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아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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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말씀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선포
선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저를 비롯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 우리 중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아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고백하고, 찬양의 자리에서 두 손을 들며 주님을 향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의 '삶'도 그 고백을 정직하게 따라가고 있습니까?
입술의 고백이 삶의 문턱을 넘어, 세상 속에서도 참된 사랑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삶 사이에 놓인 민낯을 정직하게 대면하고자 합니다.
[제1대지: 은혜가 빠진 인간적 열심의 필연적 실패]
베드로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제자였습니다.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장).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겟세마네에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다가오자,
그는 칼을 빼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거 같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십자가를 준비하고 계셨고, 베드로는 칼을 빼 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열심이 단순한 충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심이 곧 올바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거에요
베드로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의지와 헌신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ㅏ
베드롤느 기적과 힘으로 승리하는 메시아를 기대했고, 자신이 그 메시아 곁에서 끝까지 싸울 용사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 멋대로의 하나님 이해와 신뢰였습니다.
이는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자기 확신 속에 있는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가 빠진 인간의 열심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유한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대가는 때때로 우리의 한계를 훨씬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베드로는 멀찍이 서서 사람들이 피워놓은 '숯불' 곁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세상의 숯불 곁에서, 생명의 위협이 다가오자 그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내 힘으로 반드시 지켜내겠다"던 맹세는 '죽음'이라는 현실의 두려움 앞에서 가장 비참한 배신으로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결단만으로 버티려 했던 인간 사랑이 그 숯불앞에서 철저한 실패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의 나약함이 아닙니다. 은혜 없이는 누구도 끝까지 설 수 없다는, 인간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제2대지: 세상의 숯불 곁에서 타협하는 우리의 현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오늘 본문 21장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과거의 삶의 터전인 호수로 돌아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의 실패에 대한 수치심과, 영적 무기력함 때문에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들에게 부활은 아직 '사건'이었지 '삶'이 되지 못했던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2천 년 전 갈릴리 어부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우리도 예배당 안에서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며 영적인 경험합니다.
그런데 치열한 생존의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십자가를 몰랐던 나로 되돌아가지 않습니까?
부활이 '사건'에서 '삶'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이 간극, 오늘 우리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할 문제입니다.
1992년, 한국 교회사에 발자취를 남긴 고(故) 한경직 목사님께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셨을 때
전 세계가 그의 헌신과 사랑을 찬사하며 바라보던 시상식 자리에서, 목사님은 자신의 선교적 업적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했던 죄인입니다."
한국 교회가 가장 존경하는 영적 거인조차도, 국가 폭력과 생존의 위협 앞에서는 신앙의 지조를 굽히고 세상과 타협해야만 했던 뼈아픈 과거가 있으셨습니다.
'숯불 앞의 베드로'와 같은 무너짐의 경험이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대 사회는 칼을 들이대며 신앙을 포기하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승자독식의 구조, 뒤처지면 도태될 것 같은 경제적 불안이라는 훨씬 더 교묘한 '세상의 숯불'을 피워놓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협박이 아니라 유혹이기에 더욱 위험합니다. 협박 앞에서는 저항할 명분이 생기지만, 유혹 앞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지독한 현실의 괴리감이 밀려옵니다.
동료를 밟고 일어서는 대신 손해를 감수하기가, 침묵 대신 불의에 맞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압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일의 고백이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닙니다.
은혜의 공급 없이 세상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려 할때 그 때에 ㅡ 베드로처럼 우리의 열심도 한계 앞에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제3대지: 전지하심(Oida)의 은혜와 부끄러운 사랑의 수용]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허탈함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밤새 주린 그들을 위해 호숫가에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 먹이십니다.
이 숯불의 의미를 짚어봅시다.
헬라어 원어로 이 숯불은 '안스라키아(ἀνθρακιά)'입니다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단어는 딱 두 번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몸을 녹이던 대제사장 뜰의 숯불,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다시 피워놓으신 이 숯불.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 영적 실패와 수치심의 현장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정죄가 아닙니다.
곪아버린 상처는 덮어둔다고 낫지 않습니다. 그것을 정면으로 열어 빛 아래 내어놓아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됩니다.
주님이 다시 피우신 숯불은 심판의 불이 아니라, 치유의 불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를 따져 묻기 전에 먼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회개가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입니다.
조건을 충족해야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섬김과 밥상이 먼저 주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은혜가 다른 종교의 공로 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우리는 나아지면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나아질 수 있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원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아가파오(ἀγαπάω)' 무한한 사랑이였고, 베드로는 '필레오(φιλέω)' 인간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어쩌면 이 대답이야 말로 베드로의 대답이 가진 무게를 분명하게 합니다.
