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설교문] 일터, 나의 거룩한 예배 공간 - 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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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 5부 한가족 예배를 통해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음이 참 감사이자 기쁨입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우리 성도님들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셨을까 참 많이 고민해 보았습니다. 주일임에도 일터에 나가 일하시다가 늦은 시간에라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로 나아오신 성도님도 계실 것 같고, 이른 아침부터 여러 모양으로 봉사하시다가 이제야 시간이 되어 5부 예배에 나온 성도님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5부 예배는 유독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님들도 계실 것 같아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기에 이시간 풍성한 은혜와 위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성도님들, 그런데 이런 간절한 마음과는 별개로 나도 모르게 자꾸 시계에 눈이 가지는 않으신가요? “아, 이제 예배 끝나고 집에 가면 9시가 넘고, 씻고 잠들면 바로 월요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려서 “아니 목사님, 잊고 있었는데 왜 이야기하셔서 갑자기 생각나게 하세요!”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웃음)
우리에게 ‘월요일’은 그냥 7일 중 하루가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자, 때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내일부터 감당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고, 상사 눈치도 봐야 하고, 거래처 만날 생각에 벌써 마음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직장인만 힘든 게 아니죠. 가정에서는 아이들 학교 보낼 준비에 집안일이 늘어나고, 우리 아이들도 숙제와 학업 때문에 월요일이 오지 않길 바랍니다.
주일과 월요일, 딱 하루 차이인데 왜 이렇게 온도 차이가 극심할까요? 어쩌면 우리가 교회에서는 ‘성도’로 살아가다가, 직장에서는 ‘직장인’으로 살아가야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말씀은 월요일이 되어도 우리의 존재와 근원은 여전히 동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주일 예배당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직장과 가정, 학교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려운 월요일이 세상으로 파송받는 월요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가짐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대지] 먼저, 우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마음가짐은 일터에서의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사람에게 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과 사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인생이 아니라, 이 모든 환경 너머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런데 솔직하게 이 말씀이 정말 가슴에 와닿으십니까? 내일부터 당장 기쁘게 순종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드시나요? 아마 이런 생각이 먼저 드실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당장 내일 출근해서 저를 괴롭히는 상사를 봐야 하고요, 말이 안 통하는 거래처를 상대해야 합니다. 또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도 없는 집안일을 해야 하고, 쉬지 않고 학업을 감당해야 하는데 어떻게 예수님 대하듯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저 같아도 정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내 노력이 무시당하는 직장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사 노동의 현장에서, 그리고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학교라는 치열한 현장에서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이 때로는 너무 가혹한 요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더 힘들게 하려는 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짓누르는 상황과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려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의 편지를 전해 받은 이들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주인과 자유인도 있었지만, 당시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던 ‘노예들’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예들에게 있어 주인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적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노동은 그저 매를 피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주인들에게 그들은 이름조차 없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가혹한 현실 속에 있는 이들을 포함한 골로새 교회 전체를 향해 선포합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하십시오” 절망적인 환경에 매몰되지 말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라는 강력한 권면이었습니다. 
그저 눈치를 보며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노예의 태도’를 버리고 내가 하는 노동이 의미 없어보일지라도 단순히 생존을 위한 일 일지라도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 드리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즉 노동의 현장 가운데에서 ‘예배자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자의 태도’는 내가 하는 일이 아무리 작고 평범해 보일지라도, 그 일을 받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성껏 작성한 보고서 한 장, 가족을 위해 정성으로 차린 식사 한 끼, 정직하게 공부하는 그 시간들을 우리 주님이 직접 받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배자의 태도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정직함’이며, 나를 무시하는 사람 앞에서도 내 정채성을 잃지 않는 ‘굳건함’입니다. 내 인생의 진짜 주인이신 주님께 내 삶을 예배로 드리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태도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상황과 사람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당장의 나의 상황과 일은 바뀌지 않습니다. 여전히 힘들고 막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의 상사나 가족 또는 학업’에서 '주님'으로 바뀔 때, 그 힘듦의 현장이 주님을 만나는 예배의 처소로 변화될줄 믿습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다시 각자의 치열한 현장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누군가는 사무실로, 누군가는 가정으로, 또 누군가는 학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잠깐이나마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기억하며 이렇게 선포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 상사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주님! 이 성적이 내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나를 이 자리에 보내신 주님 앞에서, 주님을 대하듯 정성을 다해 이 시간을 살아내겠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가겠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의 일터는 고통만이 가득한 현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예배의 처소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꿈으로, 평범한 일상이 가장 영광스러운 예배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대지] 우리가 가져야할 두 번째 마음가짐은 나의 ‘진짜 신분’을 확인하고 ‘주를 섬기는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24절)
