즉 의롭게 살고 형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확신이 되는 것이에요. 그게 마비된 자가 걷고 뛰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것을, 내 힘으로만 할 수 없었던 그것을 이제는 거듭난 자로서 하나님의 하나님이 다녀가신 그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 이제는 성령님과 함께 그 변화된 삶을 살면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 어떤지, 진짜 자녀는 어떠한지, 여러분 얼마나 의롭고 얼마나 사랑이 넘치는지, 얼마나 세상과 다른지,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게도 보이고 여러분 자신에게도 그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못한다는 마귀의 참소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행위구원으로 내가 이렇게 구원을 얻는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다녀가셨기 때문에 이 자녀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변화된 삶에서 이제는 여러분 확신을 얻으시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사랑하는 청년들은 마귀의 참소에 넘어가서 막 낙심과 절망과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담대하고 자유한 모습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로서 담대히 평강과 희락 가운데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써 그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고 사랑을 행하면서 그렇게 확신을 갖게 되는, 그렇게 마음을 굳게 세워 영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이 시간 들으신 말씀을 기억하며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이렇게 무작정 내가 가짜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내 삶에 이런 구원받은 자의 열매들이 있다면 여러분 거기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를 이렇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담대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02:21] 또 거기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더 예수님을 닮고 더 거룩해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더 구하고 더 힘쓰고 더 주님께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 내 삶에 이런 열매들이 없다면 죄를 이기는 거룩한 삶과 형제를 사랑하는 구제와 섬김이 내 삶에 없다면 여러분 그것부터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실한 증거들이 내 삶에 없다면 그것부터 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내가 확신을 가질 만한 증거들을 내가 원하는데 내 삶에 그게 없습니다. 나도 담대한 크리스천으로 살고 싶은데 매일매일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실 그날을 벌벌 막 떨면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살았기 때문에 담대히 주님을 기대하며 맞이할 수 있는. 주님, 나에게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나에게 그런 삶을 살고 싶은데 나에게는 그런 증거들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시는 분들은 내 삶에 아직도 남아 있는 습관적인 죄악들을 이 시간 회개하시고 형제 사랑이 부족했던 것을 회개하시고 예수님을 다시 모시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안에 들어오소서. 내가 주님을 다시 내 임금과 구주로 영접하오니, 주님 내 안에 들어오소서. 주님, 나를 만져주소서. 나를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이 다녀가셨다는 흔적을 이제는 내 안에 남겨주소서. 태풍이 지나갈 때 나무들이 뽑히는 것처럼 예수님,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의 죄악들을 뿌리째 뽑아주소서.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주소서. 나도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거룩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확신을 갖기 원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나는 죄인인데 나는 사랑이 없는 사람인데 주님이 다녀가시더니 나도 거룩해질 수 있구나. 나도 사랑을 행할 수 있구나. 주님, 나도 이런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도 이런 고백을 하길 원합니다. 나도 확신을 가지며 신앙생활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이 시간 이걸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주여 삼창 외치고 우리와 함께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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