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_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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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일사 각오의 신앙

제 8장 십자가와 일사 각오의 신앙 https://youtu.be/qpgXytK7Nh4?si=Uo2VJHR81JIWkAYF
대속의 방법, 죽음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안전한 죽으심을 선포합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사야서 53장 9절 말씀. 사실이 번역은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이 부분을 히브리 원문대로 지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백성들은 그 메시아에게 죄인들과 함께 무덤을 할당하였으며 그의 높은 무덤은 한 부유한 자와 함께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속임이 없었기 때문이다.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죽자 범죄자들이 묻히는 무덤에 묻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후에 실제로는 부자가 묻히는 높은 무덤에 안치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을 행하지 않았고 그의 입에는 속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면 사람들은 그 그분의 시신을 악인들의 시체가 있는 무덤에 두려할 것이나 실제로는 부자들을 위하여 마련된 높고 큰 무덤에 안치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업문을 보면이 짧은 법문에 무덤을 뜻하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그 단어는 각각 평범한 무덤과 부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높고 큰 무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이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가 아닙니다.이 구절의 핵심은 대속을 위해 메시아가 완전히 죽으셨다는 사실과 메시아의 죽음으로 도입된 대소의 효과는 빈보와 귀천을 넘어에게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두 가지 선택 중 그 어느 것도 인간이 저지른에 죄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해도 제가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를 되돌릴 수 없고 하나님께 입혀드린 불명예를 보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회개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말하지만 알고 본 회개도 죄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들의 처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죄를 지을 능력만 있을뿐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으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죽으심만이 인간이 하나님께 반영한 불수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인 죄의 지배를 완전히 종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숙명
인간을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도 피할 수 있으면 명으로 받아들 피할 수 없으면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동시에 가장 당연하게 받아들인 숙명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자신도 죽게 될 것을 알고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죽음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범죄하기 전까지 그들은 죽음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그들에게도 죽음이 도입되었고 생명의 충만함으로 가득하던 그의 육체와 영혼의 상망의 기운이 침투에 들어왔습니다.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보십시오. 아담과 하아가 가인의 돌에 맞아 죽은 아발의 시신을 보았을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도 컸겠지만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처음으로 죽음의 실체를 마주하며 느끼 공포가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차가운 시신으로 누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창조할 때에 상태를 누려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완전히 사라진 채 죽음에 완전히 장식당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그들이 보았을 비참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인간들은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며 살았고 반복되는 죽음의 경험 속에서 죽음과 성숙명적으로 진숙해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모든 인간은 개인적으로 죽음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성장의 과정을 겪습니다. 일반적으로 청소년 기회의 죽음에 대한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는이 세상에 있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월없이 홀로 감당해야함을 깨달으며 인간 존재의 고독한 실전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공포를 극복하는 법을 배워 나갑니다. 제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다라고 표현했지만 보다 정확한 표현은 죽음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 다일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을 순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과 상관없이 죽음은 창 죽음은 창조시 인간이 부여받은 지혜를 생각해 볼 때 너무나 커다란 형벌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복종하여 사는 삶을 자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죽어가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죽음.
한낱 인간에게도 죽음이 이렇게 부당하고 참혹한 일일진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에 무엇하겠습니까? 죄의 집배 아래에 있게 된 인간에게는 죽음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죄가 없으신 메시아에게는 결코 죽음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성상 죽음과 거리가 먼 분이십니다. 완전하고 순결한 영으로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메시아는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전지전능한 분이셨으나 죽음은 그분에게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비록 인간의 육체를 가지셨으나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죽음에 복종해야 될 분이 아니라 생명으로 충만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분이 죽으셨고 장사되어 무덤에 눕혀지셨습니다. 죄를 지을 능력만 있을뿐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는 인간을 위해 대신 죄의 결과를 감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한 의인의 죽음이 아니라는 어린의 죽음입니다. 전서 1장 19절. 인간 가운데에는 흠없는 어린양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없었기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기에 그분의 죽으심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인간의 죽음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든지 실제로 그분이 치르신 고통은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범위 그 이상입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보며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고 피가 흐르는 고통만을 떠올리고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를 속시기 위해치르신 중히 일부일뿐입니다. 신을음생신 그분이에게 생을려신 생을버리셨습니다.이 마희생인지라도 할수 있습니까?는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죽음에 대해 털금만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인간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특별한 죽음이 필요했던 것은 인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던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가족이나 동료의 죽음을 보며 느끼는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메시아로서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으심 속에서 여러분은 인간을 향해 보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죄에 대하여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어미로운 진노를 동시에 보고 계십니까?
침묵과 온유함으로
이어서 살펴볼 것은 하나님이신 메시아가 그 비참한 죽음에 자기를 복중시키기까지 어떻게 살아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이사야 53장 9절 상반절 말씀 우리는이 구절을 읽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 가운데 보여 주셨던 온유한 태도를 떠올리게 됩니다.이 이 세상 사람에게 온유함이란 우유부단함과 통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거룩함을 단원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온 하나님을 위한 단호한 결단을 배제한 인간적인 부드러움이나 비굴함이 아니며 더욱이 우유 부담에서 오는 무기량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온함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안 데서 비롯된 거룩한 단호함이나 진리에 대한 결단을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들을 포함되지 않는 오염함이라면 그것은 인간적인 비굴함이지 결코 거룩한 온유함이 아닙니다. 그분이 메시아로서 보여주셨던 온유함은 당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단호하게 걸어가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 심지어 당신을 박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부드러우셨던 성품과 태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생의 전반에 걸쳐 이런 온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지만이 온유함은 특별히 그분이 체포와 신문과 처형을 당하신 과정 중에 더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선지아가 예언한 바와 같이 그는 도상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잔잡한 양같이 자기를 하나님이 온전히 막히셨고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을 향해 일체의 온유함으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 대속의 사명을 감당해 온 태도를 잃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보며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보면 시련도 겪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시련은 사람을 거칠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항상 우리 자신의 성품이 거칠 변해가고 있지 않는지 상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 일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불을 영향을 받으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늘 자각하며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며 섬길 수로 더욱 온전하게 비어져 갑니다. 그러나 신량은 감화 없이 그저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서 일을 악물고 달려온 사람들은 섬기면 섬길수록 오히려 성품이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헌실한 사람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포악한 사람,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결코 그럴 리 없어.라고 자신하지 마십시오. 은혜가 없는 사람에게 일이 치이고 실련에 시달리면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거칠고 황폐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도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힘을 다하고 하나님을 섬어 살아가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히 당연한 의무입니다. 즉 우리는 사명에 따라서 사는 일에 있어 나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일이 그렇게 산 후에 단지 일에 소인 자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영향을 받는 사람이로 남는 것입니다.
세상은 일로 가르쳐 있습니다. 길가에 구르는 돌처럼 흔한 것이 일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죄인들이 많기에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일은 어디에서까지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일로서 자기를 증명하지 말고 인격으로 우리를 증명해야 합니다. 거룩한 일을 하고 있어서 거룩한 사람일 수 있고 특별한 일을 하고 있어서 평평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중사해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신령한 은혜를 누릴 수 있지 못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 것 같아도 그것은 단지 스스로 택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사계에 바쁘셨고 온과 괴로움 고난으로 괴로우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6절. 그러나 단 한 번도 거칠고 황폐해진 성품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소한 문제에도 문제만 생겨도 쉽게 요동하고 조그만 실현이 와도 금세 내면 세계가 황폐해집니다. 수많은 위성과 거짓 충성을 가장한 자기 만족 결단을 가장한 독성 등 우리의 내면 세계는 십자가를 지고서는 온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 세계와는 얼마나 다른지요. 우리의 입술은 십자가의 사랑을 말하고 우리의 눈가는 대속의 진리 앞에 촉촉이 졌지만은 삶의 영역에서 돌아오면 우리는 다시 분순의 집착과 자기 사람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바로이 절망적인 삶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우리는 우리 내면의 부패성이 너무 쉽게 굴복하고 다시 불추성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종교적 체면칠례나 의무적 의무감으로 교회의 일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 마지 못해 거룩한 일을 해 나가며 오히리로 더 강폭하고 사악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이 얼마나 슬픈 현실입니까?
일사 각오의 신앙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은 우리의 우리의 죽기까지 순종하는 정신으로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대속의 비밀을 안 사람들의 자발적인 고백입니다. 성경은 대속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이 스스로지는 신앙적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건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는데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일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서 15절 말씀. 그리스도인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양태는 다를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동기는 같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하든 어떻게 살든지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계속 재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슴에 사묻쳐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죽기까지 그분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너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입은 우리가 가장 잘 사는 길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말씀.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이렇게 혼탁한 것은 우리가 죽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깨어진 우리의 가정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회복되지 못하고는 것도 우리가 살고자 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우리 안에 죽고자 하는죽지 않고자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이지 못하고 남겨둔 우리 안의 부패성이 하나님의 의를 그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신 때가 아니라 그분이 죽으셨을 때 비로소 우리를 위한 대속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정신으로 죽을 때 비로소 성취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죽으심으로써 거룩한 소명의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도 자기를 버리고 죽으셔야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죽이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꽃 피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일사 각오의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조국교회 초기 설교문 가운데 생사일판이라는 제목을 가질 설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국교회에서 이런 정신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일사 각오의 결단으로 살기보다는 호향의 정신으로 세상과 타협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복음 신앙 복음 신앙은 맛 이런 소금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십자가로부터 들려오는 메시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 이렇게 죽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나를 위하여 죽을 차례이다.이 죽음은 소멸소 소멸로 부르심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들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을 예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으라는 죽으라는이 요청은 사실 생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
이어서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독적 죽음이 갖는적 효과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의 무두움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다. 이사야 53장 9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단지 죄인 중에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악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고 그들과 함께 매장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시신을 선한 부자 아리마데 요셉의 부덤에 안치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깨달음을 얻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사악한 인간들의 시도를 꺾고 예수 그리스도를 종귀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의 효과는 빈부와 귀천에 구별이 없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됨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죽음은 구원받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에게 표력이 미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이 사실을 단지 예언만 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첫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언제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인에게로다.이 문제에 있어서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그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예수와 하여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입을입었느니라.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26-28절 속의 복음은 모든 계층에 호소되었고 빈부나 비천의 구별이 없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 대속의 효과를 막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신분과 개칭과 빈부와 인종의 벽을 허물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보편적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가난한 자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 구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일은 유일한 길입니다. 복음 안에서 세상을 보십시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가 인생에 대하여 어떠한 견을 가지고 있는지 구원받지 못하면 어떤 아무 희방이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기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예. >> 네. 다음 읽어 주세요. >> 네. 이념은 이해가 얽힌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소하지만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합니다. 그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든지 얼마나 악하든지 그것에 메이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믿고 복음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이 세상에서 나로 예수 믿게 하시고 영생을 소유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들도이 복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분명합니다. 아무리 권세 높아도 아무리 부유해도 복음의 놀라운 능력을 모른다면 그는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으로 우리는 비참한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온 우주에 미친 대속의 효과와 상관없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옥에 빗장이 풀렸는데도 여전히 어두운 감옥에서 죄수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부지런히이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 우리가 복음을 전하되 바로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작이 드러나게 하는 도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이 대속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집에를 누르고 떨리는 마음으로 응답을 기다릴 때 우리는 대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품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풀하기같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의 증언을 나팔처럼 사용하셔서 죄인들의 양심을 찌르고 회하시는 역사는 특정한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이 순간에도 복음의 복된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 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는 세상에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아멘.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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