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끝났다고 느낄 때 하나님은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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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새로운 생명과 삶(부활주일)
부활: 새로운 생명과 삶(부활주일)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사랑합니다! 꿈사땅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순간 있었는가? “아, 이건 진짜 끝났다.” “이건 망했다.” 시험 망쳤을 때, 친구랑 크게 싸웠을 때, 부모님과 관계가 틀어졌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건 끝이야.”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똑같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들이 3년 동안 모든 걸 걸었던 분이 눈앞에서 처형당하셨다. 그들에게 그 순간은 단순히 슬픈 일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덤으로 갔다. 기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다. “끝났기 때문에” 간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무덤이 비어 있었다. 여기서 오늘 설교의 핵심 질문이다. 빈 무덤은 ‘끝’을 의미하는가, ‘시작’을 의미하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20장 1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갔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직 어두울 때”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이 이르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으신 후 제자들의 마음이 여전히 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아직 아무 소망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부활이다. 만약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 사함도, 영생도, 아무 소망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전하려고 매우 신중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왜 부활 이야기의 시작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자로부터 시작될까?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당시 사회에서는 여자의 증언이 공식적인 증거로 인정받기 어려웠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 이야기를 꾸며냈다면 절대로 여자를 첫 증인으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처음 전하게 하셨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장 27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강하고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예수님은 힘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연약하지만 진실하게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신 것이다.
실제로 요한복음의 앞뒤 내용을 보면, 무덤에 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2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라고 복수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요한복음이 막달라 마리아만 언급했다고 해서, 다른 복음서들과 내용이 서로 다르거나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함께 갔던 여자들을 더 자세히 기록한 것뿐이다. 또 무덤에 간 시간에 대해서도 복음서마다 표현이 조금씩 다른데, 이것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여자들은 안식일이 끝난 후 저녁에 향품을 준비하고, 아직 어두울 때 출발했지만 무덤에 도착할 때쯤에는 날이 밝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어떤 복음서는 “아직 어두울 때”라고 말하고, 어떤 곳은 “해가 떴을 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에게 이 사실을 전했는지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충분히 설명된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간 것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 둘에게 말한 것을 강조한 것이고, 누가복음은 모든 제자들에게 전한 것을 함께 기록한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처음에 이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여겼다. 하지만 그중에서 베드로가 먼저 일어나 직접 확인하러 무덤으로 달려갔다. 결국 이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먼저 만난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시간 순서가 바뀌어 기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히브리식 글쓰기 방식에서는 이런 식으로 사건의 순서를 바꾸어 강조하는 것이 흔했기 때문에, 이것을 모순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안식 후 첫날”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를 설명해 주는데,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살아나셨는지보다 그 부활이 언제 사람들에게 알려졌는지를 더 중요하게 기록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에 무덤에 왔다고만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의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침이 아니라 해가 질 때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또 히브리어에서는 “첫째 날”이라고 표현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첫째”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하나”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숫자를 셀 때 항상 “하나, 둘, 셋” 이렇게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 자체에 이미 시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은 단순히 날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매주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한 주간을 말할 때도 안식일을 중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날들도 “안식일 다음 첫째 날”, “둘째 날” 이런 식으로 불렀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 여자들은 안식일이 끝난 저녁에 향품을 준비해 두었다가, 아직 어두운 새벽에 무덤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여자들도 사람들이 없는 어두운 시간에 조심스럽게 무덤으로 갔던 것이다. 결국 이 날은 단순한 하루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날, 다시 말해 완전히 새로운 시작의 날이었다.
요한복음 20장 3절을 보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간다. 이 장면은 사실 굉장히 놀라운 장면이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의 상태는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라 완전히 무너지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믿음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갔다는 것은, 그들 안에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믿음이 남아 있었다는 증거이다. 비유하자면, 불이 거의 꺼진 것 같지만 속에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상태와 같다. 제자들 자신도 그 믿음이 남아 있는지 잘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믿음의 씨앗을 이미 그들 안에 심어 놓으셨고, 그 씨앗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모습은 완벽한 믿음이 아니라, 흔들리고 헷갈리고 때로는 잘못된 생각과 섞여 있는 믿음이지만, 그래도 분명히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진짜 믿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믿음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마치 아기를 돌보는 것처럼 계속 살리고 자라게 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은 처음부터 강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시작에서 점점 자라난 것이다. 또 본문을 보면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베드로가 나중에 도착해서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처음에는 빠르고 열심히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처음에는 느리고 부족해 보여도 끝까지 가면서 더 담대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처음 속도가 아니라, 끝까지 나아가려는 믿음이다.
