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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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 왜 어둠이 먼저 나오나?
33절: 왜 어둠이 먼저 나오나?
33절이 먼저 하는 일은, 이 죽음을 보통 죽음과 구분하는 것입니다.
정오에 갑자기 세 시간 동안 온 땅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인간이 예수를 죽이는 장면”을 넘어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장면으로 들어간다는 신호입니다. 맥아더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빛으로도 나타나시지만, 심판 때는 어둠으로 나타나신다고 길게 설명합니다. 애굽의 흑암 재앙, 시내산의 두꺼운 흑암, 이사야·요엘·아모스·스바냐의 심판 본문을 연달아 가져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33절의 “그래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걸 놓치면 십자가를 “사람들이 예수께 너무 잔인했다”로만 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방향을 바꿉니다. 사람들의 죄는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일은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33절은 그걸 여는 문입니다.
한 단계 더 풀면 이렇습니다.
마가는 왜 못 박힘의 세부 묘사를 길게 하지 않고, 갑자기 “어두워졌다”에 집중할까요? 맥아더의 답은 분명합니다. 진짜 핵심 고통은 로마의 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3절은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강조하려는 절이 아니라, 이제부터 예수께 임하는 고난의 성격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절입니다.
34절: 왜 “버리셨나이까”가 중심인가?
34절: 왜 “버리셨나이까”가 중심인가?
33절이 배경을 열었다면, 34절은 그 배경의 의미를 말로 터뜨리는 절입니다.
세 시간 흑암이 끝난 뒤 예수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십니다. 맥아더는 이 절을 본문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33절에서 어둠으로 암시된 일이, 34절에서 버리심이라는 언어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래서?”는
십자가의 핵심은 육체 고통이 아니라, 대속자가 죄인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 버려짐을 당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맥아더는 이 버리심을 단지 심리적 허무감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분은 어둠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고, 어둠이 지나간 뒤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교제가 거두어진 상태를 경험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지옥이 무엇인지, 곧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위로 부재를 함께 맛보셨다는 식으로 설교를 전개합니다.
이 절이 중요한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십자가를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힘드셨을까”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34절을 통해 청중을 그 자리에 못 머물게 합니다. 질문은 “얼마나 힘드셨나”가 아니라, **“왜 이런 버리심이 필요했나?”**로 바뀝니다. 그 답은 하나입니다.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4절은 단순한 감정의 절규가 아니라, 십자가를 대속으로 해석하게 만드는 절입니다.
또 맥아더는 “My God, My God”의 반복도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단순 반복이 아니라 깊은 애정과 친밀함이 배어 있는 호소로 풉니다. 그래서 더 비극적입니다. 낯선 신에게 항의하는 외침이 아니라, 사랑하고 교제하던 아버지께 버려짐을 호소하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십자가의 깊이가 더 커집니다.
35–36절: 왜 군중의 오해를 굳이 적나?
35–36절: 왜 군중의 오해를 굳이 적나?
여기서 당신이 느끼는 “그래서?”가 특히 큽니다.
왜 중요한 33–34절 다음에 갑자기 사람들이 “엘리야를 부른다”는 말을 적어 놓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맥아더는 이것을 단순한 오청으로 보지 않고, 조롱의 연장으로 봅니다. 세 시간 동안 정오의 흑암을 봤으면 멈출 법도 한데, 사람들은 다시 냉소와 구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35–36절의 역할은
십자가의 의미는 사건 자체만으로 자동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표지가 눈앞에 있어도, 사람은 회개하지 않으면 여전히 조롱하고 비웃고 구경합니다. 즉, 이 절들은 단순한 주변 소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무지와 완악함을 드러냅니다. 맥아더는 “세 시간 흑암이 지나갔는데도 그들이 여전히 조롱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33–34절이 하나님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준다면,
35–36절은 인간 쪽이 그 일을 어떻게 못 알아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무지”를 나란히 놓습니다. 이게 있어야 39절 백부장 고백도 더 두드러집니다. 많은 이들이 못 봤지만, 한 이방 군인은 마침내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37절: 왜 “큰 소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37절: 왜 “큰 소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겉으로 보면 그냥 죽음 보고입니다.
그런데 맥아더는 여기에 강하게 멈춥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십자가형은 질식사에 가까운 죽음이기 때문에, 거의 죽어 가는 사람은 큰 소리를 지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지셨습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그분의 생명은 빼앗긴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어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외침을 “다 이루었다”와 연결하고, 또 “아무도 내 생명을 빼앗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씀과 연결합니다.
그래서 37절의 “그래서?”는
예수의 죽음은 우연한 소진도, 완전한 무기력도, 단순 패배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속은 그냥 예수께 무슨 일이 닥쳤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 일을 의식적으로 감당하시고, 마침내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33–34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예수는, 37절에서 그 사역을 다 이루고 생명을 내어놓으십니다. 그래서 이 절은 “죽었다”의 보고가 아니라, 대속이 끝났다는 선언의 자리에 가깝습니다.
이게 설교적으로 왜 중요하냐면,
청중이 십자가를 단지 불쌍한 죽음으로 보면 결국 동정만 남습니다.
그러나 37절은 동정으로 끝내지 못하게 합니다. 이 죽음은 의도되고 성취된 구원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38절: 왜 휘장이 찢어지나?
38절: 왜 휘장이 찢어지나?
이번에 직접 연 본문 범위는 77행까지라, 맥아더가 그 설교에서 38절을 길게 어떻게 풀었는지 전체를 다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부 문장까지 단정하면 안 됩니다. 다만 본문 자체와 맥아더 설교의 큰 논리로 보면, 38절은 분명히 죽음의 결과를 보여 주는 절입니다. 33–37절이 “예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면, 38절은 “그 결과 무슨 변화가 생겼는가”입니다.
그래서 38절의 “그래서?”는
그 버리심과 죽음이 헛된 고난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연 효력 있는 죽음이었다는 뜻입니다.
휘장은 원래 접근을 막는 상징이었는데, 예수의 죽음 직후 그것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즉, 십자가는 단지 형벌 감당이 아니라 관계 회복의 새 길을 여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38절은 이렇게 기능합니다.
33–34절은 “형벌”,
37절은 “완성”,
38절은 “효력”입니다.
예수께서 심판을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실제로 무언가를 열어 놓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절입니다.
39절: 왜 마지막에 백부장이 고백하나?
39절: 왜 마지막에 백부장이 고백하나?
39절도 앞과 같은 한계가 있습니다. 맥아더가 이 설교에서 이 절을 어떻게 세부 전개했는지 전체 텍스트를 이번에 다 보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의 문맥상, 그리고 앞선 절들의 논리로 보면 39절은 이 사건의 정체가 드러나는 마침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39절의 “그래서?”는
십자가는 예수의 정체를 숨긴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드러낸 자리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35–36절에서 끝까지 못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 이방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즉, 앞부분의 조롱과 오해가 마지막 고백과 대조됩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전체 흐름에서도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했던 복음서가, 십자가 아래에서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 단계 더 말하면,
39절은 단순한 감탄문이 아니라 독자에 대한 질문처럼 기능합니다.
“군중처럼 끝까지 못 알아볼 것인가, 아니면 백부장처럼 십자가에서 예수의 정체를 볼 것인가?”
그래서 본문은 정보 전달로 끝나지 않고, 해석의 자리로 독자를 끌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