조금 전 우리는 '나의 태도를 바꾸겠다'고 함께 결단했습니다. 그러나 이 결단은 회사 문을 여는 순간, 혹은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영적 허무함'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썼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소외감, 나를 오직 '성과'와 '숫자'로만 평가하는 냉혹한 현실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이 허무함이 우리의 결단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라는 거대한 간극 사이에서 영적인 허무함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시기 위해 이 약속을 예비하셨습니다. 2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당시 골로새 교회의 노예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선포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으로 노예는 어떤 재산도 가질 수 없었고,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물려받을 ‘상속권’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기업의 상을 받을 상속자다!” 비록 이 땅에서는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의 모든 유산을 이어받을 진짜 주인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노예를 소모품으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나라를 이어받을 ‘존귀한 상속자’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영적 허무함은 과연 어디에서 옵니까? 세상은 우리의 존재 그 자체보다 우리가 내놓는 ‘성과’와 ‘유능함’에 먼저 주목합니다. 물론 우리를 아껴주고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따뜻한 동료나 상사가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따뜻한 관계들 내면에도 우리가 모르는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물’이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결국 ‘내가 나의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하면, 나의 존재도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라는 불안감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실력이 인정받아야만 내 존재가 비로소 인정받는 이 구조 속에 있다 보니, 정작 ‘나’라는 존재가 인정 받지 못하고 채움받지 못하는 늘 갈급한 상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허무함이 밀려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상속자’는 전혀 다릅니다. 상속권은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서 따내는 ‘성과’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하나 때문에 주어지는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 입니다. 나의 가치가 내 ‘열심’에 달린 게 아니라, 나를 상속자 삼으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를 보고 나를 고용하고 인정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조건없이 나를 부르시고 상속자 삼아주셨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이 우리 가운데 분명한 믿음으로 고백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진리가 믿음으로 고백 될 때, 비로소 우리 삶에 진짜 변화가 시작될 줄 믿습니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던지더라도, 혹은 가정에서 나의 수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외로울 때에도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내가 얼마나 대단한 성과를 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여러분을 '내 사랑하는 자녀'라고 확증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기업을 물려받을 존귀한 주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임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되면, 우리 삶의 목적도 아주 분명해집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골로새서 3장 24절 하반절입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여러분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적용]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상속자 삼아주신 예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오직 예수님 한 분이라면,우리가 매일 하는 일들은 그냥 힘든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에 이미 하나님께 인정받은 상속자임을 기억하며, 주님만을 섬김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영적인 허무함으로 부터 벗어나 진정한 승리를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결론]
오래전 대학교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를 나누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오래전 대학교 친구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예화]
어느날 친구가 화가 잔뜩나서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치열하게 살다가 주일에 교회에 왔는데, 강단에서 들려오는 설교가 너무 아프고 상처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내지 못하냐”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한주간 회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온 자신에게 있어 현실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한참 이야기를 한 뒤에 저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민석아, 네가 나중에 목사님이 된다면, 제발 성도들의 삶을 정말로 이해해 주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때 친구가 저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목회의 중요한 방향성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다알지 못하고 온전히 공감할 수 없지만 성도님들의 아픔을 전해 들어 어느정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은혜를 받지만, 막상 월요일의 삶으로 돌아가면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상속자이며, 주님만을 섬기는 자들입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당장 내일 아침 찾아오는 삶의 현장에서 이 말씀이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괴리감이 더 크게 찾아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며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요. “왜 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지 못해?”라고 우리를 책망하거나 억합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로인해 아파하는 우리들에게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란다. 네가 서 있는 그곳에 내가 함께 있고, 너의 그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단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이자, 평안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무언가를 해내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눈물을 삼킬 때, 이름도 없이 가정에서 헌신할 때, 그 고단한 자리에서 주님을 한 번 부르는 그 마음을 예배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즉, 오늘 말씀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숙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배자’임을 깨닫게 해주는 복음인줄 믿습니다.
이제 이 믿음의 고백을 담아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는데요. 여러분이 내일 마주할 자리는 여전히 고단하고 치열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후에 고백할 찬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한 주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길 소망합니다.주님 우리는 예배자입니다. 이시간 우리 마음을 다해 함께 찬양합시다.
(찬양: ‘나는 예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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