요한복음 20장 5절과 7절을 보면,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따로 놓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굳이 시신을 감싸고 있던 세마포를 풀어서 가지런히 두고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급하게 훔쳐갔다면 그냥 그대로 들고 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세마포와 수건은 “누가 옮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급하게 벌어진 일이 아니라, 누가 정리해 놓은 것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는 것은, 이 일이 정신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질서 있게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부활은 누군가의 조작이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8절에서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그것을 보고 “믿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믿었다는 것은 “시신이 옮겨졌다”는 말을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점점 부활을 향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들의 믿음은 아직 완전하지 않았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순간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이 한 단계 더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 역시 이 장면을 보고 놀라워하며 돌아갔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이상하다고 느낀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는 뜻이다. 결국 빈 무덤과 남겨진 세마포는 제자들에게 “끝이 아니다”라는 신호였고, 그들의 흔들리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요한복음 20장 9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몰랐다”는 수준이 아니다. 사실은 알 수 있었는데도 몰랐던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들었는데도 흘려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번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고, 성경에도 그 내용이 계속 기록되어 있었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눈앞에서 무덤이 비어 있는 엄청난 사건을 보고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종종 “몰라서 못 믿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모르는 게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서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는 듣고도 흘려버리고, 읽고도 그냥 지나가고, 필요할 때만 떠올리려고 한다. 그러니까 막상 중요한 순간이 오면, 제자들처럼 “왜 이걸 몰랐지?”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분히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지나쳐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제자들이 부활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도, 우리 신앙이 자주 흔들리는 이유도 똑같다. 말씀은 있었는데, 우리가 붙잡지 않았던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10절을 보면 두 제자가 무덤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 조금 이상하다. 그렇게 놀라운 장면을 보고도 왜 그냥 돌아갔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아직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한은 분명 “믿었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단하고 확신에 찬 믿음이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뭔가 이상하다, 뭔가 일어난 것 같다”는 정도의 상태였지, “아, 예수님이 진짜 부활하셨다!”라고 확신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감동은 받았는데, 삶이 바뀔 만큼 확신이 생긴 것은 아닌 상태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순간적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이제 진짜 믿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원래 삶으로 돌아가 버린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말씀 위에 단단히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이나 분위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덤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말씀으로 정리된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확신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이 완전히 깨닫고 준비될 때까지는 바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열심만으로는 부족하고, 감정만으로도 부족하다. 확실한 믿음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깨닫고 붙잡을 때 생긴다. 그래서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아직 믿음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너의 믿음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라고 질문하는 장면이다.
지금까지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부활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 전달이 아니라,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자라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 상태, 즉 절망과 끝이라고 생각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어둠의 순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부활의 첫 증인으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을 세우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게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간다. 겉으로 보면 믿음이 무너진 것 같았지만, 그들 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믿음의 씨앗이 있었고, 그 씨앗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무덤 안에 남겨진 세마포와 수건은 누군가 시신을 옮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셨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 장면을 본 요한은 “믿었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은 아직 완전한 확신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지만 뭔가 깨닫기 시작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정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놓쳐버린 우리의 무지함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놀라운 장면을 보고도 두 제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감정은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내려야 할 결론은 분명하다. 부활은 단순히 “믿어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시작이다. 그런데 그 부활의 능력은 아무에게나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제대로 알고 붙잡을 때 비로소 확신이 된다. 우리의 신앙이 자주 흔들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말씀을 깊이 붙잡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너는 아직도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부활의 시작을 믿음으로 붙잡고 있느냐?” 진짜 부활 신앙은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삶이 바뀌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요한복음 20장 1–10절을 통해 본 것처럼, 제자들도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두운 상태에 있었고, 말씀을 알고도 놓쳤고, 놀라운 일을 보고도 확신 없이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상태에서 끝내지 않으시고, 그들을 점점 믿음으로 이끌어 가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적용은 이것이다. 먼저, “나는 지금 어두운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를 점검해야 한다. 공부, 관계, 미래 때문에 “이건 끝이다”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 두 번째로,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몰라서” 못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듣고도 흘려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어도 그냥 지나가면 제자들처럼 중요한 순간에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을 반복해서 붙잡는 데서 자란다. 세 번째로, 순간적인 감정에 머무르지 말고 확신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배 때 은혜 받고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는 모습은 제자들과 똑같다. 진짜 변화는 감동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실제 삶을 바꿀 때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작은 믿음이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의 믿음도 처음에는 아주 작고 흔들렸지만, 하나님은 그 믿음을 자라게 하셨다.
결국 부활 신앙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말씀을 붙잡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삶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감정으로 끝나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부활의 삶을 선택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