과거의 베드로였다면 주저 없이 "당연히 목숨 바쳐 사랑합니다!"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밑바닥을 처절하게 경험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마지막 주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아심(Oida, οἶδα)', 주님의 전지하심에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주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사랑이 얼마짜리인지, 다시 흔들릴지 아닐지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아십니다."
화려한 서약 대신, 이 초라하고 정직한 고백. 강함이 아니라 인정된 약함 위에서, 비로소 진정한 신뢰가 시작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고작 그 정도의 사랑으로 무슨 사명을 감당하겠느냐?"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 질문에서는 친히 당신의 언어를 베드로의 언어에 맞추시어 "네가 나를 필레오로 사랑하느냐?"고 물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눈높이를 낮추신 것,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이자 이 본문이 보여주는 은혜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의 그 초라하고 연약한 수준의 사랑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인격과 신앙이 완벽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상한 심령으로 나아올 때, 주님의 전지하신 사랑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덮으시고 우리를 품어 회복을 이루십니다.
[제4대지: 알아주심의 은혜가 창조하는 사명과 삶의 변화]
나의 부끄럽고 연약한 사랑을 주님께서 온전히 알아주셨다는면요, 사실을 영혼 깊은 곳에서 깨닫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동력이 찾아오실줄 믿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조건적 수용'의 환경 속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합니다.
그러나 '무조건적 수용'을 경험한 사람은 오히려 자유롭게 타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알아주심은 바로 이 무조건적 수용입니다. 그 사랑은 더 이상 감정적 고양이나 관념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향한 '행동'으로 전환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확인받은 베드로에게 즉각적으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 명령이 세 번 반복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그 자리에서, 이제 세 번의 회복이 선언됩니다. 과거의 실패가 지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패의 자리 위에 사명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수치가 사명의 자격을 박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가장 깊이 무너진 자를 가장 구체적인 사명의 자리로 세우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내 양을 먹이라"는 명령은,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하거나 종교적 업적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의 은혜로 내면이 충만해진 성도가, 자신이 속한 가장 세속적이고 치열한 일상의 현장에서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양을 먹이기 위해서는 양의 냄새를 맡아야 하고, 양의 느린 걸음에 나의 속도를 맞추어야 합니다.
결과를 보장받지 못하더라도, 오늘 내 곁의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죠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내일 마주해야 할 가정과 직장은 여전히 치열하고 냉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의 베드로처럼 세상의 숯불 앞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내 연약함을 이미 다 아시고 품어주셨다는 이 거대한 수용이 그 은혜가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경쟁 사회 속에서 동료를 밟고 일어서는 대신, 상처받고 뒤처진 자의 곁에 서주는 친구가 됩시다.
가족을 통제하려던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양으로 여기며 십자가의 인내로 섬깁시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세상의 방식대로 혈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를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심는 자로 서게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약함을 주님이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의 두려움과 세상의 치열함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던 여러분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실패의 자리, 그 절망의 디베랴 호숫가로 찾아오셔서 은혜의 숯불을 피워놓눈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신앙의 화려한 포장지를 다 벗어버리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정직하게 나의 밑바닥을 내어드리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한 진심을 알아주시고 안아주실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세상을 향해 걷는 참된 사랑의 행동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크신 알아주심의 은혜가,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치열한 일상을 온전히 뒤바꾸어 놓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부활의 영광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의 실패한 삶의 자리까지 친히 찾아오시는 은혜의 주님. 오늘 부활절 오후 예배를 통해 우리의 영적인 민낯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입술로는 십자가를 찬양하고 목숨을 바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치열한 세상의 현실 앞에서는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세상이 주는 두려움과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신앙의 양심을 속이고, 적당히 타협하며 세상의 숯불을 쬐었던 우리의 비겁함을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은혜 없이 내 힘과 열심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영적인 교만함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그러나 주님, 이토록 상하고 무너진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절망의 디베랴 호숫가로 찾아오셔서 따뜻한 은혜의 숯불을 피워주시니 감사합니다. 과거처럼 호언장담할 수 없는 우리의 부끄러운 입술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며 항복합니다. 자랑할 것 없는 나의 밑바닥에서 올려드리는 이 초라한 사랑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의 진심을 안다”며 안아주시는 그 무한하신 십자가의 수용 앞에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내어드립니다.
우리의 중심을 알아주시는 그 거대한 은혜가 이제 우리의 굳어진 삶을 움직이게 하옵소서. 주님의 수용하심으로 내면이 충만해져서, 내일 다시 시작되는 직장과 가정과 치열한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의 양을 먹이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세상의 방식대로 나의 이익을 구하고 혈기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약자의 곁에 서주며 정죄 대신 용서와 평화를 선언하는 ‘작은 예수’로 걷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치열한 일상이, 주님의 양을 먹이는 거룩한 사명의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참된 위로와 생명이 되